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장-3] 왕이 지켜보고 있다. >
카르 4세가 오창민을 방패 삼고 흡혈귀 둘을 쓰러트린 흔적만 보면 여의도 괴수대응본부 방향으로 빠져나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는 뒤편으로 높게 뛰어올라 한강으로 잠수한 상태였다.
물속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었다.
‘이건 예상 밖인데.’
오창민의 전술은 무일에게 매우 껄끄러운 방식이었다.
방어, 오직 방어만 한다!
차라리 깔끔히 후퇴나 도주라면 모를까, 방어는 괴수에게 없는 선택지였다. 그랬기에 무일은 여태 [반격]만으로도 살만했다.
그건 인간이랑 싸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인간끼리의 싸움은 애초에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막을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그런데 오창민이 그 상식을 깼다!
육체 능력은 무일보다 낮은 5종으로 확실히 밀리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예감]과 [예측]에서도 격이 많이 떨어졌다.
그랬는데 [격발]로 생존본능을 증폭하고, 두꺼운 외투에 가려진 근육의 움직임을 [투시]로 읽어내면서까지 공격이 아닌 방어를 택했다.
거기에 대등한 무기.
아니, 틈을 주면 근거리에서 산탄총 ‘라스베리터 람부스’를 맞고 비명횡사할 수 있으니 부담은 배로 컸다.
“후아! 수백억쯤 날릴 뻔했네!”
무일은 참았던 숨을 내뱉으며 외쳤다.
선지혜의 사랑(악의)이 묻어난 파자마 같은 바지도 겉보기랑 달리 140억이나 한다. 영국의 로열기사만 걸칠 수 있다는 예복이 250억, 안에 입은 상의도 180억쯤 한다.
며칠이나 입었다고 날린단 말인가!
인류를 위한 길도 좋지만, 일찍 은퇴하기 싫으면 ‘손해 보는 용사’는 피해야 한다.
슬프고 서럽지만….
6급 사냥꾼이라도 돈이 있어야 싸울 수 있다.
계약자 수준의 대우를 받고는 있지만, 진짜 계약자가 쓰는 돈은 정말 얼마 안 된다. 끽해야 하루에 30만 원?
카르 4세의 장비를 지원, 보수해주기에는 천문학적으로 부족하다.
그때였다.
(꼬마. 듣고 있겠지? 듣고 있는 게 좋을 거야.)
이 오만한 목소리는….
무일은 손목시계를 향해 공손히 답했다.
(네. 잘 들립니다, 여왕님.)
바람의 여왕, 박선영이었다.
엘로엘 계약자는 고저 없이 말했다. 지울 수 없는 증오를 담아서.
(좋아. 지금부터 나는 서울로 지원 가는 척하면서 다시 몸을 돌려 내 친구를 보호할 생각이다. 흡혈귀. 아주 비열하고 저급한 놈들이지.)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섭섭하게 생각 말렴. 놈들은 내 친구의 피를 광적으로 원하거든.)
(아…. 네.)
이 대한민국에서 뱀페스트가 가장 흡혈하고 싶은 ‘가축’이 있다면 선유나일 것이다.
8종 계약자였던 아름다움.
선지혜를 낳기 위해 순결을 포기했지만, 그건 난잡한 생활태도의 결과가 아닌 애국심과 모성애의 발로였다.
남편이 복상사로, 정기고갈로 결혼생활 한 달을 못 넘기고 죽었다는 일화는 이미 전설이 됐다.
얼마나 아름답고 능수능란하기에?
남자의 손길이 오랫동안 닿지 않은 ‘미(美)의 성역’이다.
한무일이 조국에서 가장 존경하는 여성 0순위.
『대한의 국모, 선유나』
선유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한다면 박선영을 비난할 수 없다. 계약자도 아닌 그녀가 더는 ‘인류에 불필요’할지라도 말이다.
