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96화 (96/287)

< [23장-2] 그분이 돌아왔다. >

선지혜는 진지하게 들었다.

외국에서 ‘가더발트 계약’은 일단 보류하고 뱀페스트를 지배하는 연구가 한창 진행 중이란 부분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가더발트가 ‘남성’에게 달라붙는 조건은 여전히 해명이 안 됐다. 하지만 원래부터 ‘남성’을 숙주로 삼는 뱀페스트라면 쉽다.

덕분에 이미 상당한 진척을 이뤄낸 것도 사실.

여태 특이체질이란 걸 제외하면 별 볼 일 없던 가문들이 강력한 ‘괴수의 힘’을 문제없이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남자가!

23세기부터 종마 취급이었던 남성의 가치가 다시 급부상하고 있었다.

외국에서는 이미 ‘4급 사냥꾼’의 벽이 허물어진 상태였다.

“선배의 여자친구도 곧 똥이 될 거야.”

“똥이라니….”

“하지만 정말인걸.”

쇠붙이를 상대로 우월한 몸매를 뽐내며 질투를 불태우는 선지혜가 ‘곧 유통기한이 다 돼서 못 써’라는 듯이 말했다.

사냥꾼의 평균수준이 쭉 올라가고 있다!

육체 능력이 ‘0종’이었던 인간이 뱀페스트의 힘을 얻고 흡혈이란 조건부로 ‘5종’까지 급부상할 수 있는 등용문(登龍門)이 열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괴수에게서 얻을 수 있는 ‘재료’의 공급도 원활해졌다.

아직은 시작 단계지만 정말 시간문제다.

그 증거로, 영국이 자랑하던 ‘카르세리안 레이소’는 그 가치가 빠르게 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은 조절해오던 물량을 전부 풀었다.

이렇게 많은 여자친구(!)가 돌아다니게 된 직간접적인 원인이다.

“대세는 스콜레옹 포르소인가.”

카르 4세는 안타까움을 담아 중얼거렸다.

세계에서 2번째로 날카로운 절단기. 미국에서 보유 중인 ‘단검’을 제외하면 ‘최고의 칼’이라 불리는 스콜레옹 포르소.

선지혜는 뺨을 맞대며 부비부비하더니 ‘피부관리에 좀 더 신경 써야겠는걸.’이라고 중얼거린 후에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부정했다.

“새로운 무기가 나올 거야.”

“흠. 그렇겠지.”

사냥꾼들이 모으는 재료의 질이 높아지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무일의 예상은 반만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무기가 50년 넘게 발전이 없었던 건 인간의 육체가 못 버텼기 때문이야. 근육강화제와 골격강화제에도 한계는 있으니까.”

“아!”

“눈치챘나 보네. 맞아. 흡혈귀의 근력을 마음껏 쓸 수 있다면 무기의 무게는 신경 안 써도 돼. 그러면 만들 수 있는 MID 절단기가 무척 많아.”

그렇다고 ‘카르세리안 레이소’와 ‘스콜레옹 포르소’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뱀페스트를 지배하려면 ‘특수체질’이어야 하는 까닭이다.

특수체질은 미녀보다도 희귀하다.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고 권장한다면 폭발적으로 늘어날지도 모르지만, 한계가 명확하다.

머릿수만 늘린다고 능사가 아닌 탓이다.

보통의 뱀페스트는 흡혈 후에 능력 하락이 없지만, 특수체질은 ‘괴수의 피’를 정화하기 때문에 ‘여성의 피’가 꾸준히 공급돼야 한다.

그 숫자란?

1종 능력을 유지하려면 매일 아침, 저녁으로 ‘치사량 직전’까지 피를 제공해줄 여성이 1명씩 필요하다.

흡혈할 여성 숫자가 늘면 당연히 능력이 오르고 이론상으로는 5종까지 가능하지만, 그 효율은 절망적이라고 보면 된다.

수혈도 안 된다.

무조건 ‘예쁘장한 여성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야 한다!

가더발트처럼 뱀페스트도 고집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렇다면 내게는 아직 필요하다는 뜻이네.”

무일은 8년째 함께하고 있는 여자친구를 매만지며 말했다.

각오만 충분하다면 온종일 가더발트를 착용한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그 각오가 턱없이 부족한 카르 4세는 무기가 가벼워야 한다.

선지혜는 철부지 아이처럼 입술을 삐죽 내밀며 불만은 표시했다.

날붙이를 상대로 질투하면 어쩌자는 건지….

“아무튼, 오창민이 선배의 뱃속에 알을 심었다는 거야?”

“...동성애자처럼 들리는 표현은 삼가줘.”

“심각한걸. 남자가 동정 수태라니.”

“야!”

선지혜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하며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암고양이처럼 색기 어린 눈빛으로 변했다.

야릇한 숨소리가 귓가를 스치는가 싶더니 새하얀 목덜미가 무일의 입가에 닿는다.

