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2] 계약은 얘가 했는데? >
‘대한민국의 현대역사를 인간의 손으로!’
당연한 얘기겠지만, 대한민국에서 종사하는 모든 공무원이 와이츠를 찬양하고 추종하는 건 아니다.
용신 와이츠는 수많은 성공신화를 이룩했고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장본인이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하지만 시민의식은 개발도상국보다도 한참 낮았다.
길거리를 가보면 먹고 싸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여자들이 숱하게 널려있다. 여자뿐만 아니라 훈련소에 강제입소한 남자들도 똑같은 수준이다.
와이츠에게 한국인이란 뭘까?
최이슬은 명료하게 대답할 수 있다.
서울이란 도시를 꾸미는 장식품,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다. 도시에는 인간이 살아야 한다는 매우 단순한 이유다.
솔직히, 안타까운 사실은 따로 있다.
시민의 간섭이 사라진 덕분에 복지가 향상되고 나라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반장이에요. 원정대 2기 준비는 어떻게 돼가나요?)
(거의 완료됐습니다, 최이슬 반장님!)
역사적으로 독재정권은 수많은 폐단을 부르며 오래 못 간다는 게 정설이었지만, 와이츠는 순탄하게 100년째 이끌고 있었다.
인간의 권력, 재력에 무관심한 까닭이다.
그야말로 ‘공명정대한’ 용신 와이츠.
기계처럼 최선의 길로만 향하는 용신의 정책에 반하는 시민단체의 궐기(蹶起)는 국가발전을 저해하려는 움직임일 뿐이다.
파고들면 이 또한 사실이다.
시민단체를 운영하려면 필연적으로 회원모집과 모금활동은 필수불가결이다. 그리고 시민단체의 간부들은 권력과 재력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누가 더 청렴결백할지는 따져볼 필요도 없다.
(교육은요?)
(너무 잘 이해해서 문제입니다.)
(역시 그런가요.)
(네. 어떤 수호자를 얻고 싶다는 식으로 요구사항이 쇄도하는 중입니다. 미계약자들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이래서는….)
모든 괴수가 인류에 보탬이 되는 건 아니다.
이거랑 마찬가지로, 여성들이 계약하기 꺼리는 괴수도 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많다!
양서류, 파충류, 곤충, 벌레….
이렇게 단정하기도 힘들다. 털 달린 모든 동물을 싫어하거나 생선이라면 치를 떠는 여성도 적지 않다.
괴수를 안고 다니는 애완동물 수준이길 바란다면 아예 타협의 여지조차 없다.
(본인이 원하든 아니든 각자가 어울리는 괴수가 있다고 못을 박으세요. 여기에 불복하여 물의를 일으킬 시에는 원정대 참가자격을 박탈한다고요.)
(하, 하지만….)
(정신 못 차리는 소수는 버릴 겁니다. 앞으로 4종, 5종 계약자가 쏟아져나올 테니 한두 명 이탈하는 정도로 아까워하지 마세요. 아셨나요?)
(네, 반장님!)
대책반은 정말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좀 넉넉하게 일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인정머리 없는 와이츠의 유예기간은 연장 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중이었다.
생떼 부리는 미계약자들을 일일이 챙길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전화상담으로 억지나 욕지거리가 들리면 서슴없이 그냥 끊어버렸다. 그 탓에 불친절하다는 민원이 쏟아지고 있지만, 당연히 무시했다.
매일 ‘신규 미계약자’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그중에는 ‘혹시 나라면?’이라는 헛된 희망으로 미계약자를 사칭(詐稱)한 실패자들도 끼어있어서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다.
『조상님들의 이름을 걸고 난 미계약자에요!』
...라고 조상님, 하느님까지 다 팔아넘기더라도 처녀막복원수술, 성형수술한 사실이 증발하는 건 아니다.
과거사를 들키고도 더욱 뻔뻔하게 나온 사례가 적지 않다.
