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4] 계약은 얘가 했는데? >
정말로 ‘언젠가’ 말이다.
그게 함정이다.
하지만 선지자로서 카르 4세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정말 이뿐이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계약자만 보이면 먼 산을 봐야 했던 ‘3급 사냥꾼’이 ‘6급 사냥꾼’이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본인도 못했다.
가더발트와 에쏘드는 정말 [예측] 밖이었다.
전역자 0명, 사망자 13명으로 마무리된 이벤트는 화제(話題)조차 못 됐다. 워낙 죽는 사람이 많다 보니 시민들도 무감각해진 것이다.
‘편하긴 하지만, 바람직하진 않군.’
사망자가 아무렇지 않게 발생한 이후부터 훈련생들의 태도는 고분고분해졌다.
부모, 애인이 찾아와서 ‘살려내라!’라고 잠시 난동을 부렸지만, 훈련 중의 사망자는 늘 있던 일이기에 일사천리로 해결됐다.
협상이란 것이다.
『용감한 전사자로 기록시켜주겠다.』
이거면 끝이다.
훈련하다가 ‘개죽음’당했다고 뉴스에 보도되면 죽어서도 모욕이다. 심지어 이번 일은 전역하겠다고 나섰다가 동료의 창에 죽은 것이다.
보호구라는 안전대책도 마련해놨는데 멋대로 벗은 본인 잘못이다.
물론, 창끝이 괴수를 찌를 수 있을 만큼 날카롭기에 완벽하게 보호해주진 못하지만, 단번에 사망에 이를 수준은 안 된다.
보상금?
정부와 본부에서는 일절 주지 않는다는 게 내부방침이다.
징집된 것도 억울한데 죽기까지 하면 이 무슨 횡포냐고 할 수 있겠지만, 정부와 본부의 실책이 아닌 사건으로 벌어진 ‘사망’에 대해서는 보상해주지 않는다.
오직 ‘전사(戰死)’만이 인정받는다.
국가에서 지정한 토벌전, 섬멸전에 참가해서 ‘후퇴’하지 않고 싸운 사냥꾼에게만 명예와 위로가 돌아간다.
개나 소나 다 보상해줬다면?
국고가 진즉 바닥났을 것이다.
안 그래도 가상현실게임밖에 모르는 인간들의 복지혜택으로 들어가는 돈이 천문학적인데 보상금은 무슨!
‘서울에서 마음 편히 산다는 것 자체가 보상이지.’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시민들이 적지 않다.
희생 없는 행복에 취한 자들….
달밤에 프라이팬 하나로 800명도 더 되는 인원을 혼자 쓰러트린 대장이라고 해서 특공대 내에서만 ‘프라이팬 악마’라고 불리게 됐다.
그 일이 지난 며칠 뒤부터 말이다.
악명을 떨치는 ‘희생’ 덕분에 특공대 분위기가 달라졌다. 썩은 생선눈깔을 하고 있던 훈련생들의 눈빛도 많이 나아졌다.
억지로, 타의로 훈련하던 그들에게 ‘살겠다!’는 뚜렷한 목적이 생긴 것이다.
그동안 원정대도 성황을 이뤘다.
계약자를 공장에서 찍어내는 기분이다.
‘이젠 5종 계약자가 나와도 담담하네.’
예전 같으면 경사 났다고 본부에서 난리법석이었을 텐데 말이다.
그만큼 ‘5종 계약자’가 많이 등장했다.
충분히 그 이상을 노릴 수 있는 ‘홍일점(紅一點)’이 간혹 보이긴 했지만, 이것만은 카르발트도 어쩔 수 없는 아쉬움으로 남았다.
6종부터는 ‘인연’이 있어야 했다.
이 계약조건은 아쿠버스도 전혀 아니라고 할 순 없었다. 계약자의 주인(主人)하고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쉬워서 몇 번 시도해봤으나 변변히 실패했다.
그 뒤로는 아예 포기한 실정이다.
원정대 1기 때처럼 호버크라프트 운전은 문세웅과 정찬호가 번갈아가면서 하고 내부안전은 타로가 맡았다.
대책반장은 양해를 구하며 3기 뒤부터는 반원들에게 맡기고 원정대에서 빠졌다. 부하들의 경험 및 교육을 겸하겠다는 의도가 뚜렷한 인선이었다.
정말 순탄하게 흘러갔다.
시간도 포함해서.
“빠끔. 계약자가 멍청한 바람에 공부할 게 여전히 많노라.”
벌써 몇 번째 듣는 대사인지 모른다.
이전이랑 차이가 있다면 더는 [예측]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무일은 ‘어서 나를 달래줘! 너 때문이잖아!’라는 분위기를 팍팍 풍기며 투덜거리는 가인을 빤히 쳐다보며 입술을 뗐다.
“재미난 번역기네.”
“빠끔. 그 재미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노라. 다만, 노예 목걸이 같은 디자인이 영 끌린다는 건 사실이다.”
“거슬리는 게 아니라 끌린다고? 그건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빠끔. 오묘하노라.”
