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08화 (108/287)

< [26장-2] 저주받은 사냥꾼 >

카르 3세는 중얼거렸다.

사냥꾼의 [예감]과 [예측]은 죽음을 빗겨가게 한다.

그가 유키나 미나미에게 뻗었던 손을 무의식적으로 멈춘 이유도 ‘죽음의 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뚜렷한 근거는 없다.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이건 카레 짱에게 비밀인데, 너무 신기해서 몰래 쫓아다녀 봤어.”

“...스토킹?”

“아니야! 나와 엑시온은 순수한 호기심이었어. 그렇지?”

갑자기 공범으로 지목된 웨이터는 멋들어진 쓴웃음을 지었다. 손은 아름다운 숙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마음씨 좋은 오빠가 솔직하지 못한 여동생을 타이르는 것처럼 보였다.

너무나 인간적인 판타이탄이 인간적으로 말했다.

“호기심이 아니라 탐구심이었다.”

둘의 차이가 뭡니까?

카르 3세는 묻고 싶어서 근질거리는 입술을 꾹 참았다.

딴죽 걸면 안 된다고 [예감]이 속삭였기 때문이다.

“이후에 이것저것 알아봤어. 어디서 그런 불가사의한 힘이 나오는 건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이 세상에 불가사의는 없다.”

“하잇! 척척박사 엑시온의 주장이었습니다!”

“......”

늘 생각하는 거지만 이 판타이탄은 인간보다도 인간적이다.

처음 보는 ‘털 없는 원숭이’를 분별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극단적이지 않게 ‘적당히’ 싸울 줄도 안다.

러시아의 판타이탄은 이렇지 않다.

미친 과학자처럼 인체실험을 즐기고 자신만의 첨단요새에 계약자를 가둬둔 채 최소한의 요구만 들어준다.

둘의 차이가 있다면?

가상현실게임을 하는가, 여부일 것이다.

일본의 판타이탄 ‘엑시리얼 온드미온’은 현실에서 ‘관대한 수호자’지만, 가상현실게임 속에서는 ‘깐깐한 수호자’다.

...팔불출 남편이란 표현이 더 적합할까.

가상현실게임 내에서는 ‘왕비만 사랑하는 국왕’이란 신분을 사용 중이다.

왕비의 경국지색(傾國之色)을 증명하듯 나라는 막장으로 운영되고 있지만, 그 흔한 반란조차 안 일어나는 이상한 소국(小國)이다.

건국된 이래로 백전불패(百戰不敗)!

세계 최고의 프로게이머로 유명한 ‘임진호’도 도전했다가 속수무책으로 패하여 아이템과 경험치를 대폭 잃었다고 전해진다.

진짜 ‘하느님’을 인간이 이길 수 있을 리 있나….

“카레 짱은 불사신(不死身)이야.”

키바 카즈마의 상념을 깬 건 유키나 미나미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잠시 넋 놓고 있던 틈에 손님으로 위장 중인 아름다운 아가씨, 휴머노이드 둘이 그의 좌우에서 정답게 팔짱을 끼며 앉았다.

외형은 가녀려도 휴머노이드의 괴력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수준이다. 그건 카르 3세라고 해도 예외가 아니었다.

흡혈을 안 한 ‘0단계’ 노블레스는 민간인보다 나을 게 없는 까닭이다.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 절대로 안 죽는 몸.”

“흡혈귀?”

“여태 설명은 안 듣고 내 가슴골만 보고 있으니 그런 멍청한 대답이 나오는 거야! 카레 짱은 정말 강력한 저주에 걸렸어.”

“저주…?”

대한민국의 프로사냥꾼 한무일은, 그가 죽으면 뒤따라 자살해서 서울을 멸망시키겠다는 협박을 받았다.

누구에게?

와이츠 계약자 선지혜에게!

태어날 때부터 공주님이었던 절세가인의 ‘청혼’을 시원하게 걷어찬 소년은 마음대로 죽을 수 없는 ‘저주’에 걸리고 말았다.

목숨은 분명 하나인데 수천만 ‘생명의 무게’가 얹어진 것이다.

무시무시한 진실!

그 발동조건은 정말 위험천만하다. 정말로 속임수나 편법 하나 없이 ‘수천만 목숨’을 짊어져야만 가능하다.

웬만한 사냥꾼은 그 부담감에 짓눌려 꼼짝하지도 못하리라!

그런데 목숨을 건 사냥까지?

미치지 않았다면 집 밖조차 못 나가야 정상이다.

하지만 한무일은 ‘카르 4세’로 불리기 전인 얼추 10년 전부터 그 막대한 부담을 온몸으로 받으며 ‘평범한 사냥꾼’처럼 행동해왔다.

정말로 믿기지 않았다.

