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72화 (72/287)

< [17장-4] 그는 산마저 뛰어넘었다. >

‘욕봤네.’

카르 4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역시나 땀은 한 방울도 안 났고 지치지도 않았지만, 가더발트는 오래 착용할 수 있는 속옷(?)이 아니다.

가만히 있어주면 좋으련만, 이 ‘발칙한 괴수’는 애무에 상당한 재능이 있었다. 여자에게 받아본 적 없어서 비교할 수 없다는 게 서글프지만.

“카르 4세! 노예는 여기에 있어!”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라 누나.”

“어머! 남자는 역시 내세울 게 있어야 여유가 생기나 보네.”

“그건 누구나 그렇죠.”

무일은 수호자 프로칸을 신경 쓰지 않고 똑바로 그녀를 보는 중이다.

가슴만 살아있었으면 6종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할 정도로, 무일은 강보라를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일광욕하러 떠난 개구리 왕자님은 돌부처처럼 정원에서 꼼짝 않고 있다. 무시는 아니고 달관하는 것 같다.

“참기 어려웠나 봐?”

“...그런 얘기는 넘어가 주시죠!”

“알았어. 그렇다고 아픈 노예를 배출구로 쓰면 안 돼~♪”

“안 합니다!”

“너무 실망하진 마. 내일부터는 조금씩 해도 괜찮을 거야.”

“저는 건전한 성인입니다….”

음흉하게 웃으며 ‘좋은 시간 보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꺼낸 ‘무늬만 간호사’는 1인실로 그를 밀어 넣고 떠났다.

무일은 쓴웃음을 지으며 병실을 구경했다.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고안된 방이란 걸 노골적으로 밝히는 창문은 작았고 그마저도 쇠창살로 완전봉쇄 했다.

실내장식은 창틀에 놓인 꽃병 하나가 전부였다. 강보라가 의무대 화단에서 꺾어서 옮겨심은 모양이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쓸쓸한 분위기.

이 병실을 쓰는 환자가 아름다운 가인이 아니었다면 감옥이라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저…. 음….”

“깨웠나? 미안하게 됐네.”

“아, 아니요! 어차피 할 일도 없는걸요!”

“그래?”

페이 링은 알몸 위에 매우 헐렁한 환자복만 걸치고 있었다.

여기저기 반창고 붙인 팔다리는 꼼짝달싹 못 하도록 침대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저것이 상처가 터지지 않도록 한 조치인지 다른 이유인지는 당장 알 수 없었지만, 썩 보기 좋진 않았다.

“어서 오세요. 우으…. 그러니까…. 주인님.”

“...말 많은 간호사가 시켰어?”

“시킨 건 아니고 가르쳐줬어요. 그래야 채찍으로 안 혼나고 또…. 주인님에게 귀염받는다고….”

태양신이시여! 어찌 저를 시험하시옵니까!

가더발트가 가만히 있는대도 살짝 불끈하고 말았다.

자신의 성벽이 이럴 리 없다고 부정한 카르 4세는 심호흡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숲 속의 맑디맑은 옹달샘처럼.

이 자리에서 ‘아니야! 나는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아!’ 같은 발언을 던지며 허둥대는 추태를 보일 순 없었다.

무일은 페이 링에게 말했다.

“처지에 대해서는 들었어?”

“네. 외부와 통신 같은 건 할 수 없지만, 간단한 리모컨 조작으로 외부소식과 ‘문물’을 접할 수 있었어요.”

몸을 움직일 순 없지만, 페이 링의 오른손에는 리모컨이 들려있었다.

유일하게 자유로운 손가락으로 정면의 벽걸이 TV를 시청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꽤 다양한 기능이 내장되어있었다.

영화, 게임, 신문, 애니메이션, 만화….

제목들에 ‘노예’나 ‘주인님’ 같은 단어가 많이 붙었다고 느낀 건, 오랜 동정생활로 지친 남자의 기분 탓이라고 생각한다.

인터넷하고는 연결되어있지 않기에 환자인 페이 링이 구하는 건 무리다. 그런데 일단 간호사 신분인 강보라가 이 많은 자료를 구해줬다는 모양이다.

그래서 페이 링은 강보라에게 무척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무늬만 간호사가 한 건 했군!

돌아가는 길에 감사하다고 꼭 한마디 해야겠다.

“심심하지 않아서 다행이네.”

“네. 음….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주인님.”“무리하지 마. 그 개구리 공주님은 환자에게 무슨 말을 해준 거람.”

“틀린 말도 아닌걸요.”

페이 링은 리모컨을 몇 번 조작했다.

한두 번 들락날락한 경로가 아닌지 찾아가는 건 순식간이었다.

중국어, 한국어, 영어로 작성된 ‘판결문’ 3장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그녀가 어떤 죄목으로 중국에서 추방됐고 그래서 무슨 처벌을 주저리주저리….

결론은 ‘노예계약서’였다.

