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76화 (76/287)

< [18장-4] 고대인의 꿈 >

그건 당일이 돼봐야 알 것이다.

무일은 평양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괴수와 술래잡기하는 날이 많아졌다. 예전에는 [업보]를 보고 선제공격하던 괴수들이 슬금슬금 피하기 시작한 탓이다.

여전히 [반격]뿐인 카르 4세에게 이 현상은 무척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작정하고 도주하는 괴수는 1종이라도 추격하기 힘들다.

지붕과 지붕을 스포츠카 속도로 달리거나 하늘 높이 날아가는 괴수를, 사냥꾼 둘이서 무슨 수로 쫓겠는가.

유일한 방법은 똑같이 ‘괴수’가 되는 것뿐.

그래서 카르 4세가 가더발트를 착용하는 날이 많아졌고 오늘도 사제팬티가 찢어지는 걸로 사건이 마무리됐다.

거의 하루에 한 개씩 날려 먹는 사제팬티를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이런저런 수단을 강구해봤지만, 이것만은 죽어도 안 됐다.

가더발트의 마지막 자존심이란 듯이 난공불락이다.

“망할 플라돈.”

“하늘로 도망친 돼지를 전봇대로 떨어트린 사냥꾼은 선배님이 유일할 겁니다.”

멀쩡한 전봇대를 뽑아서 작살처럼 던졌다.

심장이 3개인 플라돈은 덩치마저 큰 탓에 여자친구가 적중하더라도 추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무식한 방법을 택했다.

전봇대로 물리적인 피해를 주긴 무리지만, 하늘에서 균형을 잃은 ‘날개 달린 돼지’는 살충제 맞은 똥파리처럼 빌빌거리며 고도(高度)가 떨어졌다.

그걸로 사전준비 끝.

유효사거리에 닿자마자 벼룩처럼 하늘 높이 뛰어오른 카르 4세가 2종 괴수 플라돈의 정수리에 여자친구를 박으며 끝났다.

『세균이 퍼진다.』

배웠으면 활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단시간에 베고 지나가면 괴수의 재생력을 방해하는 수준에서 그친다. 주위에 먹이(괴수의 피)가 풍부하면 세균들이 얌전히 있다가 15분 뒤에 자연소멸 하는 것이다.

카르세리안 레이소로 베어낸 괴수의 피가 옷이나 피부, 심지어 눈에 튀어도 아무런 해가 안 되는 이유다.

하지만 장시간 꽂아놓으면 다르다.

객체가 늘어남에 따라 먹이를 놓고 다투는 경쟁이 과열해지면서 주위를 무차별적으로 분쇄한다. 이때의 ‘괴수의 피’는 정말 위험하다.

그래서 ‘여자친구가 날카로운 이유’가 비밀(秘密)인 거다.

“다른 가더발트 계약자도 가능할걸.”

“조사해봤는데 없었습니다.”

문세웅은 바로 부정했다.

페이 링처럼 빠른 움직임을 활용한 검술이 주를 이뤘다. 카르 4세같이 ‘진짜 괴수처럼’ 싸우는 가더발트 계약자는 없었다.

위대한 선배가 시큰둥하게 그 해답을 가르쳐줬다.

“내숭이야.”

“아하!

견문이 짧은 후배는 반론없이 수긍했다. 편협하고 어리석은 자신은 아직도 배워야 할 상식이 너무나 많았다!

괴수는커녕 여자조차 이해하지 못하다니….

최은비랑 사이가 제법 좋아지면서 방심한 걸까, 문세웅은 2급 사냥꾼이 되려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고 자책하며 새로이 의욕을 불태웠다.

“나는 옷 갈아입는다.”

“네, 선배님.”

나브랑모스 레비터에 탄 무일은 바지를 내리고 찢어진 팬티 잔해를 치웠다. 그리고는 예비용으로 챙겨온 팬티를 입었다.

플라돈이 산을 넘어가려는 조짐을 보이는 바람에 벗을 시간이 없었다. 산으로 도망치면 스포츠카로는 추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미리 벗은 후에 가더발트를 착용했을 것이다.