자신을 끔찍이 사랑해주는(괴롭히는) 아리따운 따님을 낳아주신 장모님 같아서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선유나는 쉴 자격이 있다.
이 반도에서 태어난 사람이라면, 양심과 예의를 안다면 그 누구라도 그녀를 욕보이는 언행을 해선 안 된다.
한국인이 누리는 유복한 삶은 그녀의 희생을 발판으로 세워졌으니까.
박선영은 벌써 자기 할 말만 마치고 통화를 종료했다.
한국보다 친구의 안위를 우선시하는 태도는 어떻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서면 누구나 갈등할 것이다.
그저, 여왕님은 망설임이 없었을 뿐이다.
카르 4세는 물 위를 달리며 여자친구를 힐끔 봤다.
“약발이 다 됐나?”
심장은 빗겨갔지만, 오창민을 정확히 벴다.
안 죽고 일어난 녀석이 ‘내게 무슨 짓을 한 거냐!’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른 걸로 봐서는 아주 효과가 없진 않았던 것 같지만.
놈이 살아있다는 게 중요하다. 후환을 남겨두지 않기 위해서라도.
슬슬 문세웅과 이승필 쪽도 걱정됐다.
여태 연락이 없다는 건 무사하다는 뜻일까.
(타로. 그쪽 상황은?)
(임길석 수색대장이 간부들을 이끌고 자취를 감췄습니다! 본부는 현재 EMP로 거의 모든 업무가 마비된 상태입니다!)
(...괜히 건드렸나 싶은 대답이군.)
수색대가 살짝 맛이 갔다는 조짐은 있었다.
서울은행 본점 테러 사건.
그 수색대원들은 뱀페스트가 아니었지만, 6종 계약자를 망설임 없이 살해하려 했다.
무일은 여태 그 점을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냥꾼이 계약자에게 불만을 품었던 게 하루 이틀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괴수의 부추김 혹은 이간질이 있었다면?
동료가 아닌 ‘수색대’라는 사냥꾼 전력을 줄일 의도였다면?
계약자를 잃은 6종 괴수 썬피스트의 난동으로 서울이 혼란에 빠졌다면 그 피해는 정말 심각했을 것이다.
사막의 펭귄, 썬피스트가 도시에서 약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6종.
뱀페스트 무리를 단숨에 쓸어버린 까까오가 덤빌 엄두를 못 내는 고위괴수다.
‘이렇게 따지고 보니…. 송년회도 수상했어.’
어째서 카르 4세를 참석 못 하게 했을까?
증인의 안전을 위해서란 명분을 붙인 ‘규정’이라서 따르긴 했지만, 그렇다면 위험한 동해로 가는 것도 말렸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다.
흡혈귀들은 ‘카르 4세’가 자신들을 알아보는 걸 경계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감 좋은 사냥꾼을.
실제로도 그랬다.
무일은 순수한 인간과 흡혈귀를 분간할 수 있다. 그가 ‘최은비 버프’라고 부르는 현상으로 오감이 부쩍 늘어난 이후부터다.
그렇다면 이 이전에는 어땠을까?
처음 만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분간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이라면 미묘하게 달라진 언행 등으로 눈치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짐작이지만….
흡혈귀들은 그걸 경계한 게 아닐까.
송년회는 괴수대응본부 간부들이 모두 모인 자리. 불참한다고 이상하게 보는 사람은 없지만, 사냥꾼 하나 때문에 빠진다는 건 ‘귀족’으로서 바람직한 모양새가 아니다.
그러니 배척한다.
카르 4세는 ‘왕의 숙주(예정)’. 시비가 붙어 죽이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반대상황에 와있다.
걸리면 자신들이 죽는다!
(본부에서는 현재 모든 관계자를 대상으로 혈액검사실시에 대한 찬반(贊反) 여부로 엉망진창입니다. 싫어서 반대한 건데 빨갱이로 모냐면서…. 하아….)
