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장-4] 여동생이라는데요. >
‘대충 예상은 되는군.’
14년 동안 소식 끊고 살아왔던 친가족이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찾아왔다면 이유는 ‘평양 사건’뿐이다.
괴수와 계약한 남성.
서울 시민들은 ‘그런 일이 있었어?’라는 태도지만, 무일이 기억하는 부산 분위기라면 상당히 고무되어 있지 않을까.
거기에 탐욕스러운 아버지의 성격.
아주 오래전에 신념을 잃은 그의 성장은 진즉 멈췄다.
아무리 노력해도 4종 괴수를 쓰러트릴 수 없다는 자괴감이 인성을 망가트렸다는 게, 오랜 전우(戰友)라는 이들의 변호였다.
무일은 자신의 모든 걸 낱낱이 밝혔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공유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카르 4세의 27번째 생일파티』
여기에 참석 여부가 강대국과 약소국을 가르는 경계선이었다.
스페인대사가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생일파티였다.’라는 평가는 하나도 틀리지 않는다.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세계의 주류(主流)란 증거다.
새로운 길의 가능성.
그 성공이 아직 불투명하더라도 이미 ‘선례’가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아예 불가능한 길에 도전하는 거랑 이미 앞서간 자를 뒤쫓는 건 매우 큰 차이가 있다. 기업들의 투자부터 과학자들의 마음가짐까지.
하지만 약소국은 어떨까?
서울에서는 폐가(廢家) 취급인 이곳 강남구 전경이 부산에서는 흔한 모습이다.
구닥다리 22세기로 모자라 20세기 유물 같은 집까지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곳이 부산이니 어련할까.
옥상에 올라 손짓하니 까까오가 다가왔다.
사뿐히 착륙한 수호자의 반들반들한 등껍질을 미끄럼타듯 밟고 내려온 금서희는 출세한 오라버니를 내려다봤다.
...내려다봐도 되는 걸까.
금서희는 다 쓴 오이마사지 팩을 지저분한 바닥에 깔고 그 좁은 면적 위에 무릎 꿇고 공손히 앉는 기술을 선보였다.
“다시 인사드려요. 정말 오랜만이에요, 오라버니.”
“...그래. 보고 싶어서 왔다는, 너무 속 보이는 얘기니 생략하고. 아버지께서 떠난 아들을 찾는 모양이구나?”
정말 오랜만에 만난 건 기쁘고 반갑다.
하지만 무일은 딱 거기까지였다.
그는 ‘아이들’을 거의 무조건 좋아하지만, ‘아이들이었던 어른’까지 좋아하진 않는다. 그건 이복여동생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어른은 계산적이다.
그건 한무일 본인도 마찬가지다.
이 프로사냥꾼은 ‘이 길이 인류를 위한 길인가?’라는 하나의 기준점을 놓고 끊임없이 수지타산을 계산한다.
물론, 아이 중에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아이들의 계산법을 총명하다, 야무지다 등으로 정의하며 칭찬한다.
애들은 아무리 계산해도 결국은 ‘사탕’을 고르기 때문이다.
“네.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부탁하고 싶어요. 부산은 오라버니 같은 사람이 필요해요. 누군가 이끌어주지 않으면 부산은 언젠가 사라질 거예요.”
금서희는 심각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부산은 24세기의 MID 문명 혜택을 거의 못 받고 있다.
그나마 사냥꾼들의 장비와 계약자들의 노화억제제 등은 꾸준히 공급되고 있지만, 의식주 측면에서는 최악이라고 할 수 있다.
독점체계.
서울에서 보내오는 물자와 자재를 극소수 인간들이 선점하며 빈부격차가 극심해졌다.
중국의 ‘무림’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
관리인으로 본부에서 파견 나온 6종 계약자가 있지만, 그녀의 눈과 귀를 가린 자들에 의해 착취되는 구조를 하고 있다.
한무일 그게 싫어서 13살에 가출했고 서울로 올라왔다.
1년에 한 번씩 부산까지 뚫는 한국고속도로 인부들과 계약자들이랑 친해지려고 8살 때부터 꾸준히 준비한 결실이다.
