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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처럼-111화 (111/287)

< [27화-1] 계약은 얘가 했는데? >

파르나르 장편소설

괴수처럼 14

[27화] 계약은 얘가 했는데?

학명: 아쿠버스(고결한 물의 여신)

서식지: 호수

특징: 서큐버스의 기원일지도?

위험도: 6종 소형

비고: 백합과 요부의 경계

***

괴수의 학명은 여러 나라의 언어를 쓰고 있지만, 노골적으로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이유는 별거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존재 ‘와이츠’를 보유한 국가가 영국과 한국뿐이기 때문이다.

나름 똑똑하다는 과학자라면 필연적으로 이 둘 중 하나는 만나게 되어있다.

그전에 언어공부는 필수!

어떤 와이츠를 만날지는 본인 자유다. 그리고 여기에 맞춰서 한국어 아니면 영어를 익히는 건 너무나 당연한 예의였다.

그 결과가,

『파벌!』

두 용신이야 ‘멍청한 원숭이들의 편 가르기’에 신경 쓰지 않지만, 그 원숭이에 해당하는 과학자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용신의 추종자인지가 대단히 민감한 사항으로 떠올랐다.

그 절정기!

나라마다 중구난방(衆口難防)인 ‘괴수의 이름’을 총통합하고자 괴수대응연맹에 수많은 학자가 모였을 때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와이츠랑 대화해본 적 없는 ‘권위 없는 학자’들은 구석에 찌그러졌다.

승자는?

압도적으로 ‘한국어 파벌’이었다.

귀족처럼 권위적인 영국의 와이츠 ‘모드레무스 멀리온’보다는 한국의 와이츠 ‘미카헬로 싸히어’가 학자들에게 더 친근했던 결과다.

그래도 영어가 많이 쓰였다.

당시의 세계 분위기가 딱 이랬던 탓이다.

『한국어?』

현재는 계약자이거나 게이머가 아니더라도 기본처럼 누구나 배우는 제3외국어, 국제언어가 한국어다.

하지만 4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안 된 시기에는 고명한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한국어를 아는 사람이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영어랑 섞였다.

덕분에 정말 이상하고 말장난 같은 이름도 등장했지만, ‘권위 있는 학자’들끼리 서로 좋다고 칭찬한 그것들은 전부 ‘학명’으로 채택됐다.

그래도 막장은 아니었다.

이름만 들어도 대략 어떤 괴수인지 알 수 있는 예가 참 많았다.

“주인님. 정말로 아쿠버스가 이 호수에 있을까요?”

“있어. 죽지 않았다면….”

금강호에 도착한 무일은 말끝을 흐렸다.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탓이다.

쓸모없는 에쏘드라고 좌절하며 호버크라프트 내의 침실에 들어가 꿍해 있는 한세리의 대타처럼 따라온 페이 링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쿠버스 / 6종 소형】

‘물에 사는 몽마(夢魔)’라고 해서 붙여진 학명이다.

그야 아쿠버스에 대해 잘 몰랐을 때는 ‘몽마’라는 표현도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실제로 이 괴수는 ‘용족(龍族)’이다.

그것도 ‘현명한 용’을 뜻하는 용신(龍神)!

이마에 뿔이 달리고 등에 날개까지 있는 아름다운 여성형 괴수라서 몽마로 착각했지만, 용족 특유의 위압감과 ‘용안(龍眼)’을 가졌다.

촤아아아!

잔잔했던 금강호에서 물줄기가 치솟았다.

물기둥이 사라진 허공에 등장한 ‘전라(全裸) 여인’이 활공하듯 천천히 물가를 향해 강하하기 시작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仙女)처럼.

함께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이 보석같이 빛나며 여인의 신비감을 더해줬다.

여기까지가 페이 링의 감상.

프로사냥꾼 한무일은 조금 달랐다.

날개라고 정의하기에는 살짝 어폐가 있는 무지갯빛 지느러미가 행글라이더처럼 활짝 펼쳐져 있다.

아쿠버스의 잘록한 등허리에 붙은 2쌍의 역삼각형 지느러미는 나방 혹은 나비처럼 보이게끔 했다.

신장 164, 가슴 88, 허리 53, 엉덩이 88….

불필요한 정보도 머릿속에 나열됐다.

‘공격의사는 없군.’

있었다면 아쿠버스의 특기인 ‘수압(水壓) 브레스’가 날아왔을 것이다. 그것도 이렇게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잠수한 상태에서 기습했으리라.

공격기술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마에 돋아난 산양 뿔은 ‘발전기’ 역할을 한다.

고압 전류를 물속에 흘리거나 쏘아 상태를 태워버리는 것이다. 발동 시에는 허리까지 내려온 군청색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뻗친다.

그러나 아쿠버스의 머리카락은 호수 바람에 흔들리는 걸 제외하고는 잠잠했다.

“주인님. 가까이 다가오는데 괜찮을까요?”

