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장-3] 진실은 점점 산으로. >
(조금 비싸긴 했지만, 자네의 우승상금을 보태고 특공대장이 어떻게 알고 도와주면서 꽤 많은 땅을 확보할 수 있었지!)
(특공대장….)
그 단어를 듣고부터 불안해지던 참이다.
조용했던 [예감]도 살짝 빨간불이 들어오려 한다.
(그러니 싸구려 선물은 잊고 앞으로도 내 아들을 잘 부탁하네. 스포츠카? 그거 관리하기가 얼마나 귀찮은 줄 아는가.)
(으으…….)
개성시의 그 ‘노른자 땅’보다는 안 귀찮을 것 같은데….
가보지 않고도 음모의 냄새가 느껴졌다.
선지혜와 공동명의로 되어있다면 마음대로 팔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재산을 포기하자니 그 액수가 너무 크고 아까워서 그럴 수도 없다.
외통수!
남의 우승상금으로 이런 악랄한 짓을….
하지만 어제 치러진 ‘한중전(韓中戰)’의 최대 후원자가 선지혜를 총수로 둔 ‘I♥Seoul 그룹(ILS 그룹)’이기 때문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헌병대장이 이어 말했다.
참고로, 아들 자랑을 30분째 하고 있다.
(세웅이가 내 아들이라서가 아니라 정말 운전을 잘하지.)
(그건 인정합니다.)
(오! 역시 자네도 사람 볼 줄 아는구먼. 아! 그래. 딸이 생겼다지? 앞으로 학교도 다니게 될 텐데 통학문제도 생각해야 하지 않나. 공사다망한 자네가 복잡한 서울 시내까지 매일 바래다줄 순 없지. 엄청난 인력낭비야.)
(그…. 그렇습니다.)
전에는 이렇게 말을 잘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들이 연관되면 백전노장이 되는 모양이다.
(최고급 스포츠카에 ‘초보운전’ 같은 걸 붙이면 얼마나 민망한지 아나? 괜히 체면 구기며 운전하지 말고 세웅이에게 맡기게.)
(통학이라….)
(그래. 그거만 해줘도 24시간 중의 2시간은 허비할 걸세. 잠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 빼면 안 그래도 짧은데 더 짧아지는 거지.)
카르 4세가 자기관리에 엄격하다는 것까지 조사한 모양이다.
계산기를 두들기듯 시간표를 암산해본 무일은,
(그렇다면 아드님께 신세 좀 지겠습니다.)
(하핫! 잘 생각했네!)
통화는 그걸로 끝났다.
설명서나 도움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전투기도 몰 수 있는 남자에게 ‘초보운전’ 운운하는 게 기가 막혔지만, 시간은 소중했다.
시한부 인생이라서 더욱 그렇다.
최은비는 무일이 이 단칸방으로 이사 온 후에 거의 손대지 않은 컴퓨터에서 어린이 교육프로그램을 시청 중이었다.
성장기라서 그런가?
겨우 이틀 만에 살이 좀 붙었다.
‘통학이라….’
하루라도 빨리 학교에 보내는 편이 좋았다. 앞으로 수백 년은 살 최은비에게 자신처럼 팍팍한 일정을 강요할 필요는 없지만.
아무리 오래 살더라도 젊은 시절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게다가 최은비는 이미 8년 넘게 무법지대에서 허비했다. 보호자로서 이를 간과한다면 양심이 용서하지 않으리라!
바로 문세웅을 호출했다.
“괜히 미안하네.”
“괜찮습니다, 선배님! 이름이 최은비라고 했지? 은비 양도 안녕.”
“안녕하세요, 잘생긴 오빠.”
“음? 하하! 고마워. 앞으로 세웅 오빠라고 불러줘!”
“네, 세웅 오빠.”
애가 벌써 외모지상주의에 빠지고 있었다.
하지만 최은비에게 ‘오빠’란 단어는 ‘호감을 품은 사내’가 아니란 걸 문세웅에게 가르쳐주진 않기로 했다.
입꼬리가 좌우로 쭈욱 올라가 있다.
최은비는 아직 ‘미색(美色)’이라고 부르기에는 여러모로 많이 부족했지만, 사냥꾼에게는 이 정도가 딱 좋았다.
계약자가 되기에는 조금 부족한 상태.
괴수만큼은 아니지만, MID 시스템으로 본능이 극도로 상승한 사냥꾼들은 심미안이나 취향도 괴수랑 비슷하다.
자연미인, 순결 등을 무의식적으로 따진다고 할까.
“빠른 교통편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아서 불렀어.”
“잘 생각하셨습니다. 가시죠, 선배님! 은비 양은 뒷좌석에.”
“네, 세웅 오빠.”
“하하! 어디로 모실까요?”
애가 웃음이 헤픈 남자를 싫어한다는 것만은 일러줘야 하지 않을까.
