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69화 (69/287)

< [17장-1] 그는 산마저 뛰어넘었다. >

파르나르 장편소설

괴수처럼 9

[17화] 그는 산마저 뛰어넘었다.

학명: 데빙걸(어떤 정령의 인형극장)

서식지: 시체, 무덤

특징: 시신이 벌떡 일어납니다.

위험도: 1종 특수

비고: 시신은 꼭 태웁시다☆

***

대한민국은 4차 세계대전에서 처절하게 패하고 중국의 합병시도로 인하여 도시라고 부를 곳이 별로 남지 않았다.

서울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인구밀도가 높았던 탓에 가장 먼저 파괴된 대한민국 수도는, 지방의 건물, 자원, 인간 등을 닥치는 대로 쓸어모아서 복구한 것뿐이다.

그렇다고 서울만 있는 건 아니다.

인천, 부산.

외국이랑 MID 군수품 같은 최소한의 물자만 쾌속선으로 교역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재건한 항구도시다.

인천은 주로 영국, 독일, 이집트가 주요 거래국이지만 거리 탓에 소극적인 편이고, 부산은 브라헨티나, 미국을 활발하게 오가고 있다.

파주, 개성은 인구포화현상을 줄이기 위해 정말 최근에 생긴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도망친 아들 녀석을 이렇게 볼 줄 몰랐는데.”

평양에서 치러진 ‘한중전’을 TV로 본 사내가 중얼거렸다.

벌써 15년이나 흘렀음에도 아들이라고 기억할 수 있었던 건, 가출했을 때하고 전혀 달라지지 않은 외모 때문이다.

카르 4세.

이것만으로는 알 수 없었지만, 본명을 조사하고서 확신할 수 있었다. 15살 성인식을 치르자마자 호적을 파고 ‘성’마저 바꿨지만 ‘이름’은 그대로였다.

한무일.

완전히 잊고 살았던 아들의 새 이름이다.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으로 모자라 ‘성’마저 따라갔다는 건 무슨 의도일까?

“오랜만에 아들은 본 소감이 어떻소?”

“...없사옵니다.”

남자의 좌우에 공손히 앉아있는 아홉 미희(美姬) 중 하나가 대답했다. 그의 등에 바짝 달라붙어서 어깨를 주무르는 여인보다는 못했지만, 흔한 미색은 아니었다.

2종 계약자였으니 당연하다.

그녀의 수호자를 제거하고 전리품으로 그 자리에서 범했다.

서울에서는 있을 수 없는 만행이지만, 이곳은 인천이랑 달리 서울의 영향력이 거의 미치지 않는 부산이다.

약한 계약자는 일찌감치 솎아내서 ‘출산용’으로 써도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다.

“그래, 그렇겠지.”

“......”

진즉 너덜너덜해진 몸과 마음으로 임신 중인 첩(妾)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입장에서는 별 감흥 없을 것이다. ‘한무일’은 여태까지 그녀가 낳은 16명의 자식 중 하나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건 남자도 마찬가지.

가출한 ‘아들’에게는 관심 없다. 장래가 기대되는 ‘딸’이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분명 그랬는데 관심이 많이 생겼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묻겠는데, 어떻게 2종 괴수와 계약했는지 아시오? 조짐 같은 게 있었는지 묻는 것이오.”

“없었사옵니다.”

기대는 안 했지만 역시나.

낳자마자 산후조리를 겸해서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금방 또 임신했으니 말이다. 뱃속까지 포함해서 모자(母子)가 함께한 시간은 2년이 채 안 될 것이다.

차라리 유모에게 묻는 편이 더 낫다.

그런 사정은 알지만, 뒤틀린 웃음을 지은 남자는 말했다.

“당신은 애 낳는 것 빼고는 쓸모가 없구려.”

“송구하옵니다.”

여인은 거동이 힘든 몸을 움직여 사죄를 청했다.

이런 모멸감에 흔들리기에는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고 마음은 무뎌졌다. 괜한 객기로 대들었다가 유산(遺産)되는 것보다 낫다.

스물.

자식을 20명 낳아주면 자유의 몸으로 풀어주겠다고 했다.

다른 건 몰라도 부산에서 이러한 약속은 철저하게 지켜진다. 낳다가 미쳐버릴 것 같은 50명을 제시할지언정 일단 정해진 약속은 꼼수 없이 절대적이다.

“후천적인 능력이란 건데….”

남자의 눈에 탐욕이 깃들었다.

반대로 여자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집 떠난 아들을 불러들여 순순히 입을 열게 할 방법은 ‘미련’이라고 할 수 있는 어미로 협박하는 것밖에 생각나는 게 없는 탓이다.

