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2] 수호자를 찾습니다. >
대책반 반장이 당황하는 것도 당연하다.
중요한 일에는 그만한 준비와 ‘대책’이 필요한 법이다. 그런데 특공대장은 너무나 즉흥적으로 실행하려 하고 있었다.
물론, 대책반 반장 ‘최이슬’도 알고 있다.
무언가 준비하려고 해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미계약자 명단과 교육 등은 진즉 마쳤지만, 부족한 사냥꾼 숫자는 어쩔 도리가 없었던 탓이다.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 보니 어느새 몇 개월이 어영부영 흘러갔다.
무일은 쓰게 웃으며 입술을 뗐다.
영상통화가 아니었으면 더 좋았을 거란 생각이 문뜩 들었다.
(사냥꾼은 정말 최소로만 운영할 예정입니다. 호버크라프트 운전사와 청소부, 의사와 조언자쯤 되려나요.)
까까오에 대해서도 살짝 언급했다.
하지만 최이슬은 눈을 크게 뜨며 반박했다.
(저, 정말 최소로군요…. 다른 건 둘째치고 습격에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이시죠? 5종 수호자를 맹신하는 건 좋지 않아요.)
(저에 대한 프로필을 읽어보셨습니까?)
(물론이에요. 카르 4세.)
(그럼, 카르발트도 확인해보셨습니까?)
(...아니요.)
최이슬은 솔직하게 시인했다.
대책반도 인력난에 시달려서 최신정보에는 많이 둔감한 편이다. 그래도 카르 4세가 ‘6급 사냥꾼’이란 말은 언뜻 들었다.
그가 특공대장이 됐으니 참고삼아 열람할 예정이었지만, 설마하니 취임하고 며칠도 안 돼서 필요하게 될 줄은 몰랐다.
카르 4세의 외모는 15세 미만 미성년자.
하지만 눈빛이나 말투는 산전수전 다 겪은 전사(戰士)였다.
영상통화임에도 순간적으로 압도되어 근거 없는 믿음이 최이슬의 가슴에 ‘뭉클하게 하는 무언가’를 형성하게 했다.
‘이게, 카리스마라는 걸까요…?’
경비대장 임진철과 헌병대장 문장춘에게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멋진 사나이만 이해할 수 있는 세계’ 같은 거리감이 느껴진다.
그에 반해, 특공대장 한무일은….
매료(魅了)될 것 같다.
수화기 스피커를 통해 울리는 목소리 파장과 스크린을 통해 자신을 지그시 쳐다보는 눈빛이 형용할 수 없는 조화를 이루며 묘한 흡입력이 있다.
이상하다.
초면인 것도 아니고 전에는 이런 느낌을 못 받았다.
원정대, 신년회, 송년회 등등….
만나서 대화한 적도 몇 번인가 있었다.
전 특공대장 선지혜가 날이면 날마다 결혼해달라고 매달리는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지금이라면 이상하게도 알 것 같았다.
감투의 힘?
그건 아니라고 최이슬을 장담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뭘까, 이 간질간질한 기분은….
(최이슬 반장님?)
(아! 네! 내일 몇 시까지 준비하면 될까요?)
(미계약자 열 명과 조언자 한 명만 내일 오전 8시까지 특공대 앞으로 부탁합니다. 호버크라프트를 비롯한 나머지 인원은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네….)
(그럼 이만-.)
(잠깐만요, 대장님! 너무 건성이에요!)
멍하니 듣고만 있던 최이슬을 깜짝 놀라며 말렸다.
미계약자가 타는 호버크라프트 내부를 봤을 리 없는 사냥꾼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리라!
그 안에 여성을 배려한 물품과 준비가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말이다.
낯선 환경에서 받는 스트레스는 피부와 머릿결을 푸석푸석하게 한다.
화장할 수 없는 예비계약자들에게 이건 치명적!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일단 결정된 계약은 다시 반복되거나 바꿀 기회는 영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이날은 계약자들에게 일생일대의 ‘결혼’이나 다름없는 중요한 기념일이다.
충분히 4종 계약자가 될 수 있는 미모인데 이날의 실수로 1종 수호자를 만난다면 이 얼마나 뼈아프고 후회막심한 일이겠는가.
준비는 철저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대책반 반장이자 ‘계약해본 경험자’로써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
(...그럼 호버크라프트까지 부탁합니다.)
(특공대장님.)
(네.)
(대장님이 준비해주실 부분을 말씀해주시는 편이 좋다고 생각되는데요.)
(흠. 일리 있군요.)
초보자보다는 전문가가 나서는 편이 100배 낫다.
마음가짐의 차이 때문 아닐까?
소풍 가는 심정인 카르 4세랑 달리, 최이슬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짊어질 여인들의 운명이 결정지어지는 날쯤으로 생각한다.
조바심 나는 것도 사실이다.
와이츠가 ‘미계약자’에게까지 출산을 강요하는 바람에 본부 대책반 홈페이지는 ‘계약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라는 요청 글로 폭주상태다.
