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05화 (105/287)

< [25장-3] 자, 선택의 시간이다. >

(이런 식으로 원정을 쭉 진행할 계획입니다.)

(아! 네!)

(혹시, 이 부분은 이렇게 했으면 좋겠다, 하시는 부분 있으시면 조언 부탁합니다. 아무래도 주먹구구식이라서요.)

(그, 그럼….)

용기를 낸 최이슬은 상기된 얼굴로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다.

2종 괴수, 잘해봐야 3종쯤 예상했던 미계약자가 ‘4종 계약자’로 탈바꿈했다! 숫자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지만, 무시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괴수의 취향?

맞는 얘기지만 ‘기본’은 갖춘 이후에나 따질 문제다.

솔직히 말해서 ‘맘모슨 계약자’는 몸매 관리를 게을리한 편이었다. 며칠 굶는 정도로 완전히 가릴 수 없는 군살이 여기저기 보인다.

그런데도 ‘4종’이었다.

몸매관리가 더 낫거나 미모가 더 나은 미계약자들은 어떨까?

(...반장님은 전원을 4종 이상의 계약자가 될 거라고 예상하시는 모양이지만, 남을 열 명 중에서 서넛은 2종 아니면 3종이 최선일 겁니다.)

(어째서죠?)

(생물학적으로 순결을 유지했다고 전부는 아닙니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처녀막이 전부는 아니다.

전래동화의 공주님들은 청결한 몸가짐에 최선을 다했다. 친족을 제외한 남자는 손조차 잡아본 적 없을 만큼 경건하다고 할까.

야색마 로니콘은 그녀들의 생활태도까지 따지며 ‘처녀의 팬티’를 먹을지 말지를 결정하진 않는다.

그저 계약자가 될 가능성만 판별할 뿐.

하지만 카르 4세는 괴수가 아닌 인간이기에 정확히 말할 수 있다.

스스로 가치를 깎아내린 ‘문란한 공주님’은 안 된다고.

(대장님은 그걸 어떻게 아실 수 있나요?)

(이 또한 시간 되시면 제 프로필을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저도 일단은 노블레스. 괴수의 심미안에 일가견 있습니다.)

(네….)

가더발트 다음은 뱀페스트?

카르 4세에 대한 최신 정보를 모르니 뭐라고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최이슬도 억울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한 번 작성된 프로필은 웬만해선 바뀌는 법이 없는데 이 프로사냥꾼은 최근에 수시로 갱신되는 까닭이다.

(그럼 이견이 없는 걸로 알고 진행하겠습니다, 반장님.)

(네.)

이견이 있을 턱이 없었다.

미계약자들에게 맞춤형 소개팅(?)을 해준다는데 뭐라고 한단 말인가.

변변찮은 미모의 아가씨들을 어떻게든 고위괴수랑 이어지게 해달라고 억지를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정말로 체면 던지고 생떼 부려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억지를 부려서 3종 수준의 여성이 4종 계약자가 된다면 남는 장사다.

하지만 그건 대책반 수장이 할 일이 아니다.

역으로 미계약자와 계약자들의 그런 억지스러운 불만과 투정을 받아주고 어떻게든 달래는 역할이다.

당연히 그중에는 대책 안 서는 ‘진상’도 있다.

자기 얼굴과 몸매는 생각 안 하고 무조건 5종 이상의 고위괴수와 이어달라며 난동 부리는 것이다.

최이슬도 마음 같아서는 정말 이어주고 싶다.

계약이 마음대로 된다면 말이다.

네 미모로는 1종 혹은 2종이 한계라는 통보를 받자마자 ‘네년이 어떻게 알아!’라며 난동부리는 계집들을 보면 화가 안 날 수 없다.

대책반장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전직 6종 계약자였던 그녀가 남자에게 모든 걸 의존한다는 건 성미에 맞지 않고 말이다.

불만접수쯤은 특공대장 대신 받아줄 수 있다.