이승필의 짙은 한숨이 모든 상황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죽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피를 조금 뽑는 검사일 뿐인데 그조차도 불쾌하다면서 거부하는 인사들이 있는 모양이다.
감히 나를 의심해?
대충 이런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진짜 흡혈귀들이 그들 뒤에서 살짝살짝 부추기며 도망칠 궁리를 하는 전경이 훤히 예상됐다.
이래서는 본부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다.
오창민의 위치라면 이미 [예감]으로 잡아낸 상태다. 하지만 여의도 한가운데로 들어갈 때까지 가만 놔뒀다는 게 또 문제다.
‘500억쯤 손해 볼 각오하고 싸웠어야 했나.’
오창민이 죽지 않을 줄은 몰랐다. 벤 순간부터 [예감]은 녀석을 ‘위협’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탓이다.
잔챙이들도 대장인 녀석이 죽으면 전의를 상실하고 뿔뿔이 도망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무언가 안 좋은 꿍꿍이를 벌이려는 것 같다.
그렇게 먼 거리는 못 갔다.
서울 인구가 파주시로 많이 빠지긴 했지만, 여의도만은 여전히 자동차 한 대 지나가기 퍽퍽할 정도로 붐비고 있다.
그 난리를 쳐놓고 어떻게 간다는 걸까?
해답은 가까이에 있었다.
“하수구?”
자존심 강하고 귀한 척하던 뱀페스트치고는 선택지가 독특했다.
아니, 평범한 하수구가 아니었다.
한강의 물을 끌어다가 식수로 전환하는 정화조(淨化槽)로 향하는 길이다. 아무도 침입 못 하도록 쇠창살로 막아놨지만, 좌우로 휘어졌던 흔적이 남아있다.
인간이 들어올 수 없도록 말이다.
그 즉시, 세계에서 3번째로 까칠한 여자친구로 베려고 했지만, 이 또한 영 신통치 않다.
...평범한 쇠창살이 아니란 건가.
수천만 시민이 먹는 식수를 관리하는 장소로 가는 통로답다. 한강에 서식하는 피라미 괴수가 침입하지 못하도록 막아놓은 것이다.
끼이익.
하지만 6종에 버금가는 카르발트의 근력마저 어쩌진 못했다.
엿가락처럼 휘어진 쇠창살 사이로 들어간 무일은 도로 원위치시킨 후에 녀석들의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주기적으로 청소로봇이 관리하는지 깨끗했다. 이 정도면 흡혈귀들이 비위 상해서 못 지나간다는 소리는 안 할 정도는 됐다.
부상당한 후작을 부축하며 후퇴하는 가면특공대.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녀석들이 길에 수작을 부려놓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쯧. 수색대 용품을 가지가지로 뿌려놨군.”
패색이 짙은 전장에서 빠져나갈 시간을 벌기 위해 고안한 ‘더미 로봇’이다.
이거 이름이 뭐였더라?
생각 안 나지만 괴수에게 자동으로 달려들어 끈적한 점액질을 뿌린다는 것만은 안다.
크기는 주먹 크기.
휴대하기에는 거추장스럽지만, 괴수가 싫어하는 화장품 향기(악취)로 떡칠해놓은 화학약품은 큰 도움이 된다.
모든 괴수에게 통하는 건 아니지만, 그 냄새를 벗겨내기 위해 멈칫하거나 씻어내려는 행동을 보이는 녀석들도 분명 있다.
하지만 무일에게는 냄새보다 점성(黏性)이 문제였다.
몸이 가벼운 그는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묶이진 않더라도 상당한 방해를 받을 게 자명한 까닭이다. 이건 근력이 높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탁!
카르 4세는 왼쪽 발목에 채워진 발찌를 신발 끝으로 툭 쳤다.
그 가벼운 행동만으로 모든 로봇이 작동을 멈췄다.
EMP 방출!
전자기펄스 방지코팅이 안 된 전자기기라면 무엇이든 무력화시키는 이 발찌는 헌병대에서 주로 쓰지만, 살인첨부업자들이 밀거래로 더욱 자주 애용한다.
