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90화 (90/287)

< [22장-1] 왕이 지켜보고 있다. >

[22장] 왕이 지켜보고 있다.

학명: 오니오프(죽은 척하는 도깨비)

서식지: 궁전

특징: 죽은 척하는 중입니다.

위험도: 9종 소형

비고: 꺼지지 않는 도깨비불

***

서울 시민 중에도 종종 현실파가 등장한다.

가상현실게임을 죽을 만큼 사랑하다가 갑자기 뚝 끊고 ‘리얼충’이 되려는 것이다. 하지만 오래 못 버티고 다시 환상세계로 돌아간다.

자유를 잃어서?

분명, 엄격한 사회규범으로 묶인 현실이랑 달리 가상세계는 자유롭다.

진짜 사람이랑 다를 게 없는 인공지능을 가진 NPC를 상대로 온갖 패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며, 현실에서 별 볼 일 없어도 가상현실에서는 황제로 군림한다는 ‘설정’을 짜고 즐겨도 뭐라는 사람 하나 없다.

하지만 현실로 돌아온 이라면 이 정도는 누구나 각오한 바다.

인내하면 이겨낼 수 있는 시련이다.

그러나,

이들은 다시 괴수가 없는 평화로운 가상세계로 돌아간다.

괴수가 두려워서?

어차피 괴수는 사냥꾼과 계약자 몫이다. 시민들은 화장기 없는 민얼굴로 돌아다니는 아름다운 여자들만 조심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들이 포기하는 부분은 따로 있다.

『첩첩산중(疊疊山中)』

정말 특별한 이벤트가 아니면 차근차근 풀어갈 수 있는 게임 내의 퀘스트랑 달리 현실은 늘 ‘시간 제한 이벤트’로 넘쳐난다.

가장 쉬운 예로 출근.

그나마 이건 사회적 약속이니 그럭저럭 넘길 수 있다.

하지만 ‘공지’도 없이 터지는 현실의 ‘깜짝 이벤트’가 출근길 등에 겹치면 공황에 빠진다. 이건 인내와 근성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게임처럼 복구도 안 되며 돌이킬 수 없는 물질적 피해로 돌아온다.

그게 시시각각 터진다.

이걸 극복하고 정치인들을 귀찮게 하는 건실한 시민으로 거듭나는 경우는 소수점 미만이지만, 열흘에 한 명쯤은 나온다.

그들이 조금씩 뭉치며 모임을 결성했다.

1년에 서른 명 안팎으로.

매우 적지만 그 숫자도 쌓이다 보니 많아졌다.

그들은 정계에 진출하기도 하고 부자로 거듭나기도 했다.

대부분은 평범한 회사원이나 종업원이었지만, 사냥꾼도 아닌 그들은 죽을 일이 없고 다양한 사회활동을 한다.

그 영향력은 무시 못 할 수준.

모임의 이름으로 그 성향을 잘 알 수 있다.

『신조선(新朝鮮)』

이 땅에 뿌리를 내린 단군의 ‘고조선’과 이성계의 ‘조선’을 쭉 계승하겠다는 뜻이다.

현실파를 지향하는 사람들의 모임답다고 할까.

옛날 이야기를 끄집어내려는 꿈에 부풀려 있는 걸 보면 여전히 ‘현실 판타지’를 사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들은 ‘선비’를 자칭한다.

현실에 충실한 사냥꾼을 ‘병사’에 비유하는 건 그들의 심리적 경쟁심리의 발로일 것이다.

비공식모임 ‘신조선’의 목적은 명확하다.

저 만주까지 옛 조선 땅을 전부 회복하고, 과거에 국토를 짓밟고 선조들을 무수히 해친 중국인과 일본인들에게 복수하자!

...굉장히 과격하다.

하지만 계약자는커녕 사냥꾼도 아닌 그들의 목소리는 공허했다.

그야말로 목소리만 큰 ‘선비’에 지나지 않는다.

(나라 꼴이 이러니 별 거지 같은 놈들까지 설치는군.)

