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84화 (84/287)

< [20장-4] 너는 뭐하는 시민? >

조성미의 설명을 들은 무일은 고민했다.

늘 막힘없이 추진하는 카르 4세로서는 극히 드문 행동이었다.

그건 일단 ‘경험’이 부족한 탓이다.

무일의 주요 사냥터는 수도권과 서울 밖으로, 도심에 숨어든 괴수하고는 13년 동안 인연이 전혀 없었다.

뱀페스트?

어디까지나 ‘도감’으로만 알고 있던 괴수다.

그렇다 보니 생생한 정보가 부족해서 [예측]도 불확실해졌다. 그리고 이럴 경우에 보통은 [예감]으로 대처해왔는데 이게 또 막막해졌다.

감이 약해져서?

맞다. 너무나 약해졌다.

하지만 그 이유는 ‘믿음’이 줄어서가 아니다.

위협으로 취급조차 안 될 만큼 상대가 ‘너무너무 약해서’ 느끼는 데 애먹고 있다. 그래도 나름 ‘2종 특수’인데 어째서 이런 일이….

‘다른 2종도 이렇게까지 심하진 않았는데.’

최근에 카르 4세는 이 문제로 난감한 상황을 종종 겪는다.

이젠 1종은 아예 [예감]에서 제외된 수준이고 2종도 뿌연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흐리멍덩해져 있다.

그나마 전투 중에는 ‘한 방’이라도 맞으면 죽을 수 있기에 [예감]은 과거보다도 더 뚜렷하게 발동하지만, 이처럼 추격전이나 탐색전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게 변했다.

이건 명백하다.

뱀페스트를 상대로 긴장할 가치도 없다고 태양신(?)이 말뚝을 박아버렸다!

덤비면 조지고 아니면 말자는 식이다.

너무 강해지는 바람에 밑이 안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카르발트(?)는 6종 소형.

2종 따위가 무더기로 덤빈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하물며 여기 뱀페스트 무리는 이제 막 자리 잡기 시작한 탓에 ‘인간 성인보다 조금 강한 수준’이다.

까놓고 말해 1종보다도 약하다.

약한 주제에 잔혹하기는 다른 괴수들이랑 다를 게 없지만.

“선배님답지 않게 머뭇거리시는데요.”

“...그렇게 보이냐.”

“네.”

“솔직히 말하마. 위협으로 취급 안 돼서 헤매는 중이다.”

그런데 여긴 또 어떻게 찾았는지 아리송하다.

머릿속으로 ‘저요! 제가…!’ 같은 이상한 환청도 들린 것 같고 말이다.

카르 4세는 자신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한숨을 푹 내쉬며 ‘용의자’로 허리에 맨 가더발트를 지목했다.

아주 악명 높은 수호자다.

계약자가 미쳐버릴 때까지 괴롭힌다!

페이 링은 가혹한 성희롱으로 미친다고 했지만, 남자인 그는 특별히(?) 깜짝깜짝 튀어나오는 환청으로 심장마비나 노이로제를 유도하는 걸지도 모른다.

정신수양이 필요하겠군.

아직도 발전할 길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그를 기쁘게 했다.

“그러고 보니 선배님은 5급 사냥꾼이었죠.”

이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프로사냥꾼에게 2종 괴수가 눈에 찰 리 없다.

최소한의 ‘위기’ 축에도 못 드는 것이다.

문세웅은 전혀 예상치 못한 난관에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등에 꽉 붙은 장혜린의 풍성한 젖가슴 감촉이 좋아서가 아니다. 팔로 받치고 있는 엉덩이도 탄력이 장난 아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후배가 깊은 번뇌에 빠졌다는 것만은 눈치챈 선배가 말했다.

“앞으로 하위 괴수는 네 담당이다.”

“제, 제가요?!”

“너무 걱정하지 마. 경험자를 한 명 더 초빙할 생각이니.”

