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70화 (70/287)

< [17장-2] 그는 산마저 뛰어넘었다. >

갑자기 최은비가 ‘이 음흉한 오빠랑 안 가요!’라는 말로 문세웅의 가슴에 못을 박으며 울고불고 난리를 쳤다.

버리지 말라고 오들오들 떨며 옷을 잡는 소녀.

잠깐 떨어지는 거라고 설명해보지도 듣지 않는다. 이래서야 내일부터 어떻게 학교를 보낼지 벌써 앞날이 캄캄했다.

“...어쩔 수 없지.”

“선배님?”

“혼자 느긋하게 드라이브하다가 10분 뒤에 와라.”

“애를 안고 싸우시게요?!”

“그래.”

“그러다가-, 네. 알겠습니다.”

문세웅은 말리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지금 누구를 걱정하는 거람?

이 남자는 평범한 사냥꾼이 아니다. 귀환시간이 20분에서 10분으로 줄어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가더발트를 쓴다!

그 장면을 놓친다는 게 아쉽지만, 기회는 앞으로도 많으리라.

미청년의 나브랑모스 레비터가 소년과 소녀를 도로 한복판에 내려놓고 급발진했다.

“은비야.”

“아저씨, 아저씨. 은비를 버리지 마세요.”

“...아저씨 목을 꽉 껴안고 눈을 감아. 실눈 뜨면 정말 화낼 거야.”

“네!”

왼팔로 소녀의 엉덩이를 밑에서 받치듯 안아 들었다.

이 상태로 싸운다는 건 아무리 카르 4세라도 자살행위다. 무엇보다도 [예감]은 최은비까지 지켜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소녀는 죽는다.

하지만,

가더발트가 무일의 사제팬티를 찢고 그 자리를 대신했다. 동시에 모세혈관처럼 얇고 투명한 비정형 망사가 온몸을 감쌌다.

터무니없는 힘이 솟구친다.

“첫 실전연습을 겸해서 자료수집에 적당히 어울려줄까.”

오른발로 축구공 다루듯 근처 바위를 허공에 띄웠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가볍게 들어 올린 후에 망설이지 않고 하늘 높이 던졌다.

듣기만 해도 소름 돋는 파공성.

최은비를 안고도 가벼운 몸무게 탓에 멀리 날릴 순 없지만, 빠르게 접근 중인 비행형 괴수를 격추해서 떨어트리기에는 충분했다.

피융!

멀리서 날아온 저격을 피했다.

살짝 고개만 옆으로 틀면 됐지만, 최은비가 혹시라도 맞으면 안 되기에 다리까지 써가며 큰 폭으로 움직였다.

여기서,

이전 같으면 적이 사정권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달랐다.

20분에서 10분으로 줄어든 의미.

그건 [반격]할 기회가 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한 걸음 땅에 내딛으며 앞으로 박차며 돌진했다.

깜짝 놀란 최은비가 양팔에 더욱 힘을 주며 안긴다. 최대한 충격이 작도록 부드럽게 달려보지만, 인간의 신체구조로는 한계가 있다.

그러니 속도를 줄이고 천천히.

“뭐…?”

흔들리는 차 위에서도 목표물을 정조준할 수 있는 프로저격수는 망원경이 고장 난 것처럼 빠르게 좁혀지는 원근감에 숨을 토했다.

카르 4세는 속도를 조절한 거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공포였다.

완전히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소년의 속도는 도주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선언 같았다.

십수 명의 암살자들이 난사하는 총알을 물 흐르듯 피하는 움직임은 ‘소형 괴수’가 종종 보여주는 ‘학살의 곡예’ 그 자체였다.

무일 일행을 은밀히 추적하던 자들이 탄 차량은 총 3대.

그중 하나가 영문도 모른 채 뒤집혔다.

“으아아아?!”

“크아앜?!”

차의 부피가 커서 운전기사와 바퀴만 깔끔히 베어낸 카르세리안 레이소. 그 흉흉한 여자친구가 언제 뽑혔는지 아는 자는 당사자 빼고 아무도 없었다.

커다란 차가 하늘 높이 뛰어오르며 뒤집히는 광경을 잠깐이지만 멍하니 보는 사이에 다른 한 대가 또 희생됐다.

이번에는 베지도 않았다.

그냥 옆구리를 발로 차서 도로를 이탈시켰다.

차는 바위와 정면으로 충돌하며 폭발했고 생존자는 기대하기 힘들어 보였다.

팅, 팅, 팅, 팅!

카르세리안 레이소가 총알을 튕겨냈다.

전부 피해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장애물 하나 없는 도로에서 기관총으로 쏴대면 아무리 카르 4세가 빠르더라도 무리였다.

아니, 품에 최은비를 안고 있지 않았다면 대충 조준해서 난사하는 속도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을 것이다.

