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장-4]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 >
‘...뭐지?’
첫 번째 경매는 생각할 틈도 없이 끝나있었다.
애초에 타국의 화폐가 거의 통하지 않는 대한민국에서 끌어다가 쓸 수 있는 ‘원화’는 한정된 탓이다.
수천억 원씩 써서 낙찰된 나라는 한국에 진출해놓은 기업과 자본을 처분해야겠지만, 이 경매상품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카르 4세의 ‘과정’을 손에 넣는다.
그건 이론상으로 똑같이 ‘남성 계약자’를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재료와 제조법을 갖췄는데 뭘 못하겠는가?
그 정도는 무일도 [예측]할 수 있었지만, 도무지 수긍할 수 없었다.
매일, 정말 매일 기계처럼 규칙적으로 생활해온 그에게 무언가 특별한 수련이나 비결이 있었을 리 없다.
하지만 이미 첫 번째 경매상품은 프랑스대사가 구매했다.
3천만 차이로 패배한 독일대사가 부르르 몸을 떨며 분함을 삭히는 게 보였다.
“이거 실수한 걸까요….”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당황하는 중이었다.
유럽의 패자로 불리는 4대 강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중에서 경매에 참가하지 않은 건 영국뿐이었다.
정세는 모르지만, 뭔가 대단히 중요한 경매라는 정도는 눈치챘다.
카르 4세의 생활부.
어째서 이런 거에 강대국들이 집착하는지 모르겠지만, 영국이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생일파티를 겸한 ‘외교’였다.
그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왕녀의 체면은 어떻게 될까?
‘파티밖에 모르는 여자라는 악의적인 소문이 떠돌겠죠.’
예쁜 입술을 깨물어보지만 당장 방법이 없었다.
정말로 파티만 생각하고 참석했으니까.
카이시스 하이로드가 어전회의에서 안건을 꺼내고 여왕의 반격에 순응한 건 전부 이것을 노린 포석에 지나지 않았다.
억울한 면도 있다.
카레 경이 뛰어난 기사라는 건 동의한다.
하지만 그래 봐야 ‘남자’다. 에쏘드 계약자가 아닌 이상 약하디약한 남자. 그건 카르발트로 불린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그게 왕녀님의 생각이었다.
여태까지는 말이다.
“그럼, 2번째 경매품을 소개할게요.”
“100억!”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유키나 미나미.”
“우우….”
예상대로 ‘카르발트 피규어’였다.
높이는 대략 20cm로 정말 살아있는 것 같았다. 날쌘 표범처럼 뻗은 팔다리에 우락부락하지 않게 생기다가 멈춘 복근과 흉근이 인상적이다.
각지지 않은 턱선과 서글서글한 눈매는 ‘착한 아이’처럼 보였지만, 꾹 다물어진 입술은 의외로 고집이 강할 것 같았다.
전체적인 평을 내리자면?
침대 위에서 상냥하게 ‘리드’해줄 어린 신사 같다고 할까….
“머리는 카르 4세가 미용실에서 자른 실제 머리카락을 사용했습니다. 아쉽게도 피부와 뼈는 가짜지만 그 대신, 제가 부위별로 직접 만져보고 느낀 감촉을 그대로 재현했습니다.”
“푸웁! 콜록콜록!”
무일은 마시던 샴페인을 뿜고 말았다.
명백한 성희롱 아닌가!
하지만 그 집착과 장인정신을 이해 못 하고 있는 건 카르 4세, 당사자뿐인 모양이다. 모두가 조금씩 감탄사를 내뱉고 있다.
진짜 이상해! 이상하잖아!
아무도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허리에 찬 카르세리안 레이소도 크기만 축소한 진품입니다. 주인을 죽이는 저주까지는 구현하지 못했지만, 시험해보다가 손가락이 잘릴 수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스고이….”
“우와….”
“리 하이….”
“대단하다….”
여성진영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반대로 남자들은 살짝 질렸다는 얼굴을 하고 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이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총 9개를 제작했습니다. 하나는 제가 가질 예정이고 7개는 저쪽에 자리한 예비 엄마들에게 사은품으로 증정용. 경매로 판매되는 건 1개입니다. 경매시작가는 원가 35억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카르세리안 레이소 축소판이 비싼 모양이다.
그냥 플라스틱으로 대충 만들 것이지 쓸데없는 디테일이다.
무일은 ‘검 빼고 싸게 주세요!’라고 누군가 말하리라고 [예측]했다. 저 피규어는 아무리 봐도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
하지만 아까도 그랬지만 오늘, 카르 4세의 감은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60억.”
“100억!”
“우읏! 110억.”
“120억.”