프로저격수 ‘타로 5세’로 불렸던 ‘이승필’이라면 카르 4세가 현재 못 잡아내는 [예감] 부분을 대신해줄 수 있을 것이다.

지금처럼 특공대 합숙훈련 조교로 계속 썩혀둘 순 없다.

이번 기회에 합류시켜야 할 것 같다.

문세웅은 큰 역할의 기회를 놓쳤다고 아쉬워하는 눈치였지만, 본인 스스로 능력을 과신하진 않았다.

스스로 미숙한 ‘1급 사냥꾼’이란 걸 아는 까닭이다.

곧 2급 자격증을 딸 예정이지만, 그건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

카르 4세는 ‘상대가 너무 약해서 [예감]이 먹통이다.’라고 투덜댔지만, 그 먹통 수준도 문세웅보다는 월등히 앞서고 있었다.

“경험자라면 누구요?”

“이승필.”

“아! 그 아저씨. 헌병대장 친구입니다.”

“그래?”

아버지의 친구라는 설명 맞지?

어째 전혀 모르는 사람이란 남남이란 것처럼 들린다.

아무튼, 문세웅도 이승필을 아는 모양이다.

무일이 특공대에 입대하기 직전에 수전증으로 은퇴하는 바람에 자세히는 모르지만, 주위에서 하는 말로는 정말 뛰어난 프로사냥꾼이었던 모양이다.

거의 15년 만에 복귀했는데 벌써 투입해도 되려나?

그러다 이승필이 잘못되면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지만, 이번 뱀페스트 문제를 뿌리까지 뽑으려면 반드시 필요하다.

그만큼 서울에는 현재 인재가 없다.

프로사냥꾼 숫자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

‘어쩌면 이후에 한동안 조교로 뛰어야 할지도.’

대단한 사냥꾼에게 교육받았다!

이건 이제 막 특공대에 들어온 신출내기들에게는 대단한 이점으로 작용한다. 그 자부심은 어디로 도망치지 않고 [예감]을 끌어 올려줄 것이다.

문세웅의 빠른 성장만 봐도 알 수 있다.

남을 가르치는 건 자신 없는 무일이지만, 교육장에 ‘출석’만 해도 초심자들의 생존과 실력향상에 큰 도움이 되리라 전망한다.

그렇게 얘기 나누는 사이에 1층 남탕에 도착했다.

“일단, 두 분은 남탕 안에서 씻고 계십시오.”

“여기서 안 빠져나가나요?”

엉덩이가 아파서 걸음걸이가 부자연스러운 조성미가 울상을 지으며 묻는다.

일반 헌병대 같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시민의 안전이 최우선사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르 4세는 특공대.

잔인한 얘기지만, 시민 한둘의 목숨보다는 괴수를 근절시켜 피해의 확산을 줄이는 게 특공대의 목적이다.

현재로써는 강남구 술집에 있다는 뱀페스트를 추적할 방도가 없다.

그렇다면 놈을 불러들이는 수밖에 없다.

“밖에 흡혈귀들이 매복해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조성미 양. 저희는 여기로 놈들을 유인해서 쓰러트린 다음에 움직일 겁니다.”

“원군은요?”

“없습니다. 본부는 현재 심각한 인력난에 시달리는 중입니다. 저와 후배도 지나가다가 우연히 이곳을 발견한 것뿐입니다. 다른 일을 제쳐놓고 온 것이죠.”

“네에….”

“질문할 게 남으셨습니까?”

“어…. 음…. 아니요. 없어요, 오빠.”

조성미는 대뜸 ‘오빠’라고 불렀다.

이전에 만났었던 일을 그녀도 기억해낸 게 분명하다. 하기야 목숨을 구해준 남자를 어떻게 쉽사리 잊을까.

오래된 일도 아니고.

카르 4세는 못 말리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매우 차분하거나 당찬 성격인 줄 알았는데 그냥 위험의식이 없는 것 같다.

“저, 저는 안 씻어도 괜찮습니다.”

장혜린이 문세웅의 목을 힘없이 껴안으며 말했다.

