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74화 (74/287)

< [18장-2] 고대인의 꿈 >

“미녀의 몸에 칼을 댄 극악무도한 놈!”

“오냐. 이만 간다.”

“승자의 여유라는 거냐! 너의 노예가 된 불쌍한 아가씨는 내가 반드시 스틸-, 구하겠다!”

“그려….”

상대해주기 지친 무일은 머리에 손을 얹는 친구의 무례에도 꿈쩍 않고 털래털래 정비과를 나왔다.

정찬호는 ‘으악! 햇빛이, 햇살이 내 눈을!’이란, ‘진짜 흡혈귀’도 안 할 발언을 하며 뒷걸음치더니 정비과 건물 안으로 후다닥 도망쳤다.

역시, 방구석 폐인은 태양신의 적수가 못 된다.

‘세균이라…. 기분 탓이었나.’

카르세리안 레이소, 두 자루가 맞붙었는데도 날이 상하지 않았던 이유는 순전히 동류였기 때문일까.

닿는 무엇이든 순식간에 분해하는 세균이 빠지면 평범한 검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얇은 검신이 멀쩡하다는 건 여전히 수긍 안 됐다.

페이 링은 가더발트 계약자였다.

괴수의 힘으로 냅다 후려쳤는데 멀쩡하다는 게 말이 돼?

하지만 눈앞에 떡하니 증거물이 있으니 믿지 않을 수 없었다. 하기야 330억이나 하는 명검이 툭툭 부러진다는 것도 좀 우습다.

본부를 나와 집으로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다.

“시간 되십니까, 카르 4세.”

“...미국?”

“무서운 통찰력이십니다. 네, 미국에서 나온 끄나풀이라고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국인이지만 능청스럽게 받아치는 청년이었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흔한 인상에 흔한 복장.

카르 4세의 [예감]이 알려주지 않았다면 일반인의 장난으로 여길 만큼 이 남자는 평범하고 평범했다.

적당히 설렁설렁 묻혀 살기 딱 좋은 얼굴인걸.

짧은 감상을 끝내며 말했다.

“스카우트는 안 받습니다.”

“아아, 저희는 그런 무의미한 일로 시간 낭비할 생각은 없습니다. 카르 4세의 능력이 독보적이란 건 인정하지만, 에쏘드 계약자, 7종 수호자보다 강하진 않으니까요.”

“흠. 그럼 질문입니까?”

“네. 미국에서 궁금한 건 단 하나입니다. 카르 4세의 계약이 후천적인 능력이 맞는지 그 사실확인입니다.”

당연히 후천적인 능력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났다면 특공대에서 그 고생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건 정상적인 계약이 아니란 것도 안다.

2종 괴수 가더발트가 숙주인 그에게서 못 떠난다고 할까, 수호자는 아니다. 그 증거로 무일은 필요할 때만 착용할 수 있다.

게임 버그 같은 상황이다.

하지만 그걸 솔직하게 밝힐 생각은 없다. 정보교란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상대도 안 믿을 게 뻔한 탓이다.

괴수가 아쉬울 게 뭐 있다고 남자 몸을 주물럭….

생각하지 말자.

“공짜로요?”

남자는 아니란 의미로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리고는 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재빠르게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카르 4세는 이 근방에 전자기펄스가 퍼졌다는 걸 직감했다. 감시카메라부터 모든 전자제품이 마비를 불러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시민들은 갑자기 먹통이 된 스마트폰과 전자기기에 괴성을 지르며 신경질을 부렸다. 평화에 찌든 서울 시민답다고 할까.

방금 EMP가 터졌다고 소란을 일으키는 것보다는 나았다.

“한무일 씨의 계좌로 방금 50억을 입금했습니다.”

과연 대국! 씀씀이도 크다!

이까짓 질문으로 너무 많은 돈을 준다고 의아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이 문제는 여전히 논란이 되고 있는 ‘창조론, 진화론 중에 뭐가 정답?’처럼 타협점이 없는 외길인 까닭이다.