...방금, 아이를 탓한 건가?

그런 마음을 미미하게나마 품었던 자신에게 혐오감을 느끼며 곧바로 자책하고 반성했다.

아이가 보호자에게서 안 떨어지려는 건 당연한 본능이다. 절대로 흉이 아니다.

최은비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

눈을 감고 있어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으리라.

“은비야. 조금만 참아. 곧 끝나니.”

“네, 네. 아저씨….”

다정하게 말하는 말투랑 달리 카르 4세의 오른손은 자비가 없었다.

빠르게 산개하려는 전략인 것 같으면서도, 허겁지겁 도망치는 걸로밖에 안 보이는 암살자들을 하나씩 추적해서 제거해갔다.

마지막 상대는 비행형 괴수였다.

아가리를 벌리고 산성 비슷한 물질을 쏘아낸다.

“육탄전 괴수인데 안 내려오는군.”

돌에 맞고 추락한 경험도 있어서 그런지 지능적으로 행동한다.

카르 4세는 여자친구를 하늘 높이 던졌다. 공기저항마저 베어내는 ‘세계 3위 절단기’는 괴수가 반응할 새도 없이 날갯죽지를 베어냈다.

하지만 바로 떨어지지 않고 버티며 산성을 토해냈다.

이번에 추락하면 저 무시무시한 ‘대머리 원숭이’에게 죽는다는 걸 아는지 필사적이었다.

탕!

주인 잃은 대구경 총에서 발포된 탄환이 괴수의 눈을 정확히 맞췄다.

그 사이에 중력을 받으며 은밀하게 떨어지던 카르세리안 레이소가 괴수의 몸을 또 한 번 갈랐다.

하지만 저 속도라면 칼이 땅속에 묻힐 수도 있다.

그 걱정을 비웃든 소년은 여자친구를 가볍게 받아내고는 추락한 괴수의 목과 3개의 심장을 동시에 베어냈다.

그걸로 전투는 끝났다.

시간으로 따지면 5분이 채 안 걸린 것 같다.

“은비야. 눈을 떠도 돼.”

“네….”

소녀의 눈에는 뒤집히고 불타는 차량이 각각 한 대씩 보였다. 토막 난 사람의 시신은 수풀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았다.

아이의 정서를 위해 나름 신경 쓴 경관이다.

“계약자는 저 안에 있나.”

유일하게 멀쩡한 차량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문짝을 도려내니 뒷좌석에 바짝 엎드려서 오들오들 떠는 여자가 있었다.

검은색 머리카락, 백인 피부를 가진 혼혈이었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저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에요!”

“억양으로 봐서는 러시아인가.”

“예…?”

“확인 감사.”

“잠깐만요!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죽기 싫으면 조용. 허벅지에 감춘 권총은 당장 버리라고 충고하겠어. 셋, 둘-. 좋아. 눈치가 빠른 착한 아가씨네.”

암살자로 한국인을 고용하는 건 쉽지만, 계약자는 아니다.

본부의 영향력이 약한 부산 출신의 계약자일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지만, 그 ‘부산 출신’에 속하는 무일이 억양을 모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

외국의 이간질이다.

네 조국이 이렇게 섭섭하게 대우하니 이리와!

대충 이런 거다.

최근에 된통 당한 중국은 자객을 보낼 형편이 아니고, 일본이라면 이런 하책보다는 ‘유키 짱’의 미인계를 택할 것이다.

간단한 소거법으로 남은 이웃이 러시아였다.

“선배님. 이 아가씨를 체포하면 됩니까?”

수갑을 들고 털래털래 걸어온 문세웅이 말했다.

품에서 안 떨어지려는 최은비를 그대로 안은 채 무일이 말했다.

“아직 10분이 안 됐는데 빨리 왔네.”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선배님의 활약상을 조금이라도 보려고 일찍 돌아왔는데 이미 끝나있지 뭡니까.”

“살인은 아무리 정당해도 활약이 아니야.”

“그건 알지만요. 선배님은 자신에게 너무 엄격하십니다.”

이 순간, 문세웅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어린 최은비의 머릿속에서 그의 평판과 호감도가 곤두박질쳤다는 사실을.

사냥꾼다운 말 한마디로 ‘살인을 즐기는 오빠’로 전락했다.

여기서도 적용되는 ‘누군가의 불행은 나의 행복’ 법칙!

최은비는 무일의 밋밋한(!)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평온한 미소를 지었다.

“어리광이 심한데…. 내일부터 학교 가야 하는데 이래서는….

“선배님을 잘 따르네요.”

“내가 육아는 몰라도 아이 보기는 잘해. 타고났다고 해야 하나? 다섯 살 때부터 동생들 기저귀를 갈며 실력을 쌓았지.”

“헤에~.”