“슈퍼맨이 입었다는 특수소재 팬티도 안 되니….”

강철도 찢는 괴수의 힘을 버틸 수 있는 옷감은 MID 신소재에도 없었다.

아직은 현대인의 존엄성 때문에 ‘노팬티’만은 피하고 있지만, 조만간 이 문제로 기술반이나 정비과에 문의해볼 예정이다.

목적은,

『속옷 없이 입는 파자마!』

가더발트가 끝까지 완고하다면 ‘숙주’인 카르 4세가 그 장단에 맞출 수밖에 없다.

패션디자이너나 재봉사를 만나보는 편이 더 나을까?

반바지처럼 생긴 사각팬티도 실패했던 탓에 성공 가능성은 매우 낮게 보고 있다. 이마저도 실패하면 ‘하의실종’을 진지하게 고려해봐야 한다.

치마는 절대 안 된다!

밑에 아무것도 안 입었다는 걸 감춰주는 긴 코트가 최후의 보루다.

“...선배님.”

“왜?”

“이상하게 들리시겠지만, 날이 갈수록 다리가 요염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이상하게 들려!”

저주처럼 13년 동안 변치 않았던 한무일의 다리다.

위화감은 조금도 없다.

종아리에는 야성미 넘치는 시커먼 털은커녕 솜털조차 없이 반들반들하고, 근육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매끈한 허벅지도 그대로다.

암울하구먼.

사심 없는 후배의 말 한마디가 뼈아픈 외모를 잔인하게 후볐다.

무일은 자신이 겪는 ‘미녀의 환청’처럼, 문세웅도 ‘미녀의 환각’을 봤다고 진단 내렸다.

“그럼, 선배님.”

“왜? 사진이라도 찍어두게?”

선배는 피식 웃으며 농(弄)으로 후배에게 물었다.

하지만 사냥꾼의 감은 농담마저 예리했다.

“무안한 부탁이라 망설였는데 먼저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허락하신 걸로 알고 찍겠습니다?”

“...그래.”

후배의 요구에 따라 무일은 뒷좌석에 가로로 다리 펴고 앉았다.

문세웅은 스마트폰으로 팬티만 입은 카르 4세의 두 다리가 발부터 허벅지까지 다 들어오도록 찍었다. 덤으로 손등도.

손이 자는 호텔, 앙그류 그랑모리를 벗고 진지하게 자신의 손을 살펴본 무일도 이때만큼은 후배의 말을 무시하지 못했다.

고와졌다.

좋은 장갑을 껴서 굳은살이 사라진 게 분명하다.

문세웅은 손가락도 여자처럼 가늘어졌다고 주장했지만, 그건 지금 찍어둔 사진이랑 한 달 뒤에 단순비교해보면 될 문제다.

하지만 헌병대장 아드님도 만만치 않았다.

“내일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확확 변했다면 내가 가장 먼저 눈치챘다. 그냥 조용히 기다렸다가 한 달 뒤에 비교해보면 명료해지겠지.”

변한 건 하나도 없겠지만 말이다.

어린애처럼 우기고 싶지 않기에 잠자코 있었다.

“헌병대에 선배님의 알몸 동영상이 있을 겁니다. 평양에서 찍은 거.”

“캑! 설마…?”

“방송국에서 명장면을 추려내기 위해 여러 각도에서 촬영했었습니다. 그리고 방송금지처분이 내려지면서 헌병대에서 관련 자료를 전부 압류했죠.”

플라돈에 이은 2번째 트라우마가 된 평양사건.

의도는 알겠으나 끄집어내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했다.

“후배님!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봐!”

“괜찮습니다, 선배님. 조금도 부담가지실 필요 없어요. 헌병대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니까요.”

“아버지를 악용하면 안 돼.”

“상부상조하는 거죠. 효도(孝道)하고 받는 약소한 보상?”

대가를 바란 효도는 효도가 아니라고 설명해도 듣지 않았다.

계속 부정하는 것도 우습다고 여긴 카르 4세. 마음대로 하라고 후배에게 허락하고는 조수석 등받이에 편안히 몸을 묻었다.

