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68화 (68/287)

< [16장-4] 진실은 점점 산으로. >

‘사설 카메라로 대놓고 보는 건가.’

계약자가 자주 쓰는 화장실, 목욕탕을 제외하고 공공시설 안에는 사각지대가 없다시피 한 서울이다.

...라고 말하면 과장이 심하지만, 백화점만큼은 진실이다.

물자가 귀한 시대다.

소매치기, 사재기 등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서라면 감시카메라 한두 대쯤은 다른 각도로 더 설치해도 절대 낭비가 아닌 까닭이다.

“와아…. 이게 다 먹을 거….”

최은비는 식품코너에 완전히 매료됐다.

보통은 저 나이 때에, 교묘하게 ‘순결’을 강조한 인성프로그램이 들어있는 ‘가상소꿉놀이’를 하거나 일찍 ‘가상현실게임 주니어’에 입문한다.

즉, 게임기를 파는 가전제품코너에 시선을 뺏겨야 정상이다.

“...선배님.”

“괜찮아. 그냥 감시하는 것뿐이니.”

차에서는 손이 닿지 않는 에어컨, 스피커 안에 ‘모짜리나 바글버글’이 숨어있어서 알면서도 놔뒀었다.

도청을 차단한다고 멀쩡한 고급 스포츠카를 분해하면 아깝고 귀찮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의 심리라는 게, 엿듣지 못하게 하면 ‘지금부터 중요한 얘기를 하려 하나?!’라고 어림짐작하며 더욱 노골적이고 위험한 방법을 택하게 되어 있다.

무일이 집안에 서식하는 감시카메라를 놔두는 이유다.

그보다는….

‘인간이 아닌 자들이 있군.’

어떻게 알 수 있었는지는 모른다.

평양에서 하룻밤 보내고부터 몸이 예전이랑 많이 달라졌다. 부정적이라고 묻는다면 상당히 긍정적이라서 많이 놀라는 중이다.

근력 손실이 사라졌다.

매일 관리해주지 않으면 안 됐던 근력이 고정(固定)됐다. 그렇다고 발전이 있는 건 아니지만, 시간을 대폭 절약할 수 있게 됐다.

지치지 않는다.

늘 아쉽고 부족하던 체력으로 고생하지 않게 됐고 공복감도 아직 느껴보지 못했다. 정해진 식사시간에 그냥 먹는 느낌이었다.

오감이 더 예민해졌다.

어차피 [예감] 의존도가 높아서 그 변화는 별로 못 느끼지만, 보고 듣고 느낀다는 행위로 취합한 [예측]이 극대화됐다.

그래서 알 수 있었다.

괴수들이 이 백화점 안을 태연하게 서성이고 있다!

“은비 양이 이것저것 쓸어담는데 괜찮겠습니까?”

“금전감각부터 가르쳐줘야 하나.”

“손놀림이 예사롭지 않네요. 망설임이나 군더더기 없이 물건 담는 솜씨가 저희 어머니보다 낫습니다. 아니, 웬만한 수렵꾼보다 뛰어날지도.”

“야생소녀였으니까.”

“타잔의 여성판?”

“그보다 더 힘들었겠지.”

최은비 뒤를 쫓으며 문세웅과 대화하는 카르 4세. 그의 눈은 예리하게 빛나고 있었다.

평범한 시민처럼 물건을 고르는 젊은 남녀들.

이전 같으면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미세한 움직임 차이로 ‘평범한 시민’이 아님을 [예측]할 수 있었다.

서민을 깔보는 상류층의 불손한 언행?

아니다. 이건 ‘목장 주인’의 여유다.

여태 위협으로 간주 안 돼서 [예감]이 놓친 부분.

솔직히 말하면 살짝 충격이었다.

‘뱀페스트…. 흡혈귀는 그렇다 쳐도 시체인 데빙걸…?’

백화점 지하 1층부터 지상 12층까지 둘러보는 동안 ‘7마리’나 봤다.

이게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서울에 있는 백화점 개수와 시간대별로 들락날락한 모든 괴수 머릿수를 곱하면 무시무시한 양이란 계산이 나온다.

