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17화 (117/287)

< [28화-3] 유명작가 가라사대 >

일명 ‘불도저’라고 불리는 초대형 달팽이.

아무리 거대하고 튼튼한 도시도 지우개처럼 깔끔하게 밀어버리기로 악명 높은 괴수다.

최근에 호주의 수도 시드니(4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전됐다.)를 반파시킨 경력마저 갖춘 그 9종 괴수가 중국 본토에 상륙하려 하고 있었다.

덩치는 이전보다 확연하게 줄어들었다.

이끄는 무리의 숫자도 눈에 띄게 적었다.

하지만 수많은 공격을 받고 태평양으로 도망쳤던 문팽이는 짧은 시간에 정말 믿기지 않은 회복력을 보이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큭! 그녀를 부르게!”

“이미 출동했습니다.”

노블레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중국의 최강자’는 계약자 안에 있다.

미호 첸이 실각하고 유일한 8종 계약자가 된 여인.

『마후(魔后) 비비 황』

육탄전의 선두주자라고 불리는 8종 악마(惡魔) ‘하이블’의 계약자다.

초기에는 마신(魔神)이라고 불렸으나 엘로엘에게 일방적으로 발리고부터 마왕(魔王)으로 격하된 비운의 괴수 하이블.

그래도 강하다는 건 변함없다.

물리적으로 닿지 않는 ‘바람의 정령’의 상성이 지나치게 나빴을 뿐이다.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대형’이 상대라면 월등히 효과적일 것이다.

“헬기를!”

“밖에 대기해놨습니다.”

“연맹에 지원요청을 보내! 상하이에 도착하기 전에 반드시 끝장내야 해! 빌어먹을! 해심(海深)도 낮은 이쪽 해역에 나타날 줄이야!”

첸지 죠는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호주가 공격받았을 때도 그렇지만, 원군은 한참 뒤에나 도착할 것이다. 자신들도 타국에 지원 갈 때 뭉그적거리니 말이다.

그때까지 어떻게 버티느냐가 관건이다.

중국 혼자서 막는다는 건 어불성설이고 그래서도 안 된다.

이런 대재앙 수준의 괴수를 상대로 막대한 피해를 받으면 회복하기까지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상대는 야생괴수 한 마리가 아니다.

호위와 협력으로 무시무시한 상호보완을 갖춘 고위괴수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

‘제발 그 숫자가 적기를….’

문팽이의 크기로 보아선 지난번보다 전력 면에서는 열세가 분명하지만, 인간이랑 전투해본 경험은 큰 교훈이 됐을 것이다.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는 건 이길 자신 있다는 소리다.

그러니 호주 시드니 때보다도 더욱 치열한 전투가 예상된다.

변수라면,

“기사단도 보냅니까?”

기사단은 괴수대응연맹에서 새롭게 창설한 괴수대응본부 부서다.

특공대의 상위 개념인 ‘노블레스 부대’다.

순수한 실력으로 쌓은 프로사냥꾼이랑 달리 특수체질이란 편법을 이용한 최강의 사냥꾼들이 모인 곳이다.

소수정예는 아니다.

그들에게 피와 자궁을 제공하기 위해 대기 중인 여성의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까닭이다. 그 탓에 벌써 난잡하고 문란해져서 통제가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싹 다 보내!”

“전부 말씀입니까?”

“그래, 전부! 거머리가 아닌 인간이란 걸 스스로 증명하라고 해!”

일과에 ‘사냥’이 추가된 걸 제외하면 뱀페스트랑 다를 게 없다.

아니. 흡혈과 성행위를 합리화하며 대놓고 여자를 탐하는 그들은 흡혈귀보다도 더욱 눈살을 찌푸리게 하곤 한다.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니다.

노블레스 중에도 사명감으로 똘똘 뭉친 ‘귀족의 귀감(龜鑑)’이 적지 않다.

하지만 흡혈한 여성을 지배하는 뱀페스트 능력을 맛보면 그런 의지가 사정없이 흔들며 타락하기 일쑤다.

[업보]와 함께 모든 강대국이 골치 썩는 과제.

특수체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성숙도 강요되기 시작했다.

“알겠습니다.”

위진 창은 즉시 기사단에 연락했다.

타국처럼 조심하지 않고 늘 흡혈과 사냥을 병행하며 [업보] 쌓기에 치중하던 그들은 단번에 두셋 여인의 피를 더 빨았다.

노블레스는 체내 ‘괴수의 피’ 농도에 따라 능력을 5단계로 구분했다.

『일반인이랑 똑같은 0단계』

『여성을 지배하는 1단계』

『잘린 사지도 고치는 2단계』

『물리법칙을 무시한 3단계』

『죽음마저 초월한 4단계』

평소에는 1단계를 유지하고 사냥 직전에 2단계로 돌입하던 노블레스들은 평소보다 더 많은 여성에게서 피를 뽑았다.

효율성 측면에서 4단계는 현실적으로 무리고, 그들은 기사단에 배치된 ‘대기조’를 전부 사용해서 3단계에 돌입했다.

