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장-3] 그는 산마저 뛰어넘었다. >
무일은 곧바로 말뜻을 이해하기 했지만,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지 망설였다.
거절해도 죽고, 수락해도 죽고….
이런 무서운 일이 다 있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엉켜버리는 심정이었다.
우선 이유를 [예측]해보기로 했다.
“친구들 앞에서 무언가 되돌리기 어려운 발언을 하신 겁니까?”
“읏! 네에….”
신변의 안전을 위해 계약자 대부분이 여학교를 선호한다. 그리고 윤소영이 다니는 중학교도 서울에서 명문으로 통하는 아가씨 학교.
그렇다 보니 미지의 영역인 ‘남학생’이 화제가 되는 모양이다.
남자친구 자랑….
그런 얘기가 오가는 와중에 7종 계약자에게 날아든 화살! 있을 리가 없다는 발언에 발끈한 미소녀께서 어깨 펴고 당당히 있다고 하셨단다.
상황은 이해했다.
카르 4세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루쯤 할애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한 번 시작되면 끝이 없는 법이다.
“윤소영 양.”
“네, 오빠.”
“남자친구를 내세워서 친구들에게 돋보이고 싶으신 거죠?”
“너무 직설적이잖아요….”
사춘기 계약자란 그 무엇보다 무섭군.
고개를 끄덕인 무일은 설득하기로 했다.
“...여자친구를 만들어보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어서 좀 압니다만. 이럴 때는 남자친구가 안 만나주고 ‘비싼 남자’인 것처럼 나가는 게 효과적입니다. 학생은 시간이 많죠. 하지만 그건 여자친구에게 충실한 게 아니라 몸을 노리는 늑대입니다.”
“어…. 왜요?”
“남자라면 자고로 여자를 지킬 힘과 지혜를 쌓고 돈을 모아야 하는 법입니다. 생각 없이 노는 녀석들은 언젠가 여자를 울릴 악질들이죠.”
남자친구의 범주를 넘어선 것 같지만 아무렴 어때.
중학생 주제에 여자친구…. 부러워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다.
윤소영만 이해했으면 됐다.
“저도 오빠랑 같은 생각이에요!”
“그렇습니까…?”
“네! 괴수 앞에서 벌벌 떠는 애들은 남자친구로서 실격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엘카르가 있어서 괜찮지만 제 친구들은 수호자가 없으니까요. 그러니 남자친구가 지켜줘야 해요.”
“그, 그렇죠.”
삐뚤어진 상식을 주입한 것 같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연애경험이 없는 무일도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어느 정도 설득이 완료됐다고 [예측]한 소년은 조심스럽게 생사가 걸린 말을 꺼냈다. 여태까지는 이 한마디를 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만나줄 수 없습니다.”
“앗! 그게 그렇게 되나요?!”
“여자친구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남자친구는 시간이 없는 법입니다. 갑자기 놀러 가자고 하면 못 만날 수밖에요. 적어도 일주일 전에 약속을 잡고 완벽한 데이트계획을 짜야 합니다.”
“행복…. 데이트…. 맞아요! 오빠 말이 전부 맞아요!”
윤소영의 머리 뒤편으로 하트 풍선과 폭죽이 터지는 환각이 보인다.
얼굴 99점, 몸매 101점, 성격 99점.
위험한 계약자만 아니면 정말 최고의 신붓감….
옆집 지붕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레드군이 이쪽을 지그시 쳐다본다.
‘...이상한데?’
예전처럼 깔보거나 죽이겠다는 눈빛이 아니다.
가더발트를 경계하는 건가?
그건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는 카르 4세였다. 레드군의 ‘화염 숨결’은 피할 방도가 없을뿐더러 근접전을 벌이더라도 카르세리안 레이소만 부러질 뿐이다.
뭔가 찜찜했지만,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오늘은 증거자료로 같이 찍은 사진 한 장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커플 사진?!”
“어…. 그렇게 되겠군요.”
“으으…. 이럴 줄 알았으면 예쁜 옷을 입고…. 으으...”
윤소영은 좌절하는 모양이지만, 그녀는 눈사람 같은 옷만 입지 않으면 뭘 입든 아름답게 소화해낼 수 있는 몸매의 소유자다.
아니, 옷차림은 제쳐놓고 밀랍인형처럼 예쁜 이목구비만으로도 사진은 완벽해진다.
카메라에 두 사람의 얼굴이 들어갈 수 있도록 바짝 붙었다.
파직!
윤소영의 팬티를 훔쳐보려고 치마 아래로 숨어들려는 벌레 카메라 ‘모짜리나 바글버글’을 밟아서 부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외모 격차가 심하다 보니 애인보다는 팬 사인회에서 찍은 사진 같다. 위안이라면 동년배처럼 보인다는 정도일까.