문세웅은 헌병대 교본대로 여자의 몸에 탈출도구나 추적장치가 있는지 꼼꼼히 몸수색했다.

팬티 속에서 수상한 날붙이, 더 안쪽에서 초소형 발신기….

그게 단순한 몸수색 이상의 사심이 섞인 것처럼 비치며, 미청년은 소녀에게 경계의 눈빛을 받고야 말았다.

앞으로 친해질 가망은 없어 보였다.

낙담한 문세웅은 수갑을 또 하나 꺼내서 원인제공자의 발에도 채웠다. 그리고는 트렁크에 욱여넣는 걸로 화풀이를 마무리했다.

멋진 차도 태워주고, 무거운 짐도 들어주고, 맛있는 반찬도 나눠주고….

노력할 때마다 역효과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세웅.”

“네, 선배님.”

“2급 사냥꾼이 되고 싶다면 타인의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노력해봐.”

“그거 [예측]의 수련법이잖습니까. 매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정말로?”

“어…. 그럴걸요.”

자신감이 급속도로 사라졌다.

이 남자 앞에서 [예측]을 논한다는 건 우습다.

“너는 [예측]의 1단계인 정보수집부터 잘못하고 있어. 최은비, 이 아이가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자랐는지 생각해봤어?”

“그야…. 아! 이런!”

문세웅은 무일의 가슴에 몸을 기댄 채 잠든 소녀를 힐끔 보며 깨달음의 탄성을 터트렸다.

여태 ‘불쌍한 소녀’라고만 생각하며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었다.

퍼즐을 맞춰가는 것처럼 오늘 하루 동안 저지른 실수들이 하나둘 떠오를 때마다 미청년의 표정은 와락 구겨졌다.

몸을 노리고 접근하는 오빠…?

딱 그 짝이었다.

하지만 낙담하고만 있지 않았다. 이건 ‘사람’에게 저지른 실수인 까닭이다. 상대가 ‘괴수’만 아니면 반성하고 만회할 기회는 얼마든지 온다.

“내일부터 은비의 등하교를 부탁한다.”

“맡겨주십시오!”

“친해지는 데 성공한다면 2급 진급시험을 봐도 될 거야. 목표물 말살이 주요 관심사인 괴수보다 복잡하고 섬세한 아이의 마음이니.”

무일은 노력도 했지만 일단 타고났었다.

매년 두셋씩 불어나는 동생들을 돌보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그걸 해냈다.

문세웅에게 했던 말처럼 ‘타인의 생각과 사정’을 [예측]하는 건, 카르 4세에게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과정이다.

완벽하게 읽는 데 실패했던 적이 있다면?

그건 선지혜뿐이다.

“험난하겠는데요.”

“쉬웠으면 아무나 2급 사냥꾼이 됐겠지.”

기본적인 육체훈련과 시험을 통과하고 MID 시스템을 적용한 자에게는 누구나 ‘1급 사냥꾼’이란 자격이 붙는다.

하지만 2급부터는 다르다.

배우고 습득한 이론을 실천할 수 있어야만 오를 수 있는 등급이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오냐.”

뒷수습은 문세웅과 헌병대에 맡긴 무일은, 곤히 잠든 최은비를 등에 업고 짐을 양손에 든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5초쯤 생각했다.

어째서 7종 계약자 윤소영이 침대 위에서 교복 차림으로 자고 있을까, 하고.

깨우기도 뭐해서 최은비만 옆에 조심스럽게 눕히는 걸로 타협했다.

“우웅…. 오빠….”

“엄마….”

두 소녀가 잠꼬대하며 서로를 부둥켜안는다.

최은비는 낯선 언니의 풍만한 가슴에 얼굴을 묻고 행복한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반대로 윤소영은 가위에 눌린 것처럼 옴짝달싹 못 한 채 밤새 끙끙거렸다.

아침에 벌어진 소동을 생략하도록 하겠다.

공용식당에서 전자레인지로 데운 호박죽을 한 그릇씩 비웠을 때쯤 문세웅이 최은비의 등교를 돕기 위해 찾아왔다.

후배가 7종 계약자를 발견하고 혼비백산한 일도 생략.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소란의 잔재가 스멀스멀 느껴지는 8평짜리 단칸방에서,

카르 4세는 자타가 공인한 ‘초절정 미소녀’에게 물었다.

“윤소영 양. 학교 안 가십니까?”

“슬슬 가야 하는데 오빠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요.”

“부탁…. 입니까.”

부탁이라고 읽고 명령으로 해석한다.

레드군 계약자가 입술을 벌리고 닫기를 반복하며 한참을 뜸들이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수줍게 말했다.

“오늘 하루만 제 남자친구가 돼주세요.”

< [17장-2] 그는 산마저 뛰어넘었다. > 끝

ⓒ 파르나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