“걱정할 것 없어.”

쓰러트릴 방법이 무궁무진하게 떠올랐다.

그건, 미래를 [예지]한 아쿠버스가 절망하기에 충분하다. 물 위로 올라온 시점에 ‘그녀’에게 승산이란 없었다.

사뿐히 예쁜 맨발로 착지하는 여성형 괴수.

물기를 털어낸 2쌍의 지느러미가 시계방향으로 휘감기며 아쿠버스의 상체와 하체를 각각 감쌌다.

그 모습은 무지갯빛 드레스를 걸친 것 같았다.

이마에 달린 뿔만 아니면 ‘물의 여신’이라고 해도 믿었으리라.

“도저히 괴수 같지 않아요.”

“그건 남자가 할 소리 같은데…. 외모에 속지 마.”

“하지만 이렇게나 예쁜걸요. 어?”

페이 링의 눈이 사르르 감기더니 그대로 수풀에 쓰러졌다.

무일은 그녀가 험한 꼴을 안 당하도록 잽싸게 부축했다.

말해주는 걸 깜빡했군.

아쿠버스의 지느러미에는 수면가루가 묻어있다. 그 효과는 그리 강하지 않지만 피곤한 사람이라면 선 채로 잠들 수준은 된다.

페이 링은 바쁠 일이 없었던 것 같지만, 호버크라프트에서 대책반장의 설명을 아주 열심히 들었던 모범생이었다. 운동을 포함해서.

“뻐끔뻐끔.”

아쿠버스는 해양생물(?)답게 육성을 낼 수 없다.

대신,

입 모양으로 말했다.

그것만으로도 대화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민간인은 분간하기 어렵지만, 사냥꾼의 [예측]은 입술과 혀 등의 미세한 움직임을 분석해서 완벽히 해석했다.

언어?

페이 링이랑 눈이 마주친 순간부터 계약은 이미 완료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서 얻은 지식을 토대로 아쿠버스는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중이었다.

무일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보복하러 온 거 아니거든?”

아쿠버스가 ‘몽마’라고 불린 이유는 악마 같은 외모 때문만이 아니다.

호숫가로 접근한 남자들을 납치하기 때문이다.

그 남자들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뻐끔뻐끔.”

“그럼 왜 돌아왔느냐고 따져도 말이지. 계약자의 기억을 봐서 알 거 아니야.”

“뻐끔뻐끔.”

“사람은 생식 외에도 남녀가 함께 사는 이유가 많아.”

카르 4세와 아쿠버스는 구면이다.

남자는커녕 사람의 그림자조차 없는 금강호를 찾아온 무일은 그녀에게 ‘첫 남자(!)’였다.

그 당사자 입장은?

동해에서 해돋이를 감상하던 중에 ‘금강산이 아름다워.’라는 고대인의 감언이설에 혹한 게 죄였다.

아무튼, 금강호수 근처에 갔다가 납치됐다.

원래대로라면 카르 4세의 운명은 거기서 끝장났어야 했다.

“뻐끔뻐끔.”

“아쉬워? 나로서는 천만다행이었지! 성별을 헷갈려줘서.”

아직 남자경험(?)이 없는 아쿠버스는 고민 끝에 놓아줬다.

수컷 악취가 진동할 정도로 혹사당한 ‘구제불능 소녀’에게 연민을 느낀 것이다.

괴수가 인간을 놓아준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쿠버스를 ‘용신’이라고 괜히 부르는 게 아니다.

이성의 정점에 있는 존재다.

안 그랬다면 ‘다혈질 용왕’ 레드군보다 약한 아쿠버스에게 ‘용신’이란 호칭을 부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희소성과 아름다움만으로도 그 가치가 높지만 말이다.

“뻐끔뻐끔.”

“잠깐만. 착각하면 곤란해. 네 계약자는 이쪽이라고.”

“뻐끔뻐끔!”

“지식만 훔치고 버리는 건 진짜 저질들이나 하는 짓이야.”

“...끄덕.”

마지못해 수긍하는 아쿠버스였다.

기대랑 달리 ‘6종’부터는 억지로 이어준다고 되는 게 아닌 모양이다. 페이 링의 지식만 빼내고 계약을 해지하려던 아쿠버스만 봐도 그렇다.

과거의 인연(?)으로 간신히 붙들어놓긴 했으나 일면식조차 없는 다른 고위괴수를 상대로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았다.

대화로 주선해주는 건 5종까지!

그 이상은 무리란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

‘계약은 계약인 거지?’

깨어난 페이 링은 온몸이 바짝 굳어버렸다.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아름다운 수호자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망설이지 않고 계약자에게 입맞춤한 탓이다.

아쿠버스의 인사(?)를 받은 페이 링이 울먹였다.

“내, 내 첫 키스가…. 첫 키스가…!”

계약자의 마음을 짓밟은 수호자는 요염하게 혀를 굴리며 입술을 핥았다.

