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78화 (78/287)

< [19장-2]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 >

에쏘드에게 유감은 없지만, 분한 건 사실이다.

국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낼 기회가 거의 없는 ‘왕녀’의 인기는 야금야금 ‘왕자비’에게 뺏기고 있었다.

얼굴은 취향 타니 논외지만 가슴 매력에서 압도적으로 밀린다.

예쁜 여자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남자들이 열광하는 건 당연지사. 더구나 ‘8종 계약자’인 실바니아는 몸매, 얼굴 노출이 제한적인 것에 비해 그녀는 무척 자유롭다.

그걸로 남성은 아웃!

여성 지지율도 위협받는 건 마찬가지다.

계약자가 아무리 선행을 베풀어도 같은 여자로서 시기와 질투는 늘 따라온다. 거기에 자기관리마저 철저한 ‘왕녀’는 거리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왕자비’는 아니다.

위조신분부터 평민인 그녀는 행동거지도 평범하다. 아니, 방송에서 자주 엉뚱한 면모를 보이며 공감대 비슷한 점수를 따고 있다.

괴수답게 지치지도 않는다.

이게 가장 크다.

‘...이대로는 안 됩니다.’

국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왕녀의 마법’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여전히 고맙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타성(惰性)이 짙어지면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도움을 빌미로 지지를 호소하면 비난하지 않을까.

전에는 순진하게 런던 시민을 믿었다.

하지만 사회를 배우면서 세상이 만만치 않음을 깨달았다.

“일단 가볼까요.”

지금은 눈앞에 일에 집중할 때다.

카레 경이 서울에서 무시당해왔다는 건 알고 있지만, 평양에서 보여준 놀라운 활약으로 인지도가 많이 쌓였을 것이다.

생일파티장소가 특공대인 것만 봐도, 대한민국에서 카레 경을 신경 써주고 있다는 걸 직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러니 격식 있는 생일파티임을 고려해야 한다.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아껴뒀던 무도회 의상으로 갈아입었다. 선정적이지 않으면서도 여성의 매력이 돋보이는 디자인이다.

...미리 가봐야 분위기만 어색하겠지요?

파티시간 30분을 남겨놓고 ‘듀크마 계약자’는 런던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한국 특공대 막사 앞에 도착하여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드레스를 다듬으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다.

그래야 했는데,

“...제가 늦은 걸까요, 아니면 장소를 잘못 찾아왔던가.”

태평양과 일본 열도, 동해를 차례차례 횡단한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도착 직후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홀 중앙에 놓인 거대한 케이크와 촛불 개수로 봐서는 생일파티가 분명 맞다. 심지어 생일파티노래 반주를 담당한 악단도 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일까?

전운(戰雲)이 감돈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거대한 바위섬’이 서울 하늘을 새까맣게 덮고 있었다. 저 무지막지한 비행체, 아니, 생명체를 그녀는 안다.

【웨일풍 / 7종 대형】

미국의 ‘하늘 고래’는 저렇게 크지 않다. 그렇다면 중국. 실각한 8종 계약자 미호 첸의 제자인 시링 팽의 수호자가 분명하다.

사부의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카레 경의 생일에?

무언가 심상치 않다.

그 밖에도 계약자가 분명해 보이는 미녀들이 많았고, 다국적 인사들이 서로를 곁눈질하며 파티주인공에게 말할 기회를 견제하고 있다.

심지어 아름다운 임산부들까지?

카레 경을 힐끔힐끔 훔쳐보는 모습으로 봐서는 ‘배 속의 아기’의 아빠가 누구인지 의심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만 이 광경을 이해 못 하고 동떨어진 기분.

카이서스 오라버니가 순순히 보내줄 때부터 의심해봤어야 했는데 너무 성급했다.

‘어쩌면 좋죠…?’

사전조사할 시간이 부족했던 게 뼈아프다.

영국 정보과는 아무것도 몰랐고(정말 몰랐을까요?) 꽃단장하니 파티시간이었다.

이 자리의 모두가 이 나라의 언어를 쓰고 있었고,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교양으로써 한국어는 능수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다고 장담한다.

