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장-3] 그분이 돌아왔다. >
기분만이 아니라 정말로 열이 나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상 ‘대기의 지배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바람의 여왕’ 박선영의 감각을 피해 선유나에게 접근하기란 매우 어렵다.
물론, 박선영이 멀리 떨어져 있을 때라면 ‘접근’까지 어찌어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보쌈해서 내뺄 가망 따위는 없다.
그럼에도 ‘눈치싸움’ 중이라고 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흡혈(吸血).
그리고 ‘노예화’ 때문이다.
“이모의 친척이라고 방심한 틈에 엄마는 한 번 흡혈 당한 적이 있어. 그 탓에 흡혈귀의 꼭두각시나 다름없는 엄마를 생채기 하나 없이 제압할 수 있는 건 이모뿐이야.”
“......박민혁?”
박선영의 조카이며 한무일에게 개성시를 주선한 인물.
집안 내력만 빼면 너무나 평범한 셀러리맨, 괴수대응본부 민원과 대리다.
그런데 그가 뱀페스트였다고?
지배까지 했다면 ‘귀족’이란 뜻이다.
“선배도 아네? 하지만 건드릴 수 없어. 죽이는 건 더욱. 이모가 평양과 파주 사이를 얼마나 자주 왕복했는지 아마 상상도 못 할걸.”
“아! 그때….”
“엄마와 이모가 떨어지려면 박민혁의 허락이 필요해. 그래도 왕의 계약자라고 해코지하진 않지만 정말 짜증 나는 상황이지.”
“최종명령….”
오창민이 썼던 수법이다.
그것 때문에 카르 4세는 뱀페스트 후작을 죽이는데 한참을 망설였다.
결국은 죽이긴 했지만, 그 최종명령이 풀린 이후였다.
“응. 박민혁이 죽으면 엄마가 미쳐버려. 죽을 때까지 영원히.”
“영원히?”
“놈은 한국을 총괄하는 뱀페스트 공작인걸.”
“무려 공작이냐….”
남작, 백작, 후작, 공작 순서대로 만나고 있다. 중간에 자작이 빠졌네?
난이도가 계단식으로 쭉쭉 올라간다.
이게 무슨 RPG 게임이냐고 무일은 투덜댔다.
슬쩍 목마 탈 기세인 선지혜가 말했다.
“능력도 왕만큼이나 끈질겨.”
왕과 공작의 차이는 ‘동족 위에 군림’할 수 있느냐의 차이뿐이다. 나머지 능력과 성질은 엇비슷하다.
그 한 끗발 격차가 매우 크지만 말이다.
즉, 박민혁은 백혈구울이 아닌 뱀페스트의 최종형태라고 보면 된다.
그 밖에도 쓸만한 정보나 진실을 술술 설명해주는 선지혜는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준비해온 것 같았다.
하지만 전부 와이츠가 ‘방금’ 알려준 거라고 하니, 본능대로 움직이는 카르 4세로서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뱀페스트 사건은 ‘일단’ 막을 내렸다.
더 들쑤시면 자연히 뱀페스트 공작, 박민혁이랑 충돌하게 되는데 선유나가 인질 아닌 인질인 상태라서 그럴 수 없었다.
‘심각하군….’
서울에서 소위 ‘실패자’라고 불리는 여성의 상당수가 박민혁의 가축 겸 노예다.
표현을 순화하면 ‘보균자’쯤 될까.
온종일 집에서 게임만 하는 그녀들은 ‘송곳니 자국’이 아물 때까지 남들에게 보일 리 없으니 그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서울의 수많은 여성이 인질.
그 보균자들이 ‘미래의 계약자’를 출산할 가능성을 품은 미녀들이란 걸 고려하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선지혜의 설명도 끝났고 인질들의 수송도 마쳤다.
공사다망한 카르발트에게는 감상적인 뒷수습이나 하고 있을 시간적 여유가 없다. 흡혈귀 문제가 끝났으니 이젠 또 수도권의 야생괴수를 잡으러 바로 가야 한다.
그때였다.
휘이이이잉!
폭풍이나 다름없는 바람이 휘몰아쳤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거대한 비행체가 서울 상공을 크게 선회하며 거대한 그림자를 지상에 깔고 있었다.
원근감을 파괴하는 은색의 용.
웨일풍은 너무 커서 현실감이 없었다면 이쪽은 그 크기가 눈에 다 들어오면서 더욱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서구문명의 전래동화 속에 그려지는 1쌍의 날개를 가진 드래곤과 흡사했다.
팔다리는 도롱뇽처럼 짧았지만 꼬리는 그 끝이 안 보일 만큼 길었다. 머리에 돋아난 뿔들은 왕관처럼 용신의 위대함을 치장했다.
저 거구(巨軀)야말로 진정한 ‘전설의 용’이었다.
【와이츠 / 8종 대형】
현실에 무관심한 서울 시민들도 이 순간만큼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여기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간다는 얼굴을 했다.