선천성(先天性)과 후천성(後天性).

무일이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미국의 ‘연구 진로’가 결정된다. 괜한 어림짐작으로 헛걸음한다면 수천억 예산과 긴 시간, 아까운 인재만 낭비할 테니 말이다.

그걸 예방할 수 있다면 50억은 헐값이다.

하지만 카르 4세는 욕심내지 않았다.

“후천성입니다.”

“그럴 거로 생각했지만 확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통이라면 여기서 ‘How?’라는 추가 질문이 들어가야 정상이다.

하지만 남자는 하지 않았다.

이미 미국 기술반에는 카르 4세의 완벽한 신체데이터가 있는 까닭이다. 아니, 웬만한 선진국은 전부 보유하고 있다.

한국 괴수대응본부는 신입사원을 뽑을 때 ‘애국심’은 대충 보고, 시험성적과 학연을 중시하기에 배신과 거래는 상도의(商道義) 수준이다.

한무일은 신체적으로 완벽한 남성.

중요한 2차 성장 도중에 멈추긴 했지만, 그는 염색체를 포함해서 생물학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남성이다.

심지어 미국은 카르 4세가 복용한 ‘실패작’마저 갖고 있다. 이후에 장복한 ‘수상한 약’들도 빠짐없이.

하지만 계약은 실패했다.

미국은 약의 성분을 분석한 최적의 ‘완성품’을 지원자에게 복용시켜봤으나 가더발트는 조금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물으러 온 것이다.

혹시라도 약 때문이 아니라 선천적인 재능이라면 헛다리 짚은 게 되기 때문이다.

“가봐도 됩니까?”“살펴가십시오. 아차! 미국은 언제나 카르 4세, 마이티가이(Might guy)를 환영한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사실은 이 말이 가장 중요합니다.”

“...죽기 전에 한 번쯤 가보도록 하죠.”

“약속하신 겁니다? 땅에 오망성(五芒星)을 그리시면 언제 어디서든 10분 이내로 찾아뵙겠습니다.”

미국의 상징은 ‘별(star)’이다.

단 하나뿐인 8종 수호자가 달에 사는 괴수인 까닭이다. 현재는 계약자를 따라서 지구에 머물고 있지만, 언제든 우주로 날아가 어느 나라든 공격할 수 있다.

그럼에도 8종이다.

8종 2마리와 2대1로 싸우고도 이긴 엘로엘도 8종.

그건 8종과 9종 사이의 ‘파워 인플레’ 외에도 절대로 메꿀 수 없는 ‘신성불가침영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표현하면,

『영토』

9종 괴수에게만 있는 무형의 성역(聖域)이다.

오니오프가 일본의 도쿄를 자신의 영토로 삼은 것처럼 말이다.

일단 영토로 정해지면 비슷한 유형의 괴수가 몰려들고 하위 괴수는 접근하기만 해도 ‘신봉자’에게 살해된다.

신봉자로 불리는 괴수는 6종부터 8종까지 다양하며 야생이든 계약했든 무관하다.

즉, 9종은 영토를 다스리는 ‘괴수의 왕’이다.

괴수들은 죽는 한이 있어도 강자의 지배와 명령을 따르지 않지만, 유일하게 복종하고 순응하는 존재가 9종이다.

각설하고,

몇 초 만에 50억을 번 무일은 은행으로 향했다.

‘청렴결백한 돈이니 잘 써줘야지.’

입금을 확인하니 정말로 50억이 들어와 있었다. 망설이지 않고 여자친구 몸값을 일시금으로 갚고도 3억이 남았다.

죽을 때까지 갖고 갈 줄 알았던 ‘할부의 노예’에서 해방됐음에도 감개무량하진 않았다. 얼떨결 한 기분도 없었다.

카르 4세도 그 정도 자각은 있다.

유키 짱이 가르쳐주지 않았더라도 외국에 나가면 ‘훨~~~씬’ 좋은 대우와 급료를 받을 수 있다는 걸 말이다.

