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101화 (101/287)

< [24화-3] 수호자를 찾습니다. >

그렇다면 8년째 함께한 여자친구가 ‘에쏘드’란 뜻이다.

축배라도 들어야 할까?

하지만 가장 중요한 ‘증거물’이 빠져서 그럴 수 없다. 이건 간과할 수 없는 아주 심각한 공백이었다.

에쏘드 본체가 없다!

비현실적인 몸매를 과시하던 ‘용사의 정령’은 어디에?

“나오는 조건이 있는 걸까나….”

아니면 단순한 착각일지도 모른다. 오랫동안 애착해온 쇠붙이가 에쏘드이길 바란 끝에 망상으로 치달은 걸까.

하지만 ‘평범한 쇠붙이’가 아니란 것만은 사실이다.

본부 정비과나 기술반에 의뢰해서 조사해본다는 선택지도 있었지만, 그것만은 피했다. 멀쩡한 여자친구가 분해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러니 혼자 고민해볼 수밖에.

『대화! 대화…!』

무슨 대화? 쇳덩이랑 무슨 대화를 하라고?

카르 4세는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자신에게만 들리는 환청이 뭐라고 속삭인다. 그렇다고 뚜렷하게 말하는 것도 아니고 중간중간 내용이 끊긴다.

“알아들을 수 있어야 말이지. 정말로 에쏘드라면 검에서 튀어나와야 할 거 아니냐고.”

대답은 없다.

또 침묵시위에 들어갔다.

페이 링이 씻자마자 최은비 옆에 쓰러지듯 잠드는 것까지 확인한 무일은 손목시계 ‘아메리카 드림워치’를 내려다봤다.

이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라고 판단했다.

입술을 떼며 작게 속삭였다.

(듣고 있는 거 알고 있으니 응답 바랍니다.)

(...말씀하세요. 마이티가이.)

손목에서 유창한 한국말이 흘러나왔다.

이 시계의 원산지는 미국이다. 그리고 미국에서 무언가 장난쳐놨다고 [예감]했지만 여태까지 쭉 가만 놔뒀다.

감시는 익숙하니까.

괴수대응본부 특공대에는 감시카메라 ‘모짜리나 바글버글’은 침투할 수 없지만, 인공위성들은 그가 테라스에 나오자마자 주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손목시계만큼 정밀하고 ‘항상’ 감시할 순 없다.

카르 4세는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찰거머리 괴수만으로도 머리가 과열할 지경이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세계와 서울이 빠르게 급변하면서 그 흐름을 따라잡는 것도 슬슬 벅찼다.

정리가 필요하다.

하나라도 줄여놔야 한다.

【에쏘드 / 1종 특수】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나 그렇다는 얘기고 이미 무수히 많은 나라가 에쏘드를 보유하고 있다. 당연히 미국도 그 많은 나라 중 하나다.

‘선지혜는 안 돼.’

해바라기 같은 그녀를 못 믿는다는 게 아니다.

그러나 말할 수 없다.

계약자와 정신감응 중인 대한민국 와이츠 ‘미카헬로 싸히어’는 서울 상공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부터 쭉 그의 [예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좋지 않다.

세계에서 가장 강한 사냥꾼이라고 불리지만, 8종은 아예 대적불가고 뱀페스트를 지배하는 사냥꾼이 늘면 금세 따라잡힐 허명(虛名)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스스로 살아남을 비책을 마련해두자고.

(보름 전의 전투를 전부 관찰했다는 가정하에 묻지요. 제 검은 에쏘드 맞습니까?)

(맞아요, 마이티가이.)

미국의 대답은 망설임 없이 직구(直球)였다.

덕분에 힘이 쭉 빠졌다.

뭐하러 혼자 고민했나 싶을 만큼 명쾌한 해답이었던 탓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모습을 안 드러내는 겁니까?)

(매개체가 없기 때문이에요.)

(육체, 말씀입니까.)

(네. 용사의 정령이 실체를 가지려면 괴수의 피가 꼭 필요하답니다. 그런데 카르세리안 레이소는 그 매개체를 주식으로 삼고 있죠.)

(아!)

무일의 입에서 탄성이 터지고 말았다.

어째서 생각하지 못했지?!

카르세리안 레이소의 칼날에는 ‘세균 괴수’가 서식하고 있다. 그게 일반적인 에쏘드랑 다른 결과를 부른 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가정이자 추론.

그렇기에 미국 정보요원의 설명도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아니면 에쏘드의 고집일 수도 있어요. 싸구려 피는 취급 안 한다는 거죠. 보통은 4종의 피로 만족하지만, 6종의 피를 요구할 때도 있어서 저희도 상당히 애먹었답니다.)