최이슬도 암울하긴 마찬가지다.
그 ‘말도 안 되는 정책’은 그녀에게도 적용되는 까닭이다.
출산하고 육아했던 마지막이 어느새 10년도 더 됐는데 갑자기 또 해야 한다니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다.
‘불필요한 인구를 줄이겠다는 의도겠죠.’
겉보기에는 출산을 강제하는 걸로 밖에 안 보이지만, 괴수대응본부에서 일하는 여성들에게까지 적용한 걸 보면 목적은 명백하다.
솎아내기.
남자도 없고 시간도 없다.
온갖 편법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매력적이지 않은 여성 대부분이 임신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애를 못 낳은 여자는 사냥꾼?
그건 서울 밖에 나가서 죽으란 뜻이다.
와이츠가 시행한 정책과 법안 중에는 ‘비인도적이지만 효율적인 결과물’들이 과거에도 무척이나 많았다.
하지만 이번만큼 심했던 적은 결단코 없었다.
마치, 무언가를 서두르는 것 같다.
너무나 와이츠답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 더 어이없는 건 무력하게 순응하는 서울 시민들의 태도와 분위기다.
(대장님. 솔직하게 답해주세요.)
(제가 아는 범위라면.)
(피해 없이 원정을 마칠 수 있을까요?)
(속단은 금물이지만, 제가 죽기 전까지 원정대는 무사할 것임을 약속드립니다. 제 죽음으로 속죄될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지만.)
(쉽지 않은 답변 감사합니다.)
최이슬은 진심을 담아 인사하며 어렴풋이 생각했다.
이왕 애를 낳을 거면 이 남자가 좋겠다고.
직접적인 성관계는 선지혜 회장의 방어가 두터워서 무리지만, 인공임신이라면 이미 선례도 있으니 가능하지 않을까.
강남구 쿠데타 죄인들도 되는데 ‘전직 6종 계약자’인 대책반 반장이 안 된다는 건 말도 안 된다.
남은 기일은 28일.
누군가에게는 터무니없이 짧은 유예기간이지만, 미모에 자신 있는 여성들에게는 넉넉한 시간이다. 억지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거부감만 있을 뿐.
그건 최이슬도 마찬가지다.
충분한 심사숙고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
(잘 부탁합니다, 반장님.)
(저야말로 부탁해요.)
연락을 마친 무일은 기지개를 켰다.
괴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사냥꾼’이랑 달리 ‘책임자’란 직책은 역시 어려웠다. 딱히 부담감이라고 할 건 없지만, 비효율적이다.
이번에는 경험을 위해 나섰지만, 다음부터는 전문가에게 맡기고 ‘현장인솔자’쯤으로 참가해야 할성싶다.
정비과 엄친아 정찬호에게 연락을 취했다.
호버크라프트를 포함해서 내부시설과 장비의 고장이 생길 시에 반드시 필요한 인력이 정비사이기 때문이다.
(네가 웬일이냐. 카르 4살.)
(어허! 상관에게 말하는 거 보소.)
(네가 정비과 과장은 아니잖아. 그보다 정말인 거지? 위험하지 않은 아리따운 아가씨들과 2박 3일 동안 동침한다는 거! 농담 아니지?)
(동침이 아니라 합숙.)
(내게는 차량 전체가 침대다!)
호버크라프트에는 여러 개의 침실이 있다. 개인실은 무리지만 남녀가 같은 방을 쓸 상황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정비과 에이스는 이상한 공식을 들먹이며 끝까지 ‘동침’이라고 우겼다.
무일은 영양가 없는 말씨름은 피하기로 했다.
대책반에서 거의 전부 맡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특공대장이 몸만 가는 건 아니다. 내일이라고 했지만 12시간도 채 안 남았다.
8시까지 특공대 정문으로 나오라고 통보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이거…. 비서라도 둬야 하나.”
“제가 있잖아요, 주인님.”
페이 링이 기회라는 듯이 무일의 혼잣말에 끼어들었다.
효율을 중시하는 주인으로서 이 어여쁜 노예에게 해줄 말은 하나뿐이었다.
“이마에 주름 생기면 1종도 힘들다, 너.”
“2종도 아니고 1종인가요?!”
상심에 빠진 페이 링을 놔두고 ‘조원’들에게 연락했다.
문세웅은 호버크라프트 운전기사를 겸하면서 타로와 함께 차내(車內) 치안과 인원 감시를 담당하기로 했다.
그런데 여기에 계획에 없던 한 명이 추가되게 생겼다.
헌병대장 아들내미의 부탁이었다.
(장혜린 양을? 데이트장소를 잘못 선택한 것 같은데.)
(그게…. 선배님. 사랑이 뭡니까?)
이 새끼가 갑자기 뭐래?
무일은 최대한 차분하도록 노력하며 답했다.