우수한 계약자이기 이전부터 재벌가 아가씨였던 시링 팽과 유키나 미나미가 경매 시작부터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시링 팽은 중국 무림에서 ‘하북의 호랑이’라고 불리는 ‘하북팽가(河北彭家)’의 차녀였고, 유키나 미나미는 일본의 ‘9종 공주님’이었던 ‘미오 타미에’가 선택한 엄친아의 외손녀.
배경으로 따지면 엇비슷했다.
다만, 한국의 ‘원화’ 보유량은 그렇지 않았다.
평소에 한국이란 나라에 관심을 두고 투자하지 않았다면 ‘용돈’이 아무리 많더라도 융통이 안 된다.
그런 의미에서 시링 팽은 유키 짱의 상대가 못 됐다.
“포기하면 편해, 예요. 포르 찡.”
“우우…. 정말 너무해요! 유키나.”
“나의 카레 짱을 넘본 벌이야, 예요.”
이미 유키 짱의 머릿속에는 ‘외교’란 목적은 멀리 가고 없는 모양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피규어는 그렇게 일본 아가씨의 손에 떨어졌다.
윤소영이 선망의 눈길로 쪼르르 다가가서 ‘언니. 오빠 인형 만져봐도 돼요?’라고 묻는 등의 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튼튼한 포장지는 그 자리에서 개봉!
만져본 미소녀가 ‘오빠 팔 감촉이랑 똑같아요! 설마 거기도…?’라는, 해석하기에 따라서 매우 위험한 발언을 했다.
손가락 마디 하나의 관절까지도 인체랑 똑같이 움직이는 모양이다.
“...선지혜.”
“응.”
“저거 법적으로 문제없는 거야?”
“응. 선배의 초상권은 현재 내가 대행하고 있으니 괜찮아.”
평양의 알몸 동영상을 막아달라는 카르 4세의 간절한 요청을 흔쾌히 수락한 선지혜 회장이었다.
당연히 ‘사소한 권리’ 몇 가지를 이양받았다.
그걸 이런 식으로 ‘악용’할 줄 몰랐던 무일은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을 리가….”
그렇다고 저렇게 좋아하는 유키 짱에게서 뺏어올 순 없었다.
과연, 피규어 강국 일본답다고 할까.
일본에 사는 아가씨는 씀씀이도 엄청났다.
선지혜가 말했다.
“선배. 원자잿값을 뺀 순수 수익금의 절반을 주고 싶지만, 증정용 7개 값을 빼면 얼마 안 남을 거야. 그건 이해해줘.”
“어, 음….”
결국은 저 임산부들이 어째서 왔느냐고 묻지 못했다.
아기 든 배가 볼록 나와서 거동이 불편한 김민지와 임보연을 포함한 일곱 여성이 참석한 이유는 오리무중에 빠졌다.
그녀들을 볼 때마다 죄지은 사람처럼 크게 위축된다.
어째서 그런 걸까?
카르 4세는 상념을 접고 3번째 경매로 시선을 돌렸다.
“여러분들이 고대하던 3번째 상품을 공개합니다.”
냉동 밀폐된 주먹 크기의 유리캡슐이었다.
그걸 본 경매참가자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기까지 했다.
하지만 당사자보다 그 충격이 크진 않았을 것이다.
“내 정자(精子)…?”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했던 무일은 벌렸던 입 그대로 멈춰 섰다.
선지혜의 눈이 한없이 진지했던 까닭이다.
카르 4세는 내 인권 어쩌고 떠들기보다는 이번 생일파티의 주목적을 [예측]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한마디로, 사생활이 전부 까발려졌다.
유명하지 않던 ‘과거’에 어떻게 살아왔는지부터 ‘미래’의 후손까지 낱낱이 공개됐다.
보통은 이쯤에서 [예감]이 ‘위기’를 알려왔어야 정상이다. 눈으로 찾기 힘든 감시카메라를 감으로 잡아내듯 말이다.
하지만 조용하다.
그건 선지혜의 판단이 자신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는 뜻이다.
‘아아, 그런가.’
마침내 깨달았다.
카르 4세는 스스로 ‘최초의 남성 계약자’란 타이틀을 자각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세계는 그의 상상보다 더한 관심을 두고 있었다.
7종 수호자보다 약하다고?
그건 상관없다.
2종 괴수하고 계약했다는 자체만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영역에 ‘가능성’이 생겼다. 그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
그들의 바람은 처음부터 하나다.
『남성(男性)』
재래식 무기가 몰락하고 기계가 힘든 일을 대신해주면서 그 필요성이 급격히 낮아진 ‘남성’은 이제 ‘불필요’한 단계에 접어들었다.
특히, 4차 세계대전 당시의 남자는 정말 쓸모없었다.
전쟁은 극소수 계약자와 수호자가 했고 이후에 생존을 건 국지방어 또한 그녀들의 몫이었다. 급격히 감소한 인구를 복구한 것도 계약자 외의 여자들이었다.