그만큼 이 용신의 형상은 환상을 재현하고 있었다.
와이츠는 서울을 굽어보듯 한 차례 선회했다.
...뭘 하려는 걸까?
평화로이 하늘을 노닐고 있던 플라돈 한 마리가 채찍처럼 휘둘러진 와이츠의 꼬리에 둘둘 말리며 붙잡혔다.
돼지 멱따는 소리가 한 번, 두 번….
바동거리던 플라돈이 조용해질 즈음에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용신’은 북한산 꼭대기를 뱀처럼 휘감으며 착륙했다.
불쌍한 돼지….
절대로 작지 않은 플라돈이 간식거리조차 안 됐다.
“선지혜.”
“응.”
“안 가봐도 돼?”
“괜찮아. 정신감응 중이라서 굳이 직접 만날 필요는 없어. 흐응~, 그래도 거리가 가까워지니 사념이 확실히 강해지네.”
대한민국 와이츠가 10년 만에 둥지로 귀환했다.
용신이 원숭이들의 환영식을 기대할 것 같진 않지만, 정말로 아무런 전조나 연락도 없이 태연자약하게 돌아왔다.
남들이 보기엔 뜬금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무일은 와이츠가 서둘러 돌아온 이유를 알고 있다.
원래 계획은 서울에 한 차례 홍역이 더 지나간 후였을 테지만, 실패작을 먹고 이상해진 원숭이에게 호기심이 동한 것이다.
덤으로 ‘희망’이 아닐까?
수호자만큼이나 태연자약한 표정인 선지혜에게 물었다.
“섭섭하지 않아?”
“아니, 전혀. 와이츠가 돌아온 건 엄마와 재계약하기 위해서란 건 분명하지만, 그건 나도 원하는 바야.”
“의젓한 척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걸! 곧 선배에게 더럽혀질 미래가 복받쳐서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걸!”
“......”
어느 미래에서 오셨습니까.
이런 걸 핀잔 식으로라도 질문했다가는 오늘 일정이 엉망이 될 것 같다고 [예측]한 무일은 과감히 생략했다.
와이츠의 귀환.
기대했던 것보다 별 감흥 없어서 놀랐다.
멍텅구리로 변한 대한민국을 치유해낼 수 없을 것 같아서일까. 아니면 최근에 너무 큰 사건들을 한꺼번에 당하면서 감정이 메마른 걸까.
뭐가 됐든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이만 가볼게. 1시간마다 연락해!”
“일은 언제 하라고.”
“일? 한 며칠만 기다려봐. 서울에 곧 ‘짝퉁 무일’이 양산될걸. 그때가 오면 매일 데이트하면서 룰루랄라 지낼 수 있어.”
“짝퉁 무일….”
“손목시계로 자료를 보내줄게. 아! 그리고 오늘부터 선배가 특공대장이야.”
“음?”
선지혜가 ‘8종 계약자’로 복귀하면 자연히 그렇게 된다.
특공대에서 카르 4세보다 강하거나 인지도가 높긴커녕 근접한 대원조차 없으니 투표나 경쟁 등은 전부 생략됐을 터.
괴수대응본부 특공대 대장이란 직책은 간단히 주고받을 수 있는 ‘청소당번’ 같은 게 아닐 텐데 말이다.
카르 4세는 화창한 하늘을 보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경쟁자가 한둘쯤 있으면 좋으련만….’
드라마 같은 연출을 위해서가 아니다.
대한민국 특공대에 그만큼 인재가 없다는 뜻이다. 비단 특공대뿐만 아니라 사냥꾼 전체를 봐도 그럴 것이다.
여기에 수색대장과 간부들의 배신까지 추가!
그들은 서울 밖으로 도주했거나 ‘뱀페스트 공작’인 박민혁의 아지트 같은 곳에 숨어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고 보니 수색대장도 공석이군.
산 넘어 산이다.
선지혜가 고위계약자로 복귀하며 떠나고 몇 분 후에 문세웅과 이승필이 나브랑모스 레비터를 타고 도착했다.
“선배님! 선배님께서 특공대장이 되셨다는 문자가 왔습니다.”
“축하합니다, 한무일 대장님.”
본부가 EMP 한 방 맞더니 해롱해롱하며 완전 대충이다!
전체문자라도 돌려준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 할까.
와이츠의 귀환을 주제로 이승필, 문세웅과 토론 형식의 이야기를 나누던 무일은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이 손목을 내려다봤다.
오늘부터 특공대장이다.
손목시계 ‘아메리카 드림워치’에 내장된 홀로그램을 띄우니 특공대장이 해야 할 업무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뱀페스트를 지배하는 연구의 진척도를 적은 보고서도 바로 밑에 있었지만, 카르발트는 과감히 나중으로 미뤘다.
당장 안다고 할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
중요한 건 특공대다.
카르 4세는 위에서부터 천천히 ‘특공대장이 해야 할 일’을 쭉 읽어내려갔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랬다.
‘별거 없네.’
