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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처럼-93화 (93/287)

< [22장-4] 왕이 지켜보고 있다. >

카르 4세의 앞을 가로막고 있던 콘크리트 잔해가 폭탄에라도 맞은 것처럼 좌우로 퍼지며 흩날렸다.

그 틈에 코트를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돌파했다.

통로를 튼튼하게 지은 덕분인지 생각보다 덜 무너져 내려서 다행이라고 안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잔해에 충돌해서 볼썽사납게 뒤로 자빠지는 일은 없었다.

웬만하면 수로를 막고 있는 잔해를 치워두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빨리 쫓지 않으면 사후보고가 되는 수가 있다.

무일이 걱정하는 건 ‘가축’이라고 불리는 여성들의 안위다.

‘흡혈 양을 조절 안 할 수도 있어.’

죽지 않을 만큼만 조금씩 피를 빨던 오창민이 한계까지 흡혈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녀석이 급격히 강해질 뿐만 아니라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한다.

사태가 커지고 있다.

흡혈귀들 입장에서는 ‘목장(!)’을 만들고 평화롭게 지내는 자신들을 핍박하려는 걸로 밖에 안 보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반응으로 놈들이 대항할까?

숙주의 영향을 많이 받으니 ‘폭력적인 인간’쯤으로 해석해도 될 터.

꼭꼭 숨던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리라 짐작된다.

파앙!

직선 통로에서 흡혈귀 하나가 라스베리터 람부스를 쐈다.

피할 곳이 없다는 사실에 혀를 찬 무일은 질주를 멈추고 한 발 뒤로 물러서며 탄환을 카르세리안 레이소와 칼집 쌍수로 쳐냈다.

사람의 반사신경으로 따라 할 수 없는 경이로운 움직임.

새삼 과거를 떠올랐다.

황소개구리-, 프로칸(!)이 올챙이 적을 생각하는 거랑 비슷했다.

‘나도 참 용하네.’

이런 녀석들이 바글거리는 서울에서 용케 죽지 않고 살았다.

라스베리터 람부스 같은 ‘6급 대량살상무기’를 사용하는 암살자 등을 만났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테니 말이다.

무일은 물속으로 잠수해서 상대적으로 느릿느릿 나아갔다.

산탄총이 다시 한 번 조준되고 곧장 발포됐다.

하지만 그건 흡혈귀가 그의 속도를 ‘느려졌다.’고 [예측]하도록 한 속임수.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에 이미 미끄러지듯 쭉 나아간 상태였다.

멍게, 해삼, 말미잘….

동해에서 그것들을 잡는다고 키운 수영 실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컥?!”

물속에서 튀어 올라 순식간에 흡혈귀를 벴다.

이 거리에서 연발하면 카르발트라도 무사할 수 없기에 정확히 심장을 노렸다.

그 흔한 ‘유종의 미’도 없이 즉사!

“좋았어.”

부서지거나 회수된 라스베리터 람부스가 아닌 멀쩡한 녀석을 구했다. 하지만 금세 눈살을 찌푸렸다.

여분 탄창이 없다!

어떻게 된 일인가 봤더니 [예감]으로 죽음을 예견한 뱀페스트가 남은 탄알과 탄창을 물속에 던져넣은 것이다.

지독한 놈들….

중얼거리며 땅에 떨어진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쥐어 오른쪽 허리에 맸다.

이렇게 해서 쌍수.

위치추적기가 내장됐을 놈들의 무기는 그다지 쓰고 싶지 않지만, 330억을 버리고 가면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이다.

“여긴 못 지나간다.”

“네 무덤이다, 카르 4세!”

거의 다 따라잡았다고 느꼈으나 이번에는 가면특공대 둘이 앞을 가로막았다. 성가시게도 지뢰와 어뢰를 깔아놨다. 덤으로 시차 공격을 고수한다.

이런 RPG 게임 형식의 다단계 난이도는 좋아하지 않지만, 길이 한 갈래고 지하라서 달리 선택지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시간 싸움.

여기서 고민하며 안주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탁!

다시 한 번 ‘스프라히츄 폴리곰’에서 EMP가 방출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재래식 어뢰와 지뢰인 듯 반응이 없다. 그렇다면 망설일 이유가 없다. 물리적인 충격을 줘서 터트리면 그만이다.

벽을 도려내서 바위를 공수한 무일은 괴수를 향해 냅다 던졌다.

이건 예상 못 했던 걸까?

피한다는 선택지를 놔두고 라스베리터 람부스의 방아쇠를 당긴다.

콰과광!

기껏 해봐야 튼튼한 콘크리트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바위가 터지며 낸 소리가 아니었다.

잔해가 흩어지며 주위에 어뢰와 지뢰를 건드린 것이다.

숨 한 번 들이킬 수 있을지 미지수인 짧은 시간에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땅이 흔들릴 정도로 큰 폭발이 일었다.

두 흡혈귀는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죽을 각오로 이 자리에 섰지만, 매몰(埋沒)되어 ‘살았지만 산 것 같지 않은 상태’가 되고 싶진 않은 까닭이다.