엄마와 자신에게 ‘친절했던 남자’치고 좋았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최은비에게 멋들어진(음흉한) 미소는 역효과다.
나중에 조용히 알려주기로 했다.
“일단은 백화점부터. 은비 옷이 없거든.”
“지금 옷은…. 네, 알겠습니다.”
더 물으려던 문세웅은 입을 다물었다.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부분임을 [예감]한 탓이다.
모든 나라가 다 그렇지만, 서울도 동네에서는 물건을 거의 구할 수 없다. 지하자원과 식량이 빠듯한 탓에 잉여가 있어선 안 되는 까닭이다.
특히 식량이 그렇다.
사재기하는 중간상인의 농간으로 멀쩡한 식량을 썩히거나 버리는 일이 생기면 살인사건보다 심각하게 취급한다.
걸리면?
굶어 죽을 때까지 지하감옥에서 끔찍한 고문형이다.
“우와….”
창문에 얼굴을 밀착한 최은비는 서울 번화가를 눈에 담기 바빴다.
여기저기 ‘볼트윙 헤딩’으로 무너진 빌딩들 때문에 딱히 멋지다고 할 순 없지만, 평양보다는 인구, 치안, 청결 등이 월등히 뛰어난 건 사실이다.
그런 소녀를 보며 문세웅이 선배에게 말했다.
“왠지 보기만 해도 제가 뿌듯하네요.”
“네가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지.”
어려운 이웃과 아이를 돕는다.
대가가 없음에도 그 사실만으로 자부심과 보람을 느낀다면, 그들을 지킨다는 사명의식으로 똘똘 뭉친 사냥꾼의 [예감]과 [예측]은 강해질 수밖에 없다.
종교?
한계가 있다.
막말로, 부처님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괴수를 대신 패대기쳐주지 않는 이상은 언제가 성장은 멈추게 되어있다. 그리고 권태기에 접어들면 역으로 하락한다.
무일은 아직 권태기가 없다.
태양이 뜨고 지는 걸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고마움을 느낄 수 없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날은 카르 4세의 눈에 흙이 들어가는 순간일 것이다.
“2급 시험을 한 번 볼까요?”
“그건 아직 멀었고.”
“큭. 선배님이 그렇다고 하시면 십중팔구 맞겠죠.”
“나를 너무 맹신해서 나쁠 건 없지.”
[예감]은 충분한데 [예측]이 모자란다.
문세웅이 ‘2급 사냥꾼’이 되려면 좀 더 경험과 지식을 더 쌓아야 한다. 이건 헌병대장이 아들을 안전한 곳으로만 빙글빙글 돌린 영향일 것이다.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빠른 성장을 바란다면 그만한 대가가 필요하다.
목숨을 담보로 한 ‘특공대 합숙훈련’ 같은.
“보통은 그 반대로 너무 믿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건 자신을 신뢰하지 못하는 사냥꾼이나 하는 실수고. 의심하면 지는 거야. 그리고 죽지. 그렇다고 해서 만용, 과신이랑 혼돈하면 안 돼. 그것도 죽거든.”
“...잘 죽네요.”
“잘 죽지. 괴수보다 훨씬 잘 죽지.”
카르 4세의 허리띠가 된 가더발트는 잠잠했다. 숙주가 구닥다리 ‘사제팬티(!)’를 입고 있는 걸 못마땅해 하는 것 같았지만.
무일은 ‘그 힘’이 필요할 때만 착용할 생각이다.
조몰락거리는 감각은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만드는 까닭이다. 역대 가더발트 계약자가 미쳐서 자살한 이유를 알 것 같다.
문세웅이 말했다.
“괴수 얘기하니까 생각난 건데 선배의 수호자는 어떻습니까?”
“얌전하네.”
“솔직히 말해서 좀 신기합니다. 괴상한 건가.”
“부러운 건 아니고?”
“선배님이 제 인간성을 떠보시면 실망입니다. 지금쯤 과학자들이 선배를 해부하려고 달려들 거로 상상했거든요.”
“힘들 걸.”
무일은 ‘그 힘’을 아직 써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박선영과 윤소영쯤 되지 않는다면 그를 해코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여기에 특수하고 성가신 능력을 쓰는 괴수가 더해지면 여전히 ‘변변찮은 사냥꾼’이지만.
제압은 무리다.
덤으로 카르 4세가 마음만 먹으면,
『어떤 계약자든 죽일 자신 있다.』
가더발트는 괴수다. 그리고 괴수의 가장 큰 강점은 ‘물리법칙 무시’에 있다.
다른 가더발트 계약자도 비슷한지 모르겠지만, 그는 헤라클레스, 헐크처럼 싸우는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면?
물수제비로 항공모함을 가라앉힐 수 있다.
그건 하늘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이렇게 조용한 걸까요?”
