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2] 유명작가 가라사대 >
주석의 높은 평가에 판판 소는 난감하다는 듯이 입안에서 혀를 굴렸다.
인제 와서 뭘 어쩌자고?
그녀는 정의와 희망이 승리하는 작품을 쓴다. 그게 최선이다. 카르발트의 고상한(?) 취미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가상현실게임에 발을 들이지 않은 ‘현실파’지만, 이상론자와 몽상가처럼 인류의 가능성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가능성 덩어리인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증거다.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저희는 완전히 다른 길을 나아가야 해요.”
카르 4세처럼 사명감과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인재를 만드는 계획을 말해보라고 채근해도 딱히 해줄 말이 없다.
일단, 공산주의인 중국에서 용사는 무리다.
주석과 과장이 상상하는 용사는, 인민(人民)보다 나라를 우선시한다. 엄밀히 말해, 그건 용사가 아니라 충견(忠犬)이다.
그 차이를 분별하지 못하면 얘기가 안 된다.
정보과에서는 말석이었고, 현재는 끽해야 글쟁이인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없다. 이건 직위가 아니라 능력 문제였다.
여기까지 순화해서 설명한 판판 소.
현명한 위진 창은 그녀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했다.
“그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잘 알겠다. 다만, 잘못 들은 게 있더군. 우리는 딱히 용사를 바라는 게 아님을.”
비밀을 아는 사람이 극소수니 당연하다.
중국에 에쏘드는 없다!
그 사실을 모르는 ‘판판 소’이기에 착각한 것이다.
국가주석과 정보과장이 바라는 건, 특수체질이 아님에도 뱀페스트에 굴하지 않는 ‘강력한 정신력’이다.
최강의 사냥꾼 군대!
시대가 계약자를 우대하면서 많이 희석되긴 했지만, 중국은 인도와 사우디아라비아 못지않게 남성우월주의사상이 강한 나라다.
용사가 아니어도 좋다.
충견이어도 좋다.
오만방자한 계약자보다 강한 사냥꾼이기만 하면 된다. 외모지상주의에 무너진 남자의 존엄성을 되찾을 수 있는 강력한 힘!
그 주축은 노블레스.
뱀페스트가 숙주로 삼는 ‘남자’들이다.
“아…. 그렇다면 사람을 잘못 찾으셨어요.”
에쏘드를 제외한 설명을 들은 판판 소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남자가 아니다. 당연히 남자의 마음 같은 걸 세세하게 알 리 없다. 그런데 ‘사나이의 세계’에 대해 논하자고 하니 눈앞이 캄캄했다.
카르 4세?
판판 소가 그리는 ‘꿈의 남자’라서 가능했다.
아름다운 공주보다 백성을 우선시하는 무심한 왕자님!
사랑과 관심을 못 받는다면 여성으로서 불행하다고 할 수 있지만, 백성에게 존경받는 남편이란 또 다른 매력적인 요소다.
즉, 그녀의 추측은 망상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질문을 바꾸지.”
“네.”
“카르발트가 국가 간의 분쟁에 개입하리라고 보는가?”
“안 해요.”
즉답이었다.
중국이 전 세계를 상대로 5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면 ‘인류의 평화’란 대의명분으로 일찍 종결시키고자 움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지금처럼 자신의 일과에 충실할 것이다.
욕심부리지 않고 가진 모든 걸 양보하면서….
필요하다면 사랑도 양보할 것 같은 태도만은 마음에 안 들지만, 판판 소가 아는 카르 4세는 그런 남자처럼 비쳤다.
“한다면?”
“...중국은 한국에 합병되겠죠.”
“흠!”
에쏘드와 가더발트의 조합은 ‘최강’이다.
원래, 에쏘드 계약자는 용사파티를 꾸리지 않으면 비명횡사하기 일쑤인데 가더발트가 그 치명적인 약점을 상쇄하는 건 물론이고 시너지를 내고 있다.
체력과 정신력 무한!
식욕을 참을 수 있다면 먹고 싸는 행위도 불필요하다.
가장 무서운 점은 ‘눈앞에 적이 강할수록 강해진다.’는 속성이다.
간단히 말해,
『특수효과 면역』
방사능, 탄저균, 마법, 맹독 등의 모든 ‘비겁한 능력’이라고 판단되는 효과에 대해서 절대적인 내성과 우위를 가진다.
그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벤다.’는 성질은 ‘실체 없는 정령’마저 가차 없이 죽일 수 있는 최강의 흉기다.
약점이라면 역시 ‘물리적인 공격’이다.
정정당당한 정면대결이 펼쳐지면 에쏘드 계약자는 아무런 이점도 볼 수 없다. 정말 평범한 사냥꾼처럼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취약한 부분을 가더발트가 메꿨다!