(반장님. 지금부터 북상해서 개성시 인근까지 가기로 하겠습니다.)

(그럼…. 새로운 계획에 맞춰서 제 나름대로 세팅해보도록 할게요.)

최이슬은 처음부터 이럴 계획이었으면 ‘어제 얘기해줬으면 좋았잖아요!’라고 따지고 싶었지만, 마음속으로 삼켰다.

특공대장이 대책반장을 골탕먹일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프로사냥꾼답게 즉흥적으로 떠올린 계획일 게 분명하다.

여름임에도 추위에 덜덜 떨고 있는 미계약자들을 호출해서 호버크라프트 안으로 다시 들여보냈다.

계약 예정인 여성만 화장실에서 한 번 더 볼일을 보고 외출(?)하기로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곧 계약하게 될 수호자에 대해 알려줄게요.”

불특정 다수의 괴수를 유인해서 ‘될 대로 돼라!’였던 기존의 자포자기 같은 방식에서 완전히 탈바꿈했다.

미리 특정 야생괴수를 지목해서 계약을 노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장점이 무궁무진하다.

징그러운 외형을 가졌다면 예비계약자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할애해줄 수 있고, 그래도 ‘죽어도 계약 못 해요!’라고 버틴다면 다른 선택지를 줄 수도 있다.

물론,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저는 몇 종인데요?”

“2종입니다.”

“겨우?!”

미리 안다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다.

만약 계약 후였다면 최이슬은 수호자가 폭주하지 않도록 어떻게든 계약자를 달래기 위해 무진장 노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계약하지 않았다면 얘기가 다르다.

생떼를 부리는 미계약자는 그저 ‘허영심 똘똘 뭉친 철부지 계집’일 뿐이다.

대책반장은 강하게 나갔다.

“싫으면 그냥 서울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하지만 다시 계약할 기회는 영영 오지 않을 거란 것만은 알아두세요.”

“그, 그런…!”

“선택과 책임은 본인 몫입니다.”

미계약자들의 요청과 예약이 폭주상태다.

이번 원정대가 무사히 마무리되면 더 많은 인원을 끌고 올 예정이다. 당연하게도 특공대장이랑 사전합의 같은 건 아직 없었다.

최이슬도 상당히 놀라고 있었다.

겨울과 여름 원정을 거르긴 했지만, 서울에 이렇게 많은 미계약자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탓이다.

그 모두가 의무와 책임을 회피한 채 ‘계약자 코스프레’를 즐기던 여자들이다.

소위 ‘된장녀’라고 불리는 부류다.

하지만 와이츠의 ‘공명정대한 정책’ 탓에 더는 코스프레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게 됐다.

‘너무 갑작스럽다는 건 이해하지만….’

정부의 감독 아래에 미모를 철저히 관리하는 계약자와 미계약자들이랑 달리 ‘된장녀’들의 생활태도는 문란하고 게으른 편이다.

당연히 운동은 꾸준히 안 했고 식이요법도 건성이다. 제법 한다고 해도 하루 18시간을 외모관리에 쏟아붓는 계약자와 미계약자들에 비하면 정말 ‘새 발의 피’다.

그러다가 떨어진 날벼락!

이대로 있다가는 애를 낳거나 땅을 구르게 생겼다.

하지만 급한 마음이랑 달리 하루아침에 몸매와 피부가 완성될 리 없었다. 쉬웠다면 ‘된장녀’ 같은 잉여인간도 없었을 것이다.

미모는 유지도 어렵지만 만들기는 더욱 어려운 법이다.

(다음, 김주하 양은 나와주십시오.)

안내방송으로 카르 4세가 말했다.

괴수의 마음(?)을 이해하는 프로사냥꾼의 눈썰미는 백발백중(百發百中)으로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계약을 성사시키는 중이었다.