하지만 남자는 그런 극단적인 수단을 깔끔히 포기했다.

그도 ‘프로사냥꾼’인 탓이다.

인질극이 벌어지면 구출보다 복수하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아버지’라고 해서 사정 봐줄 아들놈이 아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는 노릇이다.

3급 사냥꾼에서 정체된 세월만 40년이다. 키워준 은혜도 모르고 독립하겠다는 아들 같은 걸로 집안을 유지하는 것도 지겹다.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다.

(...쓰레기 아빠가 무슨 일이시죠.)

(한국에서 가장 예쁜 공주님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했지요!)

딸에게 폭언을 들었지만, 남자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5종 계약자가 된 딸이 있었던 덕분에, 그는 부산에서 나름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문의 말석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사냥꾼임에도 착취하는 강자가 됐다.

아내가 많아진 것도 ‘5종 딸’ 덕분이다.

그가 집에서 ‘왕(王)’ 행세를 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다. 하지만 오만하거나 어리석진 않다. 지금의 권세가 누구에게서 비롯된 건지는 잘 알고 처신한다.

(용건은?)

길게 통화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여실히 드러나는 말투였다.

남자는 유리잔 다루듯 조심스럽게, 상냥하게 말했다.

(서울에서 오빠가 출세한 모양인데 만나보고 싶지 않나요?)

(전혀.)

(그, 그런가요!)

(지금도 오빠란 새끼들이 너무 많아서 확 줄여버리고 싶은데 왜 만나.)

(그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번 오빠는 특별하니 참아줘요, 나의 사랑스러운 공주님!)

(특별? 쓰레기 아빠처럼 시궁창 암살자인가 보죠?)

이 남자가 평범한 사냥꾼이라면 이렇게 싫어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내? 많을 수도 있다. 열 명이면 부산에서는 평균이다.

하지만 그는 암살자였다.

경쟁가문의 계약자에게 은밀히 접근하고 ‘성형으로 취급하는 약’을 몸에 주사해서 수호자의 폭주를 유도하는 악질이다.

당연히 물증은 없고 심증뿐이다.

그녀의 모친도 그 피해자.

부산에서도 인정하는 3종 계약자가 몰락한 건 순식간이었다.

(아니요. 조금 많이 특별한 사냥꾼이지요!)

(특별한 사냥꾼? 서울에?)

(네.)

(...카르 4세가 내 오빠다. 뭐,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쓰레기 아빠.)

(맞았어요! 정답이에요! 서희가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머리도 똑똑해서 이 아빠는 너무나 자랑스러워요!)

남자의 아부는 끊이지 않았다.

아내들에게 이 사랑의 1%만 실천해도 화목한 가정이 됐을 것이다.

5종 계약자 ‘금서희’가 ‘쓰레기 아빠’란 인간을 조금씩 돕는 것도 순전히 부산에서 통용되는 ‘약속’ 때문이다.

이런 ‘약속’이 생겨난 원인은 한국 괴수대응본부의 힘이 부산까지 미치지 않은 탓이 컸다.

일단 멀다.

외국처럼 힘을 분산시켜도 좋으련만, 한국의 인구가 서울에만 치중(98%)되어 있고 정치인들도 자신들의 안보만 생각해서 진전이 없다.

부산에 파견된 본부 계약자는 6종 계약자 딸랑 한 명뿐.

6종 수호자도 아쉬운 나라가 수두룩하지만, 서울에 밀집된 힘을 고려하면 얼마나 무책임한 인선(人選)인지 알 만하다.

(연락처와 집 주소는?)

금서희는 살짝 호기심이 동했다.

추악한 쓰레기 밑에서 우수한 종자가 태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할까.

온종일 가상현실게임 속에서 사는 통에 현실을 ‘거의’ 외면한 한국에서는 여전히 ‘카르 4세’가 누군지도 모르는 형편이다.

무관심을 넘어 깔보고 시샘하는 수준!

가상현실게임을 못하면 동류로 취급 안 한다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이건 ‘서울’ 얘기.

똑같은 한국땅인가 싶을 정도로 ‘부산’은 ‘현실’을 중시한다.

『카르 4세』

이 이름을 모르면 부산 사람이 아니다.

서울에서는 ‘한중전’ 시청률이 0.01%도 안 됐지만, 부산에서는 99.9%였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으며 승리했을 때는 열광의 도가니였다.

카르 4세를 무시하는 땅은 이 세상에 ‘서울’뿐일 것이다.

(그것이….)

(몰라?)

(하, 하, 하….)

땀을 삐질삐질 흘릴 것 같은 웃음으로 어물쩍 넘어가려 한다.

본부에서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뜻이리라.