가더발트를 만나기 전이었다면 ‘인간의 한계’로 해외에서 고립되는 최악의 상황을 걱정했겠지만, 이젠 그조차도 벗어났다.

해코지당할 염려가 없다.

엘로엘 같은 반칙이 없는 한, 카르 4세를 잡기 전에 나라가 망할 것이다. 시가전이라면 8종 괴수랑 술래잡기도 가능하다.

열 받은 수호자가 도시를 통째로 날려버릴 확률은 99% 이상!

그런 무모한 선택을 할 나라는 없다고 본다.

간단히 말해, 카르 4세는 지구 어디에 떨어져도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부르주아의 상징, 한우(韓牛)를 먹어볼까나~.”

순수한 채식인 소는 목축이 안 돼서 고기가 귀하다. 특히나 ‘한우’는 젖을 짜는 유우(乳牛)랑 달리 육우(肉牛)로밖에 쓸 수 없어서 사냥꾼들도 잘 찾지 않는다.

고대인들은 ‘한우가 최고!’라고 곧잘 외친다.

하지만 무일이 보기에 한우는 ‘입안에서 살살 녹는 맛’이 아니다. 거친 초원을 뛰놀아서 그런지 온몸이 근육이라 육질은 젖소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다.

젖소, 염소고기의 10배 가격을 주고 먹을 가치는 없다고 본다.

무일은 플라돈 트라우마 때문에 돼지고기를 안 먹어서 모르지만, 사람들 말로는 돼지가 소보다 더 맛이 좋다고 한다.

거기에 대해선 고대인들도 반박하지 못했다.

한우의 육질이 연하던 시절은 진즉 떠났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비싼 가격대를 유지하고 있는 건 ‘평화로운 시절’을 되새김하는 고대인들의 수요와 허영심이 끊이지 않은 탓이다.

무일도 평소에는 ‘닭가슴살’만 찾는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사치를 부려보기로 했다.

‘은비가 처음 학교 간 날이기도 하니.’

소고기 귀한 줄 모르는 애에게 먹인들 고마워할 것 같진 않지만, 혹시라도 학교에서 무시당하지 않도록 ‘경험’ 시켜둔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조만간 게임기도 사야 할지도….

무일처럼 가상현실게임을 모르는 ‘서울인’도 드물 것이다.

현실에 충실했던 덕분에 강해지고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생각하면 아쉬울 것도 없지만, 최은비까지 그렇게 키울 생각은 없었다.

서울의 평범한 아이처럼.

부모가 없다고 슬퍼하지 않을 정도로는 해주고 싶다.

봉지에 든 1근도 안 되는 진공포장 소고기가 일반가정 1달 생활비랑 맞먹는다는 사실을 영수증으로 몇 번씩 재확인하는 사이에 집이 보였다.

“아저씨!”

창문을 연 최은비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저렇게 반가운 표정을 짓는 아이가, 오늘 하루 동안 겨우 1번밖에 전화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대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이게 부성애(父性愛)?

여전히 동정인데 ‘아버지의 사랑’이라니 얼토당토않다.

하지만 정상이랑 거리가 먼 가정에서 자란 무일로서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 때문인지 살짝 체념하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싫은 건 아니었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악착같이 산 보람을 느꼈다.

“...오래오래 살고 싶어지네.”

무일은 삶에 대한 애착이나 미련은 없었다. 간단히 죽을 마음도 없지만 구질구질하게라도 살겠다는 악착같은 근성도 아니었다.

생존에 애쓴 이유?

캑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라고 협박한 선지혜 영향이 컸다. 그녀가 죽으면 와이츠가 떠날 테고 엘로엘과 박선영도 대한민국이란 나라에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한국은 끝.

중국이나 일본에 합병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리라.

“반에서 제가 제일 작았어요. 가슴이랑 엉덩이도….”

“흠흠. 은비도 곧 클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정말 그럴까요?”