똑같으면 밥 한 끼 거하게 사라고 한마디 하며.

현재, 수색대원 셋이 동시에 실종됐다는 보고를 받고 이동 중이다. 이미 그 셋은 죽었겠지만, 또 다른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려면 살인범을 처리해야 한다.

2급 수색대원 셋이 구조요청도 못 하고 사망?

운이 진짜 없어서 어이없게 괴멸한 게 아니라면 마주친 괴수가 4종 이상이란 뜻이다.

‘6종 이상이면 정말 위험한데….’

하지만 [예감]이 조용하니 그건 아닐 것이다.

조금도 반응이 없는 걸로 봐서는 4종이다.

사건의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파견된 5종 계약자와 수호자가 수색대와 함께 움직이는 중이라고 하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 근방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은 그뿐이라 따로 할 것도 없다.

뭐지?

모르는 연락처에서 전화가 왔다.

해결됐으니 안 와도 된다는 보고일지도 모른다.

(카르 4세입니다.)

(음? 좀 더 굵직한 사내 목소리를 기대했는데 변성기도 안 지난 소년 목소리가 들려서 살짝 당황스럽군. 정말로 카르 4세인가?)

(맞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초면에 반말?

남의 목소리로 트집 잡는 것도 그렇고.

살짝 기분이 언짢았다.

그걸 상대방도 느낀 걸까.

(아! 미안합니다. 내 전화번호를 모르는 사람이랑 전화하는 건 하도 오랜만이라 그만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임진호라는 사람입니다.)

(...프로게이머 임진호, 맞습니까?)

(맞습니다. 나이를 앞세우는 건 바람직하지 않지만 편하게 말해도 되겠습니까? 내가 증손자보다 더 증손자처럼 아끼는 찬호의 친구라면 내 증손자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불쾌한 첫인상이랑 달리 정중했다.

나이 지긋한 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가상현실의 RPG 게임을 제패한 프로게이머다운 ‘처세술’이었다.

운전 중인 문세웅이 옆에서 ‘임진호라면 그 임진호?’라며 아는 척했다. 정찬호가 가르쳐주기 전까지 몰랐던 카르 4세는 임진호에 대한 평가를 상향조정 했다.

가상현실게임은 그에게 미지의 영역이다.

[예감]은 먹통이고 [예측]도 불완전하다.

카르 4세가 믿는 태양신은 ‘현실’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날씨와 낮이란 배경화면을 설정하는 단순한 광원(光源)에 지나지 않는 ‘가상현실 태양’은 신앙의 대상이 못 됐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어르신.)

(...하핫! 시원시원한 대답 고맙군. 목소리에 거짓이나 꾸밈이 없어. 전선 하나만 끊어버리면 알 수 없는 게임이랑 확실히 달라.)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아아, 몰라도 괜찮네. 게임이 인생 전부였던 남자의 푸념이니.)

(그렇습니까.)

실제로 만나보면 볼품없는 남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목소리만으로 판단한 임진호는 가상현실만큼은 아니더라도 현실에서도 상당한 걸물로 통할 것 같았다.

제2의 인생으로 본부 특공대를 추천하고 싶다.

카르 4세에게 임진호는 그런 기분이 들도록 하는 사내였다.

(나는 자네를 최근에 알게 됐네. 외국 친구가 해준 말이 아직도 기억나는군. 우리가 외면한 현실에는 여왕이 많지만, 왕은 단 한 명뿐이다. 마이티가이, 카르 4세.)

(...그 친구분이 미국인입니까?)

(맞네. 미국에서는 자네를 ‘마이티가이’라고 부른다더군.)

그 나라는 삼각팬티와 망토를 걸친 슈퍼히어로를 좋아하는 것 같다.

부르기 편한 ‘카르 4세’란 별명이 이미 있는데 그걸 놔두고 ‘거창한 이름’을 붙이는 문화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것도 상관없는 외국인에게.

나쁜 의미라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비꼬는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타인을 칭찬하는 별명이라서 솔직히 부담스럽다.

