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04화 (104/287)

< [25장-2] 자, 선택의 시간이다. >

드드득!

공기처럼 베이지 않고 저항감이 상당했다.

카르 4세에게 ‘가더발트’나 ‘앙그류 그랑모리’가 없었다면 멀찍이 튕겨 날아가며 전신타박상은 각오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뒷걸음치는 건 거대한 4종 괴수였다.

무일의 신체가 가볍고 기장도 짧은 탓에 제대로 된 ‘6종 힘’은 전달되지 않았지만, 현재만으로도 이미 인간의 한계는 극단적으로 벗어난 상태였다.

찍, 쫘자작!

에쏘드에 베인 뼈들이 방사형으로 갈라지면서 부스러졌다. 그 균열은 주위에 멀쩡한 뼈까지 맹독처럼 감염되며 본스트롱을 파괴해갔다.

깜짝 놀란 정령은 팔을 포기했다.

잘라버리긴 아깝지만, 가만 놔뒀다가는 여태까지 수집해온 뼈 전부를 잃을 판이라 달리 선택권이 없었다.

그걸 보며 카르 4세는 ‘역시 에쏘드!’란 생각이 절로 들었다.

“특수능력의 천적(天敵)인가.”

본스트롱이 우왕좌왕하는 틈에 아래로 파고든 카르발트는 딱 봐도 튼튼할 것 같은 두꺼운 다리를 검면(劍面)으로 후려쳤다.

일반적인 카르세리안 레이소였으면 100% 부러졌을 것이다.

하지만 생긴 건 이래도 ‘에쏘드’였다.

절대로 부러지거나 상하지 않는 ‘용사의 검’이란 재질보정을 받고 있는 여자친구는 둔기로 내려친 것처럼 본스트롱의 다리를 짓뭉갰다.

그렇다.

이건 뭉갰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기현상이었다.

다리가 파괴된 4종 괴수 본스트롱이 내던져지듯 날아가며 쓰러졌다.

‘저기에 있군.’

피어오르는 흙먼지와 뼈다귀 사이로 파고든 카르 4세는 지체하지 않고 ‘정령의 본체’가 깃든 인간의 두개골을 [예감]으로 찾았다.

역시나 사령탑인 머리부분. 위치상으로 중뇌(中腦)쯤에 자리하고 있었다.

망설이지 않고 여자친구를 던졌다!

본스트롱이 몸을 추스르기도 전에 머리에 ‘쑥!’ 박힌 에쏘드. 그리고 카르 4세는 험하게 다룬다고 칭얼거리는 ‘용사의 정령’을 느긋하게 회수했다.

그 직후,

촤르르륵!

정령이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주던 뼈들이 우르르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더는 형태를 유지 못 할 정도로 뼈들이 잘게 부서졌다.

어떤 적을 만나더라도 꿀리지 않는 에쏘드 효과였다.

특성 무효화!

너무나 싱거운 결말이었지만, 카르발트이기에 가능한 기행이다. 강력한 4종 괴수에게 달려가서 ‘유효타’를 먹이기가 어디 쉽겠는가.

‘에쏘드가 강해졌는데?’

가스레인지 불로 지진 전후(前後)의 차이가 확연하게 느껴졌다.

절삭력은 많이 떨어졌지만….

카르 4세는 겁에 질린 3종 괴수 곰돌프를 뒤로하고 귀환했다.

“세상에….”

최이슬의 입에서는 이 말밖에 안 나왔다.

건물 3층 높이의 ‘뼈로 된 거인’이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무시무시한 4종이 어린아이 손목 비틀 듯 토벌된 것이다.

근미래를 보여준다고?

세상의 모든 남자가 카르 4세 수준이라면 계약자를 포함해서 여성이 설 자리는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끽해야 ‘5종 계약자’부터 조금씩 인정해줄까요?’

하지만 이 수천만 인구가 사는 서울에서 그 정도의 미모를 겸비한 여성은 정말 손으로 꼽아야 할 정도로 희귀하다.

8종 둘, 7종 둘, 6종 셋, 5종은….

이들을 다 합쳐도 스물이 안 됐다.

