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장-3] 고대인의 꿈 >
무일이 그렇게 주장한들 최은비에게 아저씨는 ‘아저씨’였다. 나머지는 ‘오빠’다. 남자라는 중간은 없다.
아저씨는 제 몸이 필요 없는 걸까요?
그런 것 같다. 주위에 예쁜 언니가 무척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도감보다는 불안감이 앞섰다. 어른이 되면 버려지지 않을까, 하는 문제였다. 보통은 독립이라고 하지만, 어린 소녀에게는 너무나 낯선 단어였다.
“아저씨는 은비를 책임져줄 거예요?”
“당연하지.”
“계속요?”
“아니. 좋은 남자 만나서 결혼할 때까지만.”
계약자가 되더라도 마찬가지다. 남자를 깔보는 그녀들도 언젠가 모든 걸 내려놓고 평범한 여자로 돌아가고 싶어진다.
민간인이 알약 한두 개로 하는 외모관리를, 계약자는 똑같은 효과를 보기 위해 매일 12시간씩 할애한다. 운동, 식이요법, 마사지….
그건 대단히 고되고 스트레스받는 일이다.
당연히 배부른 투정이지만, 권태기가 오면 계약자는 평범한 여자가 되길 역으로 바라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저지른다.
“...아저씨에게 시집갈래요.”
“은비가 무슨 생각인지 알겠는데, 똑같은 말을 10년 뒤에도 하면 답해줄게.”
그때까지 카르 4세가 살아있다면 말이다.
뒷말은 삼켰다.
좁은 아파트 안에서만 생활해온 최은비의 체력을 올리는 목적으로 아침 운동에 동참시켰다.
예전 같으면 무일 혼자서 더 오래 했겠지만, 어째선지 근력 저하가 사라진 관계로 운동량 기준은 소녀의 체력에 맞춰졌다.
좋은 일이긴 한데 영문을 모르겠다.
일시적인 현상이거나 기분 탓인 줄 알았는데 ‘체력’과 ‘근력’이 깎일 기미가 안 보인다.
‘정말 괴수가 된 기분인데.’
현재까지는 가더발트 때문이란 결론을 내렸다.
아니면 달리 생각나는 게 없는 까닭이다.
서서히 날씨는 뜨거운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사냥꾼들은 수렵과 사냥으로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덤으로 사망률도 꾸준히 오르는 중.
최은비는 학교와 집을 왕복하는 패턴에 특공대가 추가됐다. 어린애가 혼자 집을 보는 시간이 너무 길었던 탓이다.
암살자나 유괴범보다는 선지혜가 그래도 안전하겠지.
정말 힘든 결정이었다.
(선배. 내일이 생일이잖아.)
(안 와도 돼.)
무일은 선지혜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생일케이크 촛불로 태연하게 다이너마이트를 꽂는 여자다! 그 행동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까딱 잘못했으면 영문도 모른 채 골로 갈 뻔했다.
선지혜가 수화기 너머로 귀엽게(위험하게) 답했다.
(꼭 갈게. 업무시간에 육아할 정도로 한가한걸~♬ 주로 이모가 돌본다는 건 비밀! 악착같이 살아남은 생명력에서 동질감이 느껴진다나?)
(헤에~.)
바람의 여왕님이 애를 본다고?
채찍으로 말 안 듣는 애들을 때리는 모습밖에 안 떠오른다.
편견이겠지만, 정말로 매칭이 안 됐다.
(선배. 생일파티를 특공대에서 하는 게 어때? 집은 너무 좁잖아.)
(공용식당을 빌렸어.)
(그래? 잠시만.)
(......)
(알아봤는데, 내일부터 그 공용식당은 개축 공사한데. 당연히 예약은 모두 취소. 못 믿겠으면 동사무소에 직접 물어봐도 돼.)
(됐어.)
남의 생일파티장소를 옮기려고 멀쩡한 식당을 ‘공사 중’으로 만들어버릴 줄이야!
