< [29화-1] 바다의 왕자 >
파르나르 장편소설
괴수처럼 15
[29화] 바다의 왕자
학명: 문팽이(중력을 부르는 달팽이)
서식지: 해양
특징: 밀당의 고수
위험도: 9종 대형
비고: 도시는 길을 비켜라!
***
괴수가 도시를 침공하는 이유나 원인에 대해서는 여전히 학자들의 의견이 불분명하게 갈리고 있다.
그래도 미녀를 차지하기 위해서란 주장이 가장 큰 힘을 얻고 있다.
인간들이 화려한 의상과 경력 등에 집착하듯이, 괴수는 함께하는 ‘인간 암컷’의 수준으로 자신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하필 여성일 게 뭐람?
이 조건은 종족 전체가 암컷인 괴수도 다르지 않다.
아름다운 ‘바다 요정’이라고 불리는 세이랑, 비슷하게 ‘바다 마녀’로 통하는 조스엔젤이 여기에 속하는 대표적인 예다.
암컷이기에 번식을 위해 ‘인간 수컷’을 찾는다.
다만, 최대한 쥐어짠 후에 버린다!
“용사님! 생선들이 미쳤어요!”
에쏘드 한세리가 비명을 지르며 목줄을 당겼다.
무시무시한(어디가?) 아쿠버스 라미아를 보고 오들오들 떨던 세이랑들은 육지로 올라온 무일을 보자마자 앞다투어 다가왔다.
발이 없기에 엉금엉금 기어온다.
움직일 때마다 가슴이 출렁거리고 엉덩이는 좌우로 씰룩인다. 한둘도 아니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어여쁜 인어공주들이 단체로!
“큭?!”
이제 막 가더발트를 해제하고 ‘흐트러진(?) 혈도’를 안정시키던 초절정고수 한무일은 주화입마의 위기를 맞이했다!
위험해! 정말 위험해!
황홀한 광경이라기보다는 솔직히 무서웠다.
세이랑의 요염한 눈빛은 28년 동안 쌓아온 그의 정기(精氣)를 탈탈 털어갈 것 같은 광기마저 엿보였다.
생명의 위기만큼 번식도 우선인 걸까.
세이랑과 한무일 사이에 잽싸게 선 라미아가 2쌍의 지느러미를 활짝 펼치며 시야를 차단해도 멈추지 않는다.
한세리가 목줄을 당겨보지만, 숫자가 너무 많았다.
“...빠끔. 전부 태워버리면 안 되나?”
목소리의 높낮이가 없음에도 짜증을 느낄 수 있는 말투로 묻는 아쿠버스. 이마에 달린 두 뿔이 장식품이 아니란 듯이 ‘빠지직’ 스파크 소리를 냈다.
아쿠버스가 자랑하는 물총 외의 또 다른 무기.
이름하여, 100만 볼트!
정신통일을 중얼거리던 무일이 외쳤다.
“기껏 잡았는데 하지 마!”
게다가 페이 링도 말려들 것이다.
에쏘드의 가호를 받고 있는 무일은 괜찮지만, 평범한 인간에 속하는 그녀는 수호자가 뿜은 뇌전을 버틸 수 없다.
계약자를 살해하는 수호자라니!
전혀 없는 경우는 아니지만, 페이 링은 정말 성실한 계약자다. 중국의 전통과 사상을 그대로 답습한 그녀도 ‘용’을 무척 좋아하기 때문이다.
물론, 꼭 용이 아니더라도 그녀라면 어떤 수호자를 붙여줘도 성실하게 임할 것 같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다.
심지어 ‘용신’이고 이렇게 아름답다면?
끝이다.
아쿠버스를 완전히 주인마님 모시듯 하고 있다!
“빠끔. 하지만 저것들의 작태가 심히 거슬리노라.”
“그건 너도 마찬가지거든?”
중요부위를 가리고 있던 지느러미를 활짝 펼친 아쿠버스의 매력적인 알몸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어느 나라에서 유행하는 신파극일까?
이 와중에 페이 링은 ‘옷을 입고 있으면 안 되는 분위기인데요. 그렇다면 저도.’라는 위험한 발언을 했다.
무일은 상의 단추로 향하는 그녀의 손길을 서둘러 제지했다.
고맙지만 사양하겠어!
벗는 건 본인 자유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나라의 인공위성에 실시간 감시당하고 있다. 그러니 노출증이 아닌 이상 무조건 말려야 한다.
“빠끔. 근래에 수치심이란 걸 배웠노라.”
“그런데?”
“...빠끔. 어째서 그대가 가만있는지 모르겠노라. 내 몸을 가려주는 척하면서 더듬는 게 예의 아닌가?”
