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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처럼-110화 (110/287)

< [26장-4] 저주받은 사냥꾼 >

전투라고 불리기도 민망한 일방적인 폭력 앞에, 도마뱀 괴수는 자신의 특징이자 장기인 거대한 입조차 써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다른 에쏘드 계약자는 엄두도 못 낼 전투방식!

무거운 꼬챙이를 드는 건 둘째치고,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긴 창은 역으로 움직임에 방해될 게 뻔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에쏘드 능력을 누가 저렇게 써!

그런 불만은 있었으나 첩보위성을 가동 중인 요원들은 이제 그러려니 하는 초탈의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상대는 백혈구울이랑 마찬가지로 6종이지 않은가.

【이구하마 / 6종 대형】

한 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는다고 전해지는 이구하마.

4차 세계대전 당시에 미국이 자랑하는 항공모함 세 척을 가볍게(!) 깨물어서 침몰시킨 걸로 유명해진 초대형 도마뱀이다.

평소에는 두 발로 다니지만, 사냥이나 헤엄칠 때는 네 발로 엄청난 속도를 자랑한다. 그 덩치에 걸맞게 그저 뛰고 수영하는 것만으로도 지진, 해일이 일어나는 괴수다.

그런데 죽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백혈구울보다는 아주 오래 버텼다고 할 수 있지만, 그건 덩치가 큰 덕분이지 더 강해서가 절대 아니었다.

“용사님! 피가 아주 많아요!”

“...흡혈귀 같은 발언은 자제해줘.”

“거머리 취급이라니, 정말 너무해요!”

볼을 부풀린 한세리는 이구하마의 은색 웅덩이에 맨발을 담갔다.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꿈틀 움직인 ‘괴수의 피’는 순식간에 그녀의 몸을 감쌌고 현대적인 디자인의 흰색 원피스로 변했다.

무척 수수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경악할 것이다.

무일이 여태까지 쓰러트린 모든 괴수를 일정 크기로 축소한 그림이 위에서부터 시간순으로 정밀하게 음각되어있다.

외모에도 살짝 변화가 있었다.

어깨에 살짝 닿았던, 여성치고 짧은 단발이었던 한세리는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칠흑빛 생머리로 변해있었다.

...자세히 보니 가슴도 조금 더 커진 것 같다.

정령의 과시욕은 그냥 천성인 모양이다.

“그건 뭐야?”

“붕대요! 멋지고 튼튼한 갑옷은 어렵게 됐지만, 용사님의 상처를 치료하는 붕대쯤이라면 가더발트도 허용해줄 거예요!”

“그걸 물은 게 아닌데….”

“그럼요?”

“오징어처럼 팔랑거리지 마.”

사방에 넘쳐나는 피로 에쏘드가 뭘 하든 쓰지 않는다.

하지만 휴지(?)를 온몸에 대롱대롱 매달고 서울 한복판을 돌아다니는 건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본인은 붕대라고 하는데 별반 차이 없었다.

어차피 상처 날 일도 없다!

무일이 사냥꾼의 범주를 아늑히 넘어설 정도로 강해진 건 맞지만, 육체가 연약한 인간이란 건 여전히 변함없다.

붕대를 감을 틈도 없이 사망 직행이다.

“우우….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왜?”

“용사님의 의식주는 제 담당이니까요!”

한세리는 아무래도 음식을 만들려는 모양이다. 하지만 배 속에 거머리가 들어있는 무일로서는 절대로 사양이었다. 공복감도 없고 말이다.

옷은 가더발트 때문에 안 되고, 음식은 뱀페스트 때문에 기각!

에쏘드는 의식주라고 했지만….

그녀가 만들 수 있는 주거 수준이란, 넓고 튼튼한 텐트였다. 하지만 호버크라프트를 놔두고 불편한 야영을 고집할 필요는 없었다.

“너무 우울해 하진 마.”

“그렇지만 저는 정말 변변찮은 에쏘드인걸요. 으아앙!”