단계가 올라가면 능력만 추가되는 게 아니다.

괴수처럼 강하고 튼튼해지는 건 물론이고, 오감이 더욱 발달해서 [예측]과 [투시]가 극단적으로 상승한다.

“아! 그래! 그렇군! 그런 수가 있었어!”

“주석…?”

“한국 정부는 안 돼! 그 음흉한 선지혜 회장을 포함해서! 그러니 직통을 쓴다!”

“직통이라고 하시면….”

“카르발트!”

한국만큼 상하이에서 가까운 나라도 없다.

바람의 마녀가 와봐야 상황만 더 나빠질 게 뻔하다. 하지만 검과 몸뚱이만으로 싸우는 ‘순수한(?) 검사(劍士)’인 카르 4세는 다르다.

요란하지 않은 깔끔한 전투가 가능하다.

“아! 확실히, 그라면 바로 올 겁니다.”

위진 창은 감탄사를 터트렸다.

대한민국 정부에 알리고 본부를 거친다면 늦다. 그러니 뭐든 현지배송(?)이 싸고 빠른 법이다.

여기에 지인(知人) 소개가 곁들어지면 금상첨화(錦上添花)!

정말로 아름다운 꽃이다.

“페이 링에게도 협조요청을 보내게.”

“알겠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난리법석 떨기 바로 몇 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장소는 서해(西海).

고대부터 세계에서 ‘노랑 바다(Yellow Sea)’ 혹은 ‘황해(黃海)’라고 명시한 중국과 한국 사이의 바다다.

대한민국의 올해 23차 원정대가 현재 있는 곳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인천부터 밑으로 긁어내려 가면서 쓸만한 야생괴수를 싹쓸이했더니 어느새 대한민국 남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폐허(廢墟) ‘목포’에 도달해 있었다.

“흠…. 역시 해안가는 영 성적이 좋지 않군.”

여기까지 내려올 줄 몰랐던 카르 4세는 쓴웃음을 지었다.

인공위성으로 탐지할 수만 있다면 바다에서 끄집어낼(!) 텐데 찾는 게 어려우니 여간 고생스러운 게 아니다.

그래서 전략을 바꿨다.

바다에 사는 괴수는 뭐가 됐든 계약부터 하고 보자는 식으로 말이다.

서울 방어에는 신통치 않지만, 무역항이나 무역선을 지키는 용도로는 헤엄만 칠 수 있으면 어떤 괴수든 인류에게 유용한 까닭이다.

그래도 45명은 너무 많다!

(대장님! 절대로 놓치시면 안 돼요! 저 무리를 놓치면 여기까지 온 보람이 허사로 변해요.)

(명심하겠습니다.)

최이슬 대책반장의 조금 까칠한 음성에 달래는 투로 답했다.

임신해서 그런 걸까?

그가 뭔 말을 하든 민감하게 반응한다.

‘뭐…. 아무튼, 정말로 끝이 보이네.’

오늘과 내일 원정만 마치면 나머지는 ‘계약 거부’를 한 차례 했던 미계약자들만 남는다. 대부분이 3종 이하로 없어도 그만인 부류다.

그녀들의 외모를 탓하는 건 아니다.

밑반찬 가리는 아이처럼 밉상이란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니 모레부터는 쉬엄쉬엄해도 괜찮다!

기회를 한 번 걷어찼던 그녀들은 인제 정말 시간이 없기에 ‘징그러운 하위괴수’를 붙여줘도 군말 없이 계약할 것이다.

아니면 ‘용신의 심판’을 받던가.

“용사님. 어떻게 하실 거예요?”

진드기처럼 붙어서 왼팔의 혈액순환을 방해하고 있던 한세리가 물었다.

정신감응 중임에도 이렇게 묻곤 한다.

그냥 물리적으로 접촉하고 대화하는 상황 자체가 좋은 모양이다.

“기존처럼 계약자를 데려갈 순 없지.”

최이슬은, 본인이 얼마나 무리한 요구를 했는지 아는 걸까.

괴수 하나씩도 아니고 수십으로 구성된 무리의 위치를 가르쳐주면서 ‘계약시켜주세요!’라고 부탁한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계약자 수십 명을 안고 바다 위를 뛰어다닐 순 없다.

기껏해야 둘.

양팔로 두 미계약자의 잘록한 허리를 껴안은 채 돌진한 전적이 있었다.

발만으로 두 괴수를 걷어차서 제압했다. 하지만 기절한 괴수가 가라앉으며 도망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육상에서는 6종에 버금가는 속도를 자랑하는 카르발트지만, 해수면에서는 끽해야 4종. 여기서 괴수가 잠수까지 해버리면 아예 추적할 방도가 없다.

“다녀오세요, 용사님!”

“흠. 뒷일을 부탁해.”

“맡겨주세요!”

드디어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한세리는 기쁘게 답했다.

이번 계획은 그녀의 활약이 중요하다.

전투능력은 없지만, 인간을 월등히 앞서는 괴력과 재생력은 그대로다. 그녀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여기에 있다.

포획한 괴수를 붙잡아두는 역할!

