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85화 (85/287)

< [20장-5] 너는 뭐하는 시민? >

생일파티에서 번 돈으로 복지재단을 설립하고도 돈이 남았다.

이미 시가 4,950억 ‘스콜레옹 포르소’를 주문제작 해놓은 상태고 정비과에서 좋다는 장비로 무장도 마쳤다.

걸어 다니는 ‘서울은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괴수의 공격을 정통으로 얻어맞아도 1번쯤은 살 수 있을 만큼 옷도 호화찬란해졌다. 겉보기에는 평범한 특공대 복장이지만 상표가 ‘I ♡ Seoul’로, 본부 제품이 아니다.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건 팬티 정도.

가더발트는 여전히 돌파할 수 없는 미궁의 과제였다.

“빌어먹을!”

“공격해!”

“허세라고!”

여러 사내의 몸을 숙주로 삼은 뱀페스트 일곱이 악다구니를 쓰며 손에 든 수류탄부터 냅다 던졌다.

여기까지 온 이상 도망치기란 불가능하다.

아예 마주치지 않았다면 모르지만, 이미 만난 이상 지구 끝까지 도망쳐도 카르 4세의 [예감]은 추적해낼 것이다.

거머리 괴수는 그 사실을 [업보]로 알았다.

인간이란 게 믿기지 않는다.

협공도 아니고 혼자서 죽인 괴수들이 하나같이 강하다. 뱀페스트가 흡혈로 완전체가 되더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5종 괴수들이 종잇장처럼 찢어진다.

그 인간이 수류탄을 손에 쥔다.

죽으려고 작정한 건가?

흡혈귀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콰광!

곧 대기를 울리는 폭음이 퍼지며 수류탄이 인간의 왼손에서 터졌다.

그 폭발에 최대한 휩쓸리지 않도록 바닥에 바짝 엎드렸던 뱀페스트 넷의 머리가 순식간에 허공으로 떠올랐다.

이게 어떻게 된 걸까?

어째서 저 소년은 살아있을 수 있는 걸까?

정말 인간이긴 한 걸까?

온갖 의문이 꼬리의 꼬리를 물며 셋 남은 흡혈귀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오랫동안 인간사회에 스며들어 있었기에 너무나 잘 안다.

폭탄을 쥐고 멀쩡한 인간은 없다.

그건 상식이다.

하지만 오늘, 그 상식이 무너졌다.

“이런 녀석들에게 끔찍이 살해된 시민들은 얼마나 원통했을까. 그리고 몸과 마음을 짓밟힌 처자들은 또 어떻고.”

“어, 어떻게 살아있을 수 있지?!”

“질문은 내가 해. 쓰레기 같은 흡혈귀.”

“어…?”

카르 4세는 서늘하게 선언하며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휘둘렀고, 살아있는 흡혈귀는 둘로 좁혀졌다.

가더발트에게 팬티를 잃은 무일의 표정과 기분은 썩 좋지 못했다. 원래는 좀 더 심문할 머릿수를 확보해야 했는데 그만 손이 미끄러졌다.

확실히 약했다.

그가 상대해왔던 그 어떤 괴수보다도 말이다. 물론, 가더발트와 우수한 장비가 없었더라면 이 좁은 공간에서 터진 폭탄은 꽤 위협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고려하더라도 너무 약했다.

“여성들을 어디에 감금해뒀지?”

“...풀어주겠다고 약속하면, 같은 소리가 안 먹히겠군.”

“과연. 살려둔 보람이 있네.”

다시 소파에 앉은 무일은 뱀페스트 둘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의 [예감]은 최선의 상황만을 유도한다. 간단히 죽여버린 뱀페스트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지만 말이다.

숙주(宿主).

그건 다시 말해 뱀페스트가 몸에서 빠져나가면 소생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깔끔하게 죽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동조(同調).

지배받는 남성은 뱀페스트의 성향을 결정하는데 매우 큰 영향을 준다.

즉, 여탕 안의 참극은 괴수의 소행이지만, 숙주인 인간이 품고 있던 폭력성을 현실화한 거라고 할 수 있다.

뱀페스트는 거머리다.

카르세리안 레이소에 사는 박테리아처럼 거의 ‘본능’대로 움직인다.

괴수 특유의 폭력성은 있지만, 계약자와 수호자의 관계처럼 처음 받아들이는 숙주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

도시만 봐도 알 수 있다.

평범한 시민처럼 사는 흡혈귀들이 매우 많다.

“우리가 아는 여자라면 저기 둘뿐이다.”

“나머지 셋은 어디에 있지?”

“모른다. 보스(Boss)가 저 둘을 회수해오라고 명령한 후에 그녀들을 데리고 떠났다. 어디로 보냈느냐고 물어도 모른다.”

“...죽기 전에 거짓말할 이유는 없겠지.”

점조직인 모양이다. 귀찮게 됐다.