(그런가요.)

고집은 아닐 것이다.

대화하고 싶어서 안달 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투덜거리거나 칭얼거리는 말투를 들어보면 수다쟁이 같다.

게다가 6종 괴수의 피라면 얼마 전에도 봤다.

그러니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똥고집이었다면 진흙땅에 열흘쯤 담가둘 생각이다.

『딸꾹!』

미동조차 없지만 어째선지 여자친구가 부들부들 떠는 것 같다고 느꼈다.

미국에서 속 시원하게 답해준 덕분에 기분이 상쾌해졌다.

뱀페스트가 기생하고 와이츠가 등장하고부터 쭉 짜증과 답답함이 공존했다. 무언가 속 시원하게 해결된 게 하나도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그를 힘들게 했던 가시 하나가 쏙 빠진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검사(劍士)답다고 할까.

검(劍)에 대해 알게 되니 불안감이 줄어들었다.

(또 다른 가능성도 있어요, 마이티가이.)

(경청하겠습니다.)

(저희 에쏘드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허영심이 장난 아니에요. 용사가 죽든 말든 극적인 연출을 무척 중요시하죠.)

(...고생 많았겠군요.)

진심을 담아 미국을 애도했다.

에쏘드가 위기상황에서 멋지게 등장하려고 여태 안 나온 거라면? 한강에 풍덩!

몹쓸 민폐녀는 사라지는 편이 인류에 보탬이 된다고 생각한다.

『미, 민폐녀….』

에쏘드가 또 칭얼거리기 시작한 것 같다.

영혼 혹 정신이 멀미하는 기분이다.

이것도 민폐라고….

미국의 정보요원은 한국인보다 더 유창한 한국어로 자신들의 에쏘드 흉을 보기 시작했다. 이래저래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중국의 에쏘드도 겉보기랑 달리 진상이었을까?

일반화는 피하기로 했다.

(저희 미국은 마이티가이의 협조로 정말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답니다. 그중에서도 뱀페스트는 아주 큰 수확이었죠.)

공기감염을 통한 번식법과 후작의 반역은 진정 놀라웠다.

여기에 비하면 대한민국 와이츠 계약자가 선유나에서 선지혜로 바뀐 진짜 이유는 정말 사소한 희극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괴수가 ‘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다. 역으로 독립생활하는 객체가 압도적으로 많다고 단언할 수 있다.

문제는 흡혈귀들에게 ‘왕’이 있다는 사실이다.

왕의 지배력이 예상보다 강하다면?

속속들이 등장하고 있는 4급, 5급 사냥꾼들이 ‘인류의 적’으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인류 전체가 ‘가축’으로 전락하는 건 순식간이리라.

(정말 무서운 가정이군요.)

(하지만 실제로 벌어지면 인류는 그날로 종말이에요.)

(흠….)

(그래서 저희는 오창민이란 뱀페스트 후작을 철저히 분석해서 백신을 만들고 있어요. 왕의 지배에 거역하는 약이죠.)

사건이 끝난 지 아직 보름도 안 지났다.

그런데 미국은 벌써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용신(龍神)이 없는 미국이기에 타국보다 더 노력하는 걸지도 모른다.

카르 4세는 기억나는 내용을 간추려서 선지혜(와이츠)에게 설명했기에 빈틈이 많다. 하지만 미국은 손목시계를 통해서 당사자와 함께 들으며 무언가를 더 얻어낸 모양이다.

에쏘드에 관한 정보.

이건 그 보상이라고 보면 될까.

(아무튼, 정보공유 감사합니다.)

(미국은 언제나 마이티가이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어요. 대한민국에 에쏘드가 등장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죠, 이만.)

정적이 찾아왔다.

카르 4세는 옆구리에 채워져 있는 여자친구를 힐끔 내려다봤다.

이게 에쏘드라고?

그가 아는 ‘용사의 검’은 촌스러운 디자인을 하고 있다.

일본의 에쏘드는 날렵한 곡도(曲刀) 형태로 그나마 나았다. 하지만 중국의 에쏘드는 정말 구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청동기나 철기시대에서 굴러들어온 것처럼 유치찬란하게 생겼다.

『내 집이….』

유치하다는 감상이 어때서?

좌절하는 분위기가 감염될 것 같다.

하지만 에쏘드의 수난과 굴욕은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흠…. 불로 지지면 되려나.”

머리를 긁적인 무일은 쉽게 가기로 했다.

바글거리는 세균박멸에는 역시 불이 최고 아니겠는가!

전 특공대장 선지혜가 남기고 간 초호화판 부엌에 배치되어있는 대형 가스레인지를 최대출력으로 켰다.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칼날을 끄트머리에서부터 천천히 불에 지졌다. 세균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예측]까지 동원해서 골고루.