기가 막혔지만, 어쩔 수 없이 특공대에서 하기로 했다.
어차피 초대할 지인도 별로 없어서 장소를 바꾸는 건 손쉬웠다. 끽해야 다섯? 볼트윙 테러가 제대로 한 건 했다.
하지만 그 다섯조차도 올 수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여러 국가에서 노리는 ‘위험인물’에게 가족이 휩쓸리지 않도록 하겠다는 씁쓸한 이유였다. 본인들만이라도 참석하려고 했으나 ‘마누라님’이 완강하시단다.
‘위험인물…. 어쩔 수 없나.’
최초의 남성 계약자. 그 타이틀이 갖는 위험부담이다.
카르 4세를 생포해서 해부하고 싶어하는 나라가 한둘이 아니다. 그들의 강압적인 수단은 두렵지 않지만, 주위에 피해를 안 준다는 보장은 할 수 없다.
친구의 아내들을 과부로 만들 순 없지.
홀가분한 녀석들은 전부 이민 가버리고 유부남만 남았다. 그래도 전멸이었던 여성 비율이 상당 부분 차지했다.
나름 여복(女福)일까.
그녀들이 ‘위험인물’보다 위험한 계약자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끊기 무섭게 전화가 또 왔다.
(카레 짱, 오하요 고자이마스!)
(...유키 짱, 생일파티장소가 특공대 막사로 바뀌자마자 연락한 걸 보니, 수시로 내 스마트폰을 도청한 거지?)
(우연히 듣게 된 거야, 예요.)
솔직하게 시인하는 일본 아가씨지만 정말로 ‘우연’인지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카르 4세는 그러려니 했다.
언제는 사생활이 있었나?
비싸디비싼 벌레 감시카메라, 모짜리나 바글버글에 자폭장치만 내장되어 있지 않았다면 긁어모아서 빌딩을 지었을 것이다.
옆자리에서 운전 중이던 문세웅이 ‘오오! 애인이다! 국경을 초월한 사랑! 뜨겁다!’라며 흥분하는 소리가 들렸다.
...청춘이란 참 부럽군.
뭐든 사랑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 말이다.
(편하게 말해.)
(하잇! 응, 그럴게. 거리감 없어서 정말 좋아♥)
(...오려고?)
(응! 원래는 전화만 하려고 했는데, 생일파티에 초대하지 않은 일본대사가 오는 것도 좀 그렇잖아. 눈치 없는 늙은이는 아니지만, 이왕이면 예쁘고 깜찍한 유키 짱이 축하해주는 게 좋지? 그렇다고 해줘, 카레 짱!)
(좋긴 한데…. 중요한 일 아니야?)
(괜찮아. 그 늙은이보다 내가 더 잘할 자신 있어.)
일본대사에게 늙은이….
유키 짱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준 사람이 누구인지 정말 궁금하다.
사실, 현실에서 생일파티 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시중에 싼값으로 ‘가상현실 파티패키지’가 나와 있는데 굳이 현실에서 비싼 돈 들여 얼렁뚱땅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해변, 궁전, 야외, 해저, 호수, 산림, 우주….
현실에서 구현하기 힘든 환상적인 생일파티장소가 단돈 ‘49,800원’에 뚝딱 해결된다.
덤으로 평소에 맛보기 힘든 산해진미를 뷔페로 마음껏 먹을 수 있고 NPC로부터 극상의 서비스를 받으며 게임, 섹스 등도 즐길 수 있다.
이번 생일파티만 해도 그렇다.
가상현실에서 열었으면 가족들이랑 함께 오겠다는 친구가 많았다. 하지만 카르 4세가 그렇지 않은 건 ‘중독성’ 때문이다.
가상의 세계는 아름답고 평화롭다.
그 안에서만 살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들면 ‘친구들처럼’ 현실로 복귀하기 힘들어진다.
(대타란 거지?)
(하잇! 유키 짱은 내일 하루 동안 전권대사야!)
