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4] 수호자를 찾습니다. >
서울은 현재 혼란의 도가니탕이다.
과중에 세금과 집세 등을 감당하려면 남자들은 거의 무조건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냥꾼’이 되는 길밖에 없었다.
형평성에 어긋난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사냥꾼’들에게만 시행되던 ‘쥐어짜기 법안’이 ‘남성’ 전체로 돌아간 것뿐인 까닭이다.
세금을 못 내면?
유예기간, 예외 없이 바로 추방이다.
자연히 음지에 숨어있던 뱀페스트도 끌려 나왔다. 신체검사를 통해 ‘은색 피’가 검출되며 곧바로 사형!
먼저 자진해서 신고하면 ‘의무복무’를 조건으로 선처를 베푼다는 모양이지만, 가축인 인간의 지배를 받아들이는 흡혈귀가 있을 리 없다.
이건 ‘징병(徵兵)의 탈을 쓴 감찰(監察)’이나 다름없었다.
세금폭탄을 피해갈 수 있는 뱀페스트는 극히 한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자이거나, 사냥꾼이거나….
서울에서 거머리를 몰아내겠다는 와이츠의 의지가 뚜렷했다.
『여성은?』
이쪽은 더 심각하면 심각했지 조용하진 않았다.
게임만 하느라 햇볕을 오랫동안 안 쇤 탓에 피부가 새하얗게 변한 여성들이 길거리를 배회하며 애타게 남성을 찾는 모습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다.
밤에 순찰하던 경비대원이 여성들에게 납치되어 ‘정자’를 탈탈 털렸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떠돌고 있다.
그 때문에 사냥꾼들이 몸을 사리고 있다는 실정이다.
많은 여인이 봉사해주니 행복?
뱀페스트 번식법은 생식기 감염이다.
길거리에서 만난 검증 안 된 여성이 ‘보균자’라면 성관계를 갖는 즉시 육체를 빼앗기고 숙주로 전락하는 것도 순식간이다.
웬만한 사냥꾼은 [예감]으로 이 ‘위기’를 피해간다.
하지만 ‘납치’되면 정말 답이 없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여성들의 자궁에 잠복해있는 뱀페스트를 추출하는 수술을 무상으로 해주는 정책도 겸하기 시작했다.
목적은?
『거머리 채집』
그 용도는 뻔하다. 뱀페스트를 지배하는 연구에 쓰일 것이다.
덤으로 흡혈귀 숫자를 줄여보겠다는 의도다.
게임이 아닌 현실의 몸뚱이에 무관심했던 여인들은 깜짝 놀랐고, 임신이 아닌 청결을 위해서라도 조사받으러 병원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게 됐다.
물론, 안 그런 여성도 있다.
남성혐오자도 있고 와이츠의 정책을 불만을 품은 채 무작정 버티는 부류도 있다. 심지어 지능적으로 은신처를 만들고 숨을 준비까지….
전부 부질없다.
뱀페스트 귀족이 그러도록 명령했든 아니든 늦가을쯤에 ‘사망률 높은 개성시’로 보내지는 건 기정사실이다.
버틴다고?
게임을 너무 오랫동안 해서 현실이 얼마나 무서운지 잊은 게 분명하다.
숨는다고?
서울 전체에 초음파를 쏴서 ‘배가 홀쭉한 여성’을 찾아내는 건 일도 아니다.
『인간 vs 흡혈귀』
강압적으로 도시인구를 늘리고 열성유전자를 걸러내는 악랄한 정책처럼 보이지만, 깊게 파고들면 치열한 종족전쟁이다.
선유나가 인질인데 무리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이 정도 도발은 괜찮다고 판단했거나 무언가 대비책이 있다는 뜻이다.
뭐가 됐든 카르 4세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반장님께서 직접 가시는 겁니까?”
“네. 잘 부탁해요, 대장님.”
본부에서 가까운 여의도 기슭에 정박해있는 호버크라프트에는 대책반 반장 최이슬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최은비가 거리낌 없이 ‘찬호 오빠’라고 불러줄 때부터 싱글벙글하던 정찬호는 최이슬을 보고는 ‘남자로 태어나서 행복!’이란 표정이 됐다.
최이슬은 그만큼 대단한 미인이었다.
현재는 애 여럿 딸린 아줌마지만, 과거에 6종 계약자였다는 전적을 달고 있는 여인의 미모는 발군이었다.
하지만 무일의 눈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본인이 생각해도 이상할 정도로.
분명 대책반 반장 최이슬은 아름답고 현명한 여인이다. 하지만 어째선지 매력적이란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내 취향이 아니라서?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냄새인가?’
최이슬의 몸에서는 ‘꺼려진다.’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수컷’ 냄새가 물씬 풍겼다. 하지만 후각으로 느끼는 정보는 아니었다.
이건 남의 손에 찌든 골동품을 쉬쉬하고 싶은 기분이랑 흡사했다.