어린애였던 ‘금무일’이 할 수 있던 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한무일’은 어떨까?
“네 말대로 분명 고향을 바꾸고 싶다. 그럴 힘을 키우기 위해 가출한 것도 사실이고.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야.”
“옛날처럼 도망치시는 건가요?”
금서희가 침중한 어조로 물었다.
계약자들은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애다. 그게 수호자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일을 쉽게 생각하고 뒤를 안 돌아보는 경향이 있다.
의무교육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부산 출신이라면 더욱.
“...네가 생각하는 바를 대신 말해볼까.”
무일은 [예측]했고 술술 말했다.
부산 시민들을 선동해서 ‘최강자전’을 유도하여 부산의 모든 권력층을 끌어내린다. 그리고 서울 본부의 프로사냥꾼 자격으로 섭정을 시작한다.
사냥꾼이 섭정(攝政)?
무림처럼 힘을 중시하는 부산에서는 사냥꾼 곧 정치인이다.
계약자는 3종부터 대우받지만, 그 지위는 5종 계약자가 아니면 그리 높지 않고 역으로 사냥꾼보다 살짝 아래에 있다.
4종 계약자와 수호자?
부산의 사냥꾼 서넛이 힘을 합치면 쓰러트릴 수 있다.
그게 안 되는 5종부터가 진짜 계약자다운 대우와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한다.
하지만 ‘카르 4세’는 어떨까?
사냥꾼이 혼자서 5종 괴수까지 씹어 먹을 기세다.
중앙집권체제가 가능하다.
한 명의 ‘영웅’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되는 것이다.
“그게 어때서요. 오라버니가 힘을 함부로 하실 분이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어요.”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물론…. 언제까지나 방관만 할 순 없겠지. 그러면 가출한 의미가 없으니.”
“뭐가 문제죠?”
“서희야.”
“우웃! 네!”
뚫어지게 쳐다보며 이름을 부르면 어떡하느냐고요!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수호자 까까오가 계약자를 감싸듯 몸을 둥글게 말며 구슬프게 ‘까아! 까아!’ 울었다.
눈앞에 ‘오라버니’라는 원숭이가 작정하고 ‘보물’을 빼앗으려 하면 막을 수 없다는 걸 [업보]로 아는 탓이다.
싸워야만 한다면 최선을 다할 것이다.
하지만 괴수는,
전부(全部) 아니면 전무(全無).
섬멸(殲滅) 아니면 무시(無視).
중간이란 없다.
그리고 이 ‘오라버니’ 원숭이는 까까오의 판단으로는 최대한 안 부딪치는 게 상책이다.
자신을 지배하려 하거나 ‘보물’을 더럽히지 않는다면 무시하고 싶다.
“이 서울이 어떻게 보이지?”
“무척 평화롭네요. 쓰레기 아빠 같은 사냥꾼이 심심찮게 보이고 시민들은 게임만 온종일 하며 살아도 잘 굴러가네요.”
정말 마음에 안 든다.
그저 어디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삶의 질이 확 다르다는 사실이 금서희는 너무나 마음에 안 들고 분했다.
부산에서 처음 상경(上京)했을 때의 ‘13살 금무일’도 같은 생각이었다.
정말 팔자 좋다.
여자들은 성형수술로 꽃단장하고 일주일 한 번씩 남자에게 엉덩이 대주면 대충 사는 데 지장 없을 정도다.
꼭 그게 아니더라도 휴머노이드를 안 쓰는 서울에서는 ‘예쁜 여종업원’이 할 수 있는 일들이 찾아보면 무척 많다.
다만, 자존심을 굽혀야 해서 쉬쉬할 뿐.
남자들도 그렇다.
잘생기고 성격 좋으며 재치있으면 기둥서방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능력이 조금만 받쳐주면 일부다처제가 완성된다.
2 대 8이란 극심한 남녀비율.
여자들의 허영심에는 ‘남편’도 들어간다. 꼭 육체적 관계를 갖지 않아도 좋고 다른 여자들이랑 공유해도 상관없다. 그저 친구들 앞이나 모임에서 한마디만 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
내 남편은 이런 괜찮은 사람이야!
