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장-4] 자, 선택의 시간이다. >
여성의 피를 완전히 빨아들여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괴수. 그래서 흡혈귀라고 하는 과학자도 있지만, 결국은 ‘시체’로 정의됐다.
서울에서 쫓겨난 추방자들을 흡혈하며 야금야금 힘을 키울 것 같지만, 뇌가 퇴화한 탓에 그 정도로 똑똑하진 못 하다.
여성이 많은 도시를 바로 습격한다.
위험성은 신경 쓰지 않고 먹잇감이 풍부한 곳으로 진격하는 것이다.
‘추방된 흡혈귀….’
뱀페스트 귀족사회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다.
가축을 함부로 해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기르는 가축의 반항에 울컥해서 죽인다면 그만큼의 가축을 또 구해야 한다. 한둘은 몰라도 이런 식의 소모적인 구도가 계속되면 끝장이다.
들켜서 토벌되기 이전에 자멸하고 만다.
고상한 흡혈귀들은 아리따운 여성의 목덜미가 아니면 송곳니를 안 박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리한다.
『유전자보존법칙!』
거머리 괴수는 미녀들이 예쁜 여아를 많이 낳길 바란다.
하지만 이기적인 부류는 어디에나 있는 법.
흡혈 욕심이나 홧김에 가축을 죽이는 뱀페스트가 간혹 있다. 그게 실수라면 한 번쯤은 경고로 끝나지만, 계속되면 동족들에게 제거된다.
몰락귀족처럼.
당연히 본인들은 죽지 않기 위해 발악한다.
왕이 ‘죽어라.’라고 명령하기 전에 먼저 흡혈로 숙주의 체내 ‘괴수의 피’ 농도를 100%에 도달시키는 것이다.
억제해줄 계약자가 없는 뱀페스트는 백혈구울로 진화한다.
다만, 진화하는 동안은 무력해지고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기에 필연적으로 도시 밖에서 행한다.
“헼헼헼!”
백혈구울은 호버크라프트를 발견하자마자 침을 흘리며 쏜살같이 달려왔다.
진화한 이후로 단 한 번도 흡혈하지 못했는지 덩치는 인간의 규격을 넘기지 못했다. 그래도 비쥬얼(visual)은 괴수가 분명했다.
손톱이 따로 없는 뾰족한 손가락과 마찬가지인 발가락, 오랫동안 관리하지 않은 턱수염 사이로 긴 송곳니가 튀어나왔다.
피부는 시체처럼 창백했고 움직임은 좀비처럼 건들거린다.
“흠…. 피가 많이 부족하겠는데.”
카르 4세는 에쏘드를 뽑아들고 그런 백혈구울을 막아서며 중얼거렸다.
과거에 협공으로 물리친 녀석보다 형편없다.
뿔, 날개, 촉수, 독주머니, 가시, 비늘, 등껍질….
온갖 동물의 특징과 장기를 흉내 낸 부속들이 하나도 안 보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덩치가 매우 작았다.
그야말로 갓 태어난 백혈구울.
아주 손쉬운 상대라는 뜻은 아니다.
뇌가 퇴화한 대신 ‘본능’이 극도로 발달했기 때문이다.
“크헤헼!”
죽음의 위기를 [예지]한 백혈구울이 입을 쫙 벌리며 위협적으로 울면서 뒤로 한 걸음 크게 물러섰다.
일격필살을 추구하는 카르 4세는 눈살을 찌푸렸다. 가더발트를 얻은 근래에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헛손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망하진 않았다.
‘제법….’
저렇게 작은 덩치로 상대의 공격을 허용하면 찍소리도 못 내고 죽는다. 재생력도 신체 일부를 복구하는 거지 ‘부활’이 아닌 까닭이다.
그 ‘한 방’을 맞추기 쉬웠다면 ‘6종’이라고 불리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백혈구울은 약점 없는 괴수로 악명 높다.
육체가 산산조각이 나도 살점들이 자석처럼 순식간에 합쳐지며 되살아나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신체 일부를 변형해서 전투에 유리하도록 특화하는 유연함도 갖췄다.
하지만 이 뱀페스트는 그럴 여분의 피를 구하지 못했다.
덤으로 상대는 ‘에쏘드’.
천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상성이 나빴다.
“술래잡기는 사양이다만.”
스쳐도 쇼크사라는 걸 [예지]로 깨달은 백혈구울은 전의를 상실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도망치진 않았다.
눈앞에 상대를 ‘여성(!)’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가랑이에서 수컷 악취가 진동하는 ‘구제불능 미소녀’지만, 어차피 일용의 양식이니 예쁘기만 하면 그만이다.
다시 태어난 이래로 처음 만난 먹잇감.
백혈구울은 호버크라프트 안에 있는 손쉬운 여자들이 더 탐났지만, 등을 보이는 순간 죽으리란 걸 알기에 그러지 못했다.
상대는 어차피 연약한 소녀(!).
한 방에 죽음을 맞이하는 건 피차일반이다.
“크헤헤헼!”
인내심이 없는 백혈구울이 참지 못하고 돌격했다.