“그딴 예의가 어디 있어!”
계약자와 수호자가 쌍으로 이상행동을 보인다.
어째선지 그 둘 너머로 괴수대응본부 의무대 ‘개구리 공주님’ 강보라의 환영을 어렴풋이 본 것 같았다.
무일은 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호버크라프트에 연락을 취했다.
(반장님! 빨리 계약자들을!)
(네!)
세이랑의 진격(?)은 나무 위에 대롱대롱 매달아둔 후에야 멈췄다.
줄을 꽉 쥘 수 있도록 해주는 손이 없는 인어공주들은 유연하면서도 튼튼한 목줄을 자력으로 끊을 방법이 없는 까닭이다.
라미아는 심통 난 얼굴을 한 채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말은 안 했지만, 정신감응으로 불만을 토해냈는지 머리를 문지르며 두통을 호소하던 페이 링은 재촉하듯 다시 연락 온 시링 팽의 전화를 받았다.
표정을 보아선 상황이 꽤 안 좋은 것 같았다.
‘서둘러 마무리 지어야겠군.’
사소한 문제가 있었지만, 빨리 수습하기로 했다.
호버크라프트에서 내린 미계약자들이 엉거주춤 다가왔다.
“어, 어떻게 하면 되죠?”
“여기서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계약이란, 괴수와 물리적인 거리가 좁혀지면 그때부터 가능성이 생긴다.
그렇게 한 번 이어지면 그 뒤로는 얼마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든 서로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계약.
세이랑은 기회가 오자마자 ‘인간 여성’의 지식을 훔쳤다. 하지만 아쿠버스처럼 입 모양으로 대화를 시도하진 않았다.
그저 조금은 진정된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
“계약된 것 같아요. 하아….”
세이랑이랑 반대로, 막 계약자가 된 여성이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허벅지를 꽉 오므린 채 다리를 비비 꼬더니 참지 못하고 왼쪽 가슴을 움켜쥐며 짙은 숨결을 토해냈다.
반반씩 서로 물든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난감함을 감추지 못하던 무일은 ‘수고하셨습니다.’라고 한마디 해주는 게 전부였다.
계약한 세이랑은 목줄이 풀린 이후에도 얌전했다.
힐끔힐끔 무일을 쳐다보긴 했지만, 이전처럼 달려들 기세로 기어오진 않았다.
맨땅에 요염하게, 권태롭게 누워서 누군가의 지시를 기다린다.
그렇다. 지시(指示).
적어도 계약자의 명령이나 부탁을 기다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뭔가…. 대단히 묘한 구도가 됐네.”
“하렘이네요.”
페이 링이 간단히 정의했다.
수호자가 된 세이랑이 고분고분한 자태를 뽐내며 새색시처럼 반쯤 비스듬히 누워있는 모습은 놀라움보다 기적 같았다.
스물이 넘는 인어공주들의 시선은 한 ‘인간 수컷’에게 꽂혀 있었다.
새침하게 고개 돌린 채 고향인 바다를 바라보는 것 같으면서도 시선만은 계속 한무일을 향해 있었다.
아직 계약하지 않은 소수의 세이랑도 조용해졌다.
동족의 분위기를 타는 걸까?
“...서울로 귀환할 준비해. 내가 마음 놓고 움직일 수 있도록.”
“네, 용사님!”
계약한 세이랑은 바다로 돌려보냈다.
육지에서 엉금엉금 기는 바람에 여러모로 곤란하게 했던 인어공주들이었지만, 물에 들어가자마자 우아하게 헤엄치기 시작했다.
아직 계약하지 않은 세이랑은 호버크라프트 안으로 옮겼다.
파닥파닥 발버둥이라도 치면 물건이고 사람이고 남아나지 않을 위험이 있지만, 얌전해진 태도로 보아서는 괜찮을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귀환준비 완료.
남은 건 이제 중국에 등장한 ‘문팽이’였다.
“라미아, 세리. 따라와!”
바다 위를 달릴 수 있지만, 한시가 급한 상황이다.
계약을 돕는답시고 너무 지체했다. 그렇다고 내팽개쳤으면 계약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을 테고 세이랑이 날뛰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필수불가결한 절차.
하지만 변명하면서 여유 부릴 순 없다. 조금이라도 빨리 중국 본토로 향하려면 아쿠버스의 수영 실력이 필요하다.
한세리?
에쏘드의 위력은 본체인 정령이 얼마나 가까이 있느냐로 결정된다.
검 속에 들어있으면 될 것 같지만, 그건 물리적으로 완전히 격리되는 거라서 위력이 최하라고 보면 된다.