소꿉놀이에서 엄마 역할을 맡은 계집아이처럼 득의양양한 일본 아가씨였다.
일본 정치인들에게 묵념.
7종 계약자의 생떼를 막을 수 있는 인재가 일본에 없는 모양이다. 한국도 ‘여신(女神)’들의 독주를 막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아무튼, 참석인원 추가.
유키 짱은 생일파티장소를 멋대로 바꾼 선지혜 욕을 하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잖아, 유키 짱. 그러니 참아.)
외교를 맡은 유키 짱에게 민감한 사항일 것이다.
그 일일전권대사(一日全權大使)가 말했다.
(쉽게 허락하면 안 돼, 카레 짱! 남자의 생일파티이벤트 준비는 여자친구의 특권이야! 그 여자가 무슨 권리로 낚아채는데! 아직 나도 못해봤는데! 아우 분해!)
그런 이유였습니까.
유키 짱을 과대평가했던 모양이다.
(...내일 봐.)
(응. 그리고 미리 축하해, 카레 짱.)
두 여자를 연타로 상대했더니 폭풍이 지나간 느낌이다.
문세웅이 위험하게 운전대를 한 손으로 잡은 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존경합니다, 선배님.”
“동정남을 존경해서는 큰 사람이 될 수 없어.”
“아니요. 저는 서둘러 결혼했다가 후회한 친구들을 많이 봤습니다. 청순가련한 줄 알았던 아내가 사실은 신분세탁 한 걸레였던 녀석도 있었죠.”
과거는 부끄럽지만 개과천선하고 현모양처가 됐다는 가정은 뺐다.
그랬다면 아내의 과거를 뒷조사해보지 않았을 테니까. 무언가 의심스럽고 이상한 행동을 했기에 탄로 난 것이다.
“고운 단어 써라.”
홍영희 때도 그랬지만, 문세웅은 어휘를 험악하게 쓸 때가 있다. 평소에는 안 그런데 ‘질 나쁜 여자’ 얘기만 나오면 격해진다.
제멋대로인 계약자들에 대한 불만이 왜곡된 것이다.
문세웅 본인은 아니라고 극구 부정하지만, 카르 4세는 정말 많은 부류의 사내를 봐왔다. 그리고 그 악의(惡意)를 실천으로 옮긴 남자도 알고 있다.
아버지.
세상에 이롭지 않은 남자를 꼽으라면 무일은 주저 없이 부친이라고 답할 것이다.
타락한 프로사냥꾼의 최종형태다.
부산으로 내려가서 ‘인류에 해가 되는 인간’을 제거한다는 생각도 몇 번씩 했지만, 실천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그가 암살자인 까닭이다.
괴수는 영리하지만, 암살자는 교활하다.
『인류의 천적은 인간이다.』
막강한 괴수가 등장했음에도 이 법칙은 변하지 않았다. 생존과 번식 외의 이유로 동족을 살해하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했다면?
그 창조신은 사악하고 음험한 존재가 분명하다.
카르 4세가 부친을 처단하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또 있다. 근친살해는 죄악이란 시답잖은 얘기가 아니다.
부양해야 하는 ‘가족’이 늘어나면 부산을 떠날 수 없게 된다.
선택에 따른 책임도 ‘정의(正義)’다.
서울로 다 함께 이사?
그런 식으로 전부 서울로 빠져버리면 부산은 금세 폐허로 변할 것이다.
“제가 아니라 친구 놈이 그렇게 말했습니다.”
“절교해. 사람 보는 눈이 걸레 수준인 녀석이랑 어울리면 너에게 좋을 거 없어. 끼리끼리 논다는 말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하, 하지만 이건 남자를 속인 여자 잘못 아닙니까?”
그래도 친구라고 옹호하는 문세웅이었다.
무일은 딱 잘라 대답했다.
“속은 남자가 죄지.”
속았다고 할 수 있을까, 애초에 ‘몸만’ 사랑했는데 말이다.