성매매 선진국이라고 불렸던 전적 덕분에 자연미인 출생률이 극단적으로 높은 대한민국이 이 정도다.

하물며 다른 나라들은….

(최이슬 반장님.)

(네!)

(괴수가 돌아봐 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앞으로는 미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계약을 주선할 때입니다.)

(그게 가능할 리가….)

(제 개인적인 기준을 적용하겠습니다. 우선은... 4종 계약자 하나. 빠르면 10년 이내에 세상의 모든 원정대는 이런 식으로 바뀔 겁니다.)

손목시계 ‘아메리카 드림워치’의 레이더를 작동시켰다.

한국과 미국의 인공위성과 연동하여 서울 인근에 있는 4종 괴수를 걸러냈다. 허공에 뜬 지도홀로그램 우측에는 괴수의 이름까지 쫙 나열되어 있다.

역시나 괴수밀집지역에 몰려 있는 4종.

하지만 이런 거추장스러운 호버크라프트를 호위하면서 그 안쪽까지 들어갔다가 무사히 나오는 건 카르 4세로서도 무리였다.

지역을 좁히고 괴수도 분류했다.

상대적으로 덜 위험한 곳에 서식하면서도 인류에게 유익한 4종 괴수.

“...이 녀석이 좋겠네.”

뷔페에서 음식을 선별하듯 괜찮은 괴수를 고른 프로사냥꾼은 운전기사에게 대충 위치를 알려줬다.

정말 대충이었으나 문세웅은 그 부족한 설명을 감으로 끼워 맞췄다.

아름다운 보물들을 노리는 야생괴수들이 계속 따라오고는 있었다. 하지만 함부로 덤벼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카르 4세의 [업보]는 독보적인 까닭이다.

고위괴수들이 죽음에 이르기 직전이나 직후에 품고 있던 원망, 공포, 절망, 경악, 혼란 등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카르 4세가 괴수였다면 진즉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뒤쫓아오는 건 ‘털 없는 원숭이’에 대한 편견이 매우 컸다.

(선배님. 전방에 놈이 있습니다.)

(찾느라 수고했다.)

카르 4세는 몸을 돌려 뒤편을 봤다.

미련을 못 버리고 쫓아온 2종, 3종 괴수가 아주 먼 거리에서 이곳을 주시하고 있었다.

...죽일까?

전 세계에 단 하나뿐인 6급 사냥꾼이 그런 마음을 품자마자 하위괴수들은 보물이고 뭐고 줄행랑쳤다.

수호자가 아닌 야생괴수에게는 아직 일면식도 없는 아름다운 공주를 얻고자 목숨을 도외시할 만큼의 각오가 부족한 탓이다.

덤벼봐야 개죽음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변화를 사람의 육안(肉眼)으로 파악하기란 불가능. 그래서 눈치챈 사람은 정말 극소수였다.

인공위성으로 ‘카르발트’를 항시 세밀하게 관찰 중인 정보요원 정도?

그들만이 그 미세한 변화를 눈치채고 전율했다.

『괴수가 도망친다고?』

카르 4세가 가더발트를 얻은 이후부터 쭉 지금과 비슷한 상황은 부지기수였지만, 그때는 늘 혼자 돌아다니는 약한 괴수 한에서였다.

이처럼 많은 야생괴수가 한꺼번에 줄행랑치진 않았다.

그야말로 고위괴수나 다름없는 패기(覇氣)!

이건 ‘뱀페스트를 지배하는 사냥꾼’인 노블레스하고는 완전히 상반된 결과라서 그 의미가 더욱 각별했다.

노블레스는 야생괴수를 쫓아내지 못한다.

시험 삼아 ‘여성의 피’를 무한정 빨게 해서 ‘뱀페스트 공작’이라고 불리는 영역까지 끌어올려 봤지만 허사였다.

능력의 유지시간이 극단적으로 짧고 소모되는 ‘아름다운 여성’ 숫자도 터무니없이 많다는 건 부차적인 이유였다.

단지 그뿐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그렇게 한 번이라도 ‘여성의 피’를 많이 흡수한 노블레스는 무조건 몸을 사려야 했다.

지나치게 쌓인 [업보] 탓이다.

『괴수의 피를 정화한다.』

특수체질은 결과론일 뿐이다.