숙녀의 사생활을 파헤쳤다고 따지는 건 그나마 ‘귀부인’이고, 괴수도 내 미모에 홀딱 넘어올 거라는 ‘공주병’은 정말 처방할 약도 없다.
아! 공주병보다 심한 불치병도 있다.
현실 괴수를 ‘조련’할 수 있다고 믿는 ‘전직 게이머 여성’들의 억지 주장은 정말 끔찍한 수준이다.
순결하지 않고 못생겼으면 접근조차 할 수 없다니까요?
아무리 설명해줘도 자기는 괜찮다는 말뿐이다.
괴수의 마음을 이해하면 처녀막과 외모의 장벽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역으로 대책반을 가르치려 한다.
(...고생이 많군요.)
최이슬 대책반장은 반원들에게 치하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서울 시민들의 정신무장과 사고방식은 암담한 수준이었다. 심지어 목을 매달고 자살하는 여성까지 등장했다.
원인은 간단하다.
『박선영 코스프레!』
엘로엘 계약자처럼 눈에 안 보이는 정령이랑 계약했다고 지인들에게 실컷 잘난척했던 된장녀들이 수습 못 하고 목숨을 끊은 것이다.
자살할 용기가 없어서 ‘쇼(show)’로 그친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정말로 죽어버린 사례가 심심찮게 나오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그러고도 ‘순결한 자연미인’이 많았다.
똥배와 턱살을 제거하기 위해 운동과 식이요법을 스파르타식으로 빡빡하게 병행 중인 여성들이 빠르게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녀들은 원정대 후반기를 예약하고 그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몸을 만드는 것이다.
(원정대 2기는 20명으로 구성했습니다, 반장님.)
(선별조건이 어떻게 되나요?)
(대한민국에서 가장 우수한 미계약자들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우수하다고 해도….)
자신감 없는 어투로 말끝을 흐렸다.
대책반장이 원하는 ‘사생활도 순결한 미계약자’를 조사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던 까닭이다.
문란한 여성도 처녀이기만 하면 계약은 된다. 하지만 그 가치를 상대적으로 낮게 잡는다는 특공대장의 고백은 충격적이었다.
최이슬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쉬움을 달랬다.
‘서울 인근의 5종 야생괴수를 전부 끌어안고 싶었는데….’
그렇게만 된다면 서울을 지키려다가 산화하는 사냥꾼 손실을 단시간에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경험 많은 사냥꾼들을 ‘교관’으로 돌릴 여유가 생긴다.
서울에 사는 남성 대부분이 훈련소로 끌려갔다.
국회의원의 아들이고 할아비고 할 것 없이 ‘막대한 세금을 감당할 수 있는 재벌’이 아니면 전부 들어갔다고 보면 된다.
당연히 그렇게 모인 훈련생 숫자가 적을 리 없다.
낭비를 싫어하는 와이츠는 ‘불복종은 즉시 총살한다.’는 교육철학을 내놓았다!
그렇게 하면 교관 한 명이 수천 명을 관리하는 것도 불가능은 아니란 해석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간신히 말릴 수 있었다.
『인간은 그렇게 이성적이지 않습니다!』
누워서 침 뱉기 같은 설득이 먹혀들었다.
그 차선책이 ‘교관을 늘린다.’는 건데 하루아침에 경험 많은 사냥꾼을 늘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어쩔 수 없이 현장에 있는 사냥꾼들을 불러들이고 그 공백을 계약자와 수호자로 막아야 하는데 서울은 넓다.
일본과 이집트처럼 9종 괴수가 영토로 지정하거나 8종 괴수를 팔방(八方)에 배치하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서울은 와이츠 딸랑 하나.
또 하나의 8종 수호자 엘로엘은 파주에 있다.
(어쩔 수 없죠. 좀 더 과격한 수단을 쓰는 수밖에.)
(과격이라고 하시면…?)
