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82화 (82/287)

< [20장-2] 너는 뭐하는 시민? >

무일은 ‘독점해도 될 것’과 ‘독점하면 안 될 것’ 정도는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가더발트는 후자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더는 토해낼 정보가 없었다.

선지혜의 의도를 깨달은 카르 4세는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생일파티장 폐회식 전에 차분히 고백했다.

각국 대사들은 짙은 흥미를 보였다.

이어진 추가질문시간까지 지난 후에는 충격에 빠졌다.

『이건 정상적인 계약이 아니다!』

실망했느냐고 묻는다면 그 반대였다.

그들은 여태까지 부탁으로만 움직일 수 있었던 괴수를 ‘복종’ 시켰다는데 초점을 뒀다. 남성 계약자도 놀라운데 이건 그야말로 혁명이다.

프랑스대사가 물었다.

그 증거를 이 자리에서 보여줄 수 있느냐고.

카르 4세는 대답했다.

관람료로 1,000억 원만 주면 당장에라도 그러겠노라고.

“...땅 파서 장사하는 건 아니니까.”

무일은 답답한 ‘박애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의 가능성을 연 ‘선구자’로서 약간의 보답은 받겠다는 욕심 정도는 있다.

그 하나가 돈.

생일파티 한 번으로 부자가 된 ‘카르 4세’는 자신만을 위한 복지재단 하나를 설립했다.

목적은 사생아(私生兒)들 원조(援助).

그 아이들이 성인식 전까지 ‘어머니’ 밑에서 부족함 없이 유복하게 자라도록 물질적으로 지원하기 위해서다.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한 원인제공자로서 책임을 지는 것이다.

물론, 카르 4세에게 법적인 책임은 없다.

하지만 ‘양심’이 그로 하여금 ‘아버지’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하라고 시켰다. 이건 불가항력이다.

어른이 될 때까지만이다.

어른이 된 후는 모른다.

‘15살은 좀 짧나?’

아니다. 그는 13살에 가출해서 독립했다.

여기에 비하면 강하게 키우는 것도 아니라고 합리화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그건 강남구 쿠데타의 주모자들이 예외 없이 ‘유전상속’을 선고받은 것에서 비롯된다.

그녀들은 자궁에 받을 씨로 프로사냥꾼 하나를 지목했다.

이건 절대적이다.

계약자가 순결을 포기하고 ‘예쁜 아기’를 낳아주겠다는데 정부와 본부에서 거절하면 정말 웃기는 상황에 빠지는 것이다.

무리한 요구도 아니다.

완벽한 처자와 보내는 극락의 하룻밤!

고자가 아니라면 거부할 남자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이의를 제기한 여자친구(자칭)’의 모략으로 이 판결은 남자의 눈과 귀에 닿지 않은 채 은폐됐다.

『애만 낳으면 되는 거잖아?』

그 결과가 이거다.

카르 4세는 동정을 때긴커녕 만져보지도(?) 못했는데 슬하에 자식이 ‘많이’ 생겼다는 억울함이 뼈가 사무쳤다.

하지만 언제까지 좌절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긍정적인 마인드로 내다봤다. 프로사냥꾼의 정신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름다운 계약자들이 선택해줬다!

그건,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많은’ 남자라는 뜻이다.

태초부터 27년 동안 고이 모셔놓은 ‘창’을 써보지 못했다는 건 대단히 한탄스럽지만, 언젠가 써볼 기회가 올 것이다.

...정말 올까?

생일파티가 끝나고 무일은 ‘고자 선고’를 받았다.

씨를 남아메리카 대국(大國) 브라헨티나에 비싸게 팔아먹은 까닭이다. 비싸게 사달라고 하진 않았지만, 결과가 그렇다.

그런데 여기저기 뿌리고 다니면 어떻게 될까?

브라헨티나에서 곱게 넘어갈 리 없다.

싱글벙글 웃는 선지혜의 설명을 들은 무일은 아차 싶었지만 이미 배는 떠났다.

“역시, 선지혜.”

순순히 도와줄 리 없었다.

2중, 3중 덫을 놓으니 천하의 카르 4세도 전부를 [예측]할 수 없다.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예감]이 먹통이란 점이다.

선지혜는 ‘악의’나 ‘적의’를 품지 않고 ‘도움’이란 방식으로 [예감]의 허점을 파고들어 사람을 골탕먹이는 탓이다.

그래서 늘 당한다.

알면서 당해주기도 하지만 말이다.

정관수술이란 선택지가 남았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정말로 ‘고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이건 남자의 자존심이다!

그까짓 거, 앞으로 15년만 더 참아보자.

아이들이 성장하고 평범한 종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혐의(?)도 풀릴 것이다.

‘...이미 일곱이나 뿌린 상황에서 조금 더 늘린다고 브라헨티나에서 문제 삼을 것 같진 않은데 말이야.’

선지혜의 말장난에 놀아났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하지만 마누라처럼 감시의 눈길을 보내는 무시무시한 계약자들 앞에서 ‘내 고추는 내가 알아서 한다!’라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무덤보다는 동정이 낫지만….