이구하마 같은 ‘6종 대형’을 발로 차서 자빠트릴 때는 한 편의 희극을 보는 것 같아서 웃음밖에 안 나왔다.
모든 걸 달관하고 싶은 심정이랄까!
“하지만 시간 제한을 잊어선 안 됩니다.”
판판 소의 비관적인 단정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위진 창이 끼어들었다.
카르 4세의 가더발트에는 착용한계 시간이 있다.
한무일은 ‘정신력으로 견디기 어렵다.’라고 답하며 말을 아꼈다. 지속적인 훈련(?)을 통해 미미하게 늘려가고 있지만, 영원하진 않다.
최근 기록인 22분을 넘기면 미쳐버린다고 해석된다.
그 시간이 지나면 카르발트도 평범한 ‘에쏘드 계약자’로 돌아온다.
문제라면 그 22분 동안 정말 ‘무적(無敵)’이란 점이다.
“...아무튼, 일개 작가인 저는 아는 게 없어요.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동안 읽은 약소한 자료를 통한 견해만 말씀드릴 수 있어요.”
“해보게.”
“전혀 다른 길을 찾으세요.”
“......”
“이건 제 사견이지만, 특수체질도 아닌 카르 4세가 미치지 않은 이유는 정신력 덕분이 아니에요. 에쏘드의 힘이죠. 용사의 검.”
“음…. 음?!”
정신력에 너무 치중해서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어째서 이 간단한 이치를 여태 깨닫지 못한 걸까?
카르 4세는 [자결]을 익혔다.
특수체질도 아닌 그가 정신력만으로 ‘괴수의 피’를 억누를 수 있었다면 습득하지 않았을 기술이다.
그럼 얘기가 간단해진다.
용사가 미치지 않도록 ‘용사의 검’이 보호한다는 뜻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방을 업고 살아요. 여기에 인생을 채워가는 거죠. 그리고 가진 게 많을수록 점점 무거워지다가 끝내 주저앉고 말아요.”
“재미난 견해군.”
“...영웅은 힘이 장사지만, 금방 무거워진 가방에 깔려 죽어요. 하지만 용사의 가방은 늘 가벼워서 멈추지 않죠.”
앞길을 가로막는 미녀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판판 소는 뒷말을 삼켰다.
여전히 독신(?)이고 동정(!)인 카르 4세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사항이었던 까닭이다. 그러다가 한눈에 반한 여자가 생기면 급격히 무너질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후자는 가능성을 낮게 봤다.
다른 여자가 끼어들 구멍을 용납하지 않겠다고 벼르는 ‘무시무시한 미녀’들이 그의 주위에 쫙 깔렸다.
심지어 최근에는 괴수까지 가세했다!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
“도움을 청해야죠.”
“도움…?”
“용사는 남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으니까요. 그를 넘어설 생각만 하지 않고 도움을 받으면서 실리는 취하는 편이 이득이라고 생각됩니다.”
사형선고가 떨어진 범죄자는 정말 무섭고 위험하다.
더는 잃을 게 없기에 망설임이 없다.
예시가 좀 이상했지만, 그 어떤 것에도 얽매여있지 않은 용사에게 대적하고 경쟁심을 불태우는 건 어리석다.
가진 게 많은 자는 약점도 많다.
여기서 ‘가진 것’이란 부와 명예, 여자 같은 것을 뜻한다.
“예를 들자면?”
“곧 한국은 계약자가 범람할 거예요. 한동안 원정대를 꾸릴 필요가 전혀 없을 만큼. 그 시기를 노려서 초청한다면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경쟁이 치열하겠지만.”
“이미 나왔던 안건이군.”
“수많은 사람이 찬성하는 왕도(王道)가 최선인 법이죠.”
독창적, 혁신적이라고 하면 뭔가 있어 보이지만, 정말 있어 보일 뿐이다.
성공은 드물고 위험부담은 너무 크다.
카르 4세는 성공해서 빛을 봤지만, 그전에 수많은 용사지망생이 무명(無名)으로 그 인생의 종말을 알리거나 정도(正道)를 이탈했다.
실제로 그런 무법집단이 다수 존재한다.
가까운 예로는, 중국 북단의 설원에 본거지를 둔 ‘북해빙궁’은 삐뚤어진 계약자들의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전 세계적으로 속속들이 등장하기 시작한 ‘노블레스 무법집단’까지….
처음부터 악(惡)한 마음이었던 자들도 있겠지만, 상당수는 강력한 힘에 취하거나 시민의 무관심에 환멸과 배신감을 느낀 경우다.
진정한 용사가 아니었던 셈이다.
대가를 바라고 움직이니 견디지 못하고 낙오한 것이다.
“그것 외에 제안이나 하고 싶은 말은 없나?”
좀 색다른 견해를 원하는 첸지 죠였다.