호버크라프트에 다시 올라탄 한세리는 서러움을 담아 펑펑 울었다.

난감해진 무일은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도움이 되고 싶은데 안 돼서 힘들어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그리고 그녀의 노력하는 모습이 결과를 떠나서 아름다웠다.

그래서 솔직한 감상을 털어놓았다.

“예쁜 세리가 응원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훌쩍! 정말요?”

“계약자가 거짓말하고 있지 않다는 정도는 느낌으로 알잖아.”

“그래도 직접 듣고 싶어요.”

“흠. 나는 변변찮은 에쏘드로 만족하고 있어.”

완전히 삐친 한세리는 망루 구석에서 무릎을 껴안고 훌쩍였다. 달래주지 않으면 천벌 받을 것만큼 가련한 자태였다.

하지만 계약자와 수호자의 정신감응은 일방통행이 아니다.

이건 놀아달라고 떼쓰는 ‘연기’다.

들켰음에도 한세리가 고집스럽게 버티는 것이다.

“괴수 하나가 또 온다.”

“다녀오세요.”

“그래.”

“정말로 떼놓고 가지 마세요!”

언제 심술을 부렸느냐는 듯이 냉큼 매달렸다.

보통의 에쏘드는 이렇지 않는다.

용사님의 열렬한 사랑을 듬뿍 받으며 극상의 대우와 생활을 영위한다. 그리고 전투에 방해되는 행동을 일절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세리는 대롱대롱 안겼다.

이 정도로 무게감을 느낄 ‘나의 용사님’이 아니기에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다면 방해보다는 도움이 되는 까닭이다.

심하게 강한 ‘나의 용사님’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눈치지만 말이다.

‘후음! 기분 좋은 향기…. 헤헤….’

에쏘드를 보유한 모든 국가가 경계하는 게 있다.

치명적인 아름다움!

정령의 과시욕과 허영심으로 똘똘 뭉친 완벽한 미모에 계약자가 빠져들어 헤어나오질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순도 98% 용사’는 강했다!

역으로 유혹된 에쏘드가 계약자의 품에서 떨어질 생각을 못 했다.

“...모든 에쏘드가 세리 같다면 실망인데.”

“분명 실망하실걸요!”

한세리는 긴장했다.

여태까지 등장한 세계의 모든 용사는 고만고만했다. 미녀를 좋아하고 약자를 돌아보며 풍류를 알았다.

용사의 미덕인 ‘희생’ 빼고 말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미녀를 독식하고, 약자는 승산 있을 때만 구하며, 사람들의 찬양이 끊기길 경계했다.

그건 ‘용사’가 아니다.

남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줄 모른다면 용사가 아니라 ‘영웅’이다. 그리고 에쏘드는 ‘영웅의 정령’이 아니라 ‘용사의 정령’이다.

용사 싱크로율로 따지면 23%쯤 될까.

‘정신 바짝 차려야 해!’

치열한 경쟁이 예상된다.

에쏘드의 허영심과 과시욕을 충족시키는 최고의 가십거리는 자신의 미모가 아니라 ‘모시는 용사님’이 누구냐는 것이다.

이보다 ‘용사의 정령’를 돋보이게 해주는 영예도 없다.

세상의 모든 에쏘드가 외모와 치장에 공들인 이유는 ‘마음에 안 드는 용사’를 조금이라도 더 빛나 보이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용사가 더없이 완벽하다면?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다.

대한민국 에쏘드 한세리의 옷차림이 수수한 이유다. 주위의 시선이나 판단이 어떻든 용사님만 좋다면 그게 정답이다.

“여자친구만으로 번거롭네.”

“변변찮아서 죄송해요….”

“이것도 좋은 공부라고 생각 중이니 낙담하지 마.”

공기든 물이든 닿는 모든 걸 분쇄하는 세균 괴수가 빠진 ‘카르세리안 레이소’의 절삭력은 보잘것없는 수준이다.

