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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처럼-73화 (73/287)

< [18장-1] 고대인의 꿈 >

[18화] 고대인의 꿈

학명: 뱀페스트(어떤 벌레의 더부살이)

서식지: 도시

특징: 처녀의 피를 좋아합니다♬

위험도: 2종 특수

비고: 전설이 무색한 흡혈귀

***

정비과 엄친아 정찬호를 만난 카르 4세는 망연자실했다.

카르세리안 레이소.

이 세상에서 3번째로 날카로운 검을 강화할 방법은 있었다. 하지만 여태 그러지 않았던 건 무게가 너무 올라가서 사람이 들 수 없었던 탓이었다.

그건 간과할 수 없는 문제였다.

“간단해. 검신(劍身)을 두껍게 하면 돼.”

“그러면 날카로움이 줄잖아.”

“노노. 그건 일반적인 검이고. 카르세리안 레이소, 스콜레옹 포르소. 이 둘은 평범한 여자가 아니야. 아주 특별하지.”

“어떻게 특별한데?”

정찬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작은 유리병을 가져왔다.

안에는 은색 액체, 괴수의 피가 들어있었다.

뚜껑을 연 청년은 탁자 위에 누워져 있는 여인(?)의 치마를 살짝 들치고는 괴수의 피를 그 위에 천천히 떨어트렸다. 아주 천천히.

검집에서 살짝 빼낸 칼날에 닿은 피는,

“흡수…?”

“이봐, 카르 4세. 이상하다고 생각해본 적 없어? 어째서 카르세리안 레이소는 손질이 필요 없을까, 하고.”

“...날카로워서 만질 수 없기 때문?”

“틀렸어.”

“틀렸다고?”

“그래. 이건 칼날이 예리해서가 아니라 닿는 물체를 분해하는 원리지. 절단기보다 분쇄기란 표현이 더 적합해.”

“허!”

여태 그 사실을 몰랐다는 사실에 기가 막힌 무일이었다. 검의 주인이면서 검에 대해 하나도 몰랐다는 게 말이 될까.

하지만 정찬호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듣고 놀라지 마. 네 여자친구는 4종 괴수야.”

“뭐?!”

“초소형 괴수. 세균, 박테리아라고 해도 틀린 표현이 아니야. 원래 생태계에 있던 녀석이 아니라 영국의 와이츠가 창조한 괴수지.”

“창조….”

“주식(主食)은 괴수의 피, 그밖에 못 먹는 물질은 배척해. 카르세리안 레이소의 칼날과 검집은 녀석들이 분쇄할 수 없는 성분으로 되어있지.”

너무 놀라서 말도 안 나왔다.

하지만 그게 무슨 대단한 비밀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정찬호는 이 본능대로만 움직이는 친구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해 아까보다 조금 빠르게 괴수의 피를 흘러내렸다.

전부 흡수하지 못한 피가 탁자 위에 고였다.

“...탁자가 녹네.”

“녹는다기보다는 분해된 거지. 이 현상은 잠깐이 아니라 한참 동안 천천히 진행돼. 시간으로 따지면 15분쯤?”“15분! 이러다 탁자에 구멍 나는 거 아니야?”

“생기겠지. 이대로 놔두면 15분 뒤에 아래층까지 뚫릴걸. 중간에 깔린 배수구, 전기배선 등등 전부 결딴나는 거야.”

“아….”

“하지만 그렇게 놔둘 순 없지.”

라이터를 주머니에서 꺼낸 정찬호가 탁자 위에 떨어진 괴수의 피를 불로 지졌다.

일반적인 붉은 피보다는 불에 내성이 강해서 오래 버텼지만, 액체답게 수분이 증발하고 곧 은색 핏자국만 남았다.

분쇄도 멈췄다.

“세균을 태운 건가?”

“대충 맞았어. 정확히 말하면 서식지를 지운 거야. 이 4종 괴수는 카르세리안 레이소 칼날과 괴수의 피에서만 살 수 있어.”

“독특하군.”

“네 여자친구에게 베인 괴수들의 회복력이 떨어지는 이유이기도 하지. 절단면으로 스며든 소량의 세균이 끊임없이 재생을 방해하는 원리다.”

“호오….”

응용하면 대단한 무기가 나올 것 같다.

그런데 어째서 검으로만 쓰는 걸까?

정찬호는 여기에 대한 해답도 차근차근 설명했다.

“아까 4종 괴수라고 한 이유가 이 때문이야. 5종 괴수의 피에서는 살 수 없어. 그래서 카르세리안 레이소의 절삭력은 4종이 한계라고 인식하게 된 거지. 5종부터는 완벽하게 베어내도 순식간에 붙어버리거든.”

탄환처럼 쏘아내는 것도 무리다.

세균은 불에 약하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더라도, 소모품으로 만들기에는 재료비와 재료 둘 다 감당 안 됐다.

한 발에 대략 30억! 미치지 않고는 못 쏜다.

효과라도 좋으면 모르겠으나 1종 괴수조차 못 죽인다.