“이제 알아들었어? 카레 짱 수준은 돼야 유키 짱의 남친으로 합격! 최근에는 방어가 너무 견고해서 불만이지만.”

유키 짱은 귀엽게 아랫입술을 깨물며 투덜댔다.

심장이 녹아내릴 만큼 깜찍한 자태였지만, 이번만큼은 키바 카즈마도 진지한 얼굴로 그녀의 말을 되새김했다.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정신력.

절대로 죽을 수 없는 부담감.

이렇게 완성된 ‘저주’에 ‘뱀페스트’가 꼽사리 끼면 어떻게 될까?

특수체질이 아닌 카르발트가 흡혈하면 미쳐버릴 거라고 ‘일본 정보과’는 예견했지만, 수천만 목숨이랑 동급인 남자가 간단히 미쳐줄까?

명실공히 ‘최강의 사냥꾼’이 [자결]하고 ‘8종 계약자’가 뒤따라 자살한다는 상황은 좀처럼 상상이 안 됐다.

여기에 에쏘드도 있다.

계약자가 미치도록 방관하진 않을 것이다.

‘만약, 그자가 미치지 않고 뱀페스트를 지배하게 된다면….’

카르 3세는 [예측]할 수 없었다.

생각하기 싫어서 무의식적으로 차단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하기 싫다고 해서 현실이 달라지는 건 아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사건이 눈앞에서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유키나 미나미가 당사자에게 전화한 것이다!

단신으로 ‘6종 괴수’를 농락한 프로사냥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담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여보세요.)

(카레 짱! 오하요!)

(...안녕. 유키 짱, 무슨 일이야? 아니, 무슨 일이 있다면 내 쪽인가.)

(왜, 예요? 카레 짱에게 무슨 일 있어, 예요?)

시치미 뚝 떼는 유키 짱이었다.

그녀의 한국어 실력에 대해서는 키바 카즈마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수화기 너머로 답하는 목소리에 한숨이 섞여든다.

(에쏘드가 열심히 칭얼대는 중이라서. 13살 초등학생을 상대로 카드게임을 연전연패 중인 정령은 뭐라고 해야 좋을지….)

(바보, 예요?)

(쉿! 귀가 밝아서 다 들-, 이런! 운다.)

(......)

유키 짱은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정령이 있구나!’라고 감탄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아직 익숙지 않은 최은비를 상대로 카드게임에서 연전연패했다면 정말 심각하다고 생각한다.

훌쩍이는 정령의 등을 토닥이며 카르 4세가 물었다.

(그래서 이건 안부 전화?)

(아! 이건….)

(이건?)

유키 짱은 머리에서 열이 날 정도로 생각했다.

한국에 등장한 에쏘드 때문에 전화했다고 하면, 빼도 박도 못하고 속물인 여자가 된다. 괜히 전화해서 점수 깎이는 건 정말 멍청한 짓이다.

어쩌면 좋지…? 아!

눈앞에 훌륭한 핑곗거리가 있었다.

(카르 3세가 결투를 신청한대. 제법 강해지더니 나를 성추행하려고도 했어. 흑흑….)

일본 총리의 아들, 키바 카즈마는 눈을 크게 떴다.

만반의 태세를 갖춘 노블레스조차 5종을 상대로 고전한다. 그런데 디저트처럼 6종을 찜쪄먹은 인간이랑 싸우라고?

서둘러 반박하려고 했으나 숨이 탁 막혀서 그럴 수 없었다.

팔짱을 끼고 있는 휴머노이드가 복병이었다!

(...정말인가 보네. 카르 3세, 그런 남자로 안 봤는데.)

무일이 [예감]한 유키 짱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그녀의 손목을 잡으려는 ‘성추행’을 하려고 했던 건 사실이고, 카르발트가 해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에쏘드 계약자’가 되겠다고 한 것도 맞다.

그걸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유키 짱의 주관이다.

주관적인 판단으로 본인이 ‘이게 진짜임!’이라고 생각한다면 진실보도가 된다.

(그래서 도와달라고 전화했어, 카레 짱!)

(흠. 바빠서 출장은 힘든데.)

카르 4세는 ‘판타이탄이 있는데 어떻게 성추행할 수 있지?’ 같은 의문이나 질문은 일절 하지 않고 당면한 문제를 지적했다.

카르 3세가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진실’이다.

일본 도쿄의 시민을 보호하는 7종 계약자가 성추행당할 뻔했고, 그에게 울면서(이건 가짜 같다.) 도움을 요청했다는 게 중요하다.

키바 카즈마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반대로 유키 짱은 ‘앗싸!’라고 소리 없이 외치며 촐싹거렸다.

‘이건 데이트! 절호의 기회!’