하지만 ‘웅성웅성’으로 들린다.

가령, 면식이 있는 프랑스대사관이 비서에게 말한다.

“독일이 여기 있는 이유도 우리와 같다면 상당히 불쾌한데 어떻게 생각하나.”

“아닐 겁니다. 저희도 최근에 간신히 잡았는걸요.”

“그렇지? 반드시 그래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나?”

“물론입니다. 독일 측에서 저희를 노려보는 이유는 분해서 그럴 겁니다. 인공위성을 띄운다고 전부는 아니지요.”

“흠. 좀 더 기다려보면 전모가 드러나겠지.”

예의에 어긋나지만, 마법으로 도청한 프랑스 진영의 대화였다.

그렇다며 독일은 또 어떨까?

이번에는 이쪽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프랑스 녀석들이 왜 여기 있는 건가?”

“신경 쓰지 마십시오, 장관님. 그보다는 브라헨티나에서 사람을 보냈다는데 더 관심을 가져보는 게 영양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핫! 애가 탄 건가.”

“제대로 알고 온 건 아닐 겁니다. 남들이 오니 편승한 거라고 봅니다.”

“...미국은?”

“도시 한복판에 전자기펄스를 떨어트린 무뢰배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굳이 입으로 말하는 건 들으란 걸까?

정보조작이나 허장성세 같은 정치적인 공방이 오가는 것 같다.

‘이민 권유는 아닌 것 같은데요.’

평양에서 본 ‘카레 경’의 실력은 경이로웠다. 인정한다. 그 직후에 괴수랑 강제계약한 것도 솔직히 많이 놀랐다.

지금도 꿈에서 종종 소년의 알몸과 가더발트가 나올 정도니 말이다.

하지만 그게 이 많은 나라에서 사람을 보내올 정도로 대단한 일인 걸까, 그것도 사사로운 생일파티에 참석할 정도로?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의아했다.

하지만 ‘정치’는 이마에 주름을 만들므로 고민은 여기까지만 하기로 했다.

그럼, 숙녀들의 다과회에 동석해 볼까요.

말재간이 뛰어나다고는 할 순 없지만, 필요한 정보를 아가씨들로부터 자연스럽게 끌어낼 정도는 된다고 믿는다.

다행히도 테이블마다 찻잔과 주전자, 과자가 놓여있다.

임산부들 쪽은 처녀인 그녀가 감히 끼어들 엄두가 안 났지만, 계약자들의 모임이라면 ‘8종 계약자’인 영국 왕녀님이 꿀릴 이유가 없다.

“실례합니다. 동석해도 될까요.”

복장과 외모가 다양한 미녀들의 시선이 몰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탐색하는 눈빛에는 익숙하지만,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이건 또 어디서 굴러들어온 메주?’ 라는 표정들이다.

시기와 질투하고는 달랐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더 자존심 상하는 태도들이었다.

그녀들의 관심사는 한 여성에게 쏠려있었다.

분명, 평양에서 비겁한 수를 쓰고도 카레 경의 검에 패배했던 중국 여기사(女騎士)다. 노예나 다름없는 처분을 받았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었던 모양이다.

이름이 아마, ‘페이 링’이었던가요.

요즘에는 찾아보기 힘든 전통 하녀 복장을 하고 있다.

“첫수부터 메이드라니 반칙이야, 예요. 엉큼한 암캐! 유키 짱도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너무 비겁해, 예요. 무효!”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계약자, 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유키나 미나미.

관대하고 신사적인 7종 수호자 판타이탄을 만난 그녀는 평범한 여성들보다도 자유롭게 인생을 즐기고 있다.

모든 판타이탄이 그런 건 아니다.

러시아의 7종 수호자는 ‘가상세계 살인마’라고 불린다.

사적으로, 영국의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일본의 유키나 미나미랑 가상현실게임친구. 낯선 장소에서 아는 사람이란 무척 든든한 아군이다.

