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장-5] 왕이 지켜보고 있다. >
죽기 직전까지 ‘귀족’ 같은 말을 한다.
벌거벗은 그의 겉모습은 무일이 8년 전에 보았던 ‘오창민 수색대장’ 그대로였다. 그 많은 총탄이 쑤셔박힌 몸은 이미 멀쩡해져 있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더는 위협이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뱀페스트 후작은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흡혈로 그 죽음의 시기를 늦추고 있지만, 말하는 와중에도 계속 ‘피똥’을 싸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능력은 안 죽은 모양이군….’
백작과 후작은 한 직급 차이지만, 능력 격차는 매우 큰 모양이다.
이 넓은 휴게실 한가득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들이 밀랍인형처럼 작위적인 미소를 지은 채 사냥꾼을 쳐다보고 있다.
알몸의 그녀들 주위에는 입고 있던 옷으로 추정되는 것들이 가지런히 개어져 있었다. 옷에 달린 마크 등으로 봐서는 이 시설의 직원이나 관련자다.
평상시에는 일반인처럼 생활하다가 주기적으로 오창민을 찾아와서 피를 헌납했던 걸까.
생각을 일단락한 무일이 입술을 뗐다.
“부하들은?”
“돌려보냈다. 네 위험성을 알리기 위해서…. 라는 명분이지만, 반역을 꾀하기 위해선 전부 외부로 돌려둘 필요가 있었지. 잠시 실례.”
근처에 대기 중이던 여인이 목을 내밀었다.
단숨에 녀석을 죽인다는 선택지를 놔두고 무일은 기다렸다. 아까는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이번에 건드리면 이곳의 모든 여자가 사달 날 것 같았던 탓이다.
인질극에는 끌려다니지 않는다.
하지만 살릴 수 있는 인명을 고의로 방관하는 건 카르 4세의 ‘정의’에 어긋났다.
게다가 굉장히 신경 쓰이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호기심이란 괴물일 것이다.
‘반역(叛逆)?’
다 죽어가는 녀석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흡혈은 금방 끝났다.
피를 빨리며 황홀한 표정을 짓던 여인은 오창민이 목을 놔주자마자 주저앉듯 쓰러졌다. 그리고 주위에 대기 중인 여자들에 의해 휴게실 구석으로 질질 끌려갔다.
비린내 나는 생선처럼.
내팽개쳐진 여인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시간 끌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뭐, 좋다. 천민에게 귀족의 식사예절을 이해해달라는 건 무리겠지.”
“......”
“왕께서는 너를 눈여겨보셨고 말씀하셨다. 네 몸으로 진정한 왕이 되겠노라. 그리하여 마녀를 굴복시키겠노라고.”
카르 4세는 오창민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노려봤다.
녀석이 말한 ‘진정한 왕’이라면 하나뿐이다.
뱀페스트의 탈피(脫皮)!
숙주의 심장에 기생하는 나약한 거머리에서 벗어나 숙주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완벽한 괴수.
흡혈을 많이 할수록 숙주의 피는 붉은색에서 은색으로 변한다. 그리고 그 농도가 짙어지다가 마침내 100%에 도달하면 뱀페스트는 2가지 선택지에 놓인다.
아리따운 신부와 계약하느냐.
약해빠진 자신을 초월하느냐.
전자는 현재의 삶에 안주하며 뱀페스트로 살아가는 것이다. 무분별한 흡혈충동과 파괴본능을 계약자가 잡아준다고 할까.
후자는 기생생물의 한계를 뛰어넘는 길이다. 괴수라고 하기에는 인간 의존도가 높았던 뱀페스트가 독립하여 ‘새로운 종’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백혈구울 / 6종 특수】
뱀페스트도 최근에 본 무일이 ‘백혈구울’ 같은 걸 봤을 리 없다.
...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이건 한 번 목격한 적이 있다.
끔찍하게 안 죽는 괴물딱지였다.