하지만 그 절단기가 ‘에쏘드’라면 얘기가 다르다.

절삭력이 일정해진다!

괴수가 강하든 약하든 베고 찌르는 손맛이 비슷비슷하다는 뜻이다. 단단한 부위는 저항감이 강하고, 약한 부위는 그럭저럭 쑥쑥 베이고 푹푹 찔러진다.

그래서 문제다.

‘3종 괴수의 등껍질에 막히는 건 좀 충격적인데!’

여자친구가 ‘세계에서 3번째로 날카로운 절단기’였던 시절에는 손쉽게 절단했던 괴수가 버티니 무척 성가셨다.

하지만 ‘한 방’이란 건 변함없었다.

베거나 찔리는 대신 카르발트의 무지막지한 괴력으로 짓뭉개는 것이다. 그러나 다수의 괴수를 상대로는 썩 좋은 수단이 아니었다.

몽둥이보다는 날붙이가 살상력은 훨씬 우수하니까.

“용사님이 다른 검도 쓰신다면 너무너무 섭섭하지만 어쩔 수 없죠.”

“세리는 착한 에쏘드네.”

“변변찮긴 하지만요.”

여전히 별 도움 안 된다며 뚱해 있었다. 볼을 부풀린 소녀의 표정이 너무나 귀여워서 별말 안 하기로 했다.

그렇게 서너 시간쯤 지났을까?

이런 식의 호위는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한 카르 4세는 대책반장에게 연락했다.

피로는 없지만, 정신적으로 마모되는 기분이었던 탓이다.

(반장님. 멀리서 따라오고 있는 수호자들의 배치를 변경해주십시오.)

(그건 어렵지 않지만, 통제가 될까요?)

(밖에 있는 계약자들을 호버크라프트 안으로 불러들이면 괜찮을 겁니다. 어차피 그녀들도 상당히 지쳐있고요. 잠깐이면 몰라도 장시간은 무리입니다.)

수호자가 계약자를 아무리 배려해줘도, 부유해서 부드럽게 전진하는 호버크라프트 승차감을 따라잡을 수 없다.

대책반장은 손뼉을 쳤다.

(아! 그건 생각지도 못했네요.)

(예? 여태 불만 한 번 없었다는 건 좀 이상한데요. 착오가 있던 것 아닙니까?)

(아니요. 정말 없었어요.)

최이슬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군기가 바짝 들어갔다고 할까.

거대한 도마뱀 괴수, 이구하마가 붕 날아가서 처박히고 숨을 거두는 걸 목격한 수호자들은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그 잔류사념에 전염된 계약자도 별 차이 없을 것이다.

누구 명령으로 나와 있는데 힘들다고 투덜댈 수 있겠는가!

(...아무튼, 4종 이하가 접근하지 못하게 수호자들이 근접호위하도록 진형을 짜주십시오. 얼마나 잘 지켜질지는 모르지만.)

(해볼게요.)

솔직히 이렇게 함께 우르르 몰려갈 필요는 없다.

무일이 페이 링을 안고 계곡을 폴짝폴짝 뛰어넘으며 질주했다면 진즉 금강호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방법을 택한 이유는 하나다.

보여주고 싶어서!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가씨들은 밖을 볼 기회가 없다.

가상현실게임에서 더 아름다운 경치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들은 앞으로 가상현실이 아닌 현실에서 살아가야 한다.

본인들이 원치 않더라도 외모관리 18시간이 그러도록 강요할 것이다.

‘은비에게도 보여주고 싶고.’

서울하고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도시였던 평양이란 현실만 봐온 소녀에게 세계가 얼마나 넓은지 조금이나마 더 보여주고 싶었다.

에쏘드가 없었다면 당연히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경험을 늘리려다가 죽는다면 정말…!

금서희의 까까오를 포함해서 5종 둘과 4종 다수가 호위하는 호버크라프트를 공격하는 야생괴수는 없었다.