(선배님. 그게 간단치 않습니다. 전 수색대장 오창민은 그 신조선에 가입하고 꾸준히 활동한 끝에 회장까지 올랐습니다.)

(그건…. 좀 무시 못 할 일이네.)

뱀페스트가 악다구니뿐이었던 모임의 수장에 올랐다.

그 모임이 순수한 인간의 단체일까?

꽥꽥 소리만 지르던 자들에게 물리적인 힘이 생겼다고 봐도 무방하다.

게다가 ‘신조선’은 아주 오래전에 그 과격한 명분조차 잃고 가장 구질구질한 하나의 목적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남성우월주의.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남자는 여자 위에 있다.’고 주장한다.

여자는 남편을 존경하며 모시고, 언제든 봉사할 수 있도록 몸가짐을 단정하고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게 주요 골자다.

계약자들이 가만 놔두고 볼까?

그래서 와이츠가 있을 때는 과중한 세금은 약과고 ‘자고 일어나니 추방(!)’ 같은 처분이 떨어지는 등의 박해를 숱하게 받았다.

그래도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현명한 용신 와이츠가 ‘필요악’이란 형태로 산소호흡기만은 빼앗지 않은 덕분이기도 하지만, 정치인들이 은근히 응원한 탓이다.

그리고 와이츠가 자리를 비우며 살만해진 모양이다.

(묶어서 토벌대상으로 봅니까?)

(...일단은 명단만 추려서 내게 보내. 총격전이 벌어지면 프로사냥꾼이라도 훅 간다. 전 수색대장이라면 총기뿐 아니라 대량살상무기를 빼돌리는 것도 가능했을 거야.)

(네, 알겠습니다.)

통신을 마친 무일은 땅을 박차는 속도를 올렸다.

내가 ‘괴수의 탈을 쓴 인간’이라고?

이건 비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다.

장애물이 적은 한강공원을 정말 터무니없는 빠르기로 질주 중인 카르 4세는 인간이라고 말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그는 ‘가더발트로 덮인 인간’이다.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그래도 사람처럼 보인다. 허리와 중심(!)을 제외한 온몸을 투명한 비닐로 코팅한 것처럼 감싼 가더발트를 구분하려면 ‘괴수 탐색기’로 관찰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괴수의 눈에는 어떻게 보일까?

생활기록부를 보지 않고도 미녀의 처녀성 여부와 친모(親母)의 미추(美醜)를 구분해내는 괴수의 감각은 말하고 있었다.

저 생명체는 ‘괴수로밖에 안 보이는 원숭이’라고.

무일의 육체 능력은 기존의 ‘가더발트 계약자’를 압도하고 있었다.

콰직!

밟은 지면에 균열이 생겼다.

온종일 주무르고 꼬집어도 질리지 않는 여성의 신비로운 젖가슴에 브래지어 형태로 투자(!)해야 할 ‘발칙한 속옷’의 힘이 온몸으로 분산된 덕분이다.

심지어 온종일도 아니다.

평상시에는 가수면 상태로 있다가 필요할 때만 잠깐씩 쓰기 때문에 정말 폭발적인 힘이 한꺼번에 쏟아진다!

가더발트의 능력은 ‘2종’이다.

그게 강제로 숙주의 몸을 지배할 때의 능력이다. 그리고 정신을 공유 중인 계약자에게는 아름다운 몸의 수고비로 거의 ‘5종’에 가까운 힘을 빌려준다.

...무일은 어떨까?

급기야 물 위를 달리고 있었다.

“진즉 이럴걸.”

별 감흥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비싼 신발 ‘모리엔탈 크레쉬’의 용도는 물 위를 달리는 게 아니다.

튼튼한 건 당연하고 방수, 내열 등이 우수한 소재로 제작됐다. 그리고 장시간 행군에도 지장 없도록 ‘발바닥 충격을 감소’해준다.

하지만 사용자를 잘못(?) 만나면서 이상하게 쓰이기 시작했다.

충격 감소.

이 능력이 무일에게 물 위도 달리게 해줬다.