반갑긴 한데 인사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유키나 미나미는 일본의 전통 옷 ‘기모노’ 차림이었다. 꽃무늬 비단은 이 생일파티장의 누구보다도 화려했고 시대착오적인 나막신까지 완벽하게 신고 있다.

머리에 귀여운 ‘고양이 귀’까지…?

현실에서도 부끄러운 복장을 태연히 입을 줄은 미처 몰랐다.

잠시, 아는 척하지 않기로 했다.

“참고로 노팬티 메이드~♪ 타락지수 98%!”

연분홍색 간호사 옷을 입은 여인이 콧노래 부르듯 말했다.

그녀가 ‘노팬티’라고 하자마자 파티장의 모든 남성의 시선이 집중됐다고 느낀 건 절대로 기분 탓이 아니리라.

얼굴이 당장에라도 터질 것처럼 새빨개진 페이 링이 치마를 꾹 누르며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아무도 안 믿는 눈치다.

유키나 미나미가 분한 듯 몸을 부르르 떤다.

근처에 있던 시링 팽이 마침표를 찍었다.

“...링 언니. 잠깐 안 본 사이에 많이 타락하셨네요.”

“아우으으! 팽, 너마저! 노예는 이렇게 입어야 한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야! 절대로 아기 같은 사심은 없어!”

“언니. 방금, 음흉한 속셈을 고백하셨어요.”

“어? 어라?! 내 한국말에 무슨 실수라도 있었어?!”

애니메이션에서 나온 대사로서 검증을 마쳤다.

그런데 믿지 않는다.

주인님이랑 ‘아기 만들기’ 싫다는 건 아니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동생에게 타락했다는 비난을 살 말은 안 했다고 생각한다.

그 광경을 멍하니 보는 영국 왕녀님.

이쪽에도 가상현실게임친구가 있었다. 가상현실에서도 마음이 통하는 계약자들끼리 몰려다녔으니 당연한 걸지도 모르지만.

중국의 7종 계약자 시링 팽.

서울 하늘을 뒤덮은 웨일풍을 봤을 때부터 예상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문제는, 이쪽도 말을 걸 분위기가 아니다.

중국 전통의상 ‘치파오’를 즐겨 입던 시링 팽이었다. 그런 그녀가 오늘은 순백의 하늘거리는 ‘한푸’를 입고 있었다.

저 복장은…?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기억을 더듬었다.

숙녀라면 상대의 무장(?)을 암기해두는 건 기본이다.

시링 팽의 옷차림은 평양에 모습을 드러낸 ‘중국의 에쏘드’가 입고 있던 한푸랑 비슷했다.

‘제법 잘 어울리지만….’

정령의 ‘작위적인 젖가슴’을 당해낼 순 없다.

저 한푸는, 거의 모든 계약자의 필수품인 브래지어, 패드, 뽕브라를 전혀 활용할 수 없는 진검승부 디자인이다.

정령의 과시욕이 짙게 뱄다고 할까.

시링 팽이 어떤 의도로 저 옷을 선택했는지는 의아했지만, 나중에 조용히 묻기로 했다. 이 친구도 감출 수 없는 패배감이 묻어난 얼굴이었던 탓이다.

하녀 옷이 무슨 문제일까요?

아니면 저 치마 아래로 팬티를 안 입고 있는 것에 의미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영국 왕녀님은 어림짐작했다.

“은설 언니! 다들 기합이 잔뜩 들어갔어요!”

“...나도 보고 있어, 소영아.”

교복 차림의 소녀는 실바니아가 아는 얼굴이었다.

한국의 자랑거리인 ‘최연소 7종 계약자’ 윤소영 양이었다.

솔직히 놀랍다.

프랑스의 레드군 계약자는 집 밖으로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까닭이다. 계약자를 훔쳐보거나 접근한 남성은 예외 없이 죽인다.

그런데 그 ‘질투의 용왕’이라고 불리는 레드군이 잠잠하다.

방송 예능프로그램 등에 윤소영이 나올 때는 ‘가상현실을 현실로 꾸민 속임수’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그녀 옆에 앉은 조금 앳된 청순한 미인은 모르는 얼굴이다.