남자는?
까놓고 말해서 식량만 축내는 짐이었다.
계약자가 못 되더라도 출산은 여성들의 성역이었고 남성은 우수한 종자를 보유한 한 명이면 충분했다.
치안은 총만 있으면 여자도 지킬 수 있다.
정치도 노련한 여자가 대신할 수 있다.
힘든 노동을 기계가 도맡아서 처리하면서 남자는 불필요해졌지만, 출산은 ‘계약 조건’ 때문에 여전히 여자의 자궁으로 하고 있다.
남녀비율만 봐도 알 수 있다.
『2 대 8』
남자가 당연히 ‘2’다.
식량이 부족한 약소국으로 갈수록 이 편차는 더욱 커진다.
태아가 남성이면 낙태하고 혹시라도 태어나면 안락사시키는 까닭이다. 인류의 생존이 걸린 문제인 탓에 나라에서도 권장한다.
결정적으로, 사망률이 높은 사냥꾼 대다수가 남성이다.
자연히 희소해진 남성 탓에 고리타분한 나라들도 ‘일부다처제’를 채택했고, 희소해진 만큼 남성의 가치와 권리도 회복됐다.
종자(種子)로서.
정말 불명예스러운 이유였다.
“1,000억.”
“1,300억.”
“2,000억!”
“2,200억.”
그런 암담한 현실을 극복하려면 ‘힘’이 필요했다. 고대처럼, 가족과 나라를 보호하는 능력이 여성보다 남성이 뛰어남을 증명해야 했다.
에쏘드가 있지만, 그 숫자는 터무니없이 적다.
설상가상으로, 예쁘고 처녀면 장땡인 계약자에 비해 그 요구조건이 너무 까다롭다.
적성, 사상, 재능, 노력….
심지어 혼자서는 힘도 제대로 못 쓴다.
전투를 보조해줄 ‘여성 계약자’가 다수 필요하고 그러고도 위기부담이 너무 커서, 안 그래도 부족한 ‘우수한 남성’들이 우수수 죽어난다.
이래서는 안 된다!
에쏘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이 여성우월시대를 타파하기 위한 연구와 인체실험은 전부 실패로 끝났고 국제적인 비난만 샀다.
그러던 중에 ‘희망’이 나타났다.
『카르 4세.』
여성에게만 들러붙는 가더발트를 입은 남성!
그냥 타고난 돌연변이라면 웃고 넘길 우발사건이겠지만, 그는 ‘소년을 소녀로 속이기’라는 생체실험의 피해자였다.
그 부작용으로 ‘소년’에서 성장이 멈췄다.
이상적이다.
남자들에게 목숨처럼 소중한 생식기능도 살아있으면서 계약도 가능하다. 동정(童貞)이란 조건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계약자들도 처녀인 건 마찬가지다.
생일파티장 한쪽에 자리한 여인들.
배우자도 없는 그녀들이 누구의 아이를 뱄는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의도는 명확하다.
세계에 단 한 명에게만 있는 ‘희귀한 유전자’가 후대까지 이어지는지 실험해보는 것이다.
“5,000억!”
“아직 확인도 안 됐는데 무리하는군.”
“그러는 자네야말로 포기하시게!”
유전이 안 된다면 말짱 꽝이다.
하지만 100년을 참았다.
이 메커니즘을 밝혀낼 수만 있다면 남성우월시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출산’이란 강력한 무기를 가진 여성들과 대등한 위치쯤은 사수할 수 있을 것이다.
무일은 생각했다.
저들이 현재 부르는 돈으로 ‘암살자’를 고용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하고.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이다.
선지혜는 아예 ‘카르 4세’의 모든 정보를 제공하고 실리적인 이득과 안전을 확보할 계획을 짠 것이다.
생일파티란 이벤트를 통해서.
“...선지혜.”
“응.”
방식은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주고 싶었다.
“고마워.”
“예쁜 공주님은 늘 착한 용사님 편인걸.”
가장 치열했던 3번째 경매가 끝났고 ‘꽁꽁 언 정자’는 브라헨티나에 넘어갔다.
중요할지도 모르는 ‘생활부’를 프랑스에 밀리는 척하며 넘겨주는 과감한 수까지 동원해서 자금을 말려둔다는 전략을 펼친 독일과 스페인.
브라헨티나란 예상치 못한 복병에 이를 갈았다는 후문이 있다.
“...그런데 정말로 내 아기들?”
“응.”
중요한 얘기를 가볍게 고백한다.
생명윤리의식이 망가진 계약자답다고 할까.
“나, 동정인데.”
“알아. 그래서 지키려고 노력 많이 했어. 고맙지?”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거야…?”
“응.”
< [19장-4]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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