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장-3] 여동생이라는데요. >
“아으…. 으아….
끔찍한 기억이 트라우마가 됐는지 인질들은 벌벌 떨며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겪은 고초로 야위었을 거란 상상이랑 달리 겉보기에는 평범했다. 물론, 흡혈 탓에 혈색은 다소 창백했지만, 빈혈이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행이란 느낌은 들지 않았다.
가축.
그야말로 집에서 키우는 식량이랑 다를 게 없었다.
거기에 노리개.
현대사회는 상당히 엄격하게 혼전순결주의(婚前純潔主義)를 여성에게 강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까보면 그 대상은 ‘예쁜 여성’ 한정이다.
일단 계약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되면 다른 나라는 어떨지 몰라도 서울 시민들은 매우 문란한 성생활을 보낸다.
경험은 15살 성인식을 치르자마자 신고식처럼 가상현실게임에서 친구 혹은 NPC를 파트너로 시작한다.
순결, 동정이 깨질 염려가 없고 소모되는 건 시간뿐이다.
계약자와 미계약자를 포함해서.
당연한 얘기지만, 불법프로그램을 써서 미성년자 때부터 손을 대는 부류도 있다.
“사냥꾼입니다. 구하러 온 것이니 진정하십시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없다.
상호동의 없이 강압적으로 벌어진 성관계는 처벌 대상이다. 그리고 처벌이라면 당연히 처형 아니면 추방.
소위 ‘접대’라고 부르는 행위도 여성에게 무언가 보상이 주어진다. 접대를 안 좋게 보던 시대는 성형수술이 불완전했던 21세기로 거의 막을 내렸지만.
즉, 강간은 사회에서 사라졌다.
일단 길거리에 깡패조차 없는데 강간범이라고 있겠는가. 더구나 그런 불건전한 욕구가 있다면 가상현실이란 아주 좋은 배출구가 있다.
NPC를 상대로 뭘 하던 따지는 사람은 없다.
학대, 살인, 강간, 윤간, 고문, 폭행….
현실에서는 성실한 사람이 가상현실에서는 인간말종 개망나니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버튼 하나로 찍어낼 수 있는 NPC를 상대로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여기에 세 여성은 그걸 현실에서 겪었다.
NPC를 상대로 가해자가 됐을지언정 피해자가 돼본 적이 없는 그녀들에게 정신적인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닐 터였다.
...특별한 성벽이 있지 않은 한.
“크으으….”
“역시! 백작이란 건가. 살아있군.”
하지만 살아있던 이유는 여자친구의 독기(?)를 버텨서가 아니다.
순전히 ‘타이타니 로니오’에 심장을 저격당한 덕분이다. 괴수의 뛰어난 생명력으로 심장을 잃고도 버티는 것이다.
자세히 보니, 뱀페스트가 지속적인 흡혈로 강화한 피부가 심장이 탄환에 완전히 관통되어 파괴되는 것만은 막아준 모양이다.
하지만 딱 그뿐.
피의 흐름을 주관하는 심장이 상당 부분 파손된 흡혈귀의 회복속도는 매우 더뎠다.
적이라고 할 흡혈귀는 여기까지 오지 못하고 있었다.
전부 도중에 사망.
저격수를 방관한 채 무작정 소란이 들린 5층으로 올라오려고 하니 그야말로 움직이는 과녁에 지나지 않는다.
저격수에게 마음 놓고 쏠 기회를 주다니 참 한심하다.
‘정보전달이 제대로 안 됐다는 뜻이겠지.’
창문 밖을 살짝만 내다봐도 될 문제인데 그럴 정신이 없던 걸까.
그럴 것이다.
흡혈귀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가축’의 안전이다. 강해질 수 있는 수단이 막힌다는 건 죽음보다 더한 공포다.
약한 흡혈귀는 지배받는다.
단 하나의 ‘왕’이 정한 계급체계에 따라 원치 않는 관계가 성립된 것이다. 군주에 해당하는 9종도 아닌 괴수의 명령을 따라야 하는 불합리함.
그걸 타파할 수단은 흡혈뿐이다.
나머지는 부수적인, 정말 하찮은 문제다.