페이 링에게 허락된 권리는 단 하나뿐이었다.

카르 4세(한무일)가 그녀의 몸이나 노동력을 타인에게 양도, 매각, 대여하려고 할 때만 완강히 거부할 수 있다.

법적으로 그녀는 ‘비매품’인 까닭이다.

‘중국 측에서 끼워 넣은 것 같은데….’

감시카메라 ‘모짜리나 바글버글’보다 완벽한 ‘감시자’였다.

덤으로 페이 링이 낳은 자식은 노예 신분이 아니며 ‘중국 국적과 시민권’을 가진다고 뚜렷하게 명시되어 있다.

...무슨 속셈인지?

이 부분에서 페이 링이 얼굴을 사르르 붉히며 가슴 통증을 호소하는 바람에 얼렁뚱땅 넘어가고 말았다.

그밖에 사항은 별거 없었다.

중국 정부에서 페이 링에게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보낸다는 정도?

무일은 자신을 감시하는 ‘수고비’로 해석했다.

“퇴원은 언제쯤 가능하데?”

“빈혈만 주의하면 내일 오후쯤에 퇴원할 수 있다고 의사선생님에게 들었어요.”

“내일? 그 상처가 그렇게 빨리 나았다고?”

3주쯤 예상하고 있던 카르 4세로서는 살짝 놀랐다.

불량식물(?) 부작용으로 신진대사가 활발한 체질이 된 그도 이렇게까지 빨리 나을 수 없는 치명상이었다.

목숨을 거두는 걸 제외하고는 정말 인정사정 봐주지 않았으니까.

페이 링이 말했다.

“영국 왕녀님이 마법으로 응급처치를 해주신 덕분이에요.”

“아…. 듀크마….”

대마법사로 불리는 8종 괴수는 ‘회복마법’ 같은 것도 가능한 모양이다.

그야말로 RPG 게임의 현실판이었다.

그렇게 몸은 거의 나았지만 ‘계약자’로 복귀할 수 있도록 섬세하게 치료 및 관리하는 단계라고 한다.

성형수술에 해당하는 기술을 안 쓰고 피부에 흉터가 안 남도록.

특히, 젖가슴은 여성의 매력 포인트로서 아주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주인님’이 가차 없이 베는 바람에 의사들이 고생했단다.

몰상식한 사내가 됐다.

이래서 여태 여자친구가 없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뜩 들었다.

“주인님. 내일 퇴원할까요?”

“됐어. 집이 좁아서 셋이서 자는 것도 무리야.”

아침에 윤소영과 최은비가 벌인 신파극 같은 일이 벌어지진 않겠지만, 마누라와 딸도 아닌 여자들이랑 좁은 방에서 보내는 건 아무래도 좀 그랬다.

무일의 현재 처지는….

최은비의 보호자, 페이 링의 주인님.

아름다운 마누라와 예쁜 딸을 달라고 해돋이 중에 열심히 빌었는데, 태양신은 그 기도를 졸면서 듣고 있던 게 분명하다.

딱히 불만이란 건 아니지만!

정비과의 친구놈은 예쁜 여자랑 동거(同居)조차 못 해봤다.

“...주인님은 다정하시네요.”

“잉? 뭐가?”

“아니요, 아무것도.”

자신을 죽이려 했던 여자를 노예로 얻었다. 페이 링의 상식으로는, 그런 ‘노예’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는 ‘주인’은 있을 수 없다.

화가 풀릴 때까지 물리적, 정신적으로 괴롭혀야 정상이다.

그래서 페이 링은 각오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회가 생기면 자살할 생각이었다. 노예처럼 굴욕적인 삶을 살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보라 언니가 추천한 애니메이션을 밤새 봤다.

거기에 나오는 ‘노예’처럼 ‘주인님’이랑 알콩달콩 행복한 나날이 가능하지 않을까, 같은 망상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아직 다 낫지 않은 가슴의 통증조차 달콤하게 느껴졌다.

“...처음 만났을 때는 강인한 인상이었는데 다시 보니 완전히 꿈 많은 아가씨네. 절단기보다는 부엌칼이 어울릴 것 같다고 할까.”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콧대는 낮다.

어릴 적에 귀엽다는 소리를 달고 살았을 것 같은 청순한 매력이다.

이렇게 농염한 미녀로 성장할 때까지 계약을 미루고 미루다가 ‘변태 속옷 따위’랑 계약시킨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8종은 무리지만 7종은 가능하지 않을까?

페이 링을 차근차근 살펴본 카르 4세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주인님의 평가를 들은 노예 아가씨도 생각했다.

‘부엌칼이면, 메이드(maid)를 원하시는군요.’

강보라 언니가 준 자료 중에도 분명 있었는데 젖혀둔 걸로 기억한다.

저 여주인공은 생각이 없는 걸까?