“검으로밖에 못 쓴다는 거네.”

“그렇지. 그리고 이 세균은 칼날에서 15분 이상 떨어져 있으면 저절로 죽어. 괴수의 피에 있더라도 말이지. 그 대신 번식력이 엄청나. 그래서 위험해.”

건물 옥상에서 세균이 ‘잔뜩’ 스며든 괴수의 피를 뿌리면 어떻게 될까?

그야말로 순식간에 지하까지 뚫린다! 그리고 천장에서 떨어지는 핏방울에 맞은 사람은 치명상 내지는 죽음이다.

그런 식의 악용이 가능하기에 ‘카르세리안 레이소’와 ‘스콜레옹 포르소’의 본질을 비밀로 한 것이다.

뛰어난 검술 실력이 없어도 검만 소지하면 누구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흠. 그래서 결론이 뭐야?”

“강화하고 싶으면 칼날을 두껍고 널찍하게 만들라는 거다. 세균의 접촉면적이 늘어나면 분쇄도 잘 이루어지지. 그런다고 5종 괴수의 재생력이 깎이는 건 아니지만, 칼날이 재생력에 밀려 부러지지 않으면 벨 수 있어.”

“...무게가 3배쯤 올라간다고 생각하면 돼?”

“예리한데? 역시 육식남. 못해도 그 정도는 돼야 차이를 느낄 수 있다.”

무일은 눈살을 찌푸렸다.

가더발트를 착용했을 때는 3배가 아니라 30배도 가뿐하다. 하지만 항시 착용하는 건 생리적으로, 인간적으로 무리다.

검에 몸이 끌려다니는 것도 문제다. 아니, 평상시에 들 수 있을지 의문이고 수중전이라도 벌어졌다가는 영락없이 맥주병 신세다.

평양에서 돌아온 이후로 여자친구가 깃털처럼 가벼워진 기분이 자주 들지만 그렇다고 무게를 3배로 뻥튀기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어째서 기분 탓이라고 단정하느냐?

혹시나 싶어서 무게를 재봤을 때는 그대로인 까닭이다.

‘그냥 뺏을 걸 그랬나?’

시링 팽의 ‘스콜레옹 포르소’라면 당분간(?) 문제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떠나려 할 때다.

정찬호가 식은 녹차를 후루룩 마시며 입을 땠다.

“카르 4세. 곧 생일이지?”

“뭐…. 그렇지.”

“여자친구를 성형하는 건 포기하고 양다리 어때?”

청년의 저급한 표현을 소년은 이해했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다.

“쌍수(雙手)…. 나는 오른손잡이야.”

“새삼스럽게 뭘 그런 걸 따져. 옛날에는 왼손에 총도 들었으면서. 평상시에는 한 손으로 싸우다가 괴수의 힘을 쓸 때만 쌍수.”

“...너도 게임을 너무 많이 한 모양인데, 허리에 매달아두기만 해도 무게는 나가거든? 기동력과 순발력이 떨어지는 건 둘째치고 체력이-, 잠깐.”

체력은 최근에 부족했던 기억이 없다.

이건 가더발트를 팬티로 장착(?)하지 않아도 유지되는 효과다.

‘익숙해지면 못할 것도 없겠는데…?’

장기전일 때는 오른손의 힘이 빠지면 왼손으로 싸우곤 했다. 왼손도 검술을 펼치기에는 무리가 없다.

검을 보강하는 게 어렵다면 양손으로 ‘난도질’해버리면 된다.

질보다 양!

선호하는 전투스타일은 아니지만, 가더발트를 착용했을 때에 한에서 예외로 쳐도 될 것 같다. 같은 시간에 2배 피해를 주면 재생력을 웃돌 수 있지 않을까?

손가락 빨다가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멋지잖아? 카르카르 1세.”

“그건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오지에 서식하는 새 이름이냐….”

“몰라. 그보다 양다리 해볼래?”

“...생각은 있는데 돈이 없지. 왜? 선물로 사주게?”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한 자루 더 사야 한다.

하지만 어디서 330억을 구한단 말인가?

음흉하게 웃는 선지혜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머릿속에서 바로 지웠다. 대출을 빌미로 또 무슨 흉계를 꾸밀지 알 수 없다.

정찬호가 손을 휘저었다.

“아서라. 그건 이미 선물의 범주를 벗어났잖아.”

살 수 없다고는 안 한다.

괜히 엄친아라고 불리는 남자가 아니다.

“하지만 방법이 있어서 얘기한 거겠지?”

“맞아. 과연 야생남. 척하면 척이네. 생일선물로 뭐가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어.”

“흠. 까다로운 의뢰인가.”

“지금부터 설명하려는데 찍지 마. 게다가 딱 맞춰버리면 바보 된 기분이야.”

“미안.”

정찬호에게 ‘장차 대한민국 숙녀들을 울리고 다닐 미남으로 성장하겠구나!’라고 곧잘 칭찬해주시던 어르신이 있다고 한다.

울리긴커녕 말도 못 거는 초식남으로 성장했지만.

함자는, 임진호.