아름다운 여성형 괴수의 황금색 눈동자가 이번에는 무일을 지그시 쳐다봤다. 굳이 [예측]하지 않아도 이쪽 입술을 노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였다.

딱!

기습적으로 날아온 칼집이 아쿠버스의 이마를 시원하게 후려쳤다.

딱밤?

평범한 인간이었으면 두개골이 함몰됐을 일격이었다!

하지만 빨개진 정도로 그친 이마를 부여잡은 용신은 눈물을 찔끔했다. 이런 수모를 당하면 덤빌 법도 한데 노려보는 시늉조차 안 하는 그녀가 신기했다.

“희극이 따로 없네. 하아….”

무일은 제대로 꼬인 운명을 원망하듯이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위태롭게 비틀거리는 페이 링의 손을 오른손으로 잡아끌었다. 그랬더니 아쿠버스가 앞을 가로막으며 팔을 내민다.

나도 잡아달라는 뜻이었다.

기가 막혔지만, 왼손으로 그녀의 손도 잡아줬다.

겉보기에는 인간이랑 똑같은 우윳빛 피부인데 만져보니 그 차이를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매끈하고 촉촉한데?’

양서류 같은 피부는 분명 아니었다.

보습크림과 스킨로션으로 보호받는 여인의 살결 같은 촉감이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아쿠버스의 ‘지느러미 드레스’에서 그윽한 향기가 확 퍼졌다. 그렇다고 오래 맡는 건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저것이 바로 ‘수면가루’다.

역시나 페이 링은 꾸벅꾸벅 또 졸기 시작했다. 하지만 에쏘드의 ‘특성 무효화’를 받고 있는 무일에게는 효과가 전혀 없었다.

“운전기사 재우면 죽는다.”

“뻐끔뻐끔.”

송사리(문세웅)에게는 관심 없다고 답하는 아쿠버스였다.

계약이 끝났다고 판단한 호버크라프트가 가까이 접근하더니 부유를 멈추고 말도 없이 착지했다.

왜?

무일의 의문에 대한 답은 그 직후에 통보하듯 날아왔다.

졸린 목소리의 문세웅이었다.

(선배님, 죄송합니다. 너무 졸려서요.)

(아니. 수고했다. 아침부터 온종일 운전했는데 안 졸리면 그게 더 이상하지. 정찬호와 교대한 후에 폭 쉬어.)

(감사합니다.)

(자고 일어나면 서울에 도착해있을 테니 어떤 식으로 쉬든 간섭하지 않으마.)

(하…. 하…. 선배님은 못 속이겠습니다.)

뜨거운 청춘이로다!

탄식한 무일은 페이 링과 아쿠버스를 차례로 호버크라프트에 태웠다.

호기심 어린 시선들이 집중됐다.

아쿠버스는 무지갯빛 지느러미가 살결에 착 달라붙은 덕에 가슴과 허리, 엉덩이로 이어진 굴곡이 여실히 드러났다.

원정대가 출발한 이후부터 현재까지 묵묵히 자기 일만 몰두하던 이승필마저 넋을 잃고 쳐다볼 정도로 치명적인 유혹이었다.

농염한 어른의 매력이랄까!

묘령쯤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로 저 몸매를 소화해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아! 한 명 더 있군.

“용사님!”

바둑으로 간신히 1승 거둔 한세리가 쪼르르 달려왔다.

졸린(그래서 져준 것 같다.) 얼굴로 뒤따라온 최은비는 멈추지 않고 돌진해서 무일의 가슴에 얼굴을 푹 묻었다.

이렇게 어리광부리는 소녀를 본 아저씨는 그저 미안했다. 소풍 내내 너무 떼어놓았던 것 같기 때문이다.

“아저씨. 여기서 캠핑하고 가요?”

“...그러고 싶은데 캠핑은 다음 달로 미뤄야겠구나.”

“네에….”

최은비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그런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일은 말했다.

“캠핑은 무리지만, 앞으로 한 달 동안 아저씨랑 여기저기 구경 다니자. 이번 소풍을 짧게 끝내고 싶어하는 언니가 어떻게든 도와줄 거야.”

“한 달요?! 정말이시죠?!”

“정말이지.”

특공대장이랑 눈이 마주친 대책반장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원정계획에 대해 아직 상의하지 않았음에도 프로사냥꾼은 [예측]하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전력이 급부상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을!

당연히 그 기회는 카르발트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인도 이미 깨닫고 있던 것이다.

그 조건이 초등학생의 출석이라면 정말 헐값이다.

학생을 차별하면 안 된다고 교육부나 교장선생이 딴죽 걸면?

“최은비 학생. 학교 안 나가도 되도록 언니가 도와줄게.”

국가반역죄를 적용해서 치워버리면 그만이다.

좀 과한 처사 같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최이슬은 확신했다.

< [27화-1] 계약은 얘가 했는데?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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