이 지역의 터줏대감인 ‘6종 괴수 이구하마’가 비명횡사하고 남은 괴수는 5종 이하뿐이라서 덤빌 수준들이 안 됐다.

이래서 모든 원정대는 미계약자와 사냥꾼으로 꾸려지는 것이다.

수호자가 있으면 괴수들이 접근을 안 하니까.

진형을 바꾼 이후부터 정말로 습격 한 번 없이 순조로웠다.

“진즉 이렇게 할걸!”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됐다.

한국고속도로 공사는 서울에서 부산을 이은 후에 가지 뻗듯 지방도로를 깐다. 하지만 서울보다 위쪽에 위치한 금강산은 논외다.

그래서 한 번도 도로가 깔린 적이 없는 산길은 무척 험난했다.

콰지직!

맘모슨이 없었다면 말이다.

이 초대형 코끼리 괴수가 지나갈 때마다 나무고 바위고 밀려나거나 짓밟히며 평평한 도로가 생겨났다.

도로라고 해도 자동차가 다닐 수 있으려면 여기에 다른 괴수의 도움이 더 필요하지만, 호버크라프트는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하루라는 시간이 이렇게 귀중해질 수 있을까.

원정대가 출발하고 하루는커녕 반나절도 안 흘렀는데 처음 출발할 때하고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부산의 계약자, 금서희는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오라버니가 서울에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 또한 말이다.

“이만 가볼게요, 오라버니.”

“고생만 시키고 보내는 것 같아서 미안하네.”

“아신다면 부산에 뛰어난 계약자를 많이 보내주세요. 아빠 같은 사냥꾼들이 날뛰지 못하도록 정말 많이요.”

“그래. 그리고 서울 상황이 나아지면 한 번 찾아가마.”

“약속하신 거예요?”

빨리 가자고 애타게 계약자를 부르는 까까오에 올라탄 금서희는 빠르게 멀어졌다.

벌새 날개처럼 진동하는 15쌍의 날개는 장식품이 아니었다.

세계에서 가장 빠른 괴수인 ‘돌대가리 날치’ 볼트윙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정말 무지막지한 속도다.

그 이후로 겁도 없이 달려드는 야생괴수가 조금은 생겼다.

호버크라프트를 보호하던 5종 수호자가 둘에서 하나로 줄어들면서 전력이 반 토막 났다고 해도 틀리지 않은 탓이다.

주로 비행형 괴수가 기습했다.

하늘을 꽉 잡고 있던 까까오의 공백은 생각보다 컸다.

번거로워졌다는 뜻이다.

쿠웅!

에쏘드는 훌륭한 작살이었다.

너무 거칠게 다룬다고 칭얼거리던 한세리도 이젠 포기했다.

그래도 ‘이사한 지 며칠 안 된 새집’이 이리저리 날아가는 광경을 눈 뜨고 못 보겠다면서 호버크라프트 안으로 쏙 들어가버렸다.

용사님이랑 떨어져서 뭘 하고 있을까?

괴수의 피로 만든 장기판과 장기알로 최은비에게 재도전 중이었다. 장기라면 중국의 보드게임이기에 ‘메이’가 꽤 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카드게임의 설욕을 하려던 것 같지만, 이번에도 패색이 짙었다.

초등학생이라고 무시했는데….

태어난 이래로 평양의 아파트 밖을 거의 나가보지 못한 최은비는 엄마랑 이것저것 많은 게임을 했다.

장기, 체스, 포커, 블랙잭, 화투, 바둑 등등.

집에 틀어박혀 온종일 이것들만 지겹도록 했으니 잘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어린애에게 지고 눈물을 글썽이는 에쏘드라니, 하아….”

자존심이 무참히 짓밟힌 한세리가 울먹이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려오는 기분이었다.

정신감응 중이니 기분만은 아닐 것이다.

< [26장-4] 저주받은 사냥꾼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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