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장-1] 저주받은 사냥꾼 >
[26장] 저주받은 사냥꾼
학명: 맘모슨(아주 신사적인 코끼리)
서식지: 평야
특징: 몸에서 식물이 자랍니다.
위험도: 4종 대형
비고: 가는 길마다 도로가 생길지니.
***
대한민국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남자들은 도살장에 끌려가듯 사냥꾼 훈련소에 들어가고, 여자들은 임신과 계약을 놓고 시간 싸움 중인 까닭이다.
당연히 서울 밖의 상황에 관심 가질 여유 같은 건 없었다. 하물며 당일 벌어진 일이라면 아예 알 방도가 없다.
그건 외국이라고 해도 다를 게 없었다.
차이가 있다면 대한민국은 본부(대책반 빼고)도 모르지만, 세계의 지도층들은 어떤 식으로든 실시간으로 따끈따끈한 정보를 모으고 있다는 점이다.
...꼭 지도층만 그런 건 아니다.
“스고이데스네. 카레 짱.”
대단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었다.
언젠가 계약할 거라고 예견하긴 했지만, 이런 식일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유키나 미나미는 ‘카르발트 피규어’를 만지작거리며 씁쓸함을 달랬다.
와이츠가 돌아오면서 한국의 첩보망은 거의 차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한무일이 특공대장이 되어 본부로 들어가면서 모짜리나 바글버글도 불통이 됐다.
스마트폰은 그나마 연락할 수 있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에쏘드 계약자가 돼서 축하한다고?
방해전파를 받지 않는 서울 밖인 덕분에 간신히 아메리카 드림워치를 해킹해서 미국이랑 사이좋게 ‘대한민국 에쏘드’를 막 확인한 참이다.
에쏘드답게 환상적인 미모를 자랑했다.
그 미모의 기준은?
『첫 계약자의 이상형!』
대한민국 에쏘드는 한무일이 꿈꿔왔던 ‘미(美)의 화신’이다.
정말 비겁한 정령이 아닐 수 없다.
완벽한 외모의 더부살이 여자를 추월하는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무리다. 그나마 위안이라면 매개체로 쓸 피가 부족해서 성장과 발육이 도중에 멈췄다는 정도.
아직 완벽하진 않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파고들 여지가 있다는 건데….
“미나미 상!”
잡음이 끼어들었다.
일생일대의 계획을 짜고 있던 유키나 미나미는 안면근육이 씰룩거리는 걸 최대한 억제하고자 노력했다.
강력한 연적(戀敵)을 앞두고 미세한 주름이라도 생기면 곤란하다.
하지만 귀찮게 하는 이 남자를 볼 때마다 혈압이 오르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더 가까이 오면 살충제를 뿌릴 거야.”
슈퍼거머리도 박멸시킬 수 있는 매우 강력한 살충제다.
그 살충제는 당연히 ‘7종 수호자 판타이탄’이다.
“주의하겠습니다.”
무려 ‘카르 3세’라고 불리는 청년은 쓰게 웃으며 발걸음을 멈췄다.
일본 총리의 아들.
그런 으리으리한 직함을 달고 있지만, 전자계통을 지배하는 ‘판타이탄 계약자’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총리가 청렴결백하지 않은 한, 하루 만에 탄핵 맞게 할 수 있는 게 그녀였으니까.
하물며 아들이라면 먼지처럼 날려버릴 수 있다.
사회적으로나 무력으로나….
카르 3세가 ‘노블레스’가 되도 변함없는 진실이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카르발트가 에쏘드 계약자가 됐다는 사실은 아십니까?”
“당연하지.”
“현재, 영국과 중국, 미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에쏘드 보유국들이 연구에 착수했습니다. 저희 일본도 마찬가지고요.”
“흡혈귀 용사 만들기?”
“미나미 상은 역시 알고 계셨군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카르 3세가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가 ‘아내를 칭찬하는 남편’ 같아서 심히 불쾌한 유키나 미나미였다.
신사적인 판타이탄 ‘엑시리얼 온드미온(애칭: 엑시온)’이 당장 화학약품에 담가버려도 되느냐고 의사를 물어볼 정도였다.
카르 3세는 급히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상기시켰다.
그도 일단은 [예감]을 익힌 프로사냥꾼이기에 ‘죽음의 위기’쯤은 눈치챌 수 있다.
‘나의 어떤 점이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건지….’
일본 총리의 아들 ‘키바 카즈마’는 도통 알 수 없었다.