대한민국 아쿠버스는 음성으로 말할 수 있게 됐다.
라미아가 ‘키워드(빠끔)’를 입 모양으로 말하면 장치가 작동해서 몇 초 동안 성대역할을 해주는 원리다.
계속 켜둘 수 있으면 좋겠지만, 입을 닫고 있어도 웅얼웅얼 소리가 나는 건 바람직하지 않기에 어쩔 수 없었다.
개선의 여지가 다분하다.
‘그다지 의욕은 없어 보이지만.’
아쿠버스는 이대로 쭉 쓸 의도인 것 같았다.
키워드로 ‘작동’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살아야 산다는 걸 제외하면 이 이상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장비를 목 안에 고정할 수 없어서 목에 착 달라붙는 목걸이를 이용했다.
썩 훌륭한 디자인은 아니었다.
“노예가 차는 목걸이처럼 생기긴 했네.”
편견일 것이다.
그럴 필요가 있어서 목을 꽉 조이듯 제작된 번역기다.
목걸이 안쪽 면에 수직으로 세워진 가느다란 튜브가 아쿠버스의 가녀린 목을 관통하고 들어가서 성대 부근에 안착시킨 것이다.
하지만 ‘문화적 사고회로’는 저런 걸 여성이 하면 뭔가 이상해진다.
가터벨트도 마찬가지다.
그 용도는 스타킹이나 허벅지 장식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잡아주는 역할이다. 심지어 원래는 남성용이었다.
그게 여성용으로 보편화하면서 음란하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빠끔. 거슬리느냐는 물음에 답해주겠노라.”
“아니, 굳이 안 해도….”
“빠끔. 목을 움직일 때마다 신경 쓰인다.”
굳이 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당연히 꺼림칙하겠지.
온종일 손목에 링거를 꽂고 있어도 거북한데 좌우로 움직일 수 있는 목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아쿠버스가 차고 있는 이유?
사람들이랑 쉬엄쉬엄 대화하고 싶어서는 결코 아니다.
그녀가 소통하는 상대는 ‘한무일’뿐이다. 심지어 계약자인 페이 링하고도 정신감응을 통해서만 얘기한다.
라미아가 속셈을 말했다.
“빠끔. 이제 목욕할 때도 그대와 대화할 수 있게 됐노라.”
얘기하고 싶을 때는 ‘내 얼굴을 봐줘!’라는 식으로 무일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거나 소매를 잡아당기는 식으로 주의를 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도 하필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걸 제시한 아쿠버스를 향해 무일이 솔직한 심정을 담아 넌지시 질문했다.
“계약자의 영향이냐, 아니면 원래 취향?”
“빠끔. 숭고한 내 의지다.”
숭고(崇古)는 다 죽었습니까.
본인이 뭔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 같아서 그냥 놔두기로 했다.
카르 4세의 수호자인 한세리는 그렇다 쳐도, 라미아는 페이 링의 수호자다. 그럼에도 그녀의 관심사는 계약자보다 한무일에게 노골적으로 꽂혀 있었다.
계약자는 별거 없다나?
점잖게 해석하면, 정신감응을 통해 페이 링의 밑바닥 사고까지 훑어본 라미아는 흥미를 못 느낀다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
...라고 핀잔주려 했지만, 페이 링이 ‘괜찮아요! 라미아! 주인님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라며 극구 말리는 바람에 무산됐다.
중요한 비밀을 들킨 모양이다.
페이 링의 표정은 ‘약점 잡힌 유부녀’처럼 애처로움이 풍부했다.
“라미아. 나중에라도 개량할 계획은 있어?”
“...빠끔. 좀 더 상냥하게 그대가 나에게 붙여준 애칭을 불러줄 것을 청한다.”
“무슨 요구가…. 라미아.”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이다!
이에 만족했는지 아쿠버스의 눈매가 요염하게 휘었다.
“빠끔. 목소리 높낮이가 없어서 감정표현이 제한적이노라. 이 부분만은 어떻게든 개선해볼 생각이다.”
“흐음. 일본에 괜찮은 물건이 있을 것 같은데.”
일본에도 아쿠버스가 있으니 말이다. 훨씬 오래전부터 인간사회에 관여한 용신이니 번역기 개량도 끝마쳤을 것이다.
이 번역기도 당연히 MID 기술답게 ‘긴 이름’을 가졌다. 너무 길고 중요하지도 않아서 카르 4세는 듣자마자 잊었지만 말이다.
이건 아쿠버스 전용은 아니다.
인간이랑 흡사한 괴수는 적지만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세리처럼 인간의 언어를 처음부터 구사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에쏘드는 ‘용사의 정령’이니 논외로 치자.
용사가 사용하는 언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줄 아는 게 당연하고 필수적인 괴수다.
“빠끔. 도움받을 생각은 없노라.”
“자존심?”
“빠끔. 동족에게 얕잡아 보이기 싫을 뿐이다.”
“그게 자존심이란 거야.”
라미아는 수긍할 수 없다는 얼굴이 됐다.
계속 둘이서만 대화 중이었지만, 그녀의 손만은 계속 체스판을 왕복하고 있었다. 상대까지 그인 건 아니었다.