괴수는 ‘과정’을 본다. 그리고 뱀페스트와 노블레스의 결정적인 차이가 오해와 불행을 초래했다.

노블레스는 시간이 흐를수록 능력이 떨어진다.

흡혈해온 총량은 ‘뱀페스트 귀족’에 버금가는데 피가 정화되면서 실질적인 능력은 ‘뱀페스트 서민’인 것이다.

하지만 괴수는 그런 속사정까지 신경 써주지 않는다.

간단히 [업보]를 확인하고 ‘도발하는 원숭이’를 제거할 뿐이다.

약하니 봐줘?

괴수는 그런 자비가 없다. 이유가 어떻든 먹잇감이 ‘약할 때’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사냥의 정석 아니겠는가.

이 때문에 ‘노블레스 양산계획’은 주춤하는 중이다.

『노블레스는 괴수를 도발한다!』

전부 그런 건 아니고 여성의 피를 많이 빤 일부가 그랬지만 시간문제였다.

이 때문에 유럽의 4대 강국에 속하는 스페인의 대도시 ‘바르셀로나’의 중앙 번화가가 최근에 완전히 초토화됐다.

멀찍이 날아가던 고위괴수가 갑자기 비행궤도를 꺾더니 스페인 계약자들이 대응할 새도 없이 습격해온 탓이다.

괴수의 목적은 번화가에 살던 ‘노블레스’였다.

국가의 요청으로 후손 생산에 여념 없던 남녀가 비명횡사했고, 복수하겠다며 나선 노블레스들과 고위괴수가 치고받고 싸우는 바람에 도시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결과적으로 막긴 막았다.

아직 공정단계인 ‘MID 신무기’가 부실해서 결정적인 한 방을 못 먹일 뿐이지 노블레스의 능력은 기대 이상을 보여줬다.

그렇다고 [업보]가 해결된 건 아니었다.

야생괴수들이 외곽부터 차례차례 공격해오지 않고 곧장 중심지에 냅다 들이박으면 정말 답이 없다.

그때부터는 막아도 막은 게 아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네? 어머!”

안정을 위해 5분쯤 휴식을 취한 카르발트는 비슷한 체구의 미계약자를 왼팔만으로 엉덩이를 받쳐 들었다.

정찬호가 통신을 연결해서 ‘갑자기 숙녀에게 무슨 짓이야!’라는 맹비난을 날렸지만 대꾸해주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짐짝 든 기분이다.

카르 4세는 그녀를 안은 채 호버크라프트 밖으로 사뿐히 뛰어내렸다.

찢어지는 미녀의 비명은 무시하고 습격하는 기세로 돌진했다.

목표는 당연히 4종 괴수.

약한 상대였으나 그렇다고 느긋하게 여유 부릴 틈은 없었다.

힐끔거리던 야생괴수들을 쫓아내긴 했지만, 오래 자리를 비우면 슬금슬금 돌아와서 호버크라프트를 기습할 것이다.

금서희와 까까오를 맹신하는 건 좋지 않다.

무일은 전방에 버티고 선 거대한 야생괴수를 올려다봤다.

【맘모슨 / 4종 대형】

그저 지나가는 것만으로도 4차선 도로가 생긴다고 불리는 초대형 코끼리로, 신기할 정도로 온순하고 신사적인 괴수로도 유명하다.

간단히 말해, 고속도로를 내는 데 아주 유익한 괴수다.

온몸에 다양한 식물형 괴수가 뿌리를 내린 채 기생하고 다리가 6개, 그리고 코보다 길고 튼튼한 꼬리를 가졌다는 게 특징이다.

하지만 어떻게 생겼든 저 거대한 덩치가 가장 큰 특징이자 무기일 것이다.

그저 상대가 나빴을 뿐이다.

“뿌우우우?!”

생쥐에 놀라서 자빠지는 코끼리가 이럴까.

채찍처럼 휘둘러진 코를 밟고 맘모슨 머리까지 도달한 무일은 튼튼한 신발 ‘모리엔탈 크레쉬’로 이마를 냅다 깠다.

뇌진탕이 있었는지 그대로 6개의 다리가 전부 접히며 거대한 코끼리가 모로 쓰러졌다.