여기까지 진행한 특공대장 왈.

“선지혜의 피를 쪽쪽 빨고 싶어?”

“...아니.”

“뭐야. 기분 나빠! 한껏 기대했는데 이상하잖아!”

“멀쩡한 거지!”

미치지도 않았고 흡혈충동도 없다.

아직 부화하지 않았다는 선택지가 남았지만 그건 의무대에서 조사해보면 금방 알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선지혜의 생떼로 이 계획은 무산됐다.

뱃속에 든 아기의 성별을 미리 알면 재미없다는 이론을 멋대로 접목하는 게 아닌가.

와이츠 계약자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싸히어가 조금 흥미롭데.”

“음?”

“미카헬로 싸히어. 한국의 와이츠 본명쯤은 알아둬야지, 선배.”

“알고 있거든?”

그렇지만 갑자기 흥미롭다고 말한다면 놀라는 게 당연하다.

와이츠가 흥미를 보였다.

그 얘기는 하나로 귀결된다.

슬슬 산소호흡기마저 떨어지려는 조짐이 보이는 대한민국에 구명줄이 다시 내려온다는 뜻이다.

계속 뒤편에서 그를 끌어안고 있는 선지혜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이젠 안기는 걸 넘어 업히는 수준으로 매달려있다.

“와이츠가 돌아오더라도 한국의 상황은 바로 나아지지 않을 거야.”

“왜?”

“이모도 그렇지만, 싸히어도 흡혈귀 왕을 쫓느라 바쁘거든.”

“...갑자기 그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뭔데.”

“나도 방금 알았어.”

선지혜는 30년 전이라고 우기지만 턱도 없는 소리고, 대략 40년 전에 그녀는 선유나가 국가에 내건 ‘약속’으로 태어났다.

낳고 싶어서 낳았다?

요즘처럼 안 늙는 세상에서는 당연한 얘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정략혼이었고 선유나가 한 약속은 ‘결혼’까지였다. 그 어디에도 부부의 육체 관계를 갖겠다는 내용은 없었다.

모두가 ‘결혼’에 ‘아이’도 당연히 포함된다고 멋대로 판단했을 뿐이다.

그러나 선유나는 순결을 깼다.

여기에는 수호자 와이츠의 동의가 당연히 있었다.

“싸이어는 계약자를, 당시에는 처녀였던 엄마를 빼앗겼어.”

“흡혈귀 왕에게…?”

“응. 와이츠는 8종이고, 뱀페스트 왕은 약해도 9종. 군주가 꼭 강할 필요는 없잖아? 선배의 생각대로야.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밀린 거지.”

영토를 가지고 동족을 지배할 수 있는 9종.

와이츠가 8종으로써 아무리 강하고 현명하더라도 소위 ‘계급’이라고 불리는 상하관계는 뒤집을 수 없다.

그야말로 ‘왕’이란 특수성을 악용한 횡포!

남의 아내를 빼앗는 폭군(暴君)이 ‘뱀페스트 왕’이었다.

“박 여사님은?”

박선영이 그렇게 되도록 두고 봤을 리 없다.

그 당연한 질문에 선지혜는 고개를 저었다.

“한국에는 엄청나게 많은 뱀페스트가 살고 있어. 하지만 가만 놔두는 실정이야.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거든.”

“수호자가 못 찾는다고?”

“못 찾는다기보다는 아예 시도조차 안 한다고 할까…. 괴수는 기본적으로 수컷 원숭이가 어떻게 생겨 먹었든 관심 없잖아.”

“아…. 그랬지.”

고위괴수는 무관심하고 하위괴수는 뱀페스트를 찾질 못한다.

계약자가 두 손 모아 간절히 부탁하면 ‘서울을 통째로 박살’ 내겠다는 답이 되돌아온다는 것이다.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

무시(無視) 아니면 섬멸(殲滅).

괴수의 흑백논리는 여기서도 빛을 발했다.

박선영의 수호자 엘로엘도 마찬가지다. 수컷 원숭이의 심장에 기생하는 거머리 따위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박선영도 알 방도가 없다.

엘로엘이 협조해주지 않으면 그녀도 평범한 여자에 불과한 탓이다.

“엄마는 싸히어를 좋아해. 그건 싸히어도 마찬가지고.”

“......”

“그래서 둘은 자신들 사이에 끼어든 못된 거머리를 떼어내기 위해 강수를 뒀어. 그 결과물이 나야.”

계약자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순결’이란 조건이 있다.

조국에 내건 약속을 이행하더라도 형식적으로만 지킬 예정이었던 선유나는 마음을 독하게 먹고 한 남자를 선택했다.

원래는 여기에서 그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무단침입자를 때어내기 위해 순결마저 포기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 9종 거머리는 계약자가 더는 처녀가 아님에도 안 떠나는 게 아닌가!