그 자체도 강하지만, 생명체란 틀 안에서 팔다리를 자유자재로 바꾸고 날개와 꼬리, 뿔 등을 만들기도 해서 무척 까다로운 괴수였다.
정말 ‘만능’ 같았던 판타이탄만큼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백혈구울이 돼서 한 판 붙겠다는 뜻일까.
이 어딘가에 있을 계약자와 이어진 결속을 파기하면 된다. 붉은 빛깔이 진해진 피 농도를 봐서는 탈피하긴 틀린 것 같지만.
오창민은 고개를 저었다.
무일이 무슨 생각 중인지 다 안다는 얼굴로 답했다.
“비참한 패배를 겪었다고 귀족의 긍지마저 저버리진 않는다. 나의 왕은 그렇게 생각 안 하는 모양이지만.”
“호오~.”
“...우리가 이 나라에만 많다고 상상했다면 큰 오산이다, 천민. 수많은 나라에 있지! 그리고 그중에는 인간의 생체실험에 동참하거나 희생된 녀석들도 있고.”
“흠.”
흡혈귀 후작은 노래하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이런 말을 내게 하는지 물어볼 틈도 없이 충격적인 얘기들을 속사포처럼 고백했다.
생일파티장에서 ‘카르 4세’는 말했었다.
『이건 계약이 아니다.』
하지만 각국 대사들은 실망하긴커녕 설명이 이어질수록 짙은 흥미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하나라도 더 알아내기 위해 돈을 펑펑 쏟아부었다.
어째서 그랬을까?
그 해답을 오창민이 설명해주고 있었다.
카르 4세는 가더발트의 ‘숙주’이면서도 몸을 지배받긴커녕 역으로 괴수를 지배하여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 공식을 ‘가더발트’ 대신 ‘뱀페스트’에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정말 놀라운 답이 나온다.
“성공하기만 한다면 통제가 가능한 뱀페스트 군대가 완성되겠지. 허! 천민의 지배를 받는 귀족이라!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래서 결론은?”
카르 4세는 살짝 놀라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괴수의 힘을 쓸 수 있는 사냥꾼들이 늘어난다는 건 인류에 보탬이 되는 일이다. 악용의 소지가 있지만 그건 뭐든지 그렇다.
물론, 괴수 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9종 괴수’를 제외한 그 어떤 존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까닭이다.
그런데 힘만 계속 착취당한다면?
분노하는 게 당연하다.
“당연히 실패했다. 주도권이 숙주에게 넘어갔지만, 그 숙주가 미쳐버리면 아무짝에도 쓸모없지 않은가.”
“아!”
무일은 단번에 이해했다.
뱀페스트는 ‘여성의 피’를 빨아먹고 ‘괴수의 피’를 생산한다. 그리고 그 농도가 진해질수록 강해진다.
하지만 잊어선 안 된다.
‘괴수의 피’에 감염된 인간은 미쳐버린다는 사실을!
거의 모든 괴수가 품는 살인충동(殺人衝動)에 빠져버리면 카르 4세조차 [자결]뿐이 달리 방도가 없다.
이건 생각해볼 필요도 없다.
예외가 있다면?
인간 중에는 ‘괴수의 피’에 감염돼도 안 미치는 특수체질이 있다.
오창민은 이 부분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불쾌하게도 천민 중에는 귀족을 자처하는 부류가 있지. 그들은 미치지 않고 우리의 힘만 빼앗아 쓰더군.”
“사족이 기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기다릴 줄 알아라, 천민.”
하지만 반쪽짜리 성공이었다.
특수체질은 살인충동을 일으키는 ‘괴수의 피’에 내성이 생기는 게 아니라 ‘정화(淨化)’에 가까운 원리였던 까닭이다.
끊임없이 여성의 피를 빨지 않으면 ‘괴수의 피’는 옅어지다가 끝내 체내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끊임없이 여성의 피를 빨아야 한다….
무일은 눈을 크게 떴다.
바로 눈앞에서 오창민이 그러고 있는 탓이다.