거기에 사랑은 없다.
진짜 사랑은 가상현실에서 찾는다.
“서울은 사냥꾼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환상의 도시다. 그리고 그런 이 도시는 당장에라도 붕괴할 것처럼 아슬아슬한 상태지.”
서울은 세계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 악명높은 ‘사냥꾼 착취국가’다.
대한민국 와이츠가 이룩한 ‘최고의 작품’일 것이다.
현실파인 사냥꾼들은 벌어들이는 모든 돈을 흥청망청 쓰지 않으면 거의 전부를 세금이나 보험 등으로 나가는 구조에 묶여있다.
흥청망청 어떻게 쓸까?
일단, 좋은 장비로 교체 및 보충하고 남는 돈으로는 예쁜 여자들을 ‘대여’한다. 집과 땅 등은 ‘사치세’라는 게 붙기에 빼고 나면 정말 여자뿐이 안 남는다.
여자들은 돈 쓰는 귀신이다.
고맙다고 정말 왕처럼 모셔주는 서비스도 잊지 않는다.
사냥꾼들은 이걸로 불만과 피로를 해소한다.
도도한 계약자들 탓에 쌓인 불쾌감을 성형미인들에게 배출하고 흥청망청 쓰는 삶에 빠르게 찌든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사냥꾼들은 그런 서울을 사랑하기에 수호하려는 희생정신으로 무장한다. 살짝만 엇나가도 파국으로 치닫는 문화와 사상을 와이츠가 교묘하게 끼워 맞춘 것이다.
하지만 그 사냥꾼들이 무더기로 죽었다.
통제하던 와이츠도 없고 정치인들은 제 살길을 모색 중이다.
‘어쩌면….’
강대국, 선진국 할 것 없이 외국처럼 여성들이 사냥꾼으로 활동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른다.
아니, 그뿐이면 차라리 다행이다.
가상현실게임밖에 할 줄 모르는 서울 시민들을 현실에서 얼마나 유용하게 쓸 수 있을지는 정말 미지수다.
현실을 가상현실처럼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사냥꾼?
게임처럼 부활도 안 되고 실수는 한 번조차 용납되지 않는다. 몸은 생각처럼 빠르지 않으며 괴수는 자기 수준에 맞춰져 있지 않다.
심지어 레벨1.
하루 사망자로 수백 단위를 [예측]해보는 카르 4세였다. 이것도 희망적인 견해로, 본심은 수천쯤은 가볍게 갱신할 거라고 판단된다.
캄캄하다.
“붕괴해도 부산보다는 나을 것-, 죄송요.”
“매일 부산 인구수만큼 죽을 거다.”
농담이 아니라 곧 현실이 될 것 같다.
그걸 막으려면 남성 출산율을 높여서 ‘수렵꾼’ 숫자를 늘리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이 성장할 때까지 ‘카르 4세’ 같은 극소수 남은 프로사냥꾼들이 버텨내야 한다.
이건 계약자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녀들에게 수렵 같은 막노동은 불가능하고 따로 할 일도 있다.
서울은 우수한 계약자와 수호자들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다. 괴수대응본부 게시판에는 강습반에서 5종, 6종 야생괴수를 토벌했다는 내용이 거의 매일 끊임없이 올라오고 있다.
하지만 지키면 뭐하나?
식량 부족으로 입을 줄여야 하게 생겼는데.
괴수 대신 시민을 죽여야 할 판국이다.
그래서 몸을 뺄 수 없다.
『카르발트』
최근에는 ‘카르 4세’보다 이렇게 더 많이 불리는 프로사냥꾼이 여태 잡은 5종 야생괴수 숫자는 서울의 그 어떤 계약자보다 월등히 앞선다.
외모관리 빼고 하루에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이 3시간 남짓인 계약자들이랑 달리 카르발트의 활동은 16시간.
최은비를 돌보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정말 풀로 뛴다.
여기에 사냥속도까지 압도적!