‘...에쏘드도 타죽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용사의 정령’인데 세균보다는 강하지 않을까.

잃어봐야 330억이다.

게다가 칼날이 상한 것도 아니고 전리품으로 주워온 ‘카르세리안 레이소’가 창고에 5자루나 더 있다.

똑같은 재질이니 칼날을 겹쳐놓으면 세균이 금방 옮겨올 것이다.

그러면 원상복귀!

조금도 아쉬워할 것 없다.

걱정이라면 에쏘드에 이상이 생기느냐다.

『우우….』

곧바로 확인시켜줬다.

뭐라고 하는지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무사하면 그만이다.

마지막으로 냉장고를 뒤져 꽁꽁 언 소고기를 도마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식칼 대신 ‘에쏘드’로 썰어봤다.

‘좋아. 세균은 빠졌네.’

여전히 잘 썰리긴 했지만, 이 정도면 식칼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다.

남은 조건은 에쏘드의 매개체가 될 괴수의 피.

거의 매일같이 보아온 은색 액체지만, 막상 찾으니 없었다. 하지만 이건 당연하다. 괴수대응본부에서 구할 수 있다면 그날은 서울이 풍비박산 난 비상시국일 것이다.

하지만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지금부터 구하면 된다.

“밖에 다녀올까나.”

야생괴수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쳐들어온다.

하지만 멈칫했다.

이 야심한 시간에 수도권 밖까지 나가려면 스포츠카라도 있어야 한다. 수도권에서 살 때는 상관없었지만, 서울 정중앙에 위치한 여의도에서 움직이기란 쉬운 게 아니다.

게다가 아무 괴수나 잡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미국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4종 이상의 피를 매개체로 쓴다고 말이다.

‘...원정 중에 기회가 오겠지.’

무일은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필연적으로 야생괴수와 접전이 있을 것이다. 없으면 역으로 곤란하다. 계약해야 하는데 괴수가 접근하질 않으면 어쩌란 말인가.

목표는 2박 3일 이내에 열 명 전원을 계약시키는 것이다.

괜찮은 수호자를 만날 수 있다면 더욱 좋고.

무일이 한국의 정치경제정보를 읽으며 밤을 지새운 사이에 아침이 밝고 최은비와 페이 링이 차례차례 깨어났다.

“잘 잤니?”

“네. 아저씨.”

“오늘부터 소풍 끝나는 날까지 반찬 투정은 안 돼.”

대책반에서 준비하는 도시락으로 끼니를 해결해야 한다.

도시락이 얼마만큼 아이 식성에 잘 맞춰질지 알 수 없지만, 일생일대의 중요한 계약을 해야 하는 미계약자가 많은 만큼 몸매유지를 도와줄 섬유질 위주의 식단이 예상된다.

즉, 채소류가 많다.

따로 고기반찬을 챙겨가는 게 좋지 않을까.

무일은 2박 3일 내내 굶어도 상관없지만, 성장기의 최은비에게는 단백질과 칼슘이 많이 필요하다.

“아침도요?”

“아니. 아침은 식당에서 든든하게 먹자. 페이 링은 조금만 먹어.”

“읏…. 네….”

미계약자 명단에는 페이 링도 포함되어 있다.

미세한 군살 차이로 좋은 계약을 놓친다면 죽을 때까지 후회하며 살지도 모른다. 그러니 참을 수 있다면 참는 게 좋다.

일단 계약에 성공하기만 하면 수호자도 그리 까다롭게 굴진 않는다. 뱃살이나 주름이 생길 기미가 보이면 미리 경고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처음만 마음 단단히 먹으면 된다.

뭐든 시작이 중요한 법이잖은가.

“그럼, 슬슬 가볼까.”

정말 극소수로 꾸려진 원정대는 최은비의 생각처럼 ‘소풍’이나 다름없었다.

수천 명의 사냥꾼이 동원되었던 기존 원정대랑 달리 사냥꾼은 딸랑 셋뿐이었고 그조차도 둘은 운전기사, 부사수로 빠졌다.

결과적으로 사냥꾼은 단 하나.

『카르발트』

오만이니 어쩌니 같은 구설수가 나돌 시간도 없었다. 전날 밤에 결정되고 아침 9시에 바로 출발인 탓이다.

괴수대응본부로 출근하는 사람들조차 뭔 일인지 몰랐다. 아예 신경 쓸 틈도 없다는 게 맞을 것이다.

카르 4세는 한 줄로 정의했다.

‘서울이 오랜만에 활기차네.’

< [24화-3] 수호자를 찾습니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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