하지만 괴수보다도 두려움을 모르는 인간이 있었다.

무너지기 시작한 통로를 향해 망설임 없이 뛰어든 카르 4세는 두 자루의 카르세리안 레이소로 앞을 막는 모든 걸 베며 전진했다.

파앙!

그 무시무시한 사냥꾼의 접근을 [예감]하고 발포된 산탄총은 수많은 잔해에 가려져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했다.

그 틈에 모습을 드러낸 카르 4세. 하지만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시차를 둔 옆의 흡혈귀가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모든 걸 베어버리는 카르세리안 레이소가 총구와 총신을 통째로 갈라버리는 통에 내부폭발을 일으켰다.

이 거리에서 무슨 수로?!

간단하다.

무인(武人)의 생명이자 배우자며 여자친구인 검을 작살처럼 던지는 만행과 기행은 카르 4세가 오랫동안 애용해온 ‘기술’이다.

실패하면 비무장이 되어 끝장인 외줄 타기.

하지만 이 프로사냥꾼은 단 한 번도 실패했던 적이 없었다.

“크악!”

내부폭발을 일으킨 탄창 안에 들어있는 무수히 많은 탄알과 쇳가루가 두 흡혈귀를 집어삼켰다.

아무리 재생력이 우수한 흡혈귀라도 이 거리에서 맞으면 심장이고 뭐고 남아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당연히 그 속수무책인 빈틈을 카르 4세는 파고들었다.

수확하듯 두 뱀페스트의 목을 베고 여자친구를 3자루째 탈취했다!

이걸로 990억.

어떻게 나를 놔두고 ‘양다리’를 걸칠 수 있느냐고 조잘거리는 ‘옛날 여친(!)’의 투정은 가볍게 흘려 넘겼다.

너무 뭐라 하지 말라고.

카르세리안 레이소가 산처럼 쌓여 있더라도 그 안에서 ‘낡은 여친(!)’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 쓴 골동품 취급이라고 또 쫑알쫑알….

환청이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서 걱정이다.

‘진짜 여자친구를 사귀어야 해!’

겉모습은 이래도 확실히 나이를 먹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이게 친구들이 경고한 ‘노총각 저주’임이 틀림없다.

선배가 이런 끔찍한 정신병을 앓고 있든 말든 ‘결사반대’를 외치는 선지혜 때문에 그저 나오는 건 궁상맞은 한숨과 잿빛 같은 신세 한탄뿐이다.

유키 짱도 은근히 복병이다.

그녀가 멋대로 바꿔놓은 스마트폰 배경화면을 본 수많은 여인이 말없이 그에게서 거리를 벌리며 떠났다.

...나는 남자답게 사는 걸까?

철학 같은 자문을 하는 사이에 끝이 보였다.

<침입자 발견! 침입자 발견!>

<2종 괴수를 제거합니다!>

<침입자 퇴치! 침입자 퇴치!>

하지만 ‘역시나!’라고 할까.

한강의 진입로를 쇠창살로 막아놓더라도 뚫고 들어오는 침입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걸 저지하는 로봇도 당연히 있어야 맞다.

평소에는 이 구역을 청결도를 유지하는 청소로봇이지만, 비상시에는 강력한 살상병기로 변하는 것이다.

‘정화시설 통제권을 빼앗겼군.’

빼앗긴 건지 공모인 건지는 당장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중요한 건, 카르 4세의 가더발트를 ‘수호자’가 아닌 ‘야생괴수’로 판단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청소로봇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슬슬 한계인데.

무일은 가더발트를 해제했다.

이 앞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밑천을 드러내는 것보다도 여러모로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순 없다.

다행히 괴수퇴치로봇이다.

그 가격대성능비가 너무 떨어져서 고대의 유물로 전락한 기계다.

값싼 MID 기술로 보강하긴 했지만, 괴수가 한 방 후려치면 적게는 수십억, 많게는 수백억이 증발하는 깡통에 투자하는 경영인은 없다.

“타핫!”

기합을 잘 넣지 않는 무일이 돌진하며 외쳤다.

청소로봇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마(半人半馬) 켄타우루스처럼 상반신은 인간의 상체를 흉내 냈고 하체는 4족 보행을 하고 있다.

어디까지나 시간 벌이용.

계약자와 사냥꾼이 와줄 때까지 버티기 위해 고안됐다.

하지만 무일은 멈칫했다.

그걸 고려하더라도 그 숫자가 너무나 많았던 탓이다.

‘다른 통로에서 전부 끌어온 건가!’

한강 물을 끌어들이는 수로(水路)가 여기 하나뿐일 리 없다.

흡혈귀들은 적재적소에 산개해있던 모든 청소로봇을 이곳으로 호출한 게 분명했다. 카르 4세의 발목을 잡겠다고 여러모로 민폐를 끼친다.

게다가 저 로봇들은 튼튼하고 힘도 꽤 좋다.