안절부절못하는 옆에 녀석이랑 다르게 술술 부르는 이 뱀페스트는 확실히 별종이었다. 아마도 헌병대원의 몸을 숙주로 삼은 영향일 것이다.

시민을 사랑하는 헌병대원.

아마 그런 남자의 정신이 뱀페스트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고 모든 걸 자백하도록 한 게 분명하다.

숙주는 죽지 않았다.

몸을 빼앗긴 것뿐이다.

그 증거로 평소에 품고 있던 사상과 신념 등이 괴수를 변화시킨다.

‘아깝군.’

늘 부족하긴 했지만, 요즘처럼 인력이 말랐을 때에 이런 훌륭한 헌병대원을 죽여야 한다는 게 너무나 뼈아프다.

뱀페스트에게 숙주를 놔달라고 해도 들어줄 리 없다. 그리고 괴수가 빠져나가면 몸에 흐르는 ‘괴수의 피’가 폭주해서 남자를 미치게 한다.

아직은 소량이라 괜찮을 것 같기도 하지만 저 기생충이 나와줄 것 같지 않다.

죽더라도 말이다.

숙주를 못 구하면 죽는 건 마찬가지니 0.0001%의 생존 가능성이라도 있는 쪽을 택하는 것이다.

“죽기 전에 하나만 묻고 싶다.”

“말해봐.”

“도대체 그 무기는 뭐지?”

“음?”

“어째서 이들이 부활하지 못하느냐고 묻는 것이다. 머리가 잘리긴 했지만, 이보다 더한 상태에서도 금방 재생할 수 있다.”

무일은 눈앞에 흡혈귀 질문을 이해 못 했다.

목이 잘렸어도 살아날 수 있다는 주장(?)은 충분히 알아들었다. 하지만 이건 평범한 검이 아니다.

카르세리안 레이소.

이 흉흉한 여자친구는 괴수의 터무니없는 회복력을 방해한다.

5종부터는 먹통이지만, 1종 괴수보다도 약한 뱀페스트를 상대로 절대적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괴수는 그렇게 생각 안 하는 모양이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

그리고는 동료일지도 모르는 옆의 뱀페스트 머리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크악!”

그 기습공격에 뒤로 밀려날 뿐만 아니라 머리가 수박 터지듯 완전히 박살 났다.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 없는 시신이 뒤로 넘어간다.

하지만 그 직후에 사방으로 튄 머리 파편이 스멀스멀 기어오더니 빠르게 뭉치면서 머리를 재구성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다시 부활하려던 녀석은 그 헌병대원의 몸을 숙주로 삼은 뱀페스트가 심장 부근을 밟아 으깨버리면서 완전히 행동을 멈췄다.

“우리는 심장을 잃지 않으면 죽지 않는다. 너의 무기는 도대체 뭔가?”

“글쎄…. 그렇게 말하는 넌 뭐지?”

여자친구가 뭐냐고 하면 해줄 말이 없다.

대신, 역으로 물었다.

이에 흡혈귀는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대답했다.

“...숙주를 잘못 선택했다. 놈은 내 정신을 좀먹고 있다. 내 행동원리에 간섭하고 사상충돌을 일으킨다. 흡혈하지 않으면 또 겁쟁이로 변할 것이다. 그건 싫다.”

육체가 괜찮은 남자를 골랐지만, 품고 있는 ‘정의’까지는 알 수 없었다.

보통은 겁에 질려 평범한 인간처럼 행동한다.

들키면 어떻게 될지 아는 까닭이다. 하지만 모든 숙주가 겁쟁이인 건 아니다. 그리고 이런 녀석들이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다.

이 뱀페스트는 숙주를 한 번 갈아탔다.

일반시민에서 헌병대원으로.

육체는 더 좋아졌지만, 정신적으로는 이전 숙주에게 받은 내용이랑 정면으로 충돌하면서 혼란을 겪게 되고 말았다.

대충 거기까지 카르 4세는 [예측]했다.

“좋아. 협조적인 흡혈귀. 얘기는 잘 들었다. 솔직히 말해서 흡혈귀를 직접 만나보긴 처음이거든.”

“그런 것 같았다.”

“...대화할 수 있는 괴수는 처음-, 세 번째라서 묻겠는데 말이야. 숙주랑 사이좋게 고분고분 잘 지내다가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지르는 거지?”

첫 번째 대화 상대는 판타이탄이었다.

다음은 에쏘드….

별로 유익한 얘기는 없었지만 말이다.

뱀페스트가 대답했다.

“당연하다. 흡혈로 강해지기 위해서다.”

“그런 정론 말고 할 말 없어?”

“나 같은 남작 따위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보스에게 물어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는 백작이라 아는 게 많다. 아마도.”

“너의 백작은 누구지?”

“보스에 대해 잘 알지만 말할 수 없다. 이건 절대적인 맹약. 주군에게 직접적인 해가 되는 언행은 할 수 없다.