“아저씨가 은비에게 거짓말했던 적 있어?”

“없어요! 다행이다….”

불특정 다수를 돕고 느끼는 보람하고는 무언가 달랐다.

돕다가 능력 밖이면 ‘후퇴’라는 선택지가 있던 때랑 달리 무조건 앞만 봐야 한다. 상대가 설사 신(神)이라도 싸워야 한다는 각오.

그건 책임감이란 무기였다.

하지만 강인한 마음만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

‘...양다리를 불가피하게 고려해봐야겠는데.’

최선을 다하고 죽는 결말보다는, 지키고 살아남는 편이 아무래도 좋다.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한 자루 더 구해야겠다.

옆구리에서 화를 내는 미성이 들린 것 같지만, 환청에 어울려주기에는 카르 4세의 정신력(?)은 견고했다.

흉흉한 절단기랑 9년째 사귀고 있지만 이건 곤란하다.

진짜 살아있는 애인(愛人)이 좋다.

“은비야, 그만 일어나야지.”

“우웅…. 네….”

최은비는 무일을 따라 ‘규칙적인 생활’을 시작했다.

지옥 같은 환경에서 악착같이 살아남은 야생소녀가 가장 참지 못하는 2가지가 있는데, 그건 식탐(食貪)과 수면(睡眠)이었다.

식탐은 풍성해진 먹거리에 익숙해지면 차차 해결될 것 같다.

하지만 수면은 그렇지 않았다.

아무 때나 자는 생활에 길들어진 최은비는 누가 건들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나 잘 잤다. 푹신한 침대는 말할 것도 없고, 무일은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 그녀의 수면제였다.

얼마나 잠이 많은 걸까?

궁금해서 학교를 쉬는 주말에 온종일 업고 다녀봤다.

그랬더니 식사시간과 화장실을 빼고도 18시간이나 자는 게 아닌가!

매일 굶주리던 시절에는 겨울잠 자듯 최대한 안 움직여서 체력을 보존하는 편이 생존에 유리했겠지만, 앞으로도 그러도록 놔둘 순 없었다.

“많이 먹고 싶으면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해.”

“살찌니까요?”

“맞아. 괴수는 포동포동 살찐 여자부터 잡아먹어. 그리고 날씬한 공주님을 지켜주지.”

괴수가 공격하는 우선순위는 [업보]로 결정되지만, 전부 민간인이라면 ‘먹음직스러운 원숭이’부터 공격한다.

그러니 거짓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최은비는 무일의 손을 잡고 졸린 눈으로 질질 끌려가다시피 산책하며 물었다.

“그 언니들처럼요?”

선지혜와 윤소영을 떠올린 모양이다.

무일은 소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잘 잡아주며 답했다.

“그렇지. 그리고…. 날씬하면 남자들도 좋아해서 이것저것 잘해줘.”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너무 보편화 돼서 잘해줄지는 미지수다.

서울 시민 중에 날씬하지 않은 여성은 없다.

체중조절은 ‘식량 절약’에도 도움이 되기에 국가에서 권장하고 강요하는 부분이다. 다리와 허리가 두꺼운 여성은 옷도 입지 못하게 치수를 규격화했을 정도다.

얼굴은 계약자 수준인데 몸매가 불합격이면 이 얼마나 아까운가!

체중감량이 어려운 것도 아니다.

노화억제제보다 훨씬 저렴하고 효과적인 다이어트 식품이 모든 약국에서 판매되고 있다.

하지만,

계약자를 목표로 한다면 최대한 피해야 한다.

노화억제제는 눈감아주지만, 아리따운 공주님이 ‘약물중독’이라면 이상하잖은가! 아름다워지는 묘약을 과용하고 신세 망친 여인 이야기는 그냥 나온 게 아니다.

화장품처럼 괴수가 싫어한다.

“...아저씨도요?”

“은비야! 아저씨도 남자란다!”

< [18장-2] 고대인의 꿈 > 끝

ⓒ 파르나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