계속 [예지]는 ‘공격하면 죽음’이라고 맹렬히 경고했지만, 애초에 그 정도로 영리한 괴수가 아니었다.
흙먼지가 시야를 덮을 정도로 요란하게 도약한다.
하지만 ‘공격의사’를 보이자마자 카르발트의 [반격]이 발동됐다.
뱀페스트 귀족의 육체 능력을 초월한 백혈구울은 너무나 간단히 베인 자신의 오른팔과 허리를 번갈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재생, 변형이 안 된다.
상처에서 쏟아지기 시작한 은색 피는 너무나 평범하게 밑으로 흘러내렸다.
“살짝 얕았나.”
“케헥?”
시종일관 담담한 표정인 ‘구제불능 소녀’가 감상을 중얼거렸을 때는 이미 후속타로 백혈구울의 머리가 잘린 후였다.
원래, 백혈구울에게 머리는 중요하지 않다.
여성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고 피를 흡수하기 위한 ‘빨대’ 정도의 가치밖에 없다. 전투도 [예지] 덕분에 시각과 청각 정보는 없어도 그만이다.
뇌마저 퇴화한 머리는 그야말로 장식품!
하지만 그 머리를 잃은 백혈구울은 평범한 생명체처럼 힘을 잃고 쓰러졌다.
“이게 바로 치트(cheat)로군.”
머리를 잃었다고 죽을 괴수가 아닌데 죽었다.
괴수대응연맹 소속의 과학자들이 해보라고 내놓은 공략법이 아니었다.
백혈구울은 상처에서 피가 튀는 그 짧은 틈에 화염방사기와 화학무기 등으로 조금씩 혈액을 증발 혹은 응고시켜 말려 죽여야 한다.
...이게 공식적인 공략법인데 사냥꾼들만으로는 못 잡는다고 단정하는 편이 현명하다.
괜히 ‘6종’으로 불리는 게 아니다.
그게 ‘불사의 기사’라고 불리는 백혈구울.
하지만 참으로 인간적이게 죽었다!
가상현실게임으로 치면 체력 99.99% 남은 보스가 돌연히 회색으로 변하며 쓰러진 거나 다름없는 결과였다.
아무튼, 이젠 보스가 남긴 ‘아이템’을 확인할 시간!
체구가 작은 만큼 보유한 ‘괴수의 피’도 좀 많이 부족해 보였지만, 시도해봐서 나쁠 건 없었다.
‘지금도 사기인데 본격적인 치트키(cheat key)의 길로….’
백혈구울의 시신 옆에 수은처럼 고여있는 ‘은색 웅덩이’에 서둘러 카르세리안 레이소 칼끝을 담갔다.
에쏘드를 어떻게 깨우는지는 누구에게도 배우지 못했다.
그저 본능이 시키는 대로 할 뿐.
그 상태로 1초쯤 가만히 기다린 무일은 눈을 가늘게 떴다.
“...실패인가.”
실망하고 여자친구를 떼려고 할 때였다.
덥석!
칼날을 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웅덩이에서 ‘괴수의 피’하고는 다른 우윳빛 섬섬옥수(纖纖玉手)가 튀어나온 것이다.
손목, 팔꿈치, 팔뚝, 어깨….
빠르게 그 영역을 확장해갔다. 그럴수록 주위에 흩어진 피는 빠르게 줄어들었고, 백혈구울의 시신마저 흐물흐물 녹아내리듯 쪼그라들었다.
이 광경을 간단히 정의하면?
맨홀 뚜껑을 열고 사람이 나오는 것 같다.
“아우…. 아파….”
두 발로 서는가 싶더니 균형을 못 잡고 엉덩방아를 찧는다.
누가 보더라도 ‘순도 100% 요정’이란 걸 알 수 있는 전라의 미소녀!
저 외모를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생각하기 귀찮은 한무일은 ‘여태까지 봐온 여자 중에서 가장 예쁠지도 모름’이라고 두루뭉술하게 정의 내렸다.
그 사이에 또 일어나려고 시도한 미소녀가 이번에는 ‘꺅!’이란 귀여운 추임새도 넣으며 같은 장소에 또 한 번 엉덩방아를 찧었다.
무일은 울상을 짖는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에쏘드?”
“...젖가슴 작은 계집애처럼 보여도 용사님의 연인(戀人)이 맞아요.”
소녀치고 매우 발육 상태가 좋은 에쏘드가 답했다.
여성의 수치심보다는 정말로 작아서 보여주기 싫다는 분위기였다.
“내 에쏘드는 노출증 이팔청춘(二八靑春)인가….”
“용사님! 저는 불량정령이 아니에요! 피가 부족해서 옷도 못 만들고 체구도 줄일 수밖에 없었던 것뿐이라고요!”
“흠. 그런 모양이네.”
피와 살이 빠진 백혈구울은 뼈만 남아 있었다.
에쏘드의 매개체로 전부 쓰인 것이다.
무일은 걸치고 있던 영국산 외투를 벗어서 소녀에게 입혀줬다.
“저도 메이처럼 용사님에게 어울리는 훌륭한 여체(女體)가 되고 싶었어요.”