흡혈을 한 번도 안 한 뱀페스트는 인간이랑 다르지 않다. 그건 인간의 치사량까지 안 가더라도 ‘한 번’ 피를 빨 때마다 성장하는 폭이 매우 크다는 방증이다.
세 명의 가축.
게다가 목덜미에 이빨을 박는 전후까지 즐겁게 해주는 미녀는 흔치 않다.
뱀페스트도 괴수인 탓이다.
계약자가 못 되는 하자가 있더라도 여타 괴수들처럼 여성의 ‘가치’를 밑바닥까지 떨어트리진 않는다.
적당히 타협할 줄 안다.
계약자도 아닌 ‘가축’이니까.
(선배님. 타로 형님이 건물 안의 흡혈귀는 전부 섬멸됐다고 합니다.)
벌써 형님, 동생 하는 사이가 된 모양이다. 과연, 24세기의 불알친구는 공감대 하나만으로도 금방 친해진다.
문세웅이 다기능시계 ‘아메리칸 드림워치(미국산 꿈의 시계)’로 전투종료를 알려왔다.
어중간한 용언(龍言)의 작품명.
그건 ‘실패작’이라며 여러 나라에서 버린 MID 기술을 미국에서 짜깁기해서 만든 이 다기능, 다용도 시계가 반쯤 인간의 발명품인 탓이다.
치부를 가릴 생각도 못 하고 침대 하나에 상반신만 눕힌 채 무릎 꿇고 널브러진 세 여성의 몸 위에 이불을 덮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시오.”
당장 본부 의무대로 운송해서 임신, 감염 등을 검사하는 게 최선책이다. 하지만 그건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한 후다.
여긴 서초구가 아니다.
얼마든지 뱀페스트가 지원 올 수 있으며 바로 옆 건물에 더 있을 수도 있다.
무일은 시계에 입가를 대고 말했다.
(세웅.)
(네.)
(인질을 전부 확보했다. 이 건물 5층으로 올라와서 새롭게 방어진을 구축한다. 그리고 본부 구조대에 연락해서 정황을 설명하고 지원병력을 요청해라.)
(알겠습니다.)
지시를 마친 무일은 가더발트를 해제했다.
그다음, 갑자기 공격적으로 덤벼드는 전라의 세 여인을 향해 뒤도 안 돌아본 채 칼집으로 쳐서 쓰러트렸다.
찢어지는 비명이 거의 동시에 3차례.
가녀린 여성을 매몰차게 후려쳐보긴 합숙훈련 시절에 선지혜(달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 이후로 처음인 것 같다.
썩 기분 좋은 감각이 아니다.
좋다기보다는 불쾌하고 죄책감마저 온몸을 감돈다.
“백작쯤 되면 그런 능력도 있군.”
“크엌!”
세 ‘가축’의 공격에 맞춰 벌떡 일어나서 주먹질해온 뱀페스트의 왼쪽 가슴을 칼집 끝으로 찔렀다.
심장을 제외하고는 일반 괴수를 능가하는 재생력을 보여주는 흡혈귀지만, 아직 다 낫지 않은 심장만은 극약이었던지 무릎이 접히며 뒤로 쓰러졌다.
아직은 죽으면 곤란하지.
하지만 더 곤란한 건 기절하지 않고 재차 일어나서 달려드는 세 여인이었다.
그녀들은 엉성하게 덤벼들다가 다리 걸려 넘어지는 등의 난동을 부리다가 마침 올라온 문세웅과 이승필에게 제압됐다.
두 건장한 사내는 세 여인의 양손에 쇠고랑을 채우고 못 일어나도록 바닥에 엎어놓은 채 위에서 내리눌렀다.
‘...도시 괴담에 나오는 강간범이 따로 없네.’
침대 이불을 찢어 다리를 시작으로 온몸을 누에고치처럼 둘둘 말아서 묶은 후에야 얌전해진 것처럼 보였다.
겉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꼼지락 꼼지락 미약한 발버둥은 계속됐다.
“흡혈한 여성을 지배하는 능력이라…. 도감에서 읽긴 했지만, 직접 겪고 나니 흡혈귀의 삶은 남자의 낙원이겠네.”
