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장-1] 자, 선택의 시간이다. >
파르나르 장편소설
괴수처럼 13
[25장] 자, 선택의 시간이다.
학명: 본스트롱(어마어마한 뼈)
서식지: 무덤
특징: 뼈다귀가 멋대로 움직여요!
위험도: 4종 특수
비고: 뼛가루가 될 때까지….
***
괴수에 대해 잘 모르는 미계약자들은 ‘몇 종’이냐는 거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한다.
가령, 이런 식이다.
『숫자가 높을수록 좋은 거죠?』
하지만 이건 잘못된 편견이다.
끔찍했던 4차 세계대전 당시에 인류는 ‘괴수의 무력’을 측정하기보다는 ‘괴수의 위험’에 초점을 뒀다.
강하더라도 상대하기 쉬운 괴수에게는 ‘1종’을 붙이고 상대적으로 약하더라도 인류에게 위협적인 괴수에게는 최대 ‘9종’을 달았다.
즉, 인간이 정한 등급이다.
RPG 게임에서 흔히 쓰이는 ‘2레벨보다는 3레벨이 강해!’라는 공식이 항상 맞지는 않고 때로는 완전히 틀리는 경우도 제법 허다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흡혈귀다.
【뱀페스트 / 2종 특수】
숙주를 구하기 전에는 정말 약하디약한 거머리다. 심지어 구하더라도 ‘민간인’보다 나을 게 전혀 없는 진짜 ‘0종’ 조무래기다.
하지만 ‘여성의 피’를 빨면서 달라진다.
뱀페스트는 흡혈(吸血)을 통해 강해지기 때문이다.
체내에 ‘괴수의 피’ 농도가 짙어질수록 재생력과 전투력, 지배력, 번식력이 올라가고 최종적으로 ‘5종’이라 불리기에 손색없는 괴수까지 성장한다.
그럼에도 ‘2종’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그건 모든 뱀페스트가 인류에게 위협적일 정도로 성장하지 않는 까닭이다. 소위 귀족이라고 불리는 극소수만 여기에 도달한다.
나머지는 진짜 조무래기.
1급 사냥꾼도 쓰러트릴 수 있는 피라미다.
하지만 성장한다는 ‘특수성’ 때문에 ‘2종 특수’인 것이다. 그리고 성장에 한술 더 떠서 진화까지 한다.
【백혈구울 / 6종 특수】
뱀페스트의 치명적인 약점인 ‘심장’이 사라지면서 ‘죽음의 기사’라고도 불리는 ‘불사의 괴수’로 다시 태어난다.
더는 뱀페스트가 아니다.
완전히 다른 ‘별개 종’으로 변한다. 당연히 왕의 지배도 받지 않고 ‘5종’에서 끝나는 능력의 한계도 뛰어넘는다.
거기에 한 가지 특성만은 그대로 유지된다.
흡혈.
그래서 백혈구울도 ‘6종 특수’다.
이론상으로는 끊임없이 강해져서 순수한 무력의 정점인 ‘8종’에 도달할 수 있다고 전해지지만, 거기까지 간 백혈구울은 여태 없었다.
그래도 뱀페스트보다 좋잖아?
심장이 없어지면서 산소공급이 끊긴 뇌가 퇴화해버린 백혈구울의 사고능력은 숙주에게 미안할 정도로 절망적인 수준이다.
뱀페스트 귀족들이 ‘불명예’로 취급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일단 백혈구울이 되면 왕족이고 귀족이고 없다. 그냥 본능대로 움직이는 살인마귀(殺人魔鬼)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까지 어찌어찌 이해한 미계약자들은 또 묻는다.
『왕은 좋은가요?』
꿈은 장대할수록 좋은 법이다.
미계약자라면 누구나 ‘9종 계약자’를 꿈꾼다.
가장 높은 숫자!
...설명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알 수 없는 질문이다. 하지만 정답부터 말하자면 ‘정말 좋아요!’라고 할 수 있다.
거의 모든 괴수가 단독행동을 한다.
만약 괴수들이 뭉쳐서 협공했다면 계약자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위협을 주는 괴수가 바로 ‘9종’이다.
무리를 통솔하는 지도자가 ‘있는 괴수’와 ‘없는 괴수’의 위험성은 하늘과 땅만큼 그 차이가 매우 크다.
괴수 위에 군림하여 통솔하는 괴수!
【문팽이 / 9종 대형】
【오니오프 / 9종 소형】
【이즈헬 / 9종 특수】
동족 혹은 동류랑 차별된 개별적인 종(種)으로서 선택받은 왕족이다.
하지만 이렇게 강력한 ‘타고난 왕’만 있는 건 아니다. 신하보다 나을 게 없는 평범한 ‘서민적인 왕’도 있다.
감투 빼면 별거 없다는 뜻이다.
【뱀페스트 / 2종 특수】
【나무무 / 5종 대형】
【바다사슴 / 4종 보통】
이런 ‘서민적인 왕’은 약해빠진 대신 서민(?)들에 대한 지배력도 매우 강하다. 서민적인 왕이 인기 많다는 전래동화처럼.
