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3] 계약은 얘가 했는데? >
“계약자에게 관심 좀 가지라고.”
“주인님. 저는 괜찮아요.”
페이 링이 만류했다.
겉보기에는 전혀 신경 안 쓰는 것처럼 보이지만, 계약자와 수호자는 정신감응을 통해 의사소통 중이다.
무일은 그게 어떤 방식인지 여전히 모른다.
에쏘드 계약자가 됐지만, 한세리가 무슨 생각 중인지 느끼는 수준일 뿐이다. 정확한 정보전달과 지식전수가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지식을 공유했다면 용사가 필요 없었겠지.’
정령이 용사 대신 싸웠을 것이다.
물리적인 힘은 1종 괴수에 버금가고 재생력도 겸비했다.
장애물 하나 없는 평지에서 뛰다가 자빠질 정도로 심각한 몸치이긴 하지만 힘없는 용사보다는 든든하다.
그럼에도 용사를 찾는 이유.
에쏘드는 그리 똑똑한 정령이 아니다. 온종일 ‘나의 용사님~♬’을 노래하며 성실하게 뒷바라지, 가사노동에 전념하는 백치미(白痴美)를 자랑한다.
전형적인 가정주부라고 할까!
에쏘드 ‘본체’는 용사가 마음 놓고 싸울 수 있도록 보조하는 ‘타고난 비전투원’이다.
“타고난 바보취급...”
계약자의 생각을 훑은 한세리가 볼을 부풀렸다.
그래도 찰싹 붙어서 안 떨어지려 했다.
용사 싱크로율이 50% 밑이었으면 ‘바보취급 하지 마세요!’라고 한 번쯤 멋지게 쏘아주며 반항했을 텐데, 안타깝게도 경쟁이 너무 치열하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정령이 많다.
솔직히 말해서 싫지도 않다. 아무리 맡아도 질리지 않는 ‘용사의 향기’는 ‘용사의 정령’에게 윤활유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용사의 언어폭력(!), 가혹행위(?)라면 ‘가까이 오지 마!’라고 할 때뿐이다.
나머지는 뭘 해도 그냥 좋았다.
“이거 참... 쉴 틈이 없네.”
무일의 푸념을 들은 한세리의 귀가 쫑긋했다.
메이 시절에는 계약자가 힘들어하든 죽어가든 신경 쓰지 않았지만, 현재는 아니다.
역으로 너무 튼튼해서 걱정이다!
기회를 포착한 암고양이처럼 ‘용사의 정령’이 귀엽게 속삭였다.
“마사지라도 해드릴까요? 온몸으로.”
“그럴 여유 없다.”
“용사님~♪ 일의 능률도 생각하셔야죠~! 제가 구석구석 극상의 경험을 보여드릴게요! 정말 자신 있어요.”
“시간 나면.”
한사코 거절할 줄 알았던 ‘98% 용사’가 흔쾌히 수락했다!
속으로 만세를 외친 한세리는 괴수대응연맹에 도착하자마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정보수집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탁 막혔다.
“성인인증...?”
한세리는 아뿔싸 하는 심정이었다.
대책반장이 신분증을 만들 때 분명 나이도 물었었다. 그리고 그때 ‘아직 1살도 안 된 파릇파릇한 영계!’라고 대답했다.
보안에 관심 많던 최이슬이 사정사정해서 11살로 타협했던 걸로 기억한다.
당연하게도 11살은 대한민국에서 미성년자다.
실망하며 모니터에서 눈을 뗀 한세리는 바로 옆에서 반신욕을 즐기고 있는 아쿠버스를 힐끔 바라봤다.
그러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빠끔?”
도와줄까?
눈이 반달처럼 휜 라미아가 물었다.
한세리는 장난감 사달라고 차마 말 못하는 아이처럼 고개를 맹렬히 끄떡였다.
손에 묻은 물기를 털어낸 용신이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와...”
순진한 정령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냥 성인인증만 도움받을 예정이었는데 괴수대응연맹 도서관(?)까지 어떻게 찾아 들어간 아쿠버스는 별의별 정보를 다 수집했다.
이게 바로 어른의 세계!
그렇게 주장하는 것 같았다. 마사지하고는 수준 자체가 다른 기술들의 향연이다.
아쿠버스 입장에서는 별거 아니었다.
계약자 ‘페이 링’의 머릿속에 전부 있는 거니 말이다.
“...괴수 둘이서 조용히 뭘 하나 봤더니, 이팔청춘 소녀만화라도 흉내 낼 생각이냐.”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무일이 대꾸했다.
호버크라프트에서 내리자마자 특공대 막사로 귀환한 무일 앞에 기다리고 있는 건 ‘오합지졸도 이것보다는 용맹하겠다.’라는 생각이 절로 드는 신입생들이었다.
근육강화제 덕분에 뱃살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사냥꾼에게 몸이 전부는 아니다.
더욱 중요한 건 정신!
사람을 순식간에 물어뜯는 괴수가 눈앞에 있어도, 눈썹 하나 까딱 안 하고 차분히 방아쇠를 당기고 검을 휘두를 용기가 중요하다.