“잠깐만. 메이라고?”
“네.”
“중국의 에쏘드?”
“그렇게도 불렸었어요.”
앞뒤 문맥이 뭔가 어긋난 대답이었다.
이 에쏘드가 ‘메이’인지 아닌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정령은 정해진 실체가 없다.
대신 ‘환경’의 영향을 아주 크게 받는다. 시대와 장소별로 인류의 미인 기준이 다른 것처럼 정령은 그 주변에 맞춰서 변화한다.
에쏘드도 그렇다.
용사만을 위한 ‘용사의 정령’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는 환경은 ‘용사’와 ‘집’이다. 그리고 에쏘드의 집이라고 한다면 ‘용사의 검’이다.
그렇다고 평범한 검은 안 된다.
용사가 쓸 검이 대장간에서 막 나온 신제품이라면 모양새가 이상하잖은가.
“...여태 못 나온 이유가 참 변변찮네.”
“저도 이런 세균 넘치는 검은 원치 않았는걸요!”
무일의 팔에 매달리듯 간신히 일어선 에쏘드가 변명했다.
꼭 모양새가 아니더라도 정령이 깃들려면 ‘영적인 힘을 내포한 검’이 아니면 안 된다.
중국의 에쏘드, 메이.
그녀가 살던 ‘집’은 중원 무림의 화산파(華山派)에 기원을 두고 있다.
『매화검(梅花劍)』
무려 1,0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명검이었다!
에쏘드의 설명을 들은 무일은 고개를 끄떡일 수밖에 없었다. 그 시대착오적인 유치한 디자인은 1,000년 전의 골동품이라서 당연한 거였다.
계약자의 생각을 읽은 에쏘드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영적인 힘을 내포한 검이라…. 이게?”
무일의 여자친구는 분명 ‘저주받은 검’이라고 불렸다.
주인만 다섯 번 죽인 요도(妖刀).
그 저주를 잘만 피해가고 있던 카르 4세로서는 수긍하기 어려웠지만, 이 안에서 몇 달 동안 생활해온 에쏘드가 보증했다.
“유부남을 증오하는 영혼이 깃들어 있어요.”
“...정말?”
“이 검을 소지했던 다섯은 용사님을 제외하고 전부 유부남이었어요.”
첫 번째 주인은 계약자를 아내를 둔 프로사냥꾼이었다. 하지만 성관계를 할 수 없기에 그 욕구불만을 다른 여성에게 풀었다고 한다.
이 검의 내력(來歷)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불륜이 걸리면 아내에게 살해될 것이 두려웠던 프로사냥꾼은 성욕의 배출구로 쓴 여자들을 살해한 후에 괴수가 죽인 걸로 위장했다.
그딴 이유로 희생된 억울한 여성이 백여 명!
양심이 중요한 프로사냥꾼이기에 그녀들을 죽일 때마다 ‘내 아내가 알면 곤란하니 이해해줘.’ 같은 괘씸한 변명을 했다.
여자들이 한 맺힐 만했다.
그 앙금이 쌓이고 쌓여 ‘저주’가 됐고, 프로사냥꾼은 그녀들을 죽일 때 사용한 ‘카르세리안 레이소’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런 이야기.
카르 4세는 입술을 떨며 말했다.
“...나는 총각이라서 살았다는 뜻?”
“네. 저주를 청소할까 하다가 나중에 필요할지도 몰라서 집구석에 정리해뒀어요. 일단은 저에게 없는 능력이니까요!”
“뭐냐! 그 잔인한 추가능력은…!”
“인간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용사의 천적은 늘 아내였는걸요! 저는 용사님의 안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에쏘드는 야무지게 주먹도 쥐어가며 의욕을 불태웠다.
뭔가 숭고하기까지 한 그 기세에 밀린 무일은 다른 주제로 피신했다.
“그래서 넌 메이가 아니란 거야?”
“중국에는 이런 격언이 있어요. 새 그릇에는 새 물을 담아라.”
“앞뒤가 바뀐 것 같은데….”
걸음걸이가 신생아 수준인 에쏘드를 번쩍 안아 들고 호버크라프트에 올라탄 무일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깊게 따지진 않았다.
그가 본 에쏘드는 메이의 기억을 가졌지만, 성질은 다른 것 같았다.
평양에서 잘만 걷던 메이랑 달리 서는 것조차 못하는 걸 보면 경험도 빠진, 어라?
“갑자기 잘 걷네.”
“그야 당연하죠! 달라진 체형에 익숙해졌으니까요.”
아담한 ‘용사의 정령’은 우쭐거리듯 대답했다.
이거 보란 듯이 맨발로 통통 뛰며 ‘용사’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소녀는 ‘용사의 연인’보다는 조연에 더 어울렸다.
기억과 경험은 계승한 모양이지만, 성격은 차분했던 메이하고 확실히 달랐다.
“아무튼, 그래서 넌 이름은 뭐야?”
“제 이름은 용사님이….”
“메이 2세.”
“완전 싫어요! 그런 건성인 이름은!”
< [25장-4] 자, 선택의 시간이다.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