죽음도 명령할 수 있을 만큼 절대적이다.
그에 반해, 종부터 다른 ‘타고난 왕’은 절대적인 충성을 강요할 수 없다. 그리고 동족 전체를 지배 아래에 둘 수도 없다.
각자 장단점이 있다.
그래도 굳이 선택하라면 ‘타고난 왕’이 좋을 것이다.
혼자서는 빌빌거리는 ‘평범한 왕’은 훌륭한 안보대책이 될 수 없을뿐더러 필연적으로 도시가 괴수들로 바글바글하게 변한다.
당연히 살인사건이 끊이지 않으리란 건 자명하다.
지금의 서울처럼.
페이 링을 포함한 11명의 미계약자에게 ‘마지막 문장’을 빼고 설명을 마친 최이슬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은 땀방울을 닦았다.
“얼마나 이해했을지….”
오랜 경험을 쌓은 대책반장은 별 기대 안 했다.
남녀의 성향 차이인지, 목숨이 걸렸기 때문인지 사냥꾼들은 금방 이해하지만, 미계약자와 계약자들은 몇 번을 반복해서 말해줘도 모른다.
숫자만 높으면 장땡!
백화점에서 ‘비싼 명품’을 샀다고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랑 매우 흡사했다.
‘의욕이 충만하니 괜찮겠죠.’
복잡하게 생각해봐야 이마에 주름이 생길 뿐이다.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그건 치명타!
그럼에도 대책반장이 굳이 미계약자들에게 ‘제대로 듣지도 않는 교육’을 고집스럽게 하는 이유는 나중을 위해서다.
실망하지 말라고.
기대치에 못 미치는 하위괴수와 계약하게 되더라도 낙심하지 말라는 떡밥이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이 수호자를 자극하고 꼭 사고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 사고에 휩쓸린 희생자는 늘 사냥꾼들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철없는 계약자’ 대신 죽어줄 사냥꾼도 없다. 그 대신, 주위에 무고한 미계약자 혹은 계약자가 휩쓸릴 게 뻔하다.
(반장님.)
(네. 대장님.)
(슬슬 밖으로 아가씨들을 내보내는 게 어떻습니까.)
(흠. 그래야겠죠.)
최이슬은 불안했지만, 이제 달리 방도가 없었다.
대책반에서 지원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했고 이젠 행운의 여신이 도와주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모든 괴수가 ‘순결한 자연미인’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정정한다.
좋아하긴 하는데 그 방식이 인간의 상식을 벗어난 괴수가 생각보다 많다.
인간마다 연애의 철학과 성벽 등이 다른 것처럼 괴수가 공주를 사랑하는 취향과 표현, 취급도 가지각색이다.
질투는 애교다.
영원히 독점하기 위해 계약자를 죽이는 녀석도 간혹 있다!
“추, 추워!”
“정말로 올까요?”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서행하는 호버크라프트 지붕으로 미계약자들이 올라왔다.
파괴된 아파트와 시설물 잔해가 100년 전의 참극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현실 세계에서 그녀들이 느끼는 감상이란 이 정도였다.
무턱대고 올라온 건 아니다.
뱃속에 든 물을 화장실에서 최대한 빼고 왔다.
절세가인만큼이나 아름답고 우아한 괴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팬티를 적실만큼 ‘괴수답게’ 생겼다.
2급 사냥꾼쯤 되면 친숙해지고….
프로사냥꾼은 하루라도 안 보면 마음이 허전해진다.
“저희를 주시하는 괴수는 현재 일곱 마리입니다. 방금 여덟 마리.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고…. 놈들이 달려들더라도 절대 난간에서 손을 떼지 마십시오.”
보물이 하나라면 눈에 잘 안 뛰지만, 보물이 쌓여있으면 얘기가 다르다.
도시에서 즐겨 입던 화려한 의상 대신 청순가련하게 꾸민 미계약자들은 카르 4세의 시선마저 잡아끌었다.
한둘이면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여럿이 옹기종기 모여있으니 만발한 꽃밭을 연상케 했다.
서로가 후광(後光)이 되어주며 시너지효과를 일으키는 것이다.
‘페이 링은 정말 예쁜 축이었구나!’
카르 4세는 살짝 감탄했다.
내 노예라서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그랬다.
그가 그렇게 느꼈다면 괴수들도 비슷한 감상을 품고 있을 것이다.
사냥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계약자들은 태평했지만, 저 멀리서는 야생괴수들끼리 치열한 견제와 사투가 벌어지고 있다.
계속 놔두면 이 지역 자체가 위험해질 것이다. 거기에 휩쓸리면 카르발트는 몰라도 호버크라프트와 승객들은 버틸 수 없다.
못 가질 바에 파괴한다!
서울을 공격하는 수많은 야생괴수가 이런 마인드다.
하지만 그런 비극이 없도록 시기를 조절하는 거야말로 ‘대책반’에서 할 일이다.
(3종 대형, 곰돌프. 한강 물줄기를 타고 숨어드는 야생괴수를 차단해주는 아주 고마운 수호자죠. 문제는 4종 특수, 본스트롱. 녀석을 따돌려야 하는데요.)