사랑하는 여인의 언행 하나하나 세심하게 관찰하지 않고 화려한 외모만으로 판단한 ‘육체적인 사랑’이 부른 폐단이다.
겉모습만 보고 결혼했는데 누굴 탓한단 말인가.
의처증(疑妻症)?
싫어하는 아내들도 당연히 있겠지만 떳떳하다면 남편의 ‘귀여운 질투’로 봐도 무방하다. 오해가 풀린 후에 미안하다고 쩔쩔매는 모습을 상상하며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다.
질투도 사랑이다.
안 한다면 형식적인 정략혼이랑 다를 게 없다.
『나는 그녀를 믿어.』
무책임하고 무관심한 대답이다.
뚜렷한 근거도 없이 멋대로 믿음을 주고서 배신당한 후에 ‘나쁜 년! 창녀!’라고 떠들 ‘나쁜 놈’이다.
믿음이란,
어떤 결과가 나오든 책임지겠다는 뜻이다.
무일이 여태 결혼 상대를 만나지 못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카르 4세는 막대한 빚과 신체적인 약세를 뒤집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럼에도 동정인 건 고지식하기 때문이다.
예쁘고 현실에 충실한 여성 대부분이 ‘계약자’다. 그리고 여기에 ‘순결’이란 조건이 들어가는 순간 민간인은 전멸한다.
나쁘게 말하면 고리타분.
아버지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완고한 고집이다.
“내일은 눈이 호강하겠는데요.”
카르 4세의 주위에는 성격과 수호자 빼면 ‘완벽한 공주님’이 많다.
그건 프로사냥꾼의 ‘기호(嗜好)’가 괴수랑 비슷한 탓이다.
여자 보는 눈이 병적으로 까다로운 탓에, ‘무결점 미녀’랑 영영 인연 없는 칙칙한 삶이 될 뻔했지만, 카르 4세는 그 임계점을 돌파했다.
미녀가 미녀를 부른다고 할까!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다.
“쳐다보지도 못하면서.”
“위험한 계약자만 오는 건 아니잖습니까.”
“흠. 그건 그러네.”
무일은 수호자가 없는 페이 링을 염두에 두고 후배의 기대에 동의했다. 계약자인 선지혜와 유키 짱, 강보라도 관람료(?)를 안 받는다.
남은 복병은 윤소영과 최은설.
최은설은 은행테러 때의 인연으로 얼굴만 알고 지내는 6종 계약자다. 안 와도 되는데 윤소영의 초대권에 편승해서 온다는 모양이다.
남자는?
늘 그랬듯 온다고만 하고 안 올 인간이 불특정 다수라서 모르겠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괴수대응본부 밖에서 생일파티를 했을 때의 참석자다.
내일 낮에 염소 한 마리 도축해서 저녁에 다 함께 배불리 먹고, 남은 건 이웃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준다는 계획은 물 건너갔다.
‘평탄한 생일파티는 힘들 것 같은데.’
일본에서 ‘외교’를 언급했다면 다른 나라들도 비슷비슷하리라.
하필 생일파티 때 그런 자들을 만나서 얘기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카르 4세가 자초한 일이기도 했다.
[예감]으로 그들을 피해 다니는 통에 길이 계속 엇갈린 것이다.
미국처럼 ‘적의’가 전혀 없다면 다르겠지만, 조금이라도 끼어있다면 첩보위성으로 추적해도 만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자택 방문?
무일의 집은 높으신 분들이 오기에는 많이 누추하다. 그리고 나라끼리 경쟁과 견제가 과격해지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집은 안 건드리는 게 불문율이다.
그런 걸 신경 쓸 인간들이 아니지만….
6종 괴수나 다름없는 ‘카르발트’랑 적대해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제 생일보다 기대됩니다!”
“좋기만 하진 않을 거야.”
“그게 바로 가진 자의 여유란 겁니다, 선배님! 가짜 미모와 위선으로 장난치는 가상현실파티보다 분명 즐거울 겁니다!”
“글쎄….”
< [18장-3] 고대인의 꿈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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