괴수대응로봇이니 당연한 거겠지만, 카르발트를 해제한 무일에게는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차라리 공격해달라고!

이 또한 오창민의 노림수일 터.

전부 상대했다가는 온종일 여기에 묶여있게 될 것 같다고 판단한 무일은 케이크 자르듯 정교하게 벽을 파내기 시작했다.

양손에 쥔 카르세리안 레이소.

삼각형 형태로 벽을 도려내서 틈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깡통은 어쩔 수 없는 깡통이네.”

청소로봇의 목적은 괴수 토벌이 아닌 전진을 저지하는 것이다. 침입자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면 굳이 공격할 이유가 없다.

방어진만 더욱 튼튼하게 구축하며 멀뚱멀뚱 구경할 뿐이다.

그런 기계들의 협찬(?)에 힘입어 다른 통로로 이어진 길을 뚫는 데 성공했다.

역시!

문어발처럼 모든 수로가 정화조에 가까워질수록 촘촘히 붙어있을 거란 [예측]이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하지만 로봇들은 여전히 미동 없이 서 있다.

주어진 구역만 지키면 그만이란 태도가 역력했다.

팟!

다시 가더발트를 착용한 무일은 힘차게 달렸다.

구멍 뚫는다고 시간을 허비했다.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라스베리터 람부스의 방아쇠 한 번만 당겨도 민간인 수천이 죽는 건 일도 아니란 점을 상기하면 무시 못 할 시간이다.

그리고 마침내,

캄캄한 하수구가 끝나고 밝은 건물 안쪽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그를 반겨주는 건 가면특공대가 아니었다.

넓은 동공(洞空)에는 ‘가축’들이 넓게 산개해 있었다.

“사, 살려주세요! 몸이 멋대로 움직여요!”

“죽고 싶지 않아! 싫어! 싫어!”

“노예처럼 부리더니 이젠 죽으라고?!”

“비참해! 이게 뭐야! 정말 뭐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들이 온몸에 폭탄을 주렁주렁 매달고 있었다. 그 숫자는 결코 무시 못 할 수준이었다.

못해도 백 명 안팎. 그리고 계속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녀들의 손에는 가면특공대가 넘겨준 무기로 짐작되는 카르세리안 레이소와 라스베리터 람부스가 힘겹게 들려 있었다.

그렇겠지. 추적장치가 의무적으로 내장된 저 무기들은 소지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흡혈귀란 걸 알리는 꼴이니 포기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다.

별 위협이 안 되는 권총부터 위험한(그녀들에게) 수류탄까지 온갖 무기를 최소한 하나씩은 들고 있었다.

공통점은 역시나 알몸 위에 보란 듯이 두른 폭탄들. 그리고 심한 빈혈증세를 보이며 팔다리를 후들후들 떨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때, 안내방송이 들렸다.

(한무일. 후작의 성에 온 그대를 환영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주지육림(酒池肉林) 아닌가? 본 후작이 엄선해서 모으고 관리해온 컬렉션들이지.)

클라이맥스 사족이 너무 길다고 무일은 생각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오창민이 숨어있으리라 짐작되는 곳으로 뛰어올랐다.

죄 없는 여자들을 폭탄으로 이용하는 녀석에게 시간을 계속 줘봐야 득 볼 게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녀석은 이 많은 여자를 절대 죽이지 않는다.

보는 순간, 그냥 알 수 있었다.

뱀페스트가 어렵게 모은 가축을 죽이는 행위는, 수호자가 살기 위해 계약자를 공격하는 것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일인 까닭이다.

가축을 가혹하게 대하긴 해도 파괴하거나 망가트리진 않는다.

그게 뱀페스트란 거머리 괴수의 가치관.

틀렸다면 꿈자리가 뒤숭숭해지겠지만, 원래부터 카르 4세는 인질극을 보면 협상보다는 복수하는 쪽을 택하는 냉정한 사냥꾼이다.

“거기냐!”

카르발트는 넓은 정화조 시설 높이 뛰어올랐다.

따라올 줄 알았던 그녀들은 마네킹처럼 서서 수치심, 두려움 등으로 얼룩진 얼굴로 울거나 하소연할 뿐이다.

손에 든 권총 등은 장식품인 것처럼 꿈쩍 않고 있다.

오창민은 오발로 가축의 몸에 두른 폭탄이 연쇄적으로 터지는 걸 걱정한 것이다. 아무리 정밀하게 지배한들 판단하고 움직이는 건 비전투원인 그녀들인 까닭이다.

쾅!

중앙통제실 옆에 위치한 휴게실이었다.

무일은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민간인 출입이 엄격히 금지된 정화시설에서 거머리가 인간을 사육하고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예상대로 오창민이 있었다.

뱀페스트 후작은 여인의 목에 박은 송곳니를 빼며 말했다.

“한무일. 그래서 넌 천민이란 거다. 눈치껏 기다릴 줄 알아야지.”

< [22장-4] 왕이 지켜보고 있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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