잠입과 은신이 너무 뛰어나서 그가 여전히 못 찾았거나 백화점을 안 온 괴수까지 고려하면 상상하기도 싫다.

착각?

절대로 아니다.

잘못 봤다면 무덤에 들어갈 때가 됐다는 뜻이리라.

“아저씨! 이거 호박죽 맞죠?”

“그렇긴 한데…. 호박죽만 너무 많이 담은 거 아니니.”

먹고 싶은 걸 마음껏 골라보라고 하긴 했다. 하지만 일단 골고루 먹어보고 다음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걸 추가로 구매하는 편이 현명하다.

그런데 호박죽을 왕창 담았다.

1인분 가공식품으로, 전자레인지에 20초 데워 먹는 즉석요리였다.

호박죽을 사재기해봐야 아무런 득도 없다고 판단했는지 곳곳에 배치된 감시원들은 멀리서 훈훈하게 웃을 뿐이었다.

“잊을 수가 없어서요.”

“...그러니. 하지만 매일 먹으면 질려버려. 잠깐. 풀죽만 2달 동안 먹어도 안 질렸었다고 투덜댈 생각이라면 안 돼.”

“어, 어떻게 아셨어요?!”

“어른을 얕보지 마. 어렸던 시절이 있어.”

짐꾼이 된 문세웅이 옆에서 ‘어른이 아니라 감인데.’라고 중얼거렸지만, 옆구리를 팔꿈치로 응징당한 그는 입을 다물었다.

맛을 따질 겨를이 없을 때는 질리지 않는다.

무일은 합숙훈련 내내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는데, 음식은 영양분만 공급받을 수 있으면 그만이란 식이었다.

하지만 여유가 생기면 아니다. 이것저것 따지게 된다.

요리, 맛, 신선도, 상표….

최은비는 아쉬움을 달래며 호박죽 절반을 제자리에 돌려놨다. 그러고도 많았지만, 공허한 충고보다 직접 체험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목숨이 걸린 문제도 아니고 돈이 없는 것도 아닌 까닭이다.

“선배님. 여기서 점심을 해결하는 게 어떻습니까.”

“흠. 그게 좋겠네.”

수도권 식당은 솔직히 맛집이라고 할 곳이 별로 없다. 맛깔나는 음식으로 돈 좀 벌었다 싶으면 열의 아홉은 ‘안전한 도심’으로 식당을 휙 옮겨버리기 때문이다.

여기가 같은 서울인가 싶을 정도로 가격은 약 3배 차이. 그 대부분이 자릿세다.

이전 같으면 메뉴판만 봐도 손이 덜덜 떨렸지만!

“어린이 정식, 돈가스 덮밥, 칼국수, 치킨 샐러드.”

어깨 펴고 당당히 보조요리를 주문할 수 있었다.

1분도 안 돼서 국적을 알 수 없는 조합의 요리들이 줄줄이 식탁에 쭉 차려졌다.

기다리지 않고 맛을 음미해보려 할 때였다.

밥맛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실례지만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그들이 앉은 4인용 식탁(최은비는 ‘세웅 오빠’를 버리고 아저씨 옆에 앉았다.)에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불청객.

우연인지 모르지만, 무일과 마주앉는 자리였다.

교본처럼 단정한 흑백(黑白) 배합의 펭귄 같은 정장 차림만 봐도 ‘누군가의 하수인’이란 느낌이 풀풀 났다.

하지만 나이는 20대 중반, 그 눈빛이나 태도는 선량했다.

인간 중에서 카르 4세의 감을 피해가려면 최소한 같은 프로사냥꾼으로 맞상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연기는 절대 아니다.

경계를 허물 의도였다면 반쯤 성공한 셈이다.

프로사냥꾼은 칼국수를 조금씩 베어먹으며 말했다.

“정부? 방송국인가? 뭐가 됐든 광대놀이는 할 생각이 없다고 전하시면 됩니다. 그래도 계약하고 싶다면 시급 1억부터, 하루에 내줄 수 있는 시간은 3시간 미만.”

“1억…?”