하기야 이런 ‘기여도 -1 사냥꾼’에게 타인의 개인정보를 가르쳐줄 리 없다. 호적마저 팠다면 연결고리도 없다.

5종 계약자 금서희는 생각했다.

일단, 그녀는 괴수대응본부 소속이 아니다. 강제소집령이라도 떨어지면 부산에 계속 머물 수 없는 탓이다.

부산의 치안은 열약하다.

힘없는 남자와 못생긴 여자는 착취당하고 고통받는 구조다.

‘달라질 수 있을까?’

금서희는 태어나서 처음 봤다.

부산 사람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환호하는 광경을 말이다.

가상현실에 빠져들 시간이 없는 그들에게 현실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고, 한국에 ‘위대한 사냥꾼’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기뻐하며 자랑스러워했다.

그 ‘카르 4세’가 부산에 없더라도.

하지만 고향이 부산이라면….

(설득해보도록 하죠.)

(오오!)

(...하지만 제가 없는 사이에 어머니가 잘못되면 서둘러 자살하세요, 쓰레기 아빠.)

(잘 돌봐줄 테니 부탁합니다, 공주님!)

(이만.)

금서희는 부산에서 가장 높은 건물에 있다.

그래 봐야 8층.

볼트윙 같은 괴수에 대항할 방법이 전혀 없는 부산에서 고층건물은 자살행위니 당연하다.

얼마 전에 TV에서 보았던 ‘강남구’보다 낙후된 도시.

서울에서 가장 보잘것없다는 지역보다도 난잡하고 문란하다.

‘배가 다른 오빠란 말이죠?’

스마트폰으로 동영상 하나를 재생했다. 카르 4세가 ‘저열한 중국인 여자’를 쓰러트리고 가더발트와 계약하는 장면까지 쭉 진행됐다.

부산에서는 500만 원에 거래되는 귀한 자료다. 법적인 제재 때문에 외국에서도 재방송이 없다는 청천벽력 같은 얘기가 들린 후부터 동영상 가격이 폭등했다.

부산에서는 제목을 붙였다.

『전설의 탄생』

점점 흔해지면서 가격은 빠르게 하락하고 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면 언제가 또 올라갈 것이다.

특히, 카르 4세가 정말로 ‘전설’이 된다면 말이다.

연락처와 집 주소를 알 수 없다는 게 살짝 유감이지만, 금서희는 걱정하지 않았다.

그 정도로 유명한 남자라면 서울에서도 금방 눈에 띌 것이다.

“가볼까.”

서울로.

5종 계약자 금서희는 몰랐다.

서울은 부산이랑 언어 빼고 모든 게 다르다는 사실을.

본부의 도움 없이 서울에서 카르 4세를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만큼이나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말이다.

“에취!”

무일은 크게 재채기했다.

문세웅이 돈가스를 시키는 바람에 알레르기 비슷한 현상이 발생했다고 생각했다.

“조심하십시오, 선배님. 은비 양에게 감기 옮습니다.”

“걱정하지 마. 의무대에서 종합예방주사를 접종할 예정이거든. 그리고 감기 아니야. 겨우 재채기 한 번으로 병자 취급하지 마라.”

“이제 어디로 가면 됩니까?”

신뢰의 선물로 교장과 교감을 평정하고 무난하게 입학심사를 마쳤다. 그리고 당장 내일부터 필요한 학용품 구매도 끝냈다.

그뿐만이 아니다.

칫솔, 이부자리, 교복, 속옷, 생리대 등도 어찌어찌 해결했다.

너무 무성의하게 고른 것 같지만, 여자친구를 사귀어본 적 있다는 문세웅이 아니었다면 생리대는 아예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인적이 드문 공원으로 갔으면 하는데.”

“...그거입니까.”

“그래.”

“헌병대장 집이 낫지 않을까요?”

“나는 괜찮지만, 집이 괜찮지 않을 거야.”

“그럼 괜찮은 거 아닙니까.”

“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시는 집이다만.”

“그런 모양입니다.”

서울 시내에는 인적이 드문 공원이란 게 없다. 크기도 매우 작고.

외곽고속도로에서 중부고속도로로 넘어온 후에 10분쯤 전속력으로 도시를 벗어난 문세웅은 나브랑모스 레비터를 갓길에 세웠다.

공원은 아니지만, 사람이 없으니 충분하다.

“세웅.”

“네.”

“나는 여기서 홀로 산책 좀 하고 있을 테니 20분쯤 뒤에 유턴해서 돌아와라.”

“20분이면 됩니까?”

“더 짧게 걸릴 것 같지만, 혹시 모르니.”

“알겠습니다.”

< [17장-1] 그는 산마저 뛰어넘었다.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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