“흠. 아니. 갑작스러워서 준비할 시간이 필요한 거겠지.”
외국에서 보면 한국은 대단한 나라다. 하지만 무일이 보기에는 주변국들이 종합점수는 더 높다고 생각한다.
무려 8종 계약자인 미호 첸이 실각하고 힘마저 잃었음에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 중국의 저력만 봐도 할 수 있다.
한국은?
와이츠가 손을 놓자마자 정치경제가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무너져내리고 있다. 또 볼트윙이 서울을 방문한다면 ‘또’ 파괴될 것이다.
악순환의 반복인 것이다.
살기 갑갑해지면 국민은 물론이고 사회지도층까지도 자기중심적으로 변한다. 그러면 더욱 살기 힘들어진다.
정치인들이 그 고리를 끊고 솔선수범을 보여야 하는데 역으로 ‘혼자 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앞장서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한국은 현재 그 상태에 놓여 있다.
“...인질극일 확률이 높겠네요.”
“아니. 은비를 어디에 숨기든 나는 찾을 수 있어. 그리고 나는 인질범부터 배후의 친인척까지 몰살시킬 생각이고. 아! 애들은 제외.”
감시카메라로 똑똑히 듣기 바란다.
절대, 과장이나 허언이 아님을.
“선배님은 가끔 극단적이십시다.”
“아이들의 목숨으로 장난치는 어른과 그 혈통은 인류에 불필요하다는 게 내 철학이야.”
“어른은 납치돼도 괜찮고요?”
“나는 슈퍼용사가 아니라서 어른까지 지키고 싶지 않다.”
“능력은 이미 슈퍼용사 수준이신데요.”
문세웅은 ‘남자의 경지’가 안드로메다에 가있는 ‘대선배’의 담담한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여자친구는 여러모로 끝내주는 일본인 계약자.
전투능력은….
남아메리카 대륙을 통합한 ‘브라헨티나’가 자랑하는 드래곤 슬레이어, 포르 3세가 ‘찍소리도 못하고 죽는다.’에 손모가지를 걸 수 있다.
인간적으로 너무했다.
카르 4세의 상태를 RPG 게임으로 치면?
키우던 ‘사냥꾼’ 직업을 마스터(master) 찍고 남들처럼 정체됐다가…. 다른 직업인 ‘계약자’를 추가로 선택한 셈이다.
상성도 매우 좋다.
GM 양반! 여기에 사기캐릭터가 있소! 눈 씻고 좀 보라고!
“슈퍼용사는 무슨. 변변찮은 4급…. 반올림해서 6급 사냥꾼이지.”
“반올림 기준은 모르겠지만 6급이면 절대 변변찮을 수 없는데요, 선배님.”
애초에 ‘6급 사냥꾼’이란 게 말이 되나?
웬만한 약소국은 혼자 정벌할 수 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장점은 섬멸전밖에 모르는 ‘6종 수호자’랑 달리, 민간인과 중요시설 피해를 줄인 ‘평화로운 전쟁’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전략무기다.
하지만 그런 대단한 사냥꾼은 시큰둥했다.
“여왕님이나 용왕님이 3초만 투자하면 나 같은 건 그냥 죽어.”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엘로엘에게 질식사, 추락사 당하거나, 레드군의 브레스에 활활 탈 것이다.
문세웅은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건 이 나라가 과거에 ‘섹스 3대 강국’이라서 그렇다. 아시아에서 7종, 8종 계약자가 이렇게 풍부한 나라는 한국, 중국, 일본뿐이다.
이유?
『괴수는 인종차별도 한다.』
나라마다, 대륙마다 사는 괴수가 극단적으로 달라지는 이유다.
특히나 상위 괴수일수록 조건이 까다로워진다.
뚜렷한 근거는 없지만, 이집트의 9종 수호자 ‘이즈헬’은 ‘미망인’을 선호한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매우 힘든 조건이다.
결혼하고 첫날밤 전에 남편이 죽은 절세가인?
순결한 자연미인을 결혼시키려고 한 이집트 정부의 무모함이 빛을 발한 것이다. 하지만 혹시나 싶어서 또 시도했다가 ‘순결한 자연미인’만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집트는 계약자 부족국가 1위다.
“...선배님. 저희가 무슨 얘기 중이었죠?”
이래나 저래나 어쩔 수 없는 사냥꾼.
우울한 얘기는 그만하기로 했다.
“은비의 납치설.”
“아! 그랬죠.”
“6급이든 1급이든 사냥꾼은 겸손하게 아이들이나 지키면 되는 거야.”
“어른은요?”
“똑같이 어른인데 누가 누굴 챙겨. 어른과 아이의 차이가 생식능력뿐이라면 그건 인류를 향한 모욕이지. 인간은 원숭이가 아니야.”
백화점에 도착했다.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했다.
< [16장-3] 진실은 점점 산으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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