(법적 효력이 있는 각서를 받으세요. 문란한 과거사가 적발되면 10년간 수도권에서 복무한다는 정도가 좋겠군요.)
(현실적으로 적발하는 게 가능할지요?)
(저희는 괴수의 눈을 가진 특공대장이 있어요. 그는 조사하지 않고도 여자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죠.)
(...반장님. 저는 개인적으로 좀 무서운데요.)
여자 입장에서는 소름 끼치는 일이다.
괜찮은 남자 앞에서 ‘남자친구를 사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라며 온갖 내숭을 다 떨었는데 ‘남자를 몇 번 바꿨네?’라는 식으로 까발려진다면?
꿈도 희망도 없다.
개과천선했든 진짜 사랑을 찾았든 부질없는 변명이 된다.
하물며 계약에 큰 영향을 미친다면 땅을 치고 후회하는 것밖에 할 수 없다.
(이건 어쩔 수 없어요. 치안이 확고한 서울은 강간사건이 없으니, 그저 자기 몸을 함부로 다룬 결과라고 밖에 할 말 없죠.)
이 호버크라프트 내에도 여럿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최이슬이 ‘1기 중에서 가장 예쁘다.’고 평가했던 미계약자는 겨우 3종에 머물렀다.
페이 링보다야 못났지만 그래도 4종을 될 거로 전망했다. 그런데 한무일의 도움을 받고도 성적이 나빴다.
반대로, 남자랑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그럭저럭 예쁜 요조숙녀’가 5종 계약자가 되는 기염을 토했다.
더욱 노골적인 예를 들자면?
이 호버크라프트 내에서도 손꼽히는 미녀인 ‘장혜린’은 청소담당이다.
‘특공대장이 도와주면 6종도 가능했을 미모인데.’
처녀가 아니란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이번 원정대에서 가장 별 볼 일 없는 여성으로 취급받는 중이다.
장혜린의 미래는?
사냥꾼 문세웅을 즐겁게 해주는 아내.
현대사회에서 대우받으려면 남자는 ‘사냥꾼’뿐이고 여자는 ‘계약자’가 돼야 한다. 다른 선택지는 경쟁이 치열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꽉 막혔다.
왜냐고 묻는다면 답은 간단하다.
수명의 한계가 사라지면서 세대교체도 없어졌기 때문이다.
한 번 정치인은 영원한 정치인이고, 한 번 재벌은 영원한 재벌이다. 괴수의 공격이나 불미스런 사고로 죽을 확률은 없다고 단정해도 좋다.
“반장님. 2기 준비는 어떻습니까?”
“순조로운 편이에요, 대장님.”
“그렇습니까.”
무일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수호자에게 ‘멍청한 노예’라는 폭언을 들은 페이 링은 울다가 잠들었고, 계약자를 울린 아쿠버스 ‘산드라미아 레미’는 공부 중이었다.
용신의 마음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언어와 문화를 전수해준 것 빼고는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계약자가 마음에 안 드는 것도 당연하다. 그야말로 ‘한무일 때문에’ 억지로 유지하는 중이다.
그래도 정말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페이 링은 ‘7종’에 어울리는 절세미녀이니 당연하다.
‘계약의 중요성을 아는 거겠지.’
수호자에게 계약자는 ‘진정제’로서 반드시 필요하다.
뱀페스트 왕에게 계약자 선유나를 뺏긴 대한민국 와이츠가 대타로 선지혜를 선택한 것도 이런 이유다.
아름다운 보석이 없는 괴수는 질투와 욕망에 눈이 멀어 폭주한다.
와이츠 ‘미카헬로 싸히어’가 선유나의 친딸 ‘선지혜’가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준 것은 절제심을 발휘할 줄 아는 용신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원하진 않다.
그래서 선지혜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서둘러 계약한 것이다.
“대장님은 어떤가요?”
“...라미아가 빨리 배우길 기대할 뿐입니다.”