말하는 카르 4세는 부럽다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건 지독한 경멸.
흡혈귀의 능력과 속성은 ‘아버지’를 닮았다. 힘없는 여자를 이용해서 자기 잇속을 챙기려는 방식이 비슷했다.
지배하는 능력이 다했는지 고통을 호소하던 세 여인이 잠잠해졌다.
아니면 순전히 지친 걸까?
그녀들은 곧 하나둘 수마에 빠져들었다.
깨어나면 분명 원상태로 돌아올 것이다. 흡혈한 여성을 지배하는 능력은 그 지속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
물론, 그 지배시간이 1분만 돼도 한 여성을 무장해제시키고 더 나아가 입으로 다 담기 힘든 굴욕적인 일을 명령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능력이다.
하물며 방금 ‘백작’의 능력은 못해도 10분.
통제하는 인원수가 적고 몸 상태도 멀쩡했다면 더 길었을 것이다.
“네놈이군…. 내 신부를 가로챈 놈이.”
건실한 20대 초반의 훈남 사냥꾼 몸으로 백작이 말했다.
위태로운 중심을 진정시키고 다시 가더발트를 착용한 무일이 괴수의 힘으로 뱀페스트의 팔다리를 찢듯 때어낸 직후였다.
그러고도 흡혈귀는 죽지 않았지만, 심장 위에 말뚝처럼 박힌 칼집 탓에 재생력은 물론이고 아무런 힘도 못 쓰는 상태가 됐다.
무일은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듯이 할 말만 했다.
“너도 상관의 이름을 댈 수 없겠지. 하지만 이건 어떨까? 저승까지 데려가고 싶은 백작이나 후작 이름이 있으면 대봐. 곧바로 보내주마.”
그건 흡혈귀에게 날아온 악마의 유혹이었다.
고대인들의 계급제도를 뱀페스트가 답습했다면 백작의 지위는 왕과 공작만이 내릴 수 있게 되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충성의 맹약’으로 묶이지 않은 백작과 후작을 포함한 그 밑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뜻이다.
소위 동족이라고 불리는 괴수끼리 친할까?
암투나처럼 협력하는 부류도 하지만, 계약자가 있는 괴수와 없는 괴수가 싸우는 것처럼 공동체 개념은 아니다.
불성실한 도감에는 나와 있지 않은 뱀페스트의 경우에는 이게 더 복잡하다. 왕이 정한 계급제도로 공동생활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별개로 활동한다.
파벌처럼.
무일이 노리는 건 이 부분이다.
이번에는 ‘강남구’라는 힌트와 더불어 ‘조성미’라는 계약자의 실을 쫓아서 여기까지 왔지만, 여기서 실은 끊기고 말았다.
이제 새로운 실마리를 찾아 쫓아가야 할 때다.
“...수색대장.”
“음?”
“은퇴한 전 수색대장. 내가 남서울에서 좋은 터를 못 잡도록 방해한 후작이지. 더는 해줄 말이 없다. 괴수의 탈을 쓴 인간이여.”
카르 4세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약간의 비아냥과 경의가 공존하는 흡혈귀의 건방진 소리 때문만이 아니다.
은퇴한 전 수색대장이라면 안면이 있다.
수색대 신고식을 빌미로 그를 해코지하려 했던 수색대의 늙은 간부. 하지만 해코지는커녕 실력에서 밀려 팔이 잘리는 수모를 겪은 사냥꾼이기도 했다.
그때, 흡혈귀 후작이었다고?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그 이후에 뱀페스트의 숙주가 된 게 분명하다. 그렇지 않다면 팔이 잘리는 건 그자가 아니라 무일이었고 어쩌면 그때 살해당했을 것이다.
어느새 9년이나 지난 일.
관심 없었다.
잘린 팔을 이어붙이고 며칠 후에 힘없이 은퇴했다는 게 아는 전부다.
패배한 사자처럼 정말 소리소문없이 떠났다.
“정말이라면 곧 보내주지.”
“백작의 명예를 우습-.”
뱀페스트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놈이 진실만을 말했다는 건 [예감]과 [예측] 양쪽이 전부 긍정해서 안다. 하지만 이 흡혈귀들이 ‘여자를 지배하는 능력’을 직접 보고선 정나미가 뚝 떨어졌다.