사람이 물에 빠지는 이유는 수면에 가해지는 충격이 크기 때문이다. 높은 곳에서 뛰어내린 다이빙선수가 순식간에 잠기는 것도 같은 원리다.

그 충격을 극도로 줄이면 어떻게 될까?

물론, 좁은 표면적과 중력에 이끌려 천천히 가라앉긴 할 거다. 하지만 가라앉기 전에 발로 수면을 차고 뛰어오를 수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평범한 동물 중에 그 사례가 있다.

바실리스크 도마뱀.

물 위에서 춤추는 인간형 괴수도 있다.

4종 소형, 세이랑.

‘...하지만 장시간은 무리네.’

목숨에는 지장 없지만, 남자의 존엄성이 위태로워진다.

그걸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제해야 한다. 이 순간에도 군사위성 몇 개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된다.

다른 ‘가더발트 계약자’도 가능할까?

어림도 없는 소리다.

신발을 개량한다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원래 용도를 무시하는 파격은 ‘카르발트’이기에 할 수 있는 기교다.

균형, 조화, 대칭….

무거운 여자친구가 있어서 맥주병이나 다름없는 그가 떠 있으려면 [예감]과 [예측]을 총망라한 실력이 받쳐줘야 한다.

덤으로 순발력과 근력.

합동연구란 명목으로 외국의 과도한 원조를 받은 한국 괴수대응본부 의무대에서 측정한 카르발트의 능력치 총점은 ‘6종’이다.

방어력은 ‘2종’이고 공격력은 소지한 무기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즉, 여기서 점수를 다 까먹은 것이다.

그가 가벼운 알몸(!) 상태라면 맨발로 물 위를 달리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세웅. 오창민의 위치를 말해줘.)

(바로 치시는 겁니까?)

(그래. 내 느낌대로라면 녀석도 눈치챘어. 일생일대의 위기라는 걸. 역시 귀찮군. [예지]를 쓰는 괴수라는 것들은.)

통신기 너머로 문세웅은 생각했다.

괴수들도 선배님을 보면 똑같은 생각을 할 거라고.

그 괴수들에게 카르발트는 귀찮은 정도가 아니라 공포일 것이다. 강남구 하늘을 날아다니던 ‘괴수 지네’ 까까오뿐만 아니라 괴수대응본부의 거의 모든 수호자가 저 상태다.

매우 호전적이란 부류도 마찬가지다.

적대불가.

그나마 야생괴수는 4종만 넘어도 덤벼든다. 하지만 그 아래는 싸우기보다는 뒤도 안 돌아보고 무작정 도망치는 쪽을 택한다.

그렇다면 이 ‘흡혈귀 후작’이란 작자는 어떨까.

‘다시 만나는 2차전인가?’

서로가 대등하다.

전 수색대장 오창민은 ‘인간의 탈을 쓴 괴수’였고, 전 수색대원(하루 만에 퇴출당했지만.) 한무일은 ‘괴수의 탈을 쓴 인간’이다.

8년 전에는 한무일의 승리로 끝났다.

무기의 격차가 극심했던 불합리한 조건마저 뒤집었다.

그렇다면 현재는?

여전히 오창민은 겁쟁이 사냥꾼일까, 자신의 나약함을 비열함으로 채운 사내일까…. 뱀페스트의 숙주가 된 그자의 심경을 아직은 [예측]할 수 없었다.

그래도 불리한 건 과거 때랑 마찬가지였다.

(조장님. 헌병대장을 확보했습니다.)

(좋아. 본부는?)

(본부에는 아직 협조를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끄나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선뜻 손이 가지 않습니다.)

(그건 현장지휘관에게 맡기지.)

타로의 지휘를 받을 사람이 문세웅과 문장춘 부자(父子)뿐이지만.

그러나 잊어서는 안 된다.

문장춘이 어떤 인물인지를 말이다.

법도 무시하는 팔불출 아버지지만, 그자가 바로 대한민국의 헌법을 수호하는 헌병대장이다! 은퇴한 ‘우수한 사냥꾼’들을 이끄는 수장.