“그나저나 이 녀석을 어떻게 응징한다?”

폭언을 날린 후배에게 뭘 얻어먹을까나?

문세웅이랑 했던 ‘한무일은 요염하게 변했는가?’라는 시답잖은 내기는 ‘사내대장부다우신 선배’의 승리로 끝났다.

무일의 체형은 변함이 없었다.

사나이답다고 할 수준은 아니고 ‘운동 열심히 한 소년’ 고정이다.

다만, 문세웅이 착각한 원인은 평양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차츰 생기(生氣)가 쌓이면서 여자들도 부러워할 ‘아기 피부’가 된 탓이다.

생후 6개월 된 신생아처럼 말이다.

그 영향으로 ‘조금이나마’ 세상의 찌든 때와 연륜이 묻어있다고 본인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얼굴은 완전 동안(童顔)이 됐다.

겉보기 평균 연령이 16세에서 14세로, 성인식 전까지 떨어졌다.

우울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후배의 지갑이 텅텅 빌 때까지 한우를 10근쯤 먹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

참 소심한 복수다.

“선배님. 엄청난 부자가 되셨잖아요.”

“그래서?”

“벼룩의 간을 후벼 파실 겁니까.”

“어. 가자! 고깃집으로!”

다짐했으면 실천으로 옮기는 게 중요하다.

훌륭한 사냥꾼이라면 야수괴수랑 맞서 싸우기로 일단 마음먹었으면 물러서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법이다.

그게 비싼 고깃집이랑 무슨 상관이겠느냐만….

생일파티가 끝나고 닷새가 훌쩍 지나갔다.

밤늦게까지 최은비의 숙제를 도와준 후에 홀로 밖에 나와 궁상떨었던 무일은 문세웅에게 연락했다.

그리고 다음날.

먹는 걸 좋아하는 순진무구한 초등학생은 학교로 훌러덩 보내놓고 어른 둘이서 고깃집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어디 고깃집이요?”

“고깃집이라면 당연히 서초구지!”

“큭! 서초구의 한우 전문점 말씀입니까.”

서초구는 서울 여의도 남동쪽에 위치한 번화가다.

한국에서 2번째로 잘 사는 사람들이 모인 동네다.

그런 서초구 오른편에 최고 빈민가인 강남구가 있는 이유는 타인을 지배하길 좋아하는 일부 어른들만 아는 사정이다.

즉, 서초구는 ‘평화로운 남서울’을 대표하는 지역구다.

이곳이라면 성형미인으로 쫙 깔린 길거리 파라다이스에서 0.1% 확률로 ‘미계약자’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후배의 확인질문에 선배가 답했다.

시선은 계속 ‘그림의 떡이 된 처자’들을 쫓고 있다.

“그래. 그 뭐였더라? 아마 ‘고조할머니 150년 전통 불고기’란 이름의 음식집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잘 모르는 척하지만, 식당이름을 제대로 알고 있다.

노린 티가 확 났다.

이 ‘최강의 상남자’는 사냥은 기막히게 잘하지만, 연기에는 소질이 전혀 없다.

그러니 세상은 공평하다고 할 수 있을까?

전혀 아니라는데 문세웅은 자기 보물과 애마도 걸 수 있다.

“...선배님. 인간적으로 비긴 셈 치시죠.”

“왜?”

“체형은 제가 틀렸다는 걸 인정합니다. 하지만 피부는 아니잖습니까? 성형수술과 약물복용, 보습크림으로 온몸을 떡칠한 여자들보다 피부가 좋으면 솔직히 반칙입니다.”

정말 너무하다고 후배는 단호하게 선언했다.

사냥꾼들이 수도권 밖으로 나갈 때는 늘 자외선차단 효과를 겸한 위장크림을 바르기에 피부가 타는 일은 계약자만큼이나 없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다.

점 하나 없이 깨끗한 피부는 그 ‘생일파티 피규어’처럼 뭔가 가공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자연적이지 못하고 인위적으로 고친 느낌.

어색하다는 건 아니다.

다만, 거칠게 살아가는 사냥꾼 피부가 제국의 황태자처럼 완전무결하다는 점이 비현실적이라고 할까….

슬슬 고깃집이 보인다.

문세웅의 통장을 탈탈 털어줄 시간이 가까워졌다.

“...잠깐. 저기 세워봐.”

그럴 계획이었던 무일이 팔을 들었다.

후배를 쥐어짜겠다고 벼르고 온 선배의 양심에 드디어 경종이 울린 걸까.

문세웅은 서둘러 차를 주차했다.

그리고는 살짝 기대를 담아 말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선배님. 배가 덜 고프시더라도 여기까지 와서 발뺌하시면 안 됩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저 골목.”

카르 4세는 볼트윙 테러로 반쯤 무너진 폐건물 사이를 가리켰다.

잔해는 치워졌지만, 건물은 출입금지 푯말과 경고문 하나씩 불성실하게 걸린 채 방치되어 있고 그 사이 골목은 동굴처럼 어두컴컴했다.

딱히 이상한 광경은 아니다.