이쯤 되니 ‘딴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싫어요! 정말 뭐예요! 남들은 4종이나 5종이랑 이어주면서 어째서 저는 2종인데요! 제가 뭘 잘못했다고 이런 차별대우냐고!”

밖에 있는 사냥꾼이 밀어주는 대로 척척 계약되는 것처럼 보인다.

나도 5종이랑 맞선(?) 해주면 5종 계약자가 될 수 있는데!

이런 생각을 품게 되는 것도 당연했다.

대책반장은 이런 오해가 없도록 미리 설명해주는 ‘교육’이 시급하다는 걸 실감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하루도 안 지나서 특공대장은 아무런 피해 없이 6명이나 뚝딱 해치웠다. 심지어 성적도 믿기지 않을 정도다.

3종 셋, 4종 둘, 5종 하나!

출발 전에 미계약자들의 신체정보를 읽으며 ‘4종 계약자가 한 명이라도 탄생했으면 좋겠는데.’라고 생각했던 최이슬로서는 경악할 수밖에 없는 경이로운 결과였다.

남은 2박 3일 일정?

특공대장은 남은 시간 동안 딸과 놀아줄 계획인 모양이지만, 대책반장으로서는 무릎 꿇고 빌어서라도 최대한 빨리 ‘2차 원정대’를 꾸리고 싶었다.

그래서 할 일이 태산이다.

된장녀에게 일일이 설명할 틈이 없었다.

“싫으시면 안 하셔도 돼요, 김주하 양.”

“사람을 이렇게 고생시켜놓고 그냥 돌아가라고요?!”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이런 설전을 벌이는 시간도 아까웠던 최이슬로서는 짜증이 확 올라왔지만, 그녀는 ‘전직 6종 계약자’라는 이유만으로 대책반 반장이 된 게 아니었다.

살살 달래지는 않았다.

기약 없는 ‘25차 원정대’에 넣어줄 테니 그동안 뱃살이나 빼고 있으라는 폭언을 날려주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딱히 유감은 없다.

삼겹살과 소주로 쌓아올린 저 뱃살과 턱살이 사라진다면 그렇게 노래를 부르는 5종은 무리더라도 3종은 기적적으로 될지도 모른다.

경험에서 우러난 주관적인 판단이었다.

(특공대장님. 죄송하지만 이번에도 넘어가야 할 것 같아요.)

(그런가요? 알겠습니다.)

무일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말투였다.

대략 3시간 전부터 ‘신개념 원정대’로 전 세계를 전율케 하고 있는 프로사냥꾼치고는 참으로 소탈한 태도였다.

야생괴수를 순식간에 무력제압한 후에 ‘죽을래? 계약할래?’라는 양자택일을 강요할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아! 상상이라면 했다.

전부 실패로 끝났을 따름이다.

우선, 수호자에게 ‘제압’이란 부탁은 안 통한다. 상대를 죽이거나 무시하는 극단적인 선택지밖에 없다.

남은 수단은 MID 기술과 사냥꾼.

천신만고 끝에 1종 괴수를 제압해봤지만, 분노로 눈이 뒤집힌 야생괴수는 계약하지 않았다. 아니면 영리하게 계약하는 척하다가 포박이 풀리는 즉시 복수전을 계시했다.

(한무일 특공대장님. 정말로…. 도전하시는 건가요?)

최이슬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담아 질문을 던졌다.

예정되어있던 3종 계약자 둘과 2종 계약자 둘이 거부하면서 남은 건 ‘1차 원정대’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페이 링’만 남았다.

최소한 6종.

대책반장은 그렇게 추측했다.

페이 링보다 한참 못났음에도 5종 계약자가 된 공주님을 보며 대략적인 견적을 뽑아본 것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인물선정을 좀 더 신중하게 했을 텐데….’

검증되지 않은 원정이라서 조심한 경향이 강했다.

덤으로 시간도 촉박했다.

야밤에 무턱대고 전화해서 ‘내일 있을 위험한 원정대에 참가하실래요?’라는 식의 접수신청이 쉬울 리 없었다.