월급, 주급, 일급도 아니고 ‘시급’이 1억이란다.

프로사냥꾼의 경계를 풀 의도로 허술한 샐러리맨을 동원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연륜이나 경험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도 상대해줬다.

카르 4세는 남자의 때굴때굴 굴러가는 눈만 보고도 무슨 생각 중인지 어림짐작할 수 있었던 탓이다.

여기에 후각과 청각이 더해졌다.

[예측]한다.

“그래도 계약서쯤은 읽어보도록 하지요. 밤마다 한창 열애(熱愛)하는 신혼부부를 벌써 파멸시키는 건 찜찜하니.”

“가, 감사합니다!”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얼굴로 안도한다.

순수한 샐러리맨은 이래서 상대하기 꺼려진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뿐이고 ‘양심’의 가책이 될 만큼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면발을 신기하다는 듯이 빤히 쳐다보는 최은비에게 반쯤 남은 칼국수를 넘겨줬다. 애를 돌본다기보다는 애완동물을 키우는 느낌이다.

활짝 웃으며 후루룩 먹는 소녀.

문세웅이 훈훈한(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돈가스 몇 조각을 그녀에게 넘겨줬지만,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불쌍한 후배 같으니.

최은비의 머릿속에 ‘우리 착한 희망이~, 오빠가 맛있는 거 줄게. 따라오렴~.’이라고 말하던 사내들이 떠올랐을 게 분명하다.

짐을 들어준 점수를 홀라당 날려 먹었다.

‘어디 보자….’

서울방송에서 ‘버라이어티 서바이벌’ 프로그램 계약서였다. 이전에는 ‘호위’만 해달라고 했었는데 이번에는 ‘출연’도 포함되어 있다.

염소 젖을 파는 것보다 돈이 안 되고 위험하다는 이유를 붙여 거절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는 염소 젖을 짜는 것보다는 많이 챙겨주지만, 상황이 많이 다르다.

게다가 출연?

능력노출이 나쁜 건 아니지만, 당장 내일부터 천천히 알려질 것이다. 사냥뿐만 아니라 의무대에서 신체검사도 있고 하니 말이다.

무엇보다도, 같은 시간에 수도권을 순찰하며 위험한 괴수를 처리하는 편이 더 보람 있다.

시간당 1억?

솔직히 이것도 부족하다.

카르 4세가 괴수를 저지해서 지키는 재산이 1억을 가볍게 넘는다. 초토화를 미덕으로 삼는 수호자보다 깔끔하다고 자신한다.

“호위는 불쌍한 이웃 구한다는 샘치고 2천. 규모가 크면 당연히 가격도 껑충. 그리고 출연료는 최소 1억부터 내용에 따라서 3억까지. 당연히 시급(時給)으로. 이해하셨나요?”

“물론입니다!”

“뭐…. 이미 다 도청하고 있으니 전할 건 없을 겁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계약서를 챙겨서 후다닥 떠난다.

헌병대장도 쉽게 만져볼 수 없는 액수가 나온 탓일까? 제발 돈가스를 먹어달라고 최은비에게 부탁하던 문세웅이 말했다.

“슈퍼용사가 아니라 슈퍼스타가 됐나 봅니다.”

“괴수와 계약한 최초의 남자. 이런 타이틀이 있으니 당연하겠지.”

“아하! 그렇게 생각하니 적게 부르신 것 같네요.”

“...치안담당인 변변찮은 사냥꾼에게 저들이 뭘 기대하는지 모르겠지만, 부르는 액수로 봐선 인질극 같은 건 없을 것 같다.”

가더발트와 정말로 계약한 건 아니지만, 겉보기에는 ‘최초’일 것이다.

백화점에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너무 무관심하다.

알아봐 줬으면 했던 건 아니지만….

“저들이 얼마 불렀는데요?”

“출연료, 보너스 합쳐서 시간당 3백.”

“쿨럭!

위험수당으로 돈을 긁어모으는 사냥꾼도 시간당 3백은 못 번다.