6종 괴수는 토벌시간이 상대적으로 오래 걸려서 윤소영 같은 고위계약자에게 맡기지만, 그걸 제외하고는 정말 혼자서 강습반 전체 몫을 해내고 있다.
그런 카르발트가 빠지면?
그 부담은 전부 계약자가 아닌 사냥꾼이 감당해야 한다.
무일이 ‘몇 초’면 잡을 수 있는 5종 야생괴수를 토벌도 아니고 계약자가 출동할 때까지 ‘시간 끌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내가 허망하게 죽을지는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이건 와이츠가 와도 안 된다.
부족한 남정네 숫자는 ‘시간’만이 해결해줄 수 있다.
“그렇다고 부산을 앞으로 15년이나 모른 척하시게요?”
“아니. 나는 몸을 뺄 수 없지만, 계약자들은 아니야. 현재 부산은 6종 계약자 한 명만 가있는 상태지. 정치에 대해 전혀 모르는 진짜 공주님.”
무일은 본부와 협상 중이다.
내가 더 열심히 뛸 테니 부산을 좀 더 지원해달라고.
카르 4세가 지금 부산에 가봐야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기존 권력자들을 몰아내고 정치 등에 관여하는 정도.
지금처럼 야생괴수의 침입을 저지하기 위해 발품하고 다니는 게 아니라 책상머리에 앉아서 골머리를 썩혀야 한다.
그건 ‘세계 최강의 사냥꾼’의 능력을 무시하는 처사고 낭비하는 만행이다.
하물며 괴수가 아닌 인간끼리 싸우는 일.
무일에게 이보다 더 무가치하고 비생산적인 일도 없다.
“네. 허영심이 하늘을 찌르는 바보 공주님이 있죠. 벌써 50년인가요.”
“그건 주변인들이 그렇게 만든 거고. 곧 내 요청에 따라 똘똘한 고위계약자 다수와 정치, 경제전문가들이 부산으로 파견될 거야.”
“아….”
“지금처럼 고위계약자 한 명이 쭉 있는 게 아니라 수시로 교대해서 소위 바보가 되는 걸 저지할 계획이고.”
“우읏….”
금서희는 요목조목 설명하는 한무일을 당해낼 수 없었다.
일단 배움이 옅다.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게 전부인 그녀에게 ‘정치’란, 그 단어만 나와도 머리가 핑글핑글 어지러워지는 머나먼 얘기다.
기득권층인 부산 사냥꾼들의 반발, 거기에 대한 해결책과 당근 그리고 채찍.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정치경제의 홍수는 외국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단 하나 알아들을 수 있던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엄격한 오라버니시네요.’
기계처럼 효율을 중시하며 자기관리가 철저하다.
그가 손해를 볼 경우는 오직 ‘미성년자’가 관련됐을 때뿐이다.
“더 하고 싶은 말은?”
“여동생으로서 오라버니가 필요하다면요.”
“...이건 반칙인데.”
“뭐가요. 당장 결혼해달라는 것도 아닌데요.”
맞아, 그랬지.
부산은 근친혼이 성행한다.
일본 애니메이션에나 나오는 상황극이 떡하니 붙여버리자 무일로서도 조금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예쁘다, 여동생이다, 새침하다.
3박자가 조화를 이뤘다!
게다가 유일한 취미를 직격당하는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저 멀리, 여의도 본부 정비과 사무실에 처박혀 있을 초식남 친구가 분노의 함성을 지른 것 같기도 하다.
까까오가 애처로움을 넘어 시끄럽게 울기 시작한다.
“...지금부터 공무를 봐야 해서 실례.”
“또요?!”
“서울의 프로사냥꾼은 부산이랑 달리 온종일 일해.”
무일은 여자친구를 뽑았다.
계약자 금서희와 수호자 까까오가 서로 조금씩 다른 의미로 흠칫했다.
뭘 하나 봤더니….
휴대전화번호를 콘크리트 바닥에 휘갈겨 썼다.
연필이 아니라고 칭얼대는 환청은 이제 그러려니 했다.
< [21장-4] 여동생이라는데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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