재생속도가 경이로운 괴수답게 금방 깨어나긴 했지만, 움직이지 못했다.

눈 아래의 뺨을 밟고 있는 ‘무시무시한 원숭이’ 탓이다.

“역시, 소문처럼 온순한 괴수네.”

먼저 공격한 점은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가벼운(?) 발길질로 제압하지 않았던가.

카르 4세는 오들오들 떨고 있는 아가씨를 내려놓았다.

생채기 하나 안 생겼지만, 괴수보다 빠른 인간의 품에 매달린 채 공중제비를 몇 번이나 했으나 당연했다.

미리 화장실에서 물을 빼지 않았다면 대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괴수도 떨고 공주도 떤다.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됐다고 생각한다.

‘계약해. 계약하는 게 좋을걸.’

카르 4세는 평화적인 눈빛 대화를 시도했다.

맘모슨의 커다란 눈동자가 몇 번 깜빡이더니 ‘겁에 질린 공주님’을 지그시 쳐다봤다.

찰나 동안 정신교류가 발생했다.

금방 끊겼지만, 괴수가 원하는 답을 얻기에는 충분했다.

어째서 ‘무시무시한 원숭이’에게 억지로 붙들려있는지 그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동정심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생긴 건 기대치에 살짝 못 미쳤으나 그래도 구해주고 싶었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맘모슨은 다시 정신을 이었다.

앞으로 쭉 함께할 ‘아름다운 보물’이 사는 세계의 문화와 언어, 지식 등을 순식간에 습득하고 대화를 시도했다.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마음을 전하기에는 충분했다.

눈을 크게 뜬 공주님이 육성으로 말했다.

“저…. 계약된 것 같아요.”

고개를 끄덕인 무일은 그녀를 놔둔 채 밟고 있던 맘모슨에서 뛰어내렸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초조해 하는 공주님을 받아준 건 ‘수호자 맘모슨’의 거대한 코였다.

미녀의 잘록한 허리를 감았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두꺼운 코였다.

그렇게,

계약자가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은 수호자는 옆으로 쓰러진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코를 이용해서 자신의 보물을 등에 태웠다.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본 카르 4세가 말했다.

“계약하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아, 네.”

비명을 지른 것밖에 기억 안 나는 미녀의 얼굴이 사르르 붉어졌다.

부끄러워하는 계약자의 열을 식혀줄 의도인지 수호자 맘모슨의 커다란 귀가 팔랑거리며 부채질해줬다.

그야말로 신사!

카르 4세는 혼자 돌아가기 직전에 말했다.

“멀찍이 떨어져서 일행을 쫓아오시면 됩니다. 점심 도시락은 제가 챙겨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덥더라도 참아주십시오. 지금은 계약을 굳건히 해야 할 시기니까요.”

“네!”

바짝 굳은 ‘4종 계약자’는 불평불만 없이 즉답했다.

그 모습이 애처로웠던지 맘모슨이 ‘무시무시한 원숭이’를 향해 빨리 가라는 듯이 긴 코끝을 휙휙 앞뒤로 흔들었다.

아름다운 공주님과 서울을 지키는 ‘수호자’가 된 자신을 공격하지 않을 거란 확신을 근거로 한 당당함이 엿보였다.

...지식습득속도가 무섭군.

계약자의 허영심에 살짝 물든 것 같다.

반대로 수호자의 온순한 성품은 그녀를 요조숙녀로 바꿔놓은 것 같다.

(반장님.)

(......)

(최이슬 대책반장님! 듣고 계십니까?)

(네? 저요? 뭐라고 하셨죠?)

너무나 황당무계한 계약방식에 침까지 흘리며 정신 줄을 반쯤 놓고 있던 대책반장 최이슬이 허둥거리며 대답했다.

멀리서 보면 괴수를 쓰러트리고 협박하는 것처럼 보였던 탓이다.

일단, 야생괴수를 죽이지 않고 굴복시켰다는 첫 과정부터가 상식파괴였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모든 나라에서 실패했던 방식이다.

괴수에게 ‘항복’이란 없었기 때문이다.

< [25장-2] 자, 선택의 시간이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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