무일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계급체계를 띄고 있다.

그건 왕과 귀족도 있다는 뜻이다. 서울 한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한국에 어느새 ‘흡혈귀 왕국’ 같은 게 건국된 모양이다.

그가 ‘인간의 탈을 쓴 괴수’를 보고도 그동안 가만 놔뒀던 건 현재만으로도 서울은 마비될 지경이었던 탓이다.

여기에,

『여러분의 가족, 지인 중에 괴수가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진실’을 까발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서울은 그날로 풍비박산 날 것이다.

만약, 볼트윙 테러와 강남구 쿠데타가 없었다면 이 문제를 차근차근 풀어갈 여력이 있었을 테지만, 현재로써는 무리다.

본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당연히 알고 있을 거라고 카르 4세는 판단했다.

어떤 식으로든 이런 녀석들이 한둘만 날뛰어도 도시에 뱀페스트 무리가 스며들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녀석들은 의리 같은 것도 없는 모양이다.

조금만 고문하면 아는 내용을 전부 실토할 거라고 생각된다.

“...이봐, 흡혈귀. 너는 이 나라의 시민인가?”

무일에게 상대가 인간이고 괴수이고는 중요하지 않다.

인류에 도움이 된다면 ‘아군’이고 해가 된다면 ‘적군’이다. 여기에 국경, 종족, 신분 등은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서울을 태연히 돌아다니던 놈들을 놔둔 것도 그런 이유다.

괜히 건드렸다가는 정말 끝이 없을 거란 불안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큰 불의(不義)를 안 일으키고 지낸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너무 안일했다.

수도권 방어에만 치중한 탓에 도시 내의 문제에는 너무 무지했다.

헌병대의 일손이 달려서 생긴 문제일까?

아니면 예전부터 쭉 있었던 고질적인 문제인가.

“선택받은 신민(臣民)이다.”

너무나 흡혈귀다운 대답이다.

선택받지 못한 시민(인간)은 ‘가축’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무일은 별 기대 안 하고 물었다.

“너희의 왕은 누구지?”

“모른다. 나는 백작에게 남작의 지위를 하사받은 몸. 내가 아는 거라고는 위대한 왕과 강력한 공작 두 분이 계신다는 것뿐이다.”

“...이젠 정말 작별할 시간이군.”

꽤 독특한 녀석이었지만, 그뿐이다.

이 뱀페스트는 더는 토해낼 것도 없고 숙주를 포기할 생각도 없었다.

아무래도 ‘헌병대원’은 무고한 시민을 죽인 자신을 용서 못 한다고 쭉 생각해왔던 게 분명하다.

동료를 죽인 게 그 증거.

그저 이 강력한 사냥꾼에게 ‘우리는 머리를 잃어도 죽지 않아요.’라는 걸 이해시키기 위해 비정상적인 행위를 저질렀다.

도망치거나 피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동료로 쓰면 어떨까?

정말 찰나였지만,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잘 죽지 않을뿐더러 인간보다 월등한 체력조건을 가진 녀석이라면 훌륭한 사냥꾼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말도 그럭저럭 통하는 것 같고.

하지만 금세 고개를 저었다.

카르 4세는 몰라도 문세웅은 녀석이 기습하면 100% 사망이다. 더구나 녀석은 괴수. 절대적인 포식자 앞이라서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뿐이다.

“죽기 전에 소원이 있다.”

“일단은 들어는 주지.”

“그 검으로 내 오른팔을 베다오. 꼭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다.”

“...그 정도라면.”

무일은 이유를 묻지 않고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휘둘렀다.

가더발트를 해체하고도 신속하고 간결한 움직임으로 흡혈귀의 오른팔을 때어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겨우 팔이다.

팔이 떨어졌다고 죽는 괴수는 여태 없었다.

하지만 이 ‘2종 특수, 뱀페스트’는 부들부들 몸을 떨더니 힘없이 쓰러졌다.

아직 죽지 않았지만,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놈이 말했다.

“그, 그랬군. 바로…. 성검(聖劍)….

과다출현도 아니고 쇼크사 혹은 심장마비로 죽은 것 같았다.

이쯤 되면 무일도 이상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카르세리안 레이소가 세균으로 괴수의 재생력을 더디게 하는 건 사실이지만, 스쳐도 죽는 맹독을 품고 있는 건 아니다.

“선배님. 끝난 겁니까?”

문세웅이 남탕에서 나오며 물었다.

흡혈귀들이 폭탄 어쩌고 했던 것 같았는데 탈의실이 멀쩡해서 신기하다는 얼굴이다.

여자친구가 좀 이상하다는 건 잘 알았다.

하지만 일단은 생존자들을 안전한 장소로 옮기는 게 급선무다.

이상한 여자친구 문제는 나중이다.

『이, 이상….』

< [20장-5] 너는 뭐하는 시민?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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