나이도 나이지만 자존심과 옹고집으로 똘똘 뭉친 ‘전직 프로사냥꾼’들을 살살 달래서 뜻대로 움직이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능력이 빛을 발할 순간이 왔다.

‘전 수색대장’이 뱀페스트라면, 공모자 혹은 용의자로 ‘현 수색대장’도 의심 안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때, 수색대가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견제할 수 있는 건 헌병대와 헌병대장뿐이다.

‘접전이 벌어지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안 그래도 한국은 사냥꾼 숫자가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태다.

여기서 더 줄면 카르발트라도 감당할 수 없다.

무일은 한강공원에 발 뻗고 누워 ‘현자 타임(!)’을 5분쯤 보낸 후에 다시 여의도 방향으로 가더발트를 착용하고 달렸다.

여전히 문세웅의 스포츠카 ‘나브랑모스 레비터’를 애용하는 이유다.

이렇게 쉬면 어딜 가든 도착시각은 비슷비슷하다. 그리고 카르발트 상태에서 도약할 때마다 바닥에 균열이 생기는 일이 잦아서 또 곤란하다.

안 그래도 토목공사로 바쁜 서울인데 일을 늘려버리면 민폐다.

슈웅!

파공성을 날린 탄환이 머리 옆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청각이 마비된다.

저격할 수 있으면 좋고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공격. 재생력과 방어력 둘 다 뛰어난 괴수에게는 통하지 않지만, 인간을 상대로는 효과적이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인간이었을 때다.

[예감]을 보유한 프로사냥꾼에게 시각과 청각 등의 오감은 부차적인 정보다. 물론, [예측]을 차단할 의도였다면 효과적인 방법임은 분명하다.

이게 또 평범한 프로사냥꾼이었다면 말이다.

가더발트의 보호를 받는 카르 4세에게는 아주 잠깐 윙윙거리는 정도로 그쳤다.

무일은 여의도에서 마중 나온 자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가면특공대냐.”

빨주노초파남보 등의 일색(一色) 쫄쫄이 체육복 위로 같은 색상의 헬멧을 쓰고 있다. 색상을 통일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배후를 감출 의도였다면 정말 최고라고 말해주고 싶다.

일본? 미국?

적어도 한국인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패션감각이었다.

공통점이라면 오른손에는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쥐고 있고 왼손에는 무일의 눈이 휘둥그렇게 뜨일 정도로 무지막지한 산탄총이 들려 있다.

『라스베리터 람부스(잠깐 쏟아지는 소나기)』

돈은 많은데 실력이 안 되는 부잣집 출신이나, 팔심이 경비대장 수준으로 좋아서 연사가 가능한 프로사냥꾼이 쓰는 대량살상무기다.

근거리에서 정통으로 맞히면 ‘2종 보통’까지 흔적도 없이 날려버린다는 무시무시한 산탄총이다.

사람은?

멀리서 스치기만 해도 사망 확정이다.

그 탓에 단독으로 활동하는 사냥꾼이 아니면 사용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고 ‘4급 무기허가증’을 보유한 무일도 쓸 수 없는 총이다.

주문해놓은 ‘스콜레옹 포르소’를 쓰기 위해 ‘5급 무기허가증’을 신청해놓긴 했지만, 그래도 쓸 수 없는 흉기, 라스베리터 람부스.

저걸 쓰려면 ‘6급 무기허가증’이 필요하다.

‘...저기 있군.’

가면특공대 대장이라고 가르쳐주듯 혼자 붉은색 머플러를 두른 붉은색 유니폼.

검은색 고글에 가려져 있지만 그래도 무일은 알 수 있었다.

오른손에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비스듬히 들고 오만방자한 자세로 말없이 도발하는 기술이 남달랐던 사내를 기억하고 있다.

과거랑 달라진 점은 무거운 산탄총을 한 손으로 가볍게 들고 있다는 정도.

동료들의 무장도 탁월하다.

그 준비성에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데….

“까아! 까아!”

하늘에 까마귀인가 싶었더니 지네다.

순식간에 가면특공대를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갔다.

< [22장-1] 왕이 지켜보고 있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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