후배의 입이 좌우로 찢어진 모습을 그녀가 못 봐서 천만다행이다.

무일은 차분히 말했다.

“굳이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하지만 남탕에는 들어가 계십시오. 여기에 계속 있으면 전투에 휩쓸릴 수 있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흑.”

울먹이며 마지못해 대답한다.

아무래도 심한 고초를 겪자마자 좁고 캄캄한 옷장에 갇혀있던 것이 그녀에게 정신적으로 심한 충격이 됐던 모양이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길게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다.

“세웅.”

“네.”

“원래는 탈의실에서 남탕 입구를 지키게 할 생각이었다만 장혜린 양이 상태가 좋지 못하니 안에서 입구를 지켜라.”

“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들어가는 즉시 남탕의 모든 벽의 두께를 확인해라. 그럴 리는 없겠지만, 벽을 부수고 기습해올 수도 있으니.”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벽을 부술 때까지 카르 4세가 눈치 못 챌 리는 없다.

뱀페스트가 이 건물 근처를 기웃거리기만 해도 [예감]이 진하게 반응할 것이다.

이건 문세웅의 경험을 쌓는 걸 겸해서 두 여성의 안전을 좀 더 견고히 한다는 데 의미가 있다.

장혜린 양에게 점수도 좀 쌓으라고.

녀석이랑 함께 활동하면서 구해준 미인은 꽤 돼지만 이번은 느낌이 좋다. 이어지면 잘 될 것 같다고 할까.

선지혜라는 무시무시한 감시자만 없었으면 무일이 노렸을 것이다.

이런 인연이 10년 전에 있었으면….

어째서 친구들이 ‘내가 10년만 더 젊었더라면!’ 같은 푸념을 했었는지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전투식량이다. 받아.”

“선배님. 괜찮으시겠습니까?”

문세웅이 걱정스럽게 묻는다.

물론, 쫄쫄 굶었을 게 분명한 두 피해자 여성에게 식량이 급선무인 건 맞다. 특히 빈혈을 겪고 있는 장혜린은 정말 절실하다.

하지만 그것도 지켜주는 사냥꾼이 무사할 때의 얘기다.

솔직히 말해서 문세웅은 선배 없이 혼자서 흡혈귀들을 상대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괜찮아. 전투에는 지장 없다.”

농담이나 허세가 아니다.

정말로 굶어도 배고픔은커녕 체력저하도 없다.

이건 가더발트를 얻기 전에 생긴 능력이라서 생일파티 때는 말하지 못했다. 고백하기 전에 질문공세가 쏟아지는 바람에 깜빡 잊고 넘어갔다는 게 더 정확하다.

그러니 문세웅의 걱정도 충분히 이해된다.

아무리 실력 좋은 사냥꾼도 힘을 못 내면 산송장이나 다름없다.

카르 4세는 시간 되면 문세웅에게라도 체질에 대해 말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위급상황에 어떤 변수로 적용할지 알 수 없으니까.

이건 누구에게 상담해야 좋을까?

현재는 ‘최은비 버프’라고 정의 내린 상태지만, 그동안 워낙 처먹은 불량식품이 많아서 단정하기 어려웠다.

점점 괴수가 돼가는 기분이다.

“...알겠습니다, 선배님. 정 힘들면 빠져나가면 그만이죠.”

“그래. 너무 걱정하지 마.”

“그럼 사양하지 않고 두 아가씨랑 나눠 먹겠습니다.”

“오냐.”

지시를 내린 무일은 탈의실에 배치된 소파에 대충 걸터앉았다.

[예감]이 약하니 이래저래 불편하다.

예전 같으면 두 여성을 본부에 맡기고 뱀페스트의 위치를 대충 찍어서 맞추는 식으로 추격전을 했을 텐데 말이다.

아무래도 새로운 훈련이 필요할 때인 것 같다.

미약한 [예감]을 극대화할 방법을 찾던가 새로운 접근법을 개척해야 한다.