“아쿠버스 말씀이군요.”
대한민국에 탄생한 2번째 용신 아쿠버스 ‘산드라미아 레미’의 애칭은 ‘라미아’다.
보통은 계약자가 정하지만….
계약자 ‘페이 링’의 법적 주인(主人)인 ‘한무일’이 정했다. 이건 한무일 독단이 아닌 수호자 아쿠버스의 요구였다.
정말로 누가 계약자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정비과에서 빨리 통역기를 완성하길 바랄 뿐입니다.”
계속 ‘뻐끔뻐끔’ 중인 아쿠버스를 위한 통역기 설계도는 한국 본부의 요청을 받은 괴수대응연맹에서 곧바로 전송해줬다.
하지만 설계도만 있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부품을 가공, 조립, 교정하려면 정말 피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도 MID 군수산업의 부산물이기 때문이다.
고의로 불친절하게 만들어진 설계도를 쓸만하게 고치는 건 ‘한국 괴수대응본부 정비과’ 몫이다.
대한민국 기술력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다.
...이렇게 믿고 싶다는 뜻이다.
정찬호가 3번이나 허락받고 찍은 아쿠버스 ‘라미아’의 사진을 보자마자 정비과에서 환호하며 ‘여신 만세!’를 외쳤다는 건 비밀이다.
“금방 완성될 거예요.”
본부에서 남자가 2번째로 많은 정비과 사정을 모르는 최이슬이 격려했다.
진실을 몰라서 다행이라고 안도한 무일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때였다.
(약 10분 뒤에 본부 선착장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아름다운 숙녀분들은 아무쪼록 편안한 여행 되셨기를, 정비과 에이스 정찬호가 기원합니다.)
초식남이 노골적으로 남자들을 무시한 선내방송을 날렸다.
호버크라프트는 한강 위를 질주 중이었다.
수호자가 머물 장소가 아직 마련되지 않은 탓에 서울로 진입할 수 없는 계약자들은 수도권에서 대기 중인 대책반 요원들의 안내를 받으며 먼저 하차했다.
그렇다면 정찬호는 누구를 배려한 방송이었을까?
놀랍게도 인간이 아니다.
계약할 괴수가 마음에 안 든다고 생떼 부린 끝에 여전히 미계약자로 남은 셋은 정찬호도 마음에 안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마음껏 눈요기해도 해치지 않아요.’ 상태의 에쏘드와 아쿠버스, 두 수호자에게 절대적인 호의를 보이고 있었다.
“용사님! 맛있는 거 먹고 싶어요!”
“...뻐끔뻐끔.”
화용월태(花容月態)를 뒤집어쓴 괴수 두 마리가 좌우에서 팔짱을 껴왔다.
팔뚝에 전해지는 묵직한 젖가슴 감촉이 황홀하다.
하지만 카르 4세는 단호하게 말했다.
“바빠서 안 돼! 넘쳐나는 신입생으로 특공대도 현재 엉망이야. 그걸 조율하려면 밥 먹을 시간도 없어. 그러니 페이 링이랑 같이 쇼핑하고 와.”
“용사님이랑 떨어지기 싫어요.”
“끄덕.”
용사의 정령인 한세리의 반응은 이해범주 안에 들어갔다. 하지만 라미아의 태도는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됐다.
계약이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건 알지만….
수호자에게 폭언을 듣고도 금세 기분이 풀린 페이 링도 방송을 들었는지 슬그머니 방에서 나왔다. 그녀는 최은비랑 정답게 손을 잡고 있었다.
무일은 너무나 착한 노예를 가리키며 용신에게 꾸짖듯 말했다.
“얘가 네 계약자거든?”
“빠끔…?”
페이 링을 힐끔 보고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는 라미아.
보랏빛이 감도는 입술을 움직여 소리 없이 대꾸했다.
어쩌라고…?
< [27화-2] 계약은 얘가 했는데?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