“빠끔. 내 도움이 절대적임을 명심했으면 하노라.”

옷은 거추장스럽다고 안 입으면서, 휘황찬란한 보석으로 장식된 목걸이와 발찌, 팔찌 등을 뿔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는 아쿠버스.

그 결과,

악마 코스프레 같았던 뿔이 왕관 비슷하게 변하면서 라미아는 어느 나라의 여왕님 같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겉보기에도 나쁘지 않아서 계속 그러려니 놔뒀는데 한마디 해주기로 했다.

이번에는 그녀의 도움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라미아. 전격(電擊) 한 방이면 전부 부서질 텐데 괜찮아?”

“빠끔. 나라에서 또 구해줄 것이다.”

현명한 용신인 걸 떠나서 괴수답게 이기적인 답변이었다. 그게 얼마나 낭비인지 알면서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다.

예외가 있다면?

짙은 한숨을 내쉬며 무일이 고백했다.

“네가 좋아하는 것 같아서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진짜 별로다.”

“뻐끔뻐끔?!”

너무 놀란 아쿠버스는 장치의 ‘발성(發聲) 키워드’도 잊고 뭐라고 했다.

공기 중으로 소리는 전달되지 않았지만, 호버크라프트 안에서 최은비랑 놀아주고 있던 페이 링은 깜짝 놀라며 두통을 호소했다.

라미아가 유일하게 신경 쓰는 존재.

그건 한무일이었다.

악취와 향기가 혼재되어있는 무시무시한 수컷!

모든 괴수가 그러하듯 아쿠버스도 ‘남자의 냄새’를 무척 싫어한다. 하지만 여성형 괴수답게 암컷이기도 했다.

여기에 계약자의 ‘타락한 노예’ 근성이 첨가됐다.

고통을 즐기는 마조히스트!

수컷의 끔찍한 구린내를 쾌락으로 승화시켰다!

그런 독특한 취향이 아니더라도 카르 4세의 [업보]는 그녀의 아랫배 깊숙이 짜르르하게 해주는 무언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인연’도 합격점.

목숨을 한 번씩 주고받은 사이다.

과거에 멋모르고 호수를 찾아온 소년을 그녀는 살려줬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터무니없이 강력해져서 돌아온 소년은 반대로 그녀를 놓아줬다.

“치장한 뿔이 매력적이냐고 물어도…. 나는 인간인데?”

“...빠끔. 이해했노라.”

라미아는 장신구들을 뿔에서 떼어내더니 쓰레기처럼 휙휙 아무렇게나 던졌다.

누가 봐도 화풀이였다.

두 눈을 빛낸 한세리가 잽싸게 그것들을 줍기 시작했다. 용사님의 주머니 사정도 꼼꼼하게 관리하는 ‘용사의 정령’다웠다.

에쏘드의 제작능력?

물론, 괴수의 피로 귀금속을 찍어낼 수 있다. 하지만,

영구지속이 아니다!

그것들로 상인을 속여서 현금과 물건 등으로 교환하는 건 ‘정의로운 용사’가 해서는 안 되는 짓이다.

“아무튼, 놓치지 마.”

물고기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은 간단하다.

육지로 끌어올린다.

아쿠버스처럼 수륙양용인 괴수는 덜하지만, 그녀도 겉보기랑 달리 물에 특화된 탓에 지상에서는 육체 능력이 한참 떨어진다.

심지어, 용(龍)의 전매특허인 브레스(물총)는 아예 쏠 수 없다.

하물며 완벽한 해산물(?) 괴수는 어떨까?

끈질긴 생명력 덕분에 땅에 던져진다고 죽진 않지만, 정말 ‘파닥파닥’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다.

지금부터 카르발트가 할 일이 그거다.

괴수 무리를 육지로, 한세리와 라미아가 있는 곳으로 집어 던지는 것이다.

【세이랑 / 4종 소형】

대략 스물 정도가 무리 지어서 이동하는 중이었다.

비린내 난다거나 징그러워서 싫다는 미계약자는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

인어공주니까!

뱃사공(남자)의 천적이라고 불리는 세이랑은, 바다라면 어디서든 마주칠 수 있을 만큼 흔한 괴수지만, 계약자는 매우 희귀하다.

원정대를 구성하는 사냥꾼 대부분이 남성인 탓이다!

프로사냥꾼이고 나발이고 인간 수컷은 세이랑이랑 눈이 마주치면 최면술에 빠지면서 ‘사랑의 포로’가 돼버린다.

이러니 상대할 수가 있나!

하지만 ‘에쏘드 계약자’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용사에게 잡기(雜技) 따위!

“...음? 뭐지? 왜…?”

파도를 헤치며 바다 위를 달리던 무일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덕지덕지 붙기 시작했다.

세이랑 무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했다.

그런데 카르발트의 [업보]를 보자마자 줄행랑쳐야 하는 인어공주들이 역으로 우르르 헤엄쳐오는 게 아닌가!

무언가 심상치 않은 전개였다.

< [28화-3] 유명작가 가라사대 > 끝

ⓒ 파르나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