그래서 탐탁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든다고 목숨을 내놓는다는 건 더욱 말도 안 된다.
『스프라히츄 폴리곰(거북한 전파 뚱뚱이)』
그래서 고지식한 카르 4세치고 드물게 융통성을 발휘한 게 이 발찌였다.
전자 생명체라고 할 수 있는 ‘판타이탄’과 ‘오토러스’에게조차 통하지 않는 물건을 비싼 돈 들여 샀다!
무지막지한 회복력과 범용성, 변신능력으로 무장한 괴수를 상대로 무슨.
4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가상세계 하느님’ 판타이탄이 인류를 향해 먼저 EMP를 뿌리고 다녔다고 하니 말 다했다.
하지만 뱀페스트도 고단수였다.
카르 4세의 장비쯤은 미리 파악해둔 상태였다.
쾅, 콰광, 쾅쾅!
전자기펄스에 노출되자마자 무력해지는 부류도 있지만, 문제가 생기면 바로 자폭하도록 해놓은 장치도 있다.
놈들이 뿌려놓은 휴대용 지뢰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 좁쌀 크기의 지뢰는 문세웅이 애용하는 녀석이다. 딱히 놀라울 것도 없다. 헌병대뿐만 아니라 수색대에서도 자주 쓰는 장비이기 때문이다.
역시, 인간의 무기를 쓰는 적은 성가시다.
그래서 ‘스프라히츄 폴리곰’를 구매한 거였는데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맞아버리면 회의감마저 들 수밖에 없다.
다치진 않았지만, 통로가 무너지며 막혀버렸다.
“...수 싸움에서 통쾌하게 졌네.”
전 수색대장 오창민이 8년 전의 패배 이후부터 쭉 노력해왔다는 방증이다.
카르 4세를 쓰러트리기 위해 분석하고 이렇게 패배했을 때의 방책까지 마련해둔 걸 보면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장비를 구매한 건 최근. 그래서 아는 사람도 드물다.
그런데 오창민은 예의주시하고 있었던 것처럼 바로 대비책을 마련했다.
그게 좀 사나이답게 정정당당한 방식이었으면 좋으련만…. 천성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성장이 멈췄다는 걸 어째서 모르는 걸까.
뭐, 좋다.
함정에 빠트려서 이기겠다는 건 좋다.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 상대를 가려가며 해야 하는 법이다.
괴수를 함정에 빠트리는데 그 재능을 발휘하면 좋을 텐데….
아쉬움인지 한탄이지 모를 숨을 내뱉은 무일은 칼집째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들었다.
‘막으면 부술 뿐.’
늘 홀딱 벗겨서(!) 휘두르던 여자친구에게 옷을 입혀 더욱 무게를 가중시키고 튼튼하게 했다. 하지만 이래서는 그저 단단한 막대기에 지나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이 휘두른다면 말이다.
여기에 잠깐뿐이 안 되지만 ‘가더발트’로 칼집을 덮어씌우면?
칼집을 벨트에 고정해주는 융통성을 발휘해주던 ‘발칙한 속옷’을 응용하면 그 견고함은 6종 괴수도 후려칠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해진다.
카르세리안 레이소가 벨 수 있는 괴수는 4종까지.
그럼에도 무일이 ‘6급 사냥꾼’으로 불리게 된 건 다른 게 아니다.
못 베니 팬다!
그야말로 ‘괴수처럼’ 싸우는 것이다.
보통은 오른손에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쥐고 왼손에는 방패를 겸한 칼집을 쥐는 쌍수 형태로 5종 괴수를 떡처럼 썰고 뭉갠다.
하지만 자주 쓸 기술은 못 된다.
가더발트는 그리 협조적인 괴수가 아닌 탓이다.
그래도 잠깐이라면,
콰광!
< [22장-3] 왕이 지켜보고 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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