“용사님! 벌써 일이 끝나신 거예요?”
“아니. 몽둥이로 쓸만한 걸 찾다 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왔네.”
“칼집은요?”
“...라미아에게 했듯 딱밤 날리면 사람은 죽어. 아! 저게 좋겠군.”
“프라이팬이네요.”
“모서리로 안 찍으면 죽진 않겠지.”
남녀차별이라고 뻐끔뻐끔 항의하는 아쿠버스에게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으며 대장실을 나온 무일의 손에는 정말로 프라이팬이 들려 있었다.
이유도 이 프라이팬처럼 하찮다.
나를 한 대라도 때린 녀석은 전역(?)시켜주겠다고 약속한 참이다.
‘쩝. 나도 늙었나.’
많이 물러진 것 같다.
스쳐도 위험한 여자친구 대신 이런 훈훈한(?) 가정용품을 쓰니 말이다. 훈련을 실전처럼 해야 한다고 믿는 무일로서는 훈련생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사나이들을 너무 무시하는 처사일까...?
가공식품이 범람하면서 구시대 유물로 자리매김한 프라이팬으로 상대하면 모욕으로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측]의 결정이다.
이 프라이팬이 딱 좋다고 말이다.
단순하면서도 불편한 구조 탓에 ‘사각 도넛’이란 별명을 달고 있는 특공대 막사 중앙은 폭탄이 떨어져도 멀쩡한 인공 잔디가 심어진 연병장이 있다.
물론, 폭탄도 폭탄 나름이겠지만 사람이 잡아당겨도 안 뜯길 정도인 건 사실이다.
“지금부터, 전역포상이 걸린 훈련을 계시한다.”
총원은 800명쯤 된다.
여자들이 좋아할 법한 근육질 외형이랑 달리 그 내실은 정말 실속 없다. 아무리 좋은 약이 나와도 ‘필요한 근육’만 단련시켜주지 않기 때문이다.
단백질 덩어리?
그렇게 단정해도 틀리지 않은 몸들이다. 유연성은 기대하기 힘들고, 자기 팔뚝보다 얇은 쇠몽둥이 하나도 제대로 못 들고 빌빌거린다.
이들의 저질스러운 폐활량까지 보고 나면 ‘역시 민간인이구나!’ 싶다.
“와아아아!”
“집에 가고 만다!”
“조그만 대장 양반. 약속 꼭 지키시오!”
“내가 게임계 검존(劍尊)이라고 불렸던 남자다!”
하지만 집에 가고 싶다는 마음만은 ‘카르발트를 눈앞에 둔 괴수’들보다 용감했다.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두고 볼 문제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흥분하는 신입생들을 보며 한숨을 조용히 내쉰 특공대장.
저들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사람을 너무 물로 보는 거 아닐까.
‘게임에서는 외모와 능력이 완전 별개라서 저들도 방심 안 할 줄 알았는데.’
애초에 사냥꾼의 정점을 뜻하는 ‘특공대장’을 뭐라고 생각하는지도 의문이다. 선지혜가 맡았던 잠깐을 제외하고는 늘 ‘사냥꾼 No 1.’이 대장이었다.
프로사냥꾼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 특공대다.
그래서 프라이드도 강한 대원들에게 시시콜콜 명령할 수 있으려면 대장은 반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강해야 한다.
체력만 받쳐주면 머릿수 따위는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카르 4세는 ‘세계가 인정한 사냥꾼 No 1.’이다.
굳이 가더발트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최강’이라고 스스로 확신한 순간부터 이미 [예감]도 ‘최강’이었다.
최강의 사냥꾼은 차분히 설명했다.
“여러분의 손에 들린 창은 훈련용 장난감이 아닙니다. 비상시국에 민간인들에게 지급되는 MID 무기입니다. 이렇게 설명해도 이해가 안 된다면 시가로 개당 2,000만 원쯤 하는 꼬챙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민간인이 쓰기 편하도록 가볍고 튼튼하게 제작됐다.
괴수를 쓰러트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이지만, 접근전에도 이보다 초심자에게 가격대성능비가 우수한 물건도 없다.
야구방망이보다 약간 긴 창끝은 말뚝처럼 뾰족해서 ‘괴수의 급소’를 내려찍을 수 있도록 해놨다.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서 협공하는 용도다.
창은 고대부터 ‘비전투원이었던 징집병’들에게 애용되던 무기다.
그건 24세기에 접어든 현재도 마찬가지다.
총기류가 유용할 것 같지만, 양산형 싸구려 총으로 난사해봐야 괴수는 생채기 하나 안 생긴다.
오발(誤發)로 동료를 안 쏘면 다행이다.
“어서 시작합시다!”
“그 프라이팬도 무기입니까?”
“설명은 짧게 갑시다.”
무려 800명이다.
훈련병들도 바보는 아니다. 눈앞에 조그만 대장이란 인간이 나름의 실력이 있어서 저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다. 덤으로 이런 제안도 하고 말이다.
좋다. 인정한다.
하지만 실력이 아무리 좋더라도 800명은 무리다.