그가 99% 성공률을 자랑하는 연애전략은 ‘여성과 자주 만난다.’는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3종 이상의 수호자를 곁에 둔 계약자에게는 자주 쓸 수 없어서 이 전략이 어렵지만, 유키나 미나미는 괜찮다.
그녀의 수호자 판타이탄은 ‘아기 만들기 빼고 전부 OK!'로 유명하니까.
하지만 방금은 명백한 살기(殺氣)였다.
그게 계약자의 의지를 반영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 실험에 지원했다는 거야?”
“하잇! 강해져서 미나미 상의 옆에 나란히 서고 싶습니다!”
키바 카즈마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 당돌한 대답에 유키나 미나미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눈앞에 사내를 지그시 쳐다봤다. 다시 봤다는 표정은 결코 아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카르 3세의 목울대 넘어가는 소리가 3번쯤 지나갔을 때였다.
“카즈마 상.”
“하잇!”
“내 피를 빨게 해준다면 어떻게 할 거야?”
짓궂은 표정의 유키나 미나미가 푹신한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점점 거리를 좁혔다.
집은 ‘권력의 노예’인 모친 탓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고급 카페에 숨어있었는데 이 또한 좋은 선택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애초에 무리였던 걸지도 모른다.
좁은 도쿄에서 ‘감 좋은 스토커’를 떼어놓으려면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오니오프 성지(메이지 신궁)’밖에 없다.
유키나 미나미도 이전에는 카페 같은 곳에 숨지 않았다.
7종 계약자가 뭐하러?
카르 3세도 ‘친하게 지내자고 끈적대던 사내’ 중 하나의 범주였기에 별문제 없었다. 그런데 ‘흡혈귀’가 된 이후부터 민폐 수준으로 변했다.
“그야….”
키바 카즈마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유키나 미나미는 도쿄의 명문 고등학교 교복 코스프레 중으로 무척이나 깜찍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그녀의 새하얀 목덜미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계약자』
아무도 이견을 제시하지 못하는 그녀만의 별명이다.
이건 계약자에게 너무나 관대하고 유용하며 인간적인 수호자 판타이탄을 만났기 때문만은 아니다.
축복받은 몸매와 체질!
유키나 미나미는 가슴과 엉덩이로만 살이 찌는 ‘타고난 공주님’이었다.
정말로 그런지는 확인할 방도가 없지만….
아무튼, 하루에 그녀가 소모하는 외모관리시간은 수면을 포함해서 12시간 미만. 이 기록은 괴수대응연맹에서 조사한 계약자 평균 ‘18시간’보다 매우 짧은 수치였다.
이쯤 되면, 수호자가 ‘신사적인 판타이탄’이 아니더라도 행복한 계약자라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이런 ‘타고난 공주님’의 미모는?
진짜 공주님이자 세계 최초의 9종 계약자인 ‘미오 타미에’랑 판박이다.
“카즈마 상. 흡혈할 기회를 준다면 어쩔 거야?”
“흐음….”
딱 봐도 시험이다.
키바 카즈마는 유키나 미나미가 유혹하는 요지를 모를 만큼 어리석지 않다. 하지만 이미 나온 정답을 놔두고 그는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요염하고도 고결한 ‘미의 결정체’를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탓이다.
흡혈은 한순간이지만 관계는 오래간다.
체내에 ‘괴수의 피’가 거의 안 남은 ‘0단계’ 상태로는 무리지만, 한 번이라도 다량의 흡혈로 ‘3단계’ 이상을 경험한 노블레스는 특별하다.
뱀페스트로 치면 귀족 계급이다.
‘유키나 미나미가 내 말을 따른다….’
카르 3세는 아래로 피가 급격히 쏠리는 걸 느꼈다.
현재는 [업보] 문제가 해결 안 돼서 흡혈을 중지한 ‘0단계’ 상태지만, 한 번이라도 해서 ‘1단계’에 돌입하면 보균자를 마음대로 조종하는 능력을 쓸 수 있다.
여기서 유키나 미나미의 피를 빤다면?
괴수의 힘을 쓸 수 있을 때마다 그녀는 ‘나만의 노예’가 된다.
“싫으면 말고.”
“잠깐! 실례가 안 된다면…!”
다시 멀어지려는 절세가인의 가녀린 손목을 잡으려던 미청년은 움찔하며 동작을 멈췄다.
어느샌가 사방에서 겨누어진 총 탓이다.