물론, 부랴부랴 도감 이상의 정보를 모은 덕분에 알고 있던 능력이지만, 말 그대로 남자들의 로망과 망상을 구현하는 정도라고 여겼다.
그런데 상상 이상으로 치졸했다.
연약한 여인들을 가축으로 모자라 방패막이로 쓴다는 게 너무나 마음에 너무 안 든다.
아버지가 생각난다.
그 하나만으로도 유언조차 안 들어줄 사유로는 차고 넘쳤다.
“선배님. 구조대가 왔습니다.”
“여긴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철수하자.”
“네.”
옆에서 다 듣고 있던 문세웅은 ‘전 수색대장이 흡혈귀 후작’이란 말이 나왔을 때부터 표정이 굳어있었다.
괴수대응본부 대장끼리는 앙숙처럼 서로 으르렁거리기도 하지만, 반대로 죽이 잘 맞는 경우도 있다.
헌병대장과 전 수색대장이 그렇다.
문세웅은 ‘아버지가 혹시?’라는 의혹을 지울 수 없었다.
그건 불안감이고 공포이기도 했다.
“세웅아.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나름 명예를 안다는 흡혈귀 귀족이 ‘팔불출 헌병대장’이라고 자랑하며 돌아다닐 리 없잖아.”
“그, 그렇겠죠?”
“설사, 흡혈귀의 숙주가 되셨더라도 어떻게든 그 거머리를 축출해서 구할 거다. 이 나라는 헌병대장처럼 처세술이 뛰어난 분이 필요해.”
칭찬치고는 좀 이상했지만, 무일은 진심이었다.
괴수보다 시민을 상대할 때가 압도적으로 많은 헌병대에 필요한 건 실력이 아니라 어떤 사람도 구슬릴 수 있는 능글맞은 처세술이다.
아직은 헌병대장 문장춘이 안전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모른다.
방금 백작은 분명 사냥꾼의 [예감]과 [예측]을 조금이나마 사용했다.
그렇다면 ‘전 수색대장’은 어떨까?
프로사냥꾼이란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햇병아리(18살 한무일)에게 팔이나 잘린 변변찮은 사냥꾼이지만, 그건 무일의 [예감]이 너무 뛰어났기 때문이다.
전 수색대장은 프로사냥꾼의 평균쯤 한다.
“선배님만 믿겠습니다. 정말 싫은 헌병대장이지만 구해주십시오.”
“너무 앞서가지 마. 우리가 잡으려는 자는 헌병대장이 아니라 전 수색대장이니. 그렇지만 현 수색대장도 일단 용의자로 놔야겠군.”
무일은 일단 문세웅에게 헌병대 문제를 맡겼다.
헌병대장이 흡혈귀랑 친하게 지냈다고 해서 나쁘다고 할 순 없다. 무일도 평양에서 오기 전까지만 해도, 자주 가는 백화점 안내원이 뱀페스트였는지 몰랐을 정도니 말이다.
덤으로 윤승철에게 이 젊은 사냥꾼을 도와달라고 지시했다.
혹시라도 있을 접전을 걱정한 배치다.
흡혈귀는 ‘타이타니 로니오’로 정확히 심장을 명중하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 게다가 상대가 본부 관계자라면 MID 무기도 염두에 둬야 한다.
문세웅의 현재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알겠습니다, 조장님.”
“혹시라도 싸우게 되면 본부에 지원요청을 하고 무리하지 마.”
“명심하겠습니다.”
곧 구조대가 세 여성을 운송했고 그 뒤를 호위하듯 문세웅과 타로가 따라 나갔다. 이어서 다른 인원들이 뱀페스트 시체를 옮기기 시작했다.
시체를 조종하는 ‘데빙걸’을 경계한 것도 있지만, 과학자와 의사들에게는 괴수 시체 부검과 실험은 빼놓을 수 없는 과제다.
무일은 혹시나 놓친 부분이 있는지 확인하고 옥상으로 올라갔다.
약속대로 여동생을 만나줄 시간이다.
< [21장-3] 여동생이라는데요.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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