그렇기 위해 부른 ‘유명작가’이니 말이다.
살짝 망설이던 판판 소는 성형수술의 완벽함을 자랑하는 입술을 뗐다.
“그렇다면…. 무림의 부활을 바랍니다.”
“무림? 이유를 듣고 싶군.”
“뛰어난 사냥꾼의 탄생을 진심으로 원하신다면 자국의 문화를 살리셔야 해요. 한국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암행어사(暗行御史)? 이게 원조일 거예요.”
신분을 감추고 잠입해서 탐관오리를 파헤치는 풍운아(風雲兒)!
이게 한국 스타일이다.
와이츠의 책략으로 국민들이 ‘게임 바보’가 되면서 전통문화가 묻히고 ‘RPG 용사’가 대두 되긴 했지만, 원래는 그렇다.
그렇다면 중국은?
고대부터 무림(武林)이 있었고 그 정점에 ‘협객(俠客)’이 있었다.
아리따운 여인들이랑 사랑을 불태우고 불의(不義)를 참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가정과 가문, 문파를 세우는 상남자!
영웅호색(英雄好色)!
삶이 팍팍하고 궁핍해도, 곁에 절세미녀만 있으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는 ‘조건부 양보정신’을 가진 ‘야생남’이다.
“협객이라….”
물량의 선두주자였던 8종 수호자 쑨우쿵과 전쟁억제력의 일인자 에쏘드를 날린 끝에 간신히 무림을 제압했다.
그런데 판판 소는 다시 부활시켜야 한단다.
분명, 본부와 정부의 천재들이 내놓은 해결안에는 없는 답이긴 했다.
“저희가 RPG 용사를 흉내 낼 필요는 없어요. 주석께서 정말로 카르 4세처럼 강한 사냥꾼을 원하신다면 협객이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셔야 해요.”
“무림이 있을 때도 없던 협객이 글쎄….”
첸지 죠는 회의적으로 봤다.
하지만 완전부정하지 않는 그를 보며 용기를 쥐어짠 판판 소가 말했다.
“이전 무림은 소인배, 장사꾼으로 이루어져 있었어요.”
“통제하면 된다는 건가?”
“그건 무림이 아니죠.”
“......”
첸지 죠는 입을 꾹 다물었고 위진 창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제안하거나 비평하기란 쉽다.
이상론이라면 그만두라는 두 남자의 압력에 살짝 식은땀을 흘린 판판 소는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좋은지는 저도 모릅니다. 하지만 한 가지쯤은 제안할 수 있어요.”
“들어보고 싶군.”
“천하제일비무대회(天下第一比武大會).”
“흠!”
“대회의 1등 상품으로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라면 어떨까요? 이전 무림에는 없던 이벤트예요. 무림인데 힘을 겨루는 공식대회가 없었으니 엉망일 수밖에요.”
무림을 다시 부활시킨다는 건 당장 수긍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하지만 사냥꾼끼리 힘을 겨루는 시합이라면 매우 긍정적으로 보는 중국의 국가주석과 정보과장이었다.
‘카르 4세에게 패배한 일도 있으니 대비 차원에서….’
‘우승자의 [예감]은 분명 더 높은 경지에 오르겠지.’
우승자에게 권력과 재력은 주지 않는다.
그 대신, 미녀와 명성을 포상으로 안겨준다면 정치적인 부담은 없다.
우수한 사냥꾼이 대결 중에 사망할 수 있다는 위험부담은 있지만, 그럴수록 위로 올라가는 자들이 강해질 것이다.
“...솔직히 그대를 부르고 살짝 실망했었네.”
“네.”
“그런데 막바지에 좋은 제안을 해줘서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한다. 맞는 말이야. 우리가 카르 4세의 꽁무니를 쫓아갈 필요는 없는 거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판판 소는 간신히 안도할 수 있었다.
눈앞에 첸지 죠는 중국의 정점에 있는 남자다.
민간여성 하나 소리소문없이 납치해서 강간, 고문, 감금 등을 아무렇지 않게 명령할 수 있는 존재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 폭군 같은 인물이었다면 국민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했을 것이고, 한국의 대통령처럼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헉! 주석! 급히 아셔야 할 문제가 생겼습니다!”
긴급연락을 받은 위진 창이 비명 비슷하게 외치며 바짝 굳었다.
첸지 죠의 표정도 뒤따라 어두워졌다.
또 ‘바람의 마녀’가 태풍이나 홍수라도 일으킨 걸까? 용신 와이츠가 돌아온 이후부터 새색시처럼 얌전해진 것 같았거늘!
놀랄 준비를 했다.
“무슨 일인데 호들갑인가, 정보과장.”
“황해(黃海)에 ‘문팽이’가 출현했습니다! 목적지는 상하이입니다!”
< [28화-2] 유명작가 가라사대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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