게다가 사용하는 장비의 유지비, 보수비, 소모비용 등을 따지면 역으로 적자나 허탕인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카르 4세는 그런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아무리 변변찮아도 3종 계약자와 수호자보다 호위 측면에서 훨씬 안전하다. 그럼 거기에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 정상 아닌가.

하지만 이건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특수성 때문이다.

『가상현실게임 선진국』

국민들이 힘겨운 현실보다 아름다운 가상현실을 중시한다.

온종일 게임 속에만 사는데 현실의 경제, 사회를 알겠는가? 그 무관심의 결과로 괴수의 위협에 특히 무뎌진다.

고대인이거나 근접한 세대는 그나마 낫다. 하지만 젊은 세대는 ‘밥만 먹고 게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다른 나라도 요즘 세대는 비슷비슷하다.

하지만 정부가 한 번 쫄딱 붕괴하고 국민이 무방비하게 학살당했던 대한민국은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고대인 비율이 매우 낮다.

그런 복합적인 원인이 이거다.

뛰어난 사냥꾼과 계약자가 있으면 칭찬할 줄 알아야 하는데 한국인들은 ‘가상현실에서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녀석들’이란 식으로 깔본다.

하지만 이건 달리 도리가 없다.

사냥꾼과 계약자는 현실에 충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일처럼 가상현실게임을 아예 안 하는 사람은 드물지만 잘하는 사람도 없다.

그런 이유로 깔보고 무시하지만, 현실에서 마주치면 내색하지 않는다.

『게임 폐인』

현실에 충실한 사람은 가까이서 보면 빛이 난다고 한다. 그 상대적 박탈감 때문에 국민들은 계약자와 사냥꾼을 멀리하게 되고 현실도 더욱 기피(忌避)하게 된다.

그런 악순환.

와이츠가 고안한 ‘현실파 쥐어짜기’ 경제체계 덕분에 현실에서 4시간쯤 일하면 사는 데 지장 없게 되면서 더욱 가속화됐다.

현실파 쥐어짜기?

간단하다. 현실에 충실한 사람들을 세금 등으로 쥐어짜서 불우한(?) 게임 폐인들을 돕는다는 경제개념이다.

털 없는 원숭이들을 평화적으로 침묵시킨 놀라운 정치 수완!

하지만 와이츠가 떠난 현재, 이 ‘현실파 쥐어짜기’ 경제체계는 단점뿐이 안 남았다.

그 현실기피현상이 한국을 좀먹고 있다.

“접촉해온다면 외국에서겠군.”

“저 외국인처럼요?”

“그래.”

아직은 거리가 멀지만, 천천히 접근해오고 있었다.

마주치지 않는 편이 좋다고 판단한 무일과 문세웅은 최은비의 손을 잡고 살짝 빠른 걸음으로 백화점을 빠져나갔다.

이제 갈 곳은 학교다.

최은비가 사회에 빨리 적응하려면 학교는 필수다. 무일 본인이 검정고시로 전부 패스해놓고 그런 말을 하면 어폐가 있지만, 초등학교 3년은 정상적으로 다녔다.

어차피 초등학교, 중학교는 의무교육이라서 반드시 다녀야 하고 말이다. 출석, 성적이 나쁘면 가차 없이 유급이라 나이는 딱히 중요하지 않지만.

“선배님. 어느 학교로 모시면 됩니까?”

“흠. 개성시로 이사 가기 전에 잠깐 다닐 예정이지만, 뭐든지 처음이 중요한 법이지. 은비에게 가장 시급한 건 여성스러움.”

“아가씨 학교?”

“그래야지.”

“조건이 까다로울 것 같은데요. 그리고 호적신고는 하셨습니까?”

“음? 어…. 그건 생각도 못 했네.”

얼빠진 소리를 하는 카르 4세. 하지만 그건 신경이 분산된 탓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게 따라붙는 감시카메라, 첩보위성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 ‘모짜리나 바글버글’들이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싸울 때는 말문이 막혔다.

초소형 우주전쟁이 따로 없군.

카르 4세는 당분간 심심하지 않을 것 같다고 자조했다.

< [16장-4] 진실은 점점 산으로.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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