가만히 서 있는 800명을 한 대씩만 때려도 지쳐 쓰러질 것이다. 그런데 다 큰 성인 남성으로만 800명이면 아무리 싸울 줄 몰라도 곱게 당해주진 않는다.
게다가 이미 ‘맛보기’라면 했다.
하루가 영원처럼 길었던 며칠 동안, 정말 골병 앓아가며 훈련했으니까.
“...괴수는 인간을 하찮은 굼벵이쯤으로 압니다. 사냥꾼이랑 많이 싸워본 괴수는 안 그렇지만, 대부분 괴수는 인간경험이 없죠. 그래서 한 대를 맞는 순간부터 당황하고 격분하며 빈틈이 많아집니다.”
처음 ‘한 방’이 중요하다.
미래를 보는 [예지]를 갖춘 괴수들은 ‘처음 보는 도구’의 쓰임새마저 간파하지만, 대부분 괴수는 총구를 보고도 회피하지 않는다.
날아오는 총알을 보고 깜짝 놀라며 피하는 경우는 있어도 말이다.
인간은 연약하지만,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은 강하다.
최약체로 분류됐던 인류는 불과 도구를 사용하고부터 지구의 포식자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괴수를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상대의 역량을 [업보]로 파악하는 괴수는 인간을 얕잡아본다. [업보]가 아예 제로라고 할 수 있는 민간인이라면 더욱.
사냥꾼이랑 달리 민간인들은 정보전에서 이기고 들어가는 것이다.
“알겠으니 빨리빨리 합시다!”
“여자친구가 보고 싶어!”
“이 지옥에서 더는 있고 싶지 않아!”
정말로 집에 갈 수 있다고 믿는 걸까?
교관들이 쥐어짤 때는 말 한마디 못하던 그들이 편하게 막말하고 있었다.
그건 800명이란 군중 속에 섞이면서 가상현실게임처럼 ‘익명성’이 보장된다는 믿음에서 나온 용기가 주효했을 것이다.
‘...교관들이 제대로 설명을 안 했군.’
프로사냥꾼의 [예측]은 800명이 아니라 그 이상의 머릿수에 섞어놔도 범인을 정확히 끄집어낼 수 있다.
도주한 괴수를 지구 반대편까지 추적할 수 있는데 이 정도쯤이야!
특공대장을 대하는 태도가 글러 먹은 ‘적의(敵意)’는 명백한 ‘위기’로서 무일의 생존본능을 찔끔찔끔 자극했다.
하위괴수보다 인간이 더 위협적이란 게 아이러니하다.
“괴수는 공격한다고 친절하게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말한 무일은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나이들의 무리 속으로 돌진했다. 가더발트의 힘을 쓰지 않았기에 빠른 속도는 아니었다.
썼다면 프라이팬 대신 사람을 무기처럼 휘둘렀을 것이다.
그래도 카르 4세였다.
침착하게 사방에서 찔러오는 창을 피하며 한 명씩 프라이팬으로 머리를 후려치거나 복부를 모서리로 찍었다.
너무나 인간적인 움직임.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몸짓만으로 차곡차곡 800명을 쓰러트렸다.
“잡았다! 아니?!”
“뭐야?!”
“등 뒤에 눈이 달렸나!”
엄연한 흉기인 창을 인정사정없이 찔러온다. 이게 교관의 가르침 성과인지 원래 이기적인 본성인지는 따져보고 싶지 않았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자들은 프라이팬이 아닌 동료의 창에 찔린 피해자들이었다.
헬멧과 방탄조끼 덕분에 사망에 이르진 않았을 거라고 믿고 싶지만, 헬멧을 벗거나 상의를 풀어헤치는 식으로 튀려는 부류가 있었다.
‘한둘쯤 죽으면 기강이 좀 잡히겠지.’
포위되지 않도록 주의하며 냉정하게 판단했다.
사람들은 이상한 환상을 품고 있다.
특공대라고 하면 싸움만 잘하는 괴물들만 모아놓은 소굴로 안다. 하지만 실제로 보면 전투 실력은 부수적인 능력이다.
진짜는 정신력이다.
인간은 도구를 사용해서 흥한 ‘만물의 영장’이다.
프로사냥꾼과 민간인의 차이도 ‘도구’를 얼마나 잘 다루느냐의 차이다. 그리고 괴수를 상대로 ‘위험한 도구’를 얼마나 잘 다루느냐가 관건이다.
놀라서 수류탄을 떨어트린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와 시민까지 죽는다.
그러나 ‘알고 보니 별거 아니네?’라고 생각되는 이걸 못해서 허망하게 죽는 사건이 어느 나라든 매년 끊이지 않는다.
땡!
프라이팬 소리가 맑게 진동했다.
끝끝내 훈련병 800명이 전부 쓰러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 홀로 승자로서 오롯하게 선 특공대장은 찌그러진 주방용품을 보며 혀를 차고는 말했다.
무책임한 어른의 조언을 같은 어른에게.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 여러분도 언젠가 할 수 있습니다.”
< [27화-3] 계약은 얘가 했는데?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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