볼트윙 테러와 강남구 쿠데타. 그 대형사건 둘을 연타로 얻어맞은 서울 곳곳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국고(國庫)가 바닥난 탓이다.

야심 차게 준비한 개성시는 완공을 앞두고 중단되며 관리비만 나가는 실정이고 강남구 투기로 쫄딱 망한 정치인들이 세금을 횡령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피해복구사업을 할 여력이 없다.

...라는 게 정부의 변명이고 입장이다.

하지만 그 진짜 의도는 서울 시민을 파주시와 개성시로 강제이주시키겠다는 계획이다. 당연히 선지혜 회장이 입김이 강하게 적용됐다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저 골목이 어때서요?”

“지금부터 들어가 보면 알겠지.”

전에는 이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평양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사람 행세하는 괴수를 분별할 수 있게 됐지만, 그건 세심한 관찰을 통한 [예측]의 결과였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다.

그저 마음이 가는 대로 움직인 [예감]이었다.

저기에 무언가 있다고 말이다.

‘땅굴을 파서 도시로 숨어든 괴수인가?’

지하철과 지하매장을 공격하는 그놈들은 매우 위협적이다.

땅속으로 파동을 쏘아서 이상을 감지하면 계약자와 사냥꾼이 출동한다. 그리고 괴수가 튀어나올 지점에 미리 매복해있다가 처리하는 식이다.

하지만 전부 찾기란 불가능하다.

땅속에서 가만히 잠복해있으면 초음파로는 잡아내기가 어려운 까닭이다.

“선배님. 여기, 못 치운 잔해가 있습니다.”

커다란 콘크리트 바위가 건물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골목이 좁아서 기계가 못 치운 걸까?

카르 4세는 유심히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니. 이건 안 치운 거다. 이 무거운 돌덩이를 옆으로 밀었던 흔적이 있어. 미닫이문처럼 말이지.”

“이 꿈쩍도 안 하는 걸 말이죠, 선배님.”

“그래.”

“평범한 인간의 소행은 아니겠군요. 여기가 선배님의 비밀아지트가 아니라면 괴수의 소행이란 뜻이겠네요.”

“훌륭한 [예측]인데?”

하지만 평범한 괴수는 아니다.

도시 내에 보금자리를 만드는 괴수들이 심심찮게 있지만, 이렇게 지능적인 보안을 마련해두진 않는다.

침입자가 오면 기쁜 마음으로 잡아먹을 뿐.

이렇게 입구를 꽁꽁 감춰두진 않는다.

“입구를 막아놓은 걸로 봐선 괴수는 밖에 나가 있는 모양입니다. 이미 토벌됐다는 선택지도 있지만, 그랬다면 선배님의 [예감]에 안 걸렸겠죠.”

“흠. 도시에서 출퇴근할 수 있는 괴수는 드물지.”

카르 4세는 후배를 다시 보게 됐다.

진짜 제법인데?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혼자서 모든 걸 생각하고 판단해야 했다. 그런데 문세웅은 제법 보조하는 모양새가 났다.

초심자에 해당하는 1급 사냥꾼답게 아직은 입으로만 거드는 수준이었지만, 여기에 ‘행동력’이 더해지면 충분히 2급으로 진급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일은 여자친구를 뽑았다.

그리고는 바위를 자르는 대신 원래 입구 옆에 새롭게 하나를 뚫었다.

“...선배님. 보통은 바위를 벨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막고 있는 바위를 치운 후에 멀쩡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게 정석이다.

하지만 무일은 손가락을 좌우로 흔들었다.

“저걸 잘게 쪼개서 치우려면 한세월이다.”

“가더발트는요?”

“...팬티를 아낄 수 있으면 아껴야지. 쉬운 방법을 놔두고 손해를 자초할 필요는 없잖아.”

“부자가 쪼잔…. 아닙니다. 그것도 그렇네요.”

문세웅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무일은 쓰게 웃었다.

올챙이가 제법 성장하긴 했지만, 앞다리까지 나오려면 아직 먼 것 같다. 그 점이 못내 아쉽지만, 시간과 경험이 쌓이면 자연히 해결될 것이다.

폐건물 내부로 진입하며 말했다.

“RPG 게임 용사의 방식을 따라 할 의리는 없어. 우리는 나무문도 못 부숴서 열쇠 찾으러 이리저리 헤맬 여유가 없다고.”

“아하!”

“그러니 게임은 적당히 즐겨라. 게임 시나리오 흉내 내면 훅 간다.”

“명심하겠습니다.”

RPG 게임에서는 마왕의 부활 혹은 소환을 저지하려고 용사가 모험을 떠난다.

하지만 끝판왕으로 마왕은 늘 등장한다.

이유는 시나리오만큼이나 많겠지만, 따져보면 별것도 아닌 구조물을 문화재처럼 소중히 아끼다가 늦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문과 벽이 막고 있으면 빠르게 부수고 지나갑시다!

게임이 현실 같으면 재미없긴 할 거다.

그러나 설사 그렇다고 해도 현실을 게임처럼 즐기려다가는 영영 재미없는 수가 있다.

“자, 뭐가 있는지 볼까.”

< [20장-2] 너는 뭐하는 시민?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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