간단히 말해 ‘임자 있는 유부녀(有夫女)’란 뜻이다.
무일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페이 링이 있다.
그녀에게서는 상큼한 향기가 물씬 났다. 그건 암컷의 페로몬 같으면서도, 오감이 아닌 [예감]으로 판단하는 본능에 가까웠다.
『아무도 손대지 않는 처녀다.』
그 정보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원리는 알 수 없지만 [예측]보다도 더 객관적인 사실이 자동으로 머릿속에 입력된다.
방금까지는 몰랐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페이 링의 매력은, 상당한 매력의 소유자인 최이슬과 비교되면서 그 차이를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분명, 사냥꾼들도 까다로운 편이다.
본능으로 아름다운 유전인자를 보유한 자연미인을 찾아가고, 다른 수컷이 조금도 건드리지 않은 처녀를 선호한다.
하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다.
괴수처럼 ‘여성의 가치’를 극단적으로 계산하진 않는다.
“주인님. 빤히 쳐다보면 부끄러워요.”
“...오늘따라 더 예쁘네.”
“그, 그런가요!”
무척이나 기뻐 보이는 페이 링이 온몸을 꼬며 부끄러움을 표시했다.
카르 4세는 어떤 의도를 갖고 내뱉은 말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최이슬이랑 비교되면서 페이 링의 ‘순결’이 평소보다 더욱 두드러진 매력으로 비쳤을 뿐이다.
...뱀페스트 영향인가?
대책반 관계자가 인솔해온 열 명의 미계약자들을 본 무일은 자신의 [예측]이 정확했음을 알 수 있었다.
겉보기에는 최이슬보다 매력이 한참 떨어졌다.
6종 계약자였던 최이슬에 버금가는 미인이 흔치 않다는 것도 이유지만, 미계약자들의 복장과 표정에 깔린 허영심은 눈 뜨고 못 봐줄 수준이었던 탓이다.
그럼에도 최종평가는,
『최이슬보다 낫다!』
처녀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결과가 뒤집혔다.
그야말로 괴수 같은 심사기준이었다.
카르 4세는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동정이 숫처녀만 고집해서 어쩌자고?
그뿐이라면 차라리 다행이다. 선지혜의 핀잔처럼 다 차려진 밥상도 못 먹고 눈요기만 할 것 같다는 불길함이 엄습했다.
사랑과 순결은 지키기 위해!
연인(戀人)이 매력적으로 안 보인다면 사랑도 없다. 그러니 계속 사랑하기 위해서는 욕망을 포기해야 한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선배님. 표정이 안 좋으십니다.”
“괜찮으세요?”
문세웅과 장혜린이 차례로 말을 걸어왔다.
천박하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잉꼬부부처럼 다정하게 팔짱 끼고 있는 둘을 떼어주고 싶다는 기분도 안 들었다.
카르 4세의 눈에 비친 장혜린은 매력적인 여성이 아닌 탓이다.
분명,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는 ‘조성미보다 훨씬 낫네.’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다시 본 장혜린은 이 자리에 모인 여성 중에서 ‘최하(最下)’였다.
이건 괴수의 심미안(審美眼)이다.
무일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간신히 쥐어짰다.
“둘이 잘 어울리는데?”
후배가 아깝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괴수가 아닌 인간의 기준으로 본다면 둘은 분명 잘 어울리는 커플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예측]이었다.
문세웅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선배님. 국어책 읽는 것 같습니다.”
“...그러냐.”
“졸지 않고 운전 잘할 테니 맡겨주세요!”
문세웅도 [예측]과 [예감]을 익힌 사냥꾼이다.
말의 진심쯤은 분간할 수 있다.
하지만 선배의 ‘영혼 없는 칭찬’을 ‘공사를 혼동했다.’는 꾸지람 정도로 해석했다.
그래선지 기분 상한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무일은 오해가 없도록 시간 나면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이상한 심미안에 대해서.
“녀석이 졸지 않도록 장혜린 양이 잘 감시해주십시오.”
“네!”
도착한 순서대로 호버크라프트에 승차하기 시작했다.
자기소개는 이동하면서 하기로 했다. 어제는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니냐고 걱정했던 최이슬이 ‘아침형 괴수를 놓치면 손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카르 4세는 안에 타는 대신 호버크라프트 후미에 사령탑처럼 부착된 망루에 앉았다.
자기소개?
굳이 안 들어가 봐도 된다.
호버크라프트 내부를 비춰주는 간이모니터가 망루에 설치되어있는 덕분이다. 여기서도 얼마든지 내부상황을 보고 들을 수 있다.
그것과 반대로, 말하고 보여주는 것도 가능하다.
(세웅.)
(네.)
(인천 반대방향으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알겠습니다.)
스마트폰으로 금서희에게도 연락했다.