서민들이 즐겨 입는 원피스 계열의 평상복 위에 계약자의 몸맵시를 가려주는 방탄코트를 걸치고 있다.

이게 일반적인 계약자 복장.

하지만 그 상식이 이 파티장에서는 이상하게 보였다.

“거기, 진짜 여중생!”

“네? 저요?”

유키나 미나미가 윤소영을 불렀다.

이 코스프레 대가는 심한 농담을 들었다는 말투로 지적하기 시작했다.

“교복 치마를 짧게 줄이고 어른 팬티를 입고서 아닌 척하지 마! 교복 대신 평상복으로 갈아입을 시간은 충분했잖아. 그리고 정말 17살? 도대체 뭘 먹고 자라면 그 나이에 그 발육이 가능한 거야!”

“딱히 노력은 안 했는데요.”

“스고이! 대단해! 반격할 말이 떠오르질 않아!”

조금 엇나간 것 같지만, 여자들끼리 할 법한 품평회였다.

하지만 이 밖에서는 무시무시한 수호자들이 이 근방을 맴돌며 계약자를 지켜보고 있다. 덤으로 수호자끼리 당장에라도 싸울 분위기다.

위험하다.

그냥 위험한 정도가 아니라 정말 위험하다!

카레 경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많은 계약자를 초대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방탄코트를 걸치지 않은 왕녀님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얼굴과 몸매를 노출하고 다니는 계약자들이 몰려다니면 십중팔구 사달이 난다.

게다가 저 복장들.

한 남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무장(武裝)이다.

“제가 초대한 건 아니지만, 잘 오셨습니다, 실바니아 왕녀님.”

“아, 네.”

그가 입술을 맞출 수 있도록 장갑 낀 손등을 내밀려다가 멈칫했다.

기사도를 모르는 ‘카레 경’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어색한 상황에 빠져버리면 헤어나올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이 사내는 여태 멀쩡할까요?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무례한 의문을 품고 말았다.

수호자 중에 하나가 질투로 광분하는 순간, 이 생일파티장은 물론이고 한국 괴수대응본부 전체가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그런데 평온하다.

조금씩 긴장하고 있는 건 여러 강대국에서 찾아온 사절단뿐이었다.

“헤에~, 왕녀님도 옷차림에 상당히 공을 들였네요☆”

“다시 만나서 기쁩니다, 선지혜 회장.”

이 생일파티장에서 가장 파격적인 옷차림을 꼽으라면 단연 이 여인일 것이다.

우월한 다리맵시가 돋보이는 회색 쫄바지는 평범했다.

하지만 상의.

이 파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한무일의 누드 상반신이 분홍색 하트 한가운데 그려져 있는 새하얀 면티는 그야말로 독보적, 독창적이었다.

짓궂은 장난?

선지혜의 고요한 눈동자를 보면 그렇게 단정할 수 없다.

그건 광기(狂氣).

지고지순한 연모를 넘어선 집착이었다.

“선배. 새로운 친구들은 마음에 들어?”

“...생일파티에 참석한다고 전부 친구인 건 아닙니다, 대장님.”

“그럼 내년에는 나랑 단둘이?”

키가 상대적으로 작은 소년의 머리를 가슴으로 감싸려 한다.

그걸 자연스럽게 피한 카르 4세가 잽싸게 말을 바꿨다.

“즐겁군요. 축하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건.”

“그래? 준비한 보람이 있네☆”

실바니아 하이로드 왕녀는 파티장에 감도는 ‘전운’의 정체를 막 깨달았다.

계약자들은 이 남자의 언행 하나하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정말, 어떻게 살아있는 걸까요?

그녀의 8종 수호자, 대마법사 ‘듀크마’마저 ‘투명 마법’으로 모습을 감추고 침묵 중이다.

카르 4세가 한숨을 푹 내쉬며 개최인사(?)를 했다.

“제 생일인지 외교인지 모를 이곳에 와주신 여러분을 그냥 환영합니다.”

< [19장-2]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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