레이더로 확인한 최이슬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원래는 조를 나눠서 두 야생괴수를 때어놓아야 한다.
코에서 수시로 불을 뿜는 곰, 곰돌프는 인류에 유익하기에 계약을 유도하고, 인간의 뼈를 즐겨 수집하는 정령, 본스트롱은 제거한다.
그 둘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다.
이게 일반적인 ‘원정대’의 방식으로 모든 나라에서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쓸 수 있는 패는 ‘6급 사냥꾼’ 딸랑 한 명.
그 프로사냥꾼이 말했다.
(...반장님. 수호자 기대치를 조금 더 높게 잡는 게 어떻습니까.)
(네? 하지만 욕심은 좋지 않아요.)
(어차피 3종 이하의 계약자는 곧 쓸모없게 됩니다. 세상이 그렇게 변하고 있습니다. 힘들게 계약을 유지할 바에 평범한 여자로 사는 편이 좋습니다.)
(그건….)
대책반 반장 최이슬도 올해 최대의 이슈인 ‘남성혁명’에 대해 들었다.
남성이 뱀페스트를 지배하는 기술 개발!
이미 연구와 임상시험은 끝났고 일부 강대국들은 실전배치 중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자격조건인 ‘특수체질’이 양산되기까지 걸리는 기간은 20년 안팎.
총기의 보급으로 기사계급이 몰락했듯이….
위험부담만 크고 ‘약한’ 하위계약자는 필요 없는 세상이 오고 있다.
(정말 괜찮은 괴수가 보이면 알려주십시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준비는 제가 했지만, 현장은 특공대장님이 전문가이시니 믿고 맡기겠습니다)
(그 믿음에 보답해드리기 위해서 제가 근미래를 조금만 보여드리겠습니다.)
(네?)
카르 4세는 호버크라프트 망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강대국들이 추구하는 뱀페스트의 힘은 아니지만, 그보다 훨씬 강력하고 제약도 적은 가더발트가 온몸을 감쌌다.
새롭게 등장한 ‘흡혈귀를 지배하는 사냥꾼’은 나라마다 부르는 호칭이 달랐지만, 하나같이 허무맹랑한 것들뿐이었다.
중국을 예로 들자면?
절정고수!
다른 나라들도 별 차이 없다.
하지만 점점 제멋대로 불리기 시작하면서 괴수대응연맹은 ‘괴수의 이름’처럼 하나로 통합했다.
『노블레스(Noblesse)』
뱀페스트의 광기(괴수의 피)를 억제할 수 있는 특수체질은 고귀한 혈통인 ‘귀족(貴族)’이나 다름없다는 데 기인했다.
거기서 따온 명칭.
그만큼 혁신적이고 대단한 능력이란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말이다….
겨우 ‘1종’ 괴수의 힘으로 그렇게 불린다면 순수한 근력만 ‘6종’에 버금가는 카르발트는 뭐라고 정의해야 좋을까.
딸그락! 끼긱!
온갖 동물과 괴수의 뼈로 거대한 인간의 형태를 구축한 괴수, 본스트롱.
가장 좋아하는 뼈가 ‘인간의 뼈’이기에 인간을 죽이는 행위 또한 고민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인류에 해가 되는 괴수’다.
정령이기에 박멸시킬 수도 없다.
대신에 등장조건도 까다로워서 흔한 괴수는 아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최근 얘기고, 인간의 시체가 산을 이뤘던 4차 세계대전 당시와 직후에는 ‘시체를 조종하는 정령’ 데빙걸이랑 함께 아주 흔했던 정령이다.
본스트롱 일부가 되는 순간 평범한 뼈가 아니다.
강철보다 단단하고 범용성도 상당해진다.
거대한 몸체를 작게 분리해서 따로 움직일 수도 있고 날카로운 갈비뼈 등으로 온몸을 고슴도치처럼 보호할 수도 있다.
기껏 수집한 뼈를 던지는 ‘소모행위’ 빼고는 다 한다고 보면 된다.
괴수다운 고집이다.
“빨리 끝내자.”
피가 없는 뼈다귀라서 아쉽지만, 기회는 또 오리라.
카르 4세는 단단한 칼집 대신 얇디얇은 연약한 여자친구를 뽑아들었다.
‘얼마나 안 잘리는지 확인해볼까.’
어떤 괴수의 손톱이었던 날카로운 뼈들이 바짝 세워진 본스트롱의 거대한 팔이 덤벼들었다.
하위 종의 뼈로 이루어진 부위는 상대적으로 약하지만, 고위괴수의 시체에서 슬쩍(?) 해온 뼈는 정말 튼튼하다.
평소의 카르 4세라면 [반격]했을 것이다.
빗겨가듯 피하며 더욱 깊게 파고들어 ‘정령의 본체’가 깃들어있다고 [예감]한 부위를 파괴하는 수를 썼으리라.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카르세리안 레이소가 아닌 ‘에쏘드’의 절삭력을 시험해보기 위해 맞상대해줬다.
올곧게 수직으로 내리그었다.
< [25장-1] 자, 선택의 시간이다.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