너무나 비현실적이라고 판단한 페이 링은, 현실의 약해빠진 남자들의 헛된 망상으로 치부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다 보니 참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주인님은 강하다.

믿음직스러운 지아비에게 몸과 마음을 다하는 게 아내의 본분이자 행복 아닐까.

무림 기준으로 ‘계집종 vs 애첩’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노예답게 살짝 거친 사랑을 받으며 아이를, 아이를…. 아우으으….

페이 링은 ‘계약자가 아닌 여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상상했을 플레이를 떠올리다가 머릿속이 과열했다.

아무리 타인의 생각을 잘 읽는 카르 4세도 이것만은 간파하지 못했다.

“...몸조리 잘해.”

“네, 주인님.”

계속 있다가는 함께 이상해질 것 같았던 무일은 병실을 빠져나왔다.

순진한 미녀의 사고회로를 망쳐놓은 간호사에게 고맙다고 해야 좋을지 고민했지만, 병원생활이 얼마나 지루한지 잘 아는 무일이다.

그러니 감사인사는 인간 된 도리.

중국 무림의 대표로 출전했던 여걸이 쉽게 변할 리 없다는 믿음도 다소 있었다.

지나치게 순응적이고 고분고분한 태도가 걱정되긴 했지만, 현실성이 빠진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변하진 않겠지.

강보라가 예쁜 인형(환자)을 자랑하는 소녀처럼 물었다.

“어때?”

“...돌봐줘서 고마워요, 누나.”

“내일 퇴원시킬 거야?”

“아니요. 집이 좁아서 당분간은 좀 더 의무대 신세를 지게 하려고요. 어차피 치료비는 중국에서 전부 댄다고 했으니 쥐어짜듯 이용해줘야죠.”

“그래? 우후후후, 으헤헤헤….”

“누, 누나…?!”

음침한 미소와 아우라를 뿜는 간호사에게서 떨어졌다.

몸 성한 아가씨를 괜히 장기입원시켜서 망쳐놓는 게 아닌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퇴원 절차를 밟는 게 좋지 않을까.

하지만 그럴 틈이 없었다.

“이 누나만 믿어!”

강보라에게 등을 떠밀리며 의무대에서 쫓겨났다.

자신의 위기밖에 못 잡아내는 [예감]이나, 눈앞에 드러난 현상을 분석하는 [예측]이 없더라도 알 수 있다.

페이 링이 위기에 빠졌음을 말이다.

“아무리 믿으라고 하셔도 말이죠! 정말 괜찮은 겁니까?!”

“물론이지! 이상적인 노예로 개조해줄게.”

“개조?! 흘려넘길 수 없는 단어가 나왔는데요?!”

4종 수호자 프로칸은 문제가 아니었다. 개구리 왕자님보다 공주님이 더 강적이었음을 카르 4세는 너무나 뒤늦게 깨달았다.

하지만 명백한 ‘호의(好意)’를 품고 있는 여성을 카르 4세는 이길 수 없다.

특공대장 선지혜처럼.

그 꿍꿍이를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해주는 이유다.

페이 링을 구출하는 건 포기했다.

‘본부에 온 김에 정비과에 들러 카르세리안 레이소의 강도와 예기를 더 높일 방법이 있는지 물어볼까나.’

가더발트의 성능을 확인한 카르 4세는 쓰게 웃었다.

전에는 몸뚱이가 아쉬웠는데 이젠 역으로 무기가 불안해진 까닭이다.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낮에, 7종 괴수 레드군을 보고 확신했다.

앞으로는 무기가 강해져야 자신이 강해진다고 말이다.

(아저씨!)

(...세웅이가 휴대전화를 사준 건가?)

(네! 이것만 있으면 언제든 아저씨랑 얘기할 수 있데요. 하지만 오빠 말을 믿을 수 없어서 학교 끝나자마자 전화한 거예요.)

(그래? 잘됐네.)

후배야, 너는 어제 하루 만에 신뢰가 얼마나 떨어졌던 거냐.

하지만 오늘은 점수를 딴 모양이다.

문세웅이 2급 사냥꾼을 목표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휴대전화는 최은비의 생각과 마음을 [예측]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내일까지만 기다려줄 생각이었는데….

카르 4세는 ‘예상대로’ 기기값이 굳어서 무척 만족스러웠다. 후배의 성장은 [예측]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래도 선배로서 푸념하자면 [예측]을 웃도는 발전이 없었다는 정도.

기회는 앞으로도 얼마든지 있으니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럼…. 나도 발전하러 가볼까.”

까칠한 여자친구를 어루만지며 정비과로 향했다.

...갈 필요 없다고?

천상의 음률이 산들바람처럼 머릿속을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그 신비로운 노랫말로 속삭이는 마성(魔性)에 온몸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냉큼 무시했다.

환청에 흔들릴 만큼 한무일은 굶주리지 않았다!

『또 무시, 맨날 무시….』

< [17장-4] 그는 산마저 뛰어넘었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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