그렇게 새벽까지 사방팔방으로 연락해서 끌어모은 미계약자 중에서 ‘5종 계약자’가 탄생했다는 것 자체가 기적!

제대로 신경 써서 모집하면 어떨까?

대책반장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다만, 총체적인 난관이 남아있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7종이랑 대화하려면 저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정말로 7종인가요?!)

예상하긴 했지만, 중매쟁이(?)에게 직접 들으니 느낌이 확 달랐다.

최이슬은 걱정이 앞섰다.

페이 링이라면 7종도 충분히 계약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카르 4세가 대화라고 주장하는 무력제압이 가능할 때의 얘기다.

그 어떤 나라의 기록을 다 뒤져봐도, 원정대가 유도해서 6종 이상의 계약을 성사시켰다는 얘기는 없었다.

도시를 파괴하러 온 고위괴수가 첫눈에 반해서 수호자가 된 경우뿐이다.

그 유명한 ‘바람의 여왕’ 박선영도 그랬다.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휩쓸고 태평양을 건넌 ‘엘로엘’이 일본에서 ‘오니오프’에게 얻어맞은 화풀이 하려고 한국에 왔다가 미소녀에게 뿅 간 것이다.

‘서울의 영웅’ 파트너 ‘레드군’도 마찬가지.

다혈질 용왕은 단숨에 불태우려던 마을에서 어린 윤소영을 발견하고 신사(紳士)로 전향했다.

『6종부터는 극적인 계약을 원하나?』

이런 농담 같지 않은 농담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실제로, 정말로 아름다운 미계약자를 6종 야생괴수 앞에 대령해봤으나 계약은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호자가 죽어버린 ‘전직 7종 계약자’를 소개해줘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연맹에서조차 ‘마의 벽’이라고 부르는 6종부터는 ‘행운의 여신’이나 ‘운명의 여신’이 도와주지 않으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그 최소자격조건에 합당한 미모를 갖추기도 어렵고.

대신, 계약하기 어려운 만큼 6종 괴수부터 그 강력함도 독보적이다. 세계의 모든 국가가 심심해서 고위계약자들을 특별취급하는 게 아니란 뜻이다.

“어디 보자….”

카르 4세는 레이더로 야생괴수를 선별하기 시작했다.

계약을 거절하는 녀석이 있으면 ‘괴수의 피’를 협찬받을 예정이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럴 기회가 오지 않았던 탓이다.

어쩔 수 없이 희생양을 물색했다.

본스트롱처럼 인류에 패악을 끼치면서도 피가 풍부한 고위괴수.

에쏘드의 ‘매개체’가 될 제물이 필요하다.

‘6종도 아니고 7종을 상대하려면 에쏘드가 있어야 해.’

지금의 에쏘드만으로도 능력을 잘 살리면 어찌어찌 7종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변수가 많고 위험부담도 너무 컸다.

현재, 카르 4세는 혼자가 아니었다.

평화롭게 지내는 야생괴수를 건드리는 걸로 모자라서 믿고 따라와 준 일행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짓은 할 수 없다.

진보(進步)를 위한 도전과 희생?

한무일의 [예감]을 지탱해주는 ‘정의’하고는 맞지 않았다.

굳이 희생한다면 나 혼자.

여기서 죽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도전이 아닌 99% 승률을 위해 ‘용사의 정령’을 물질세계로 끌어올리려는 것이다.

“용사라….”

장래희망(헌병대장)은 아니지만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

그 꿈이 실현되려 하고 있었다.

카르 4세는 포식자처럼 두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그 제물은…, 너로 정했다.’

아메리카 드림워치에 ‘괴수의 이름’이 표시됐다.

인류에 전혀 도움이 안 되면서도 비싼 피를 보유한 괴수였다.

【백혈구울 / 6종 특수】

< [25장-3] 자, 선택의 시간이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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