그 부담감으로 카르 4세를 압사시킨다는 암살계획이었다면 반쯤 성공했다고 미국 정부에 말해주고 싶을 정도다.

임진호가 이 얘기를 꺼낸 이유가 뭘까?

나쁘게 말하면 아부, 구수하게 표현하면 떡밥이다.

(아직도 꿈을 꾸시고 계신 모양이군요.)

(...예리한 친구군. 가상현실게임 주민이 모두 자네 같았다면 나는 최고가 못 됐을 거야. 맞네. 100억으로는 지리산은커녕 치악산 등반도 힘들다더군.)

(치악산이라면…. 경비 포함해서 135억쯤 들어갈 겁니다.)

그조차도 날씨 좋은 날을 선택해서 낮은 봉우리 하나만 최단거리로 찍고 빠르게 철수한다는 전제가 붙는다.

캠핑이라도 하겠다고 했다가는 금액이 천문학적으로 붕 뜬다. 그리고,

괴수 사냥? 그것도 용(龍)…?

용이라고 불리는 괴수는 아무리 약한 녀석도 5종이다. 계약자 도움 없이 잡으려면 아무리 낮게 잡아도 500억은 각오해야 한다.

당연히 이 500억은 ‘5종’을 잡는데 소모되는 장비와 인명피해를 수치화한 최소액수로, 사냥에 성공할 확률은 5% 미만이다. 실패하면?

몰살(沒殺)이다.

괴수는 한 명도 예외 없이 평등한 죽음을 선사한다. 단, 죽음만 평등하고 황천으로 향하는 과정은 천차만별이다.

성공률을 올리려면 당연히 장비와 사냥꾼 수준을 높여야 한다.

최고가격?

계약자와 수호자 없이는 성공률 100%란 없다. 고용주의 안전과 편의를 신경 쓰고 높은 성공률에 근접할수록 터무니없이 비싸질 뿐이다.

(가상현실에서도 좋은 아이템과 어려운 퀘스트는 비싸긴 하지만, 현실 의뢰라는 건 정말 말도 안 나오더구먼.)

(어쩔 수 없습니다.)

게임은 게임이다.

잃더라도 복구할 수 있는 데이터일 뿐이다.

게임에 현실감을 부여하기 위해 ‘복구 불가’라는 타이틀을 달더라도 마찬가지다. 게임캐릭터가 아닌 유저 목숨도 ‘복구 불가’라면 또 모르겠지만.

아이템 등을 잃으면 개인의 상실감은 크겠지만, 인류를 향한 기여도로 따지면 ‘보리밥 한 그릇’보다도 무가치하다.

임진호는 그 차이를 최근에 절절히 깨달았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괴수들이 약하거나 온순했다면 가격이 더 내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괴수는 강력하고 사냥꾼과 장비는 늘 부족하다.

부족하면 버튼 하나로 찍어낼 수 있는 게임이랑 다르다.

(찬호가 그러더군. 카르 4세는 세계에서 가장 싼 사냥꾼이라고.)

(그 녀석다운 말이네요.)

카르 4세라면 5종 괴수를 100억에 잡아줄 수 있다. 그리고 지인이란 할인카드(?)가 추가되면 더 싸진다.

막말로, 이게 노망난 늙은이의 사사로운 유희가 아닌 ‘위기에 빠진 시민’을 구하는 일이었다면 무상(無償)으로 잡아줬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성공률.

계약자밖에 모르는 수호자보다도 안전하게 고용주를 지키면서 확정 100%다. 상대가 6종 괴수라면 위험하겠지만.

아무튼,

가격대성능비로 따지면 카르 4세는 헐값이다.

(자네는 얼마에 해줄 수 있는가?)

상당한 고단수다.

단도직입적으로 가격부터 묻다니 말이다.

하지만 카르 4세는 현실파.

와이츠 계약자 선지혜쯤 되지 않는다면 이런 얄팍한 수에 당하지 않는다.

(꿈을 먼저 말씀해주십시오. 아주 상세히, 빠짐없이.)

< [18장-4] 고대인의 꿈 > 끝

ⓒ 파르나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