(세웅아. 나는 프로사냥꾼이지 연애전문가가 아니다.)
(연애경험이 많으시잖습니까.)
(그건…. 됐다.)
카르 4세는 그냥 오해하게 놔두기로 했다.
털 없는 원숭이의 권리를 신경 쓰지 않는 와이츠의 정책은, 거리감 있던 젊은 남녀를 급속도로 가깝게 해주는 촉매 역할이 돼줬다.
나름 진지해진 후배의 얘기를 들어보니 가까운 정도를 넘어서서 어젯밤부터 하나가 됐던 모양이다.
장혜린 양도 애를 낳긴 해야 하니….
후배에게 ‘책임감 버프’가 생기길 바라며 은근슬쩍 밀어주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진도가 무척 빨랐다.
이런 상황이 서울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면?
부족한 사냥꾼 전력 강화!
방식은 마음에 안 들지만, 와이츠는 역시 와이츠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민간인을 끌어들이는 건 안 돼. 하지만 청소와 잡일은 도와줄 사람은 필요하지. 그 아가씨가 하겠다면 허락하마.)
(감사합니다!)
(...너도 소설을 너무 많이 봤구나.)
굳이 위험한 장소로 여자친구를 부르는 이유는 하나다.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아직 1급 사냥꾼인 문세웅이 뭘 보여줄 수 있을지 미지수지만, 그건 평판과 소문에 둔감한 카르 4세만의 생각이다.
팔불출 헌병대장 문장춘.
이 남자를 과소평가하면 큰코다친다.
현재, 문세웅은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남자의 오른팔!’이라는 명함을 달고 있다. 사냥꾼 세계에서 이 미청년은 선망의 대상이다.
각색이 다소 섞였지만 정말 사소한 문제.
카르 4세가 신뢰해주고 동행시킨다는 사실만으로도 주가가 쭉쭉 오르는 추세다.
(선배님에 비하면 멀었습니다.)
(오냐.)
(아침에 뵙겠-.)
(잠깐.)
(네. 말씀하세요.)
카르 4세는 수화기 너머의 미세한 숨소리를 포착해냈다.
벽시계를 힐끔 확인하고는 달래듯 말했다.
(일찍 자. 대책반 반장도 말했지만, 내일 출발하는 원정대는 무척 중요해. 그러니 밤놀이하지 말고 체력을 보존해라.)
(역시! 선배님의 감은 대한민국 최고이십니다! 죄송하지만 이미 시작했는데요.)
(...졸음운전 하면 진짜 죽는다.)
(명심하겠습니다!)
못 말리겠다는 듯이 혀를 찬 무일은 통화를 마쳤다.
사랑하는 사람만 곁에 있으면 세상 걱정 없다는 마인드의 청춘이 부럽기도 했지만, 숨 한 번 내쉬며 털어냈다.
잠꾸러기인 최은비도 들떠서 도통 잠들 기미가 안 보였다.
페이 링은 ‘1종만은 절대 안 돼!’라고 외친 이후부터 열심히 윗몸일으키기를 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맨바닥에 무방비하게 잠들었다.
...잠들 순서가 뒤집혔는데.
최은비가 ‘마법의 손’이라고 명명한 ‘무일의 손’이 토닥여주기 시작했다.
침대에 누워 그 규칙적인 리듬을 즐기듯 미소를 짓던 13살 소녀는 그대로 꿈나라 급행열차를 탔다.
땀에 젖은 페이 링은 깨워서 샤워장에 밀어 넣고….
‘휴식이 필요 없다는 것도 고역이군.’
무일은 푸념을 늘어놓으며 대장실 테라스로 나왔다.
자고자 한다면 잘 순 있지만, 그건 무상무념(無想無念)으로 멍하니 있는 거에 가깝다. 완전히 의식이 끊기는 수면이랑 다르다.
어째서 이런 몸이 된 걸까?
피로를 느끼지 못하고 지치지도 않는다. 단련하지 않아도 근육은 그대로고 피부는 아기처럼 생기가 넘친다.
어두운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무일의 시선이 여자친구에게 꽂혔다.
이상하긴 이쪽도 마찬가지다.
“저주받은 검….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다만.”
카르 4세는 ‘에쏘드’를 의심했다.
계약자에게 무한한 기력과 체력을 준다는 수호자. 그리고 뱀페스트 남작이 말한 ‘성검(聖劍)’이란 단어가 또 하나의 가능성을 [예측]하게 했다.
그건 에쏘드의 핵심적인 능력이다.
『적이 강할수록 강해진다.』
매우 포괄적인 서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강해진다는 걸까?
정말로 적이 강할수록 ‘공평하게’ 강해진다면 일본의 에쏘드 계약자가 짚단처럼 죽어나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다.
바람의 여왕은 어째서 중국의 에쏘드를 경계했을까?
모든 의문을 종합해본 카르 4세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특성 무력화…. 그쯤 되라나?’
< [24화-2] 수호자를 찾습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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