대한민국 게임계의 전설로 불리는 남자다.

가상현실게임 순위권에 그의 이름이 빠진 적이 거의 없고, 프리미어리그에서 금메달을 쓸어담고 있으며 여전히 현역이다.

즉, 세계적으로 유명한 프로게이머다.

그런데 이분이 ‘노망(老妄)’이 들었다는 것이다.

자식들의 눈치싸움에도 질렸고 인생도 시시해져서 이만 ‘안락사’를 생각하고 있단다. 아무리 설득해도 고집불통인 노인(老人)의 죽음은 기정사실이 됐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루고 싶은 꿈이 있데.”

“꿈?”

“가상현실게임 세계에서는 온갖 위험한 모험을 다 다녔던 어르신이지만, 정작 현실에서는 서울 밖으로 나가본 마지막이 암흑기가 전부였다는 거지.”

암흑기라면 대한민국의 산소호흡기가 떨어지기 직전이었던 100년 전이다.

그 시기를 겪었다면 ‘고대인’이란 뜻이다.

안락사를 선택해도 딱히 이상할 것 없는 사람이라고, 카르 4세는 매우 현실적인 관점에서 수긍했다.

가상현실이 아닌 현실에서 진짜 모험을 해보고 싶다는 거군.

살 만큼 살았으니 괴수도 두렵지 않을 것이다.

“얼마 준데?”

“선수금으로 10억. 끝나면 또 10억.”

의뢰비가 깔끔해서 좋긴 하지만, 카르세리안 레이소 시가는 330억이다. 검을 사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구체적으로 얼마나 위험한 ‘모험’인지도 듣지 못했다.

계약자를 고용하면?

그냥 혼자 모험을 떠나는 편이 더 안전하다.

수호자는 기본적으로 계약자만 지키기 때문에 요원호위로 부적합하다. 그리고 이동할 때마다 야생괴수들이 영역침입으로 간주해 괜한 시비만 부른다.

그래도 20억이다.

쉽게 무시할 수 있는 액수는 아니었다.

위험하다면 깔끔히 포기하겠지만 어쩌면 간단한 내용일 수도 있다. 일단 들어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

“위험한 생일선물이네. 구체적인 내용은?”

“가상현실게임에서 흔히 구성하는 5인 파티야. 당연히 임진호 어르신은 깍두기지만, 일단은 상인 클래스란 설정.”

“1인당 20억씩 준다는 거지?”

“그래. 5명 합쳐서 100억. 목표는 지리산에 사는 악룡(惡龍) 사냥이다. 세상을 등지기 전에 드래곤 슬레이어 칭호를 달고 싶으신 걸지도.”

“지리산이라면…. 경상남도의 그 지리산?”

괴수를 맨손으로 때려잡는 도사가 산다고 해서 가본 기억이 있다.

도사는 개뿔.

부산의 권력다툼에 밀려 추방된 프로사냥꾼이었다. 소지한 모든 장비를 뺏긴 맨몸으로 살아남은 건 용하지만 딱 그뿐이었다.

함정을 파고 여자친구를 빼앗으려 하기에….

보답으로 목을 벴다.

“어. 그 지리산.”

서울에서 한참 남쪽이다.

악룡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가는 길부터 험난할 것 같다.

은밀한 기동으로 혼자 다녀오는 거라면 어렵지 않지만, 일행을 줄줄이 달고 이동하면 사방에서 괴수들이 달려들 게 자명하다.

목적도 마음에 안 든다.

악룡(惡龍)?

지리산에서 평화롭게 사는 용을 사악하다고 할 순 없다.

그래서 일단은 보류하기로 했다.

“아이를 돌보고 있어서 장기외출은 당분간 무리야.”

최은비가 울면서 매달릴 게 분명하다.

명분도 뚜렷하지 않고 어린애를 불행하게 하는 돈은 얼마가 됐든 필요 없다.

정찬호가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아, 그랬지. 예쁜 신부를 구할 방도가 없다는 걸 깨달은 네가, 아예 첫걸음부터 입맛대로 키우는 중이라고.”

“그런 말 안 했거든!”

“내게는 그렇게밖에 안 들렸다네, 친우여!”

카르 4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정비과 엄친아에게 부탁했다.

생각해볼 테니 다른 파티를 구하면서 기다려보시라고, 의뢰자인 임진호에게 그렇게 전해달라고 말이다.

일종에 시간 끌기다.

무일은 게임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안락사하는 건 국가적인 손실이란 자각은 있다.

“다음에는 생일 때 보자.”

“너랑 싸웠던 도도한 아가씨도 오는 거지? ”

“어…. 아마도.”

“오냐! 꼭 가마! 노예라니! 이런 부러운 설정이라니! 카르 4살(射殺)이여! 너야말로 ‘3D 애로 판타지 어드밴처’ 실사판(實事板)이잖아! 천벌 받을 놈!”

“...감시자인데.”

덤으로 비매품이다.

친구에게 죽으라는 녀석에게는 비밀이다.

< [18장-1] 고대인의 꿈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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