체스판 반대편에는 최은비와 한세리가 나란히 붙어 앉아 한팀이 되어 함께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과연! 이렇게 음란해도 용신이란 건가.’
망설임이 없다.
체스는 이론상으로 ‘완벽한 수’가 존재하는 보드게임이다. 동급의 슈퍼컴퓨터가 붙으면 동점으로 끝난다는 뜻이다.
그걸 저 주먹만 한 얼굴로 해내고 있는 산드라미아 레미.
두 미소녀가 10분쯤 아웅다웅하며 내린 ‘최적의 수’를 1초 만에 간파하고 농락하는 아쿠버스였다.
벌써 몇 판째인지 모른다.
이쯤 되면 포기할 법도 한데, 한세리는 ‘용사님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겠어요!’라는 식으로 버티는 중이다.
최은비는?
8살 이후로 엄마에게 져본 적 없는 고수의 자존심이란다.
둘 다 애들다운 사고방식이다.
“빠끔. 오늘따라 수컷들이 발정(發情) 중인 이유가 궁금하노라.”
“누가?”
“빠끔. 그대 빼고 전부.”
“그거야 바다로 가는 중이니 흥분할 만도 하지.”
“빠끔. 수긍할 수 없는 답이다.”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한무일을 제외한 모든 남성을 ‘열성인자를 퍼트리고 싶어하는 죄악의 원숭이’라고 표현한 아쿠버스니까.
육지에만 틀어박혀 있는 사내들은 묘한 환상을 품고 있다.
인어공주!
그건 아무리 똑똑한 아쿠버스라도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분명하다.
실제로 해양괴수 중에는 유독 ‘미녀’가 많다.
전래동화나 전설에 나오는 인어처럼 외형이 ‘아름다운 여체(女體)’랑 매우 흡사한 괴수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 대표격이라고 할 수 있는,
【세이랑 / 4종 소형】
【조스엔젤 / 5종 소형】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괴수가 많은 바다에서 그 분포도가 상당히 높으면서도 아름답기로 소문이 자자한 두 여성형 괴수다.
세이랑은 뱃사람을 유혹해서 바다에 빠트렸다고 전해지는 ‘전설의 인어’랑 흡사하다면, 조스엔젤은 ‘바다의 여신’쯤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둘 다 ‘반인반어(半人半魚)’다.
이마에 달린 뿔만 제거하면 완벽하게 인간으로 위장할 수 있는 아쿠버스랑 달리 명백하게 괴수처럼 생겼다.
그럼에도 아름답다.
대부분 남자는 여자의 얼굴, 가슴, 허리, 다리만 보기 때문이다. 지느러미와 아가미 등은 사소한 문제다.
갑자기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
한반도(韓半島) 내륙의 쓸만한 야생괴수가 동났다!
단시간에, 유익한 괴수만 편식해서 계약하니 점차 줄어들어 ‘괜찮은 육상괴수’를 찾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채워지겠으나 와이츠의 의지는 확고부동했다.
어쩔 수 없이 ‘원정대 21기’부터는 바다로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대장님. 가능하시겠어요?”
묵묵히 체스를 관람 중이던 여인이 물었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다시 원정대에 합류하게 된 최이슬 대책반장이었다.
한무일 특공대장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아꼈다.
하지만 계속된 끈적한 시선에 한숨을 푹 내쉬며 라미아에게서 고개를 돌린 카르 4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무조건 해봐야죠. 육지형 사냥꾼이라고 해서 이대로 주저앉을 순 없으니.”
“육지형…. 그게 중요한가요?”
“맥주병은 아니지만, 애초에 물은 인간이 사는 영역이 아니니까요.”
첩보위성이 심해(深海)까지 닿지 않는 탓에 여전히 미지(未知)의 영역으로 남은 부분이 많은 바다.
약한 괴수만 들이박아도 침몰하는 호버크라프트를 타고 멀리 나갈 생각은 없다.
인천에서 튼튼한 배를 공수한다는 계획도 있었지만, 기각됐다.
“서른 명의 아가씨 운명이 대장님에게 달렸어요.”
“노력해보겠습니다.”
미래의 계약자 혹은 미부인(美婦人)이 될 아가씨들 줄줄이 데리고 바다로 들어갔다가 침몰하면 정말 큰 일인 까닭이다.
그녀들의 부모들이 대성통곡하는 건 둘째치고 국가적인 손실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누가 알겠는가?
그녀 혹은 그녀의 딸이 ‘9종 계약자’가 될지 말이다.
그래서 아무리 시간이 촉박하더라도 바다로 들어가는 건 보류하고 해안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수준으로만 돌아다니기로 했다.
“확답은 안 주시네요.”
“이번에는 저도 상당히 긴장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될 것 같긴 합니다만.”
초대형 달팽이라도 튀어나오지 않는다면 말이다.
아니면 괴수가 무리 지어 달려든다거나?
뭐가 됐든 [예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게 상당히 신경 쓰였다.
< [27화-4] 계약은 얘가 했는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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