입술을 깨문 선유나는 아이까지 낳기로 했다.

선지혜가 태어난 진짜 배경이다.

그러나 이 빌어먹을 ‘거머리 왕’은 정말 ‘내가 바로 진정한 거머리다!’라고 주장하듯 떨어질 기미가 안 보였다.

분노한 박선영이 계약자의 쌍방향통신을 역추적하는 데 성공해서 갈기갈기 찢어놔도 마찬가지였다.

견고한 9종 계약은 그대로!

녀석은 죽지도 않는 찰거머리였다.

그날 이후부터 현재까지 기나긴 눈치싸움이 시작됐다.

“역시…. 진실은 늘 머네.”

복상사했다는 ‘선지혜의 아버지’는 사실, 와이츠의 보물을 더럽힌 대가로 세상을 하직했을 확률이 높다.

선유나의 ‘자애로운 국모 이미지’도 상당 부분 각색된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선지혜보다 더 음….

진실이야 어떻든!

여신과 용신의 러브스토리에 훼방을 놓은 거머리는 어떻게 됐을까?

“왕은 현재 브라헨티나에 숨어있다는 모양이야.”

브라헨티나라면 남아메리카 대륙이다.

지구 반대편.

그 찰거머리에게도 박선영은 부담스러웠던 게 분명하다. 육체가 수증기 단위로 분쇄됐다고 하니 트라우마가 생기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고도 포기 안 한 왕의 집념에 박수!

뱀페스트 ‘귀족’의 자존심처럼 ‘왕족’의 자존심이 아닐까.

“하지만 추적에도 한계가 있었던 거지?”

아니었으면 왕은 이번에야말로 분자단위로 갈렸을 것이다.

선지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정확한 위치는 엄마만 알지만, 그걸 평평한 지도 위에 찍어보라고 하는 건 무리. 브라헨티나라고 생각한 것도 발밑 멀~~~리 수호자가 있는 기분이 들어서래.”

지구 반대편이니 정말 멀 것이다.

발밑이라고 느낀 걸 포함해서 말이다.

무일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리고 의문점에 대해 질문했다.

“정공법은?”

지도로 못 찾겠으면 직접 찾아간다는 수단도 있다.

뭐든 현지조달(?)이 빠른 법이다.

“이모가 엄마와 함께 브라헨티나까지 가서 추적해봤는데 실패했다나 봐.”

“흐음….”

수호자가 자신의 위치를 계약자에게 왜곡해서 전하거나 감출 수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다.

하지만 9종이라면?

왕이나 왕자가 침소에 있다는 알리바이를 깔고 신분을 숨긴 채 밀정(密偵)을 나가서 미녀를 만난다는 전래동화가 많다.

만약 ‘괴수의 왕’에게도 군림 외의 능력이 있다면?

정말 그런지 확인해줄 수 있는 ‘9종 계약자’가 이집트에 있다.

하지만 괴수대응연맹의 경고도 무시하고 침략전쟁을 일삼는 ‘아름다운 파라오’가 확인해줄 것 같진 않았다.

아무튼, 이래저래 황당한 진실이다.

그 찰거머리가 아니었으면 선지혜도 안 태어났을 거란 뜻이다.

“싸히어가 선배에게 관심을 보인 이유가 이 때문이야.”

“왕의 그릇?”

“응. 똑같이 왕이고 9종이라면 계약을 빼앗아올 수 있어.”

“그건 와이츠의 계획인가?”

아니더라도 딱히 중요하지 않지만 말이다.

정말 어울리지 않게 부끄러워하며 선지혜가 대답했다.

“그렇긴 한데 나도 관심이 무척 많아.”

“...한 번만 물을게. 왜?”

“흡혈귀 왕비 선지혜! 상상만으로도 팬티가 축축하게 젖어드는걸!”

“제발 봐줘….”

이 아가씨는 아주 멀리(!) 부정적(?)으로 내다보는 것 같다.

작년까지만 해도 4종 괴수 하나에 빌빌거리던 사냥꾼에게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쫓아가는 것조차 버겁다.

4급 사냥꾼이 양산된다고?

생일파티가 끝난 지 한 달도 안 지났는데 세계는 너무나 빠르게 급변하고 있었다.

카르 4세는 뇌가 과열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면 박 여사님은 쭉 선유나-.”

“장모님.”

“어, 장모님 곁에 붙어있는…. 잠깐! 호칭을 멋대로 바꾸지 마.”

“사소한 건 넘어가는 게 좋을걸. 이마에 열도 있어.”

선지혜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말투로 무일의 이마에 섬섬옥수를 얹었다.

절세가인이 신경 써주면 영광으로 알아야 할 터!

하지만 카르 4세는 크게 숨을 내쉴 뿐이었다.

“아아, 집에 보내줘….”

< [23장-2] 그분이 돌아왔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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