소녀는 무척 만족스러운지 표정이 활짝 폈다.
“고마워요, 무일 오빠!”
“친구들에게 꿀리지 말고 힘내십시오.”
“네!”
치마가 위험하게 펄럭이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나는 미소녀였다.
지각?
그런 걸로 혼낼 선생이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순식간에 접근해서 계약자를 소중히 안아 든 레드군이 서울 중심가 방향으로 날아갔다. 학교까지 10초 내외로 도착할 것 같다.
...저렇게 보니 신사 맞네.
그렇다고 해서 방심하진 않는다.
수틀리면 동해처럼 서울을 태워버릴 용왕이란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슬슬 움직여볼까나.”
오늘은 의무대에서 능력검사를 받기로 되어있다. 덤으로 새벽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페이 링’을 만날 예정이다.
환자의 안정을 위해 원래는 면회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녀의 ‘주인(主人)’으로서 생살여탈권을 가진 카르 4세는 예외였다.
노예라….
오래전이지만 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단어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을까?
어머니는 페이 링처럼 ‘2종 계약자’였고 사냥꾼에게 패배했다. 그리고 패배를 안겨준 원수의 애를 낳는 노예(첩)가 됐다.
‘실패자가 아니면 좋겠는데.’
성형수술은 아니지만, 끊어진 인대를 붙이고 피부를 봉합하는 과정에서 ‘조건’을 조금이라도 깨는 시술을 했다면 계약은 영영 끝이다.
오늘은 그걸 확인하고자 한다.
계약할 가능성이 있다면 다시 계약자가 될 수 있도록 해볼 것이고, 불가능하게 됐다면 최은비를 돌봐주는 보모로 만족.
어떤 결과가 나오든 노예로 거두는 건 확정이다. 사정은 딱하게 됐지만, 목숨을 노린 아가씨란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까닭이다.
일단 명분은 그렇다.
속마음은 ‘가족’을 합법적으로 늘릴 수 있어서 대찬성이다.
장점?
“곧 생일이었지….”
아주 외롭진 않을 것 같다며 안도한 소년은 보았다. 무시하려고 해도 계속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지하철, 버스, 자기부상열차, 길거리….
그 사이를 ‘평범한 시민’처럼 돌아다니는 괴수들을 말이다.
그럼에도 여자친구를 뽑지 않는 이유는 수호자일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가능성. 그리고 위해(危害)를 끼치지 않으면 굳이 손댈 필요 없다는 합리적인 판단에서였다.
몰랐던 진실.
괴수와 이웃하며 살고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나?
본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을지 궁금했다.
아니.
아예 안 묻기로 했다. 알고 있었다면 다행이지만, 아닐 경우에 서울은 혼란에 휩싸일 테니 말이다.
“어서 와! 카르 4세!”
무늬만 간호사인 강보라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한중전으로 많이 다칠 줄 알았는데 멀쩡해서 섭섭했다는…. 당사자가 섭섭한 발언을 시작으로 쉴 틈 없이 말하는 4종 계약자!
카르 4세는 적당히 맞장구쳐주며 기계설비를 신중하게 관찰했다.
일부 실험에 협조하는 건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다.
자신을 강제적으로 생체실험, 해부하려고 하면 당연히 끝장을 볼 생각이다. 하지만 그러면 너무나 많은 피를 손에 묻혀야 한다.
부디 어리석지 않기를.
“카르 4세. 그럼 시작할까? 이것들 만든다고 의무대와 정비과가 얼마나 난리법석을 떨었는지 몰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왜?”
“그야 저도 준비가 필요하니까요.”
“어머!”
무일은 옷을 하나하나 벗었다. 전부 벗을 필요는 없지만, 팬티만 벗는 것도 우습고 가더발트에 관한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제팬티를 벗기 무섭게 새로운 팬티가 하체를 덮었다. 딱히 부끄럽거나 이상한 꼴불견은 아니었다.
검은색 수영복 소년이랄까….
여전히 허리에 찬 칼이 전체적인 분위기를 흉흉하게 했지만, 강보라처럼 ‘어머!’를 연발하며 호들갑 떨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시작은 근력테스트로군요.”
물리충격을 흡수해주는 장갑, 앙그류 그랑모리로 덮인 주먹을 꽉 쥔 카르 4세는 정면의 특수강판을 힘껏 후려쳤다.
그대로 파괴.
이 측정기를 만든 기술자와 고문관의 입이 떡 벌어졌다.
3종 괴수가 몸통박치기를 해도 끄떡없다고 호언장담한 그들로서는 금붕어처럼 입술을 뻐끔뻐끔하며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강판이 휘어지는 정도로 측정할 예정이었는데 이러면 당장은 알 도리가 없었다.