개개인이 너무나 개성적이고 인간적이었던 탓에 평범한 카페 손님인 줄 알았는데 전부 휴머노이드였다.
이들 모두가 판타이탄의 분신.
명실공히 최강의 프로사냥꾼이 된 카르 4세마저 깜빡 속았던 ‘인간형 로봇’이다. 절세가인에게 한눈팔고 있던 카르 3세가 눈치챌 수 있을 턱이 없다.
“그냥 물어만 본 거다, 해충.”
소파에 돌아가 앉은 계약자를 대신해서 수호자가 대답했다.
깔끔한 웨이터 복장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미남자는 테이블 위에 빈 커피잔을 새롭게 채우고는 아름다운 숙녀 옆에 섰다.
유키나 미나미가 말했다.
“카즈마 상. 당신은 괜찮은 남자야.”
“...놀리지 마십시오, 미나미 상. 제가 무슨 말실수를 했는지 정도는 압니다.”
“그거야 내가 예뻐서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아….”
절대로 빈말이 아니었다.
유키나 미나미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이해해줬기에 키바 카즈마가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고개를 떨군 카르 3세는 부들부들 떨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여인이다.
저런 도도함마저도 싫어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깜찍하다.
반드시 ‘에쏘드 계약자’가 되겠다고 다짐하는 미청년에게 아름다운 숙녀는 뜨거운 커피잔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그래서 당신은 위험해.”
“무슨 말씀입니까.”
“엑시온이 내 안전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남자가 아니란 뜻이야. 더 쉽게 말해서, 기회를 노리는 엉큼한 늑대~♪”
장난스러운 말투였지만 눈빛만은 진지했다.
예쁘기만 했다면 진즉 일본 정부에 이용당했을 것이다.
카르 3세는 방금 지은 죄가 있어서 반박하지 못했다. 하지만 억울한 마음에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을 꺼냈다.
“카르 4세는 다르다는 겁니까?”
“달라.”
유키 짱은 딱 잘라 말했다.
순간, 말문이 막혔던 카르 3세가 대꾸했다.
“어째서 그리 쉽게 단정하는 겁니까, 미나미 상.”
“그야 보았으니까.”
정부의 앞잡이가 된 엄마가 싫어서 한국으로 몰래 가출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서울은 비상사태였다.
평화로웠다면 판타이탄을 타고 몰래 들어가는 게 가능했겠지만, 레이더가 사방에 깔린 서울은 아무래도 힘들었다.
영토침입으로 오해받긴 싫어서 끝날 때까지 구경하기로 했다.
『섬멸전』
인간과 괴수 중 한쪽이 전멸할 때까지 끝나지 않는 싸움이었다.
전장은 수도권에 해당하는 노원구 코앞.
시가지까지 침입하기 전에 차단했어야 했는데 와이츠가 없는 보안체계의 대처가 조금 늦어진 결과였다.
당연히 민간인 피해도 있었다.
어쭙잖은 동정심으로 무작정 구하러 간 사냥꾼들이 무더기로 죽어갔다. 그들의 행동을 비웃을 순 없지만 칭찬하기도 어려웠다.
살아서 더 많은 사람을 돕자!
뛰어난 사냥꾼이라면 이런 마음가짐도 필요하다.
“...그 어리석은 사냥꾼 중에 카르 4세가 있었다는 겁니까?”
“너무 뻔한 얘기 같아?”
“솔직히 말해서 그렇습니다.”
카르 3세라면 절대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계약자의 응원이 올 때까지 기다린 후에 처신하는 게 현명하다.
유키 짱은 굳이 부정하지 않고 계속 말했다.
“개죽음이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그 소년은 갓난아기를 안고 돌아왔어. 그리고 계속해서 구하고 또 구했지.”
사냥꾼 소년은, 야생괴수가 들이닥치자마자 그대로 버려진 산부인과와 안전한 피난처를 왕복하며 아기들을 날랐다.
이쯤 되면 확률적으로 죽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소년은 악착같이 살아남고 또 살아남았다. 급기야 무기도 버리고 이리저리 좁은 골목과 건물 내부를 돌아다니며 어떻게든 괴수를 따돌렸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
판타이탄이 계산한 생존율은 소수점이었다. 그런데 소년은 그걸 몇 번이고 깡그리 무시하면서 왕복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할까?
인류는 그 기적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었다.
“위기감지능력….”
< [26장-1] 저주받은 사냥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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