선지혜가 여태 계약자 아닌 척했다고 해서 ‘와이츠 계약자’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다.
스트레스에 쥐약!
그래서 잡다한 업무는 ‘후원’치고 발을 깊게 담근 ‘I ♡ Seoul 그룹’에서 처리하게 해놨고 대장이 바뀐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무일이 앞으로 해할 역할은 ‘훈련감독’ 하나뿐이었다.
즉, 막사에서 노는 일!
특공대장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보잘것없는 업무였지만, 선지혜는 정말 이조차도 대충 하면서 특공대를 무탈하게 이끌어왔다.
자문단의 능력에 기립박수!
카르 4세가 이 체계를 바꾸기 전까지 특공대는 ‘전 특공대장’의 영향을 매우 많이 받을 거란 건 자명했다.
...좋은데?
어른 한무일로서 어린 최은비를 돌봐야 하고, 6급 사냥꾼으로서 해야 할 일도 태산 같이 많다.
여기에 해롱해롱 중인 본부까지 끼어들면 감당할 수 없다.
“우선…. 집부터 옮겨야겠네.”
개성시로 곧 이사 갈 예정이었는데 현재 무기한 연장 상태다.
서울 위쪽의 파주시는 ‘바람의 여왕’과 ‘국모의 추종자’들이 철통같이 막고 있어서 괜찮지만, 개성시는 아니다.
불가피하게 서울의 방어전력이 분산돼야 한다.
이미 카르발트의 요청으로 ‘부산’에 전력이 분산될 예정이다.
부족한 사냥꾼 숫자가 채워지거나 고위계약자 한둘쯤 새롭게 등장하기 전까지 개성시는 사실상 ‘봉인’이다.
개성시가 그 꼴이니 특공대장답게 특공대 막사로 이사 가는 게 맞다.
세금도 안 내고 얼마나 좋은가!
과거에도 선지혜가 몇 번씩 막사에서 같이 살면 집세 걱정 없어서 좋다고 유혹한 적이 있었지만, 단호하게 거절했다.
본인이 감촉 좋은 이불이 돼주겠다나….
절대로 안 될 제안이다.
하지만 이제 특공대장이 됐으니 막사는 ‘카르 4세’ 소유다.
취임식도 없이 너무 대충이다.
“선배님은 몸만 가시면 이사는 끝난 거 아닙니까.”
“어…. 어? 생각해보니 그러네.”
단칸방에 있던 모든 가구는 본부에서 무상으로 대여해준 물품이다.
하지만 들르긴 해야 한다.
무일은 정말 몸만 가면 되지만, 최은비의 교과서와 학용품은 전부 집에 있다. 그것들은 특공대 막사에서 구할 수 없다.
물론, 학교에 후원금 형식으로 얼마 찔러주면 이것들도 간단히 해결될 테지만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카르 4세가 ‘낡은 여친’을 계속 들고 다니는 것처럼 말이다.
물건에 하자가 없다면 쓰던 걸 계속 쓰는 게 좋다.
『난 새색시인데….』
무시하고.
최은비의 교과서와 학용품은 문세웅이 오늘 업무 후에 막사까지 옮겨주는 걸로 했다.
거처 문제로 고민했던 ‘노예’도 이제 괜찮을 것 같다.
(페이 링.)
(네. 주인님.)
생일파티장에서 친한 여동생인 시링 팽에게 놀림 비슷한 걸 당한 페이 링은 건전한(?) 아가씨로 돌아왔다.
무늬만 간호사 강보라가 ‘무의식이 이미 타락했음~♬’이란, 돌이킬 수 없는 병명(病名) 비슷한 진단을 내렸지만 괜찮지 않을까.
(특공대 막사에서 기다려.)
앞으로 특공대 대장실에서 생활할 것이며, 박선영이나 선지혜랑 놀고 있을 최은비를 잘 부탁한다는 설명도 곁들였다.
문세웅도 참 걸물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생사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최은비의 하교 시간은 꼼꼼히 챙기는 걸 보면 부전자전(父傳子傳)이란 단어가 절로 떠오른다.
팔불출.
최은비가 문세웅의 친여동생도 아니니 그 방향성은 건전하다고 본다.
하지만 동정도 아닌 문란한 후배에게 ‘딸 같은 아이’를 내줄 생각은 좁쌀만큼도 없다.
페이 링이 살짝 기대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 네. 목욕재계하고 기다릴게요.)
(그냥 기다려도 돼.)
개구리 공주님이 멀쩡한 아가씨를 망가트려 놨다. 단시간에 사람의 개성을 이렇게까지 바꿔놓는 것도 능력일 것이다.
페이 링의 운명을 거머쥔 책임자로서 이 일을 어쩌면 좋을까.
카르 4세는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술을 뗐다.
(...페이 링.)
(네!)
(우리, 평범하게 가자.)
(네?)
(아니야. 곧 바쁠 예정이니 끊는다.)
< [23장-3] 그분이 돌아왔다. > 끝
ⓒ 파르나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