“너…!”
“이제야 눈치챘군. 하지만 본 후작은 좀 더 오묘한 상황이지. 주도권은 내게, 너희의 표현을 쓰자면 괴수에게 있고 숙주인 오창민은 끈질기게 간섭하고 있다. 참으로 오묘한 관계이지 않은가.”
오래전의 일이다.
원한이 사무친 오창민은 카르 4세를 쓰러트리기 위해 ‘실패작’을 따라 먹었다. 여기에 ‘카르 4세의 강함’이 있을 거라고 멋대로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순서나 분량이 뒤죽박죽이라 제대로 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흡혈귀에게 몸을 빼앗겼다. 하지만 ‘불량식품’의 효과가 전혀 없진 않았던 덕분에 어정쩡한 상태에 놓이고 말았다.
뱀페스트의 지배는 받지만 간섭할 수 있는 권리!
지옥에서 기어 올라왔다.
이건 그런 의미였다.
그 덕분에 오창민은 카르세리안 레이소에 베이고도 ‘쇼크사’하지 않고 여태 버틸 수 있었다. 반쯤은 인간인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까지는 카르 4세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게 집착했군.”
전 수색대장 오창민은 카르 4세에게 짙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뱀페스트가 숙주의 소원을 들어주는 ‘착한 괴수’란 얘기는 전 세계를 다 뒤져봐도 금시초문이다.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속사정이 있었다.
“절대적인 왕의 명령을 어기고 너를 죽이려 했던 것도 이상한 숙주를 만난 영향이지. 덕분에 이렇게 반역도 꾀할 수 있으니 불만은 없다만.”
“그 몸으로?”
“직접 내 손을 쓰는 건 무리다. 설마하니 그런 천박한 수를 쓸까. 오창민은 네가 끔찍하게 죽길 바라고 있다.”
“이 여자들로 나를 협박할 생각이라면 포기하는 게 좋을걸.”
무일이 아직 손을 쓰지 않은 이유는 하나뿐이다.
왕을 포함한 다른 귀족의 정보를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서다.
여기에 굳이 덧붙이자면 ‘인질’들을 쉽게 살릴 수 있다면 간단한 요구조건은 수용해서 살리겠다는 ‘정의’다.
“물론,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하마. 본 후작은 애완동물들을 사랑한다. 순종하든 반항하든 아름다운 암캐들은 참 매력적이지 않은가.”
“......”
흡혈을 중지한 오창민은 얼굴을 포함한 몸 전체가 창백하고 홀쭉했다. 말하면서도 흡혈로 시간을 벌고 있지만, 그것도 곧 한계일 것 같다.
이미 체내의 피는 치사량 이상 빠져나간 상태였다.
그럼에도 백수십 명에 달하는 가축들에게 걸린 ‘최종명령’은 풀릴 기미가 안 보였다.
“천민. 너희가 뱀페스트라고 부르는 우리의 번식법을 아는가.”
“...교미(交尾)지.”
무일은 떨떠름한 얼굴로 답했다.
계약자를 선택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한 ‘성체(成體)’ 뱀페스트는 숙주의 남근(男根)을 통해 인간 여성의 자궁에 알을 심는다.
그걸로 끝.
알은 자궁에 착상해있다가 월경(月經) 때 나오는 ‘여성의 피’를 몇 차례 흡수하며 최소한의 ‘괴수의 피’를 확보하고 부화한다.
이때가 뱀페스트의 원형인 ‘거머리’ 형태다.
뱀페스트는 그 상태로 계속 자궁벽에 달라붙은 채 잠복해있다가 다른 남성의 요도(尿道)가 보이면 침투한다.
숙주를 바꿀 때는….
마찬가지로 요도를 통해서 이동한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정직한 답변이군. 아니면 그뿐이 모르는 건가.”
“음?”
“왕족과 귀족에게는 각자마다 고유의 각인이 있다.”