일단 후자는 가망이 없어 보인다.

전자도 당장은 방도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으니 보류.

‘뱀페스트…. 조용히 사는 것 같아서 놔뒀는데 안 되겠군.’

무일이 그동안 놈들을 보고도 놔둔 건 다른 게 아니다.

숙주가 ‘무고한 시민’이기에 건드리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본부에서 ‘해가 없음’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서울에는 ‘인간의 탈을 쓴 괴수’가 많았다.

괜히 건드렸다가 돌이킬 수 없는 사태에 빠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하지만 본부는 일단 모르는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미계약자 조성미’가 잡혀갈 때까지 수수방관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니려나. 폐건물에 전기가 들어왔는데 아무도 몰랐다는 건 정부나 본부에 은폐해준 공모자가 있다는 거겠지.”

중얼거리는 틈에 손님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음을 [예감]했다.

무일도 그렇게 생각하지만, 조성미는 그럭저럭 괜찮은 계약자고 장혜린은 포기하기에 ‘정말 아까운 식량’이다.

납치된 여성이 이 둘뿐이었을 리 없다.

문세웅이 열었던 3개의 옷장에는 배설물만 있고 그 주인들은 어디론가 끌려간 상태였다.

어디로 갔을까?

그건 지금부터 물어볼 생각이다.

탕! 탕!

어디서 총을 구한 모양이다. 그뿐만 아니라 숙주로 헌병대를 쓰고 있었다.

그렇다면 폭탄 종류도 있다고 봐도 무방할까.

하지만 절체절명이 아니라면 쓰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써버리면 헌병대가 몰려와서 일망타진할 테니 말이다.

장시간 충분한 흡혈로 4종, 5종 정도의 흡혈귀로 진화하지 않는 이상은 사냥꾼의 집중공격에 당해낼 수 없다.

하물며 계약자가 출동한다면?

전멸이다.

그러니 놈들이 택할 수 있는 수단을 얼마 없다.

‘납치 아니면 협상.’

하지만 납치는 무리다. 그걸 원천봉쇄하고자 남탕으로 온 거니 말이다. 벽이나 천장을 뚫고 침입해올 수도 있지만, 저런 저급한 뱀페스트로는 시간이 좀 걸린다.

그 틈이면 문세웅이 최상급 기관단총으로 균열이 생긴 벽과 천장을 벌집으로 만들어놓을 것이다.

괴수의 회복력?

숙주는 흡혈을 많이 하기 전까지는 괴수보다 인간에 가까워서 한 발만 맞아도 치명상이다.

뱀페스트의 괴력만 조심하면 칼보다 총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녀석들이 생각이란 걸 한다면 슬슬 낯짝을 드러낼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사냥꾼 애송-.”

무일은 건들거리는 남자를 사정없이 벴다.

그런 삼류 협박에 고분고분 따라줄 카르 4세가 아니다.

남탕에 대표로 들어온 놈이 죽자 당황한 녀석들은 다른 하나를 추가로 들여보냈다. 쭈뼛쭈뼛 걷는 발걸음이 애처롭다.

근육이 우락부락한 남자가 저러니 구역질이 치민다.

뱀페스트의 성격과 숙주의 외모가 불일치하며 벌어진 현상일 것이다.

“10초 안에 지껄여봐. 거머리.”

“대, 대화에 응하지 않으면 폭탄을 먹여주-, 죄송합니다! 대화에 제발 응해주세요! 왜 화필 나야! 저런 인간은 들어보질 못했-!”

시끄럽게 떠들어서 또 벴다.

아무래도 카르 4세의 [업보]를 보고 만 모양이다.

앞에 놈은 예의가 없더니 이번에도 형편없다.

“헌병대에서 쓰는 민간제압용 수류탄 하나만 믿고 왔다면 실망스러운걸. 못해도 화염방사기나 생화학무기쯤은 준비해왔어야지.”

< [20장-4] 너는 뭐하는 시민?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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