“어…. 다음은 달리기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강보라가 일정표를 보며 말했다.
심심해서 따라온 것처럼 보이는 개구리 왕자님, 프로칸이 ‘개구우울.’ 울면서 ‘이걸 만든다고 얼마나 공들였는데….’를 중얼거리는 과학자들을 위로했다.
카르 4세는 어깨를 으쓱했다.
측정해달라고 애원한 것도 아니니 수리비청구서는 안 날아오리라.
달리기는 단순했다.
“러닝머신쯤 기대했는데 본부를 한 바퀴 도는 겁니까?”
“대신 신발을 준비했다나 봐.”
“호~, 과연….”
안 그래도 어제 3분쯤 달린 것만으로 신발 고무판이 눈에 뜨일 만큼 달았었다. 전용 신발이 시급하던 참이다.
하지만 무일의 기대는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사은품으로 나중에 챙겨갈 생각이었던 신발은 ‘MID 첨단과학’이라고 부를 요소를 찾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축구화보다도 뾰족한 굽이었는데 재질이 고무 대신 금속이었다.
구두쇠란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준비~♬”
“끙….”
초시계를 든 강보라가 재촉했다.
어쩔 수 없다고 한숨을 내쉬며 출발선에 섰다.
이왕 하는 거니까.
최선을 다하긴 하겠지만, 글쎄, 어떨지….
“땅!”
의무대를 한 바퀴 도는 산책코스가 초토화됐다. 최고속도에 방해되는 원심력에 밀려나지 않기 위해 지지대로 삼은 나무, 바위, 전봇대 등이 순식간에 파괴됐다.
사물이 휙휙 지나간다.
그래서 카르 4세도 달리는 동안은 깨닫지 못했다. 모든 움직임을 감에 의존한 채 ‘보지 않고’ 달리니 알 도리가 없었다.
착지는 나름 깔끔했지만, 상황파악이 늦은 강보라가 초시계를 늦게 누르는 바람에 정확한 측정은 카메라 시간을 봐야 할 것 같다.
초시계에 찍힌 시간은 ‘2.43초’였다.
“세상에….”
“그야말로 괴수네.”
“이게 가더발트…?”
불장난을 저지른 아이 같은 심정으로 후다닥 의무대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괴수가 숨어들었느니 어쩌니 난리법석을 떨었지만, 깔끔히 무시하고 다음 테스트로 넘어가려 했다.
표정이 매우 안 좋은 카르 4세가 제지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잠시 쉬었다가 하죠!”
“...그런가. 그러도록 하지.”
차분한 과학자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기록표 하단 공란에 ‘착용시간 한계는 대략 5분 30초 내외’라고 기록했다.
치명적인 약점이로군.
말은 안 했지만, 눈대중으로 그들은 의견을 교환했다.
아래를 가릴 수건을 부탁한 무일은 의자에 앉아서 명상하듯 기다렸다. 하지만 고의로 뜸들인 탓에 가더발트를 해제하고 손으로 중심부를 가려야만 했다.
과학자는 ‘5분 30초 내외’를 팬으로 북북 긁어서 지웠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다시 펜을 들었다.
새롭게 ‘7분 확정’이라고 쓰고 동그라미를 그렸다.
“휴우~.”
“...카르 4세. 몸 상태는 좀 어떤가.”
“어…. 음….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아주 큰 일 날 뻔했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흠. 그렇군.”
눈빛을 빠르게 교환한 과학자들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서로의 의견이 일치했음을 확인했다.
그들은 ‘한계 초과 시에 죽음에 이를 수도 있음’이라고 썼다.
강보라는 얼굴을 사르르 붉혔다.
이 자리에서 소년의 말뜻을 똑바로 이해한 건 그녀뿐인 것 같다.
같은 남자라서 그런지 이해하고 조용히 넘어가 주는 과학자들의 배려(?)는 이 아름다운 간호사 때문에 무산됐다.
얼굴이 화끈화끈해진 무일은 손부체질로 열을 식혔다.
“다음 테스트는 좀 진정된 후에 했으면 합니다.”
“물론일세. 하지만 우리도 바쁘다 보니…. 재촉할 생각은 아니네만 최대한 빨리 재개했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진정되지 않아서 바로는 무리였다.
다음 시험은 ‘20분’ 뒤에 시작됐다.
과학자들은 ‘정상적인 휴식은 20분 이상 필요. 무리할 수 있으나 위험함.’이라고 썼다. 이 정보는 수많은 강대국에 비싸게 팔릴 것이다.
진실하고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 [17장-3] 그는 산마저 뛰어넘었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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