정말 잉여 같지만, 어쩔 수 없다.
9종 괴수를 상대로 만용을 부릴 순 없기 때문이다.
“빠끔. 나를 교통수단 취급한다는 게 참으로 유감스럽노라.”
“싫으면 빠져. 대신, 목욕탕 압수.”
“빠끔!”
호수에 사는 아쿠버스답게 라미아는 물을 좋아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잠이 많은 그녀는 종종 계약자 ‘페이 링’을 껴안은 채 지느러미로 김밥처럼 말고 잔다.
하지만 물속에서 그러면 페이 링은 익사한다!
그 대안으로, 그녀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특공대 막사에 마법처럼 뚝딱 만든 시설이 ‘수증기 사우나’였다.
정비과에서 ‘여신님의 보금자리를 우리 손으로!’라고 외치며 본업은 휴무(休務) 때리고 전원이 달려들어서 이틀 만에 호화찬란하게 만들었다.
‘세상은 미녀가 지배하는 게 맞아.’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 무일은 이 생각밖에 안 들었다.
정비과에 고맙다고 한마디쯤 해주라는 무일의 핀잔에 아쿠버스는 영상통화로 ‘빠끔. 하인 주제에 손재주가 제법이노라. 규모가 작긴 하지만.’이라고 했다.
정비과에 감격의 눈물이 쏟아졌다고 한다.
그냥 미녀도 아니고 무려 ‘용신’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똑똑하다는 천재(남성 99%)들만 모여있는 정비과에서 이런 아쿠버스를 찬양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칭찬 뒤의 불만은 의도가 분명했다.
내년에 정말로 더 크게 완벽한 설계도와 계획으로 지을 예정이라고 정비과 에이스 정찬호가 얘기했다.
그런 대접을 받는 ‘호수의 여신’에게 무일이 말했다.
“비겁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빠끔. 그대가 싫어할 짓을 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노라.”
“그럼?”
“빠끔. 운동량보존법칙을 안다는 가정하에 말하겠노라.”
운동량은 무게와 속도의 곱에 비례한다는 자연법칙이다.
워낙 물리법칙을 무시해대는 괴수가 많아서 깜빡 잊고 있었던 무일은 한탄인지 감탄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허! 너는 얼마나 인간적인 거냐.”
이런 건 괴수답게 무시해줘도 좋으련만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
두 사람이 추가되면 무게가 3배로 늘어난다. 자연스레 속도도 절반 가까이 뚝 떨어진다는 소리다.
이렇게 논쟁할 시간도 아깝거늘!
생활태도만 인간미 넘치는 게 아니었다.
“빠끔. 거기에 물리저항과 행동제약까지 감수하면 더욱 늘어진다.”
“뭔 말이지 알겠어.”
당연한 이치다.
아쿠버스가 ‘교통수단이 아니다.’라고 했던 건 이런 의미였다.
그녀는 호버크라프트나 기차, 버스 등이 아니다.
탑승하는 손님 한둘 늘어난다고 속도가 달라지는 일이 없는 운송수단들이랑 달리 ‘가벼운 몸체’인 라미아는 영향을 크게 받는다.
수영선수에게 사람을 업고 똑같은 속도를 내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빠끔. 그래서 다른 제안을 하노라.”
“뭘?”
“빠끔. 저 생선들의 협조를 받을 수 있다면 문제없노라. 한둘이면 나보다도 느리겠으나 여럿이라면 무게의 부담을 거의 받지 않을 것이다.”
세이랑을 가리키는 라미아.
무슨 뜻인지 깨달은 무일은 눈을 크게 떴다.
그게 가능할까?
맹렬하게 돌아가기 시작한 [예측]은 된다는 답을 내렸다. 여기에 [예감]까지 가세해서 본능에 맡기라고 속삭인다.
“...해보자고.”
아직 계약하지 않은 세이랑까지 가세했다.
그 숫자는 총 33명 혹은 33마리.
자유를 되찾았던 인어공주들은 농염한 눈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목을 내밀었다. 그리고 수컷이 가져온 목줄을 다시 찼다.
“......”
“......”
눈이 마주친 찰나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의도대로 움직여줄까?
카르 4세의 그런 불안이 기우라는 듯이 그녀들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물살을 가리며 전진했다.
그 뒤를 라미아와 한세리(짐짝처럼)가 따라왔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본능대로 움직이고 살아가는 프로사냥꾼답게 생각은 잠시 접어뒀다.
지금은 곧 만나게 될 슈퍼달팽이에게 신경을 집중할 때였다.
< [29화-1] 바다의 왕자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