고상하게 ‘각인’이라고 했지만, 생물학적으로 보면 ‘포자(胞子)’다. 숙주의 체액(體液)에 함유되어 있으며 이것들이 뭉치면 ‘알’이 된다.
뱀페스트는 흡혈한 여성의 상처 난 목에 포자를 주입한다.
그렇게 해서 ‘가축’을 지배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포자는 혈맥을 통해 심장과 뇌에도 침투하여 각인되기에 제거할 방법은 없다. 있다면 ‘각인의 주인’을 제거하여 무용지물로 만들거나 ‘다른 각인’으로 덮어씌우는 것뿐.
다른 해결책이라면 시간이 답이다.
호흡, 배설, 목욕, 월경, 타액 등의 방식으로 아주 조금씩 체내에 퍼진 포자가 배출되는 것이다. 얼마나 걸릴지는 몸에 침투한 양에 따라 다르다.
카르 4세는 눈을 크게 떴다.
드디어 오창민의 의도를 깨달은 탓이다.
“호흡기 감염?!”
뱀페스트 후작은 다 죽어가는 얼굴로 씩 웃었다.
시간은 충분히 끌었다. 살짝 걸리는 부분이라면 프로사냥꾼의 [예감]이 ‘위기’로 판단하지 않았다는 정도일까.
[예감]이 미리 경고했다면 계획하자마자 들통 났을 것이다.
하지만 감염은 확실히 마쳤다.
【뱀페스트 / 2종 특수】
이 학명에 들어가는 ‘페스트(pest)’는 멋지라고 붙은 게 아니다.
모든 괴수를 통틀어 봐도 개체 수가 많고 번식도 무시무시한 종은 뱀페스트가 독보적이라서 따온 것이다.
이 휴게실에 가축들을 모아놓은 것도 감염을 위한 연출이었다.
그녀들이 호흡하며 내뿜은 포자는 카르 4세의 기도(氣道)를 통해 폐로 스며들어 뭉치고 뭉쳐 ‘알’이 되었다.
물론, 이대로는 부화하지 못한다.
엄연히 남성인 카르 4세의 체내에서는 부화 조건인 ‘여성의 피’를 구할 방법이 없는 까닭이다.
그래서 이 번식법도 원래는 여성을 상대로 한다.
여성의 폐에서 부화한 ‘거머리 괴수’는 자궁으로 이동한 후에 남성의 생식기가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첫 과정만 번거롭고 나머지는 같다.
여태 이 번식법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다.
“너는 곧 숙주가 된다.”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난 남자다.”
남성의 폐에서 형성된 알은 부화할 수 없다. 이대로라면 굳이 내시경으로 찾아 끄집어낼 것도 없이 며칠 안에 자연 소멸할 것이다.
카르 4세의 [예측]에도 불구하고 오창민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저 ‘알’은 특별하다.
얼마 안 남은 목숨과 바꿔치기한 정통후계자인 탓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반역을 꾀한 뱀페스트 후작답게 후계자도 ‘왕의 그릇’으로 만들었다.
죽음도 빗겨가는 ‘불사의 왕’.
그런 왕이 부화하지 못해서 죽는다는 건 웃기지 않는 농담이다.
오창민은 근엄하게 외쳤다.
“나의 왕이 선택한 천민이여!”
“......”
“나의 반역(反逆)과 원한(怨恨)!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이루어-!”
카르세리안 레이소가 오창민의 심장에 박혔다.
원하는 ‘목적’을 이룬 후작이 ‘인질’들에게 내려둔 ‘최종명령’을 회수했다는 걸 [예감]하자마자 찌른 것이다.
『내가 죽으면 날뛰어라!』
이 최종명령이 그대로 수행됐다면?
가축인 그녀들은 망설임 없이 거리로 뛰쳐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지배의 효력이 다하거나 죽기 전까지 서울에 민폐와 충격을 줬으리라.
카르 4세는 불쾌감을 담아 시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엔딩(ending)은 짧게 해라.”
< [22장-5] 왕이 지켜보고 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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