소풍 규모가 무지막지하게 커지는 바람에 호버크라프트로는 약속장소인 강남구 안으로 진입할 수 없는 까닭이다.
갈 수 없으니 부르는 수밖에.
“까아! 까아!”
5종 수호자 까까오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단단한 등껍질 위에 고정된 푹신한 쿠션 위에는 계약자 금서희가 앉아 있었다.
그녀도 자기소개해야 할까?
카르 4세는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정부 소속이 아닌 계약자를 중요한 원정대에 동행시켰다는 걸 트집 잡으면 일만 복잡해지는 까닭이다. 그럴 바에는 착각하도록 놔두는 편이 현명하다.
게다가 계약자는 아주 멀리서 호위하게 되어 있다.
금서희가 일행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서희야.)
(네.)
(우리는 점심시간에 보자.)
그러니 따로 챙겨줄 생각이다.
금서희는 오늘만 도움 주고 곧장 부산으로 돌아갈 예정이지만, 무일은 그녀의 도움보다 만남에 더 의미를 뒀다.
카르 4세에게 이 원정은 어디까지나 ‘가족소풍’이기 때문이다.
과신하지 않고 끊임없이 레이더를 관찰하고 있지만, 난폭해진 괴수를 찾아가는 것도 아닌 원정이 위험해질 가능성은 매우 낮다.
어디까지나 카르발트 기준에서.
(오라버니! 여동생에게 가족여행이라고 해놓고 이러기예요?)
(이게 다 부산과 가족을 위한 길이야.)
(말이라도 못하면….)
계약자가 늘어나면 부산으로 보낼 수 있는 전력도 증가한다.
그 정도는 배움이 얕은 금서희도 알기에 별말 안 했다. 그렇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하지 않은가.
괜히 심술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오라버니의 호언장담처럼 부산은 벌써 난리가 났다.
와이츠의 정책은 부산에도 적용됐으니 큰일이 안 나는 게 더 이상하다. 부산 사람들은 서울이랑 달리 모두가 현실파라 반발도 컸다.
하지만 찍소리 못했다.
어느새 50년 가까이 부산에서 살며 관리해온 6종 계약자 ‘송선영’이 서울로 돌아가고 7종 계약자 ‘고은별’이 파견된 탓이다.
『재해의 천사』
서울의 영웅 ‘윤소영’과 함께 대한민국에 단 둘뿐인 7종 계약자 중 한 명을 칭하지만, 아주 상반된 별명을 갖고 있다.
고은별은 인천을 지키는 계약자였다. 하지만 그 진실은 너무나 위험해서 밖으로 빼둔 사고뭉치라는 게 더 적합하다.
계약자 고은별은 무척 성실하고 착하다.
하지만 수호자가 성격 더럽고 질투도 심하다. 아주 많이!
경고 없이 사살을 미덕으로 삼는 7종 수호자 때문에 ‘접근불가’와 ‘대화불가’를 기본으로 달고 있는 공주님이다.
그래도 본인은 늘 의욕적이다.
다만, 결과가 늘 거기에 한참 못 미칠 뿐이다.
그런데 그 ‘재해의 천사’가 인천에서 부산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하루도 안 지나서 줄초상 치른 가문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여기까지가, 금서희가 전해 들은 고향 상황이었다.
(할 말 있어?)
(...오라버니. 부산이 살기 좋아질까요?)
(더는 나빠질 수 없을 만큼 최악이니 무조건 좋아지겠지.)
(지나치게 낙관적이고 무책임하세요!)
금서희는 스마트폰 스피커뿐만 아니라 육성으로도 들릴 만큼 크게 소리 질렀다.
더 황당한 건 ‘무조건 좋아질 거다.’라는 오라버니의 궤변에 설득된 자신이었다.
무일은 볼을 긁적이며 말했다.
(서희야. 인천을 떠올려봐.)
(인천이 왜요?)
(서울이랑 가까워서 살기 괜찮은 게 결코 아니야. 내가 우리나라 공주님들을 싫어할 수 없는 이유지.)
고은별과 윤소영처럼 훌륭한 계약자가 또 탄생했으면 좋겠다.
카르 4세는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전진하는 그 아가씨들을 볼 때마다 삶의 보람을 느낀다.
그녀들을 뒷받침해주는 게 사냥꾼이 할 일 아닐까!
무일은 신중하게 주위를 경계했다.
여기서부터 서울 밖이기에 언제 어디서 야생괴수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다.
특히, 바닥에 누워있어서 잘 보이지도 않고 레이더에도 안 잡히는 바디엘프 같은 걸 호버크라프트가 박았다가는 바로 귀환해야 한다.
“어디, 언제 오려나.”
지금부터는 괜찮은 야생괴수가 다가와 주길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예비공주가 괴수에게 차이면?
실망할 것 없다.
예비용사가 피를 헌납받을 예정이다.
< [24화-4] 수호자를 찾습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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