아름다운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감사의 뜻으로 카르 3세에게 아주 비싼 음료와 디저트 등을 주문해준 유키 짱은 다음 달에 ‘데이트(사형날짜)’를 잡았다.

대한민국 와이츠의 최후통첩이 끝나고 이틀쯤 지난 날이었다.

“...일본도 말세로군.”

통화를 마친 무일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혀를 찼다.

사냥꾼의 대우가 좋은 일본이라 그런 걸까?

어떻게 7종 계약자에게 성추행할 생각을 할 수 있는지 상상이 안 갔다.

‘남성혁명이란 게 좋은 것만은 아니군.’

기고만장해진 사냥꾼이 등장하고 있었다.

생일파티 이후부터 자신의 모든 정보를 하나도 남김없이 공개하고 있는 카르 4세로서는 씁쓸함을 감출 수 없었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한 일이라도 악용하려는 무리는 어디에나 있다.

후회?

그렇지는 않다.

인류의 전력은 확실히 증가하는 추세인 까닭이다. 사냥꾼의 질이 올라가면서 덩달아 계약자의 수준도 높아지고 있다.

그래서 뿌듯하다.

악용한 자들로 인해 인류가 끝장나더라도 이 마음은 변치 않으리라. 멸종한다면 그건 한무일 개인의 독단이 아닌 인류의 결정이다.

“뭐…. 그런 최악의 상황이 안 오도록 노력해야겠지.”

무일이 유키 짱의 생뚱맞은 요청을 수락한 이유다.

힘에 취해서 계약자를 성추행하려 한 카르 3세는 용서할 수 없다. 악용의 대가를 반드시 치러야 할 것이다.

이 또한 카르 4세의 ‘정의’였다.

기술과 정보를 공개한 사람의 책임과 의무.

아무리 봐도 손해 보는 장사지만, 아이들이 마음 놓고 자랄 수 있는 세상에 한 걸음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다면 좋다고 생각한다.

“용사님! 저도 도와주세요!”

종이로 된 매우 쉬운 카드게임에서 또 한 번 패배의 쓴맛을 맛본 에쏘드 소녀가 부들부들 떨며 애원했다.

우연으로라도 한 번쯤 이길 법도 한데 연전연패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 정령 앞에는 최은비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세리! 아저씨에게 도와달라는 건 반칙이야! 안 돼!”

“아우….”

대한민국 에쏘드의 이름은 ‘한세리’로 정해졌다.

당연하게도 ‘카르세리안 레이소’에서 따왔다.

정말 건성이었지만, 이름이 용사님의 별명 ‘카르’ 뒤에 찰싹 붙어있고 성도 ‘한’으로 같다면서 그녀는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역시나 [예감]으로 지은 이름답게 대충도 ‘신의 한 수’다.

대책반장 최이슬은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한세리’를 보면서 신분증을 만들고 있었다.

본부 대책반에 시켜도 되지만 그녀는 일일이 수작업 중이었다.

에쏘드 신분은 기밀사항이기 때문이다.

이미 첩보위성으로 웬만한 나라는 다 안다고 카르 4세가 말해줘도 요지부동이다.

“어디 보자….”

설득을 포기한 무일은 페이 링을 불러들였다.

에쏘드를 물질세계로 불러들이면서 ‘능력’도 한층 더 강화됐으니 이제 ‘7종 야생괴수’를 물색하는 일만 남았다.

마음 같아서는 ‘8종 야생괴수’로 하고 싶지만, 이것만은 현재도 무리였다.

반드시 토벌해야 하는 괴수라면 겸사겸사 시도해보겠지만, 죽이지 않고 대화하는 건 아무래도 어렵다고 판단했다.

솔직히 7종도 계약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제압을 둘째치고 계약자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인 까닭이다.

『운명적인 만남!』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괴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 무일도 부정할 수 없는 정론이다.

“주인님. 대한민국에는 대형이 많네요.”

“맞아. 소형은 찾아보기 힘들지.”

지구 상의 거의 모든 지표면은 고위괴수들이 땅따먹기해서 나눠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연히 되찾으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 예로, 엘로엘 계약자 박선영은 대한민국에 서식하는 ‘7종 소형’을 전부 바람에 날려 일본이나 중국에 던져버렸다!

가벼워서 만만했기 때문이다.

그런 탄압(?)이 몇 번 반복되자 [예지]할 수 있는 ‘소형 괴수’들은 아예 이 조그만 반도를 찾아오지 않게 됐다.

한국에 사는 고위괴수 대부분이 ‘대형’뿐인 이유다.

“큰 건 싫은데….”

“걱정하지 마, 페이 링. 나도 싫으니까. 집에서 기를 수 없잖아.”

< [26장-2] 저주받은 사냥꾼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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