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장-2] 진실은 점점 산으로. >
맞다.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다.
한국의 와이츠가 실패한 몇 안 되는 MID 실험이었다. 그리고 용신이 폐기한 ‘실패작’을 만진 한국의 ‘오만한 과학자’들은 대국민사과를 하고 전원 은퇴했다.
그렇게 알려졌고 사실이다.
은퇴한 과학자 중에는 중국에 몸을 의탁한 자들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나 미국 등으로 이민한 자들까지 똑같이 진술하니 의심할 필요없는 진실이다.
그래서 이 보고서를 깡그리 무시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전부 은폐공작이 있었다. (증거자료 33쪽) 실제로는 3,000명 이상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실험에 이용됐다. (증거사진 42쪽) 진짜 목적은 괴수대응연맹에서 금지한 인체실험!』
이야기는 점점 판타지소설이 돼가고 있었다.
읽어주기 힘들 정도로 재미없었다.
인체실험?
그건 말없이 하는 교양 같은 거다. 과정이 어떻든 성공하면 찬사받고 실패하면 비난받는 숭고한 작업이다.
인류가 누리는 ‘노화억제제’는 그 대표적인 성공작이다. 원숭이에게 ‘영원한 생명’을 먼저 주고 인간에게 적용했다고 순진하게 믿는 걸까.
이건 달나라로 먼저 보내는 거랑 차원이 다르다.
진화론이든 창조론이든 인간과 원숭이는 별개 생명체인 까닭이다.
바다거북의 수명이 1,000년인 이유는?
은행나무가 10,000년 넘게 사는 이유는?
전부 처음부터 다시 연구해야 한다.
즉, 신이 정한 ‘수명의 메커니즘’을 간파하려면 그만한 희생이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희생 없이 달콤한 과실만 얻길 바란다.
완전, 돼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첸지 죠는 그 사실을 잘 안다. 정치인인 그는 ‘희생 없는 과실’을 찾는 인간(가축)의 본성을 누구보다 잘 이용할 줄 아는 부류이기 때문이다.
선지혜 회장처럼.
『오직 한 사람만 성공했다. (인물사진 51쪽) 그는 괴수에 버금가는 예지력과 약간의 재생력을 얻었다. (입원기록 53쪽) 선지혜 회장이 12년 동안 집중적인 관심을 보인 이유다.』
첸지 죠는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예지력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재생력은 솔직히 놀랐다.
전치 6주의 치명상을 1주일도 안 돼서 거의 회복했다는 정보는 믿기지 않았지만, 자료의 출처가 한국 본부 의무대라서 믿지 않을 수 없었다.
카르 4세.
인간의 탈을 쓴 괴수였단 말인가?
그런 괴수라면 많다.
흡혈귀, 늑대인간, 인어, 요정, 반인반수….
하지만 그것들은 순수한 괴수가 정말로 ‘인간의 탈’을 쓴 경우고, 순수한 인간이 괴수처럼 된 경우는 없었다.
무시무시한 얘기가 시작됐다.
『최종병기 양산을 위해 매년 그의 정자를 채취하고 있다. (수술기록 62쪽) 현재까지 파악한 프로토타입 모체는 총 열다섯으로 전원이 과거에 계약자로 판명됐다. (인물정보 78쪽)』
첸지 죠는 살짝 현기증을 느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강남구 쿠데타도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 그 많은 계약자를 모체로 쓰기 위한 변명거리일 가능성은 충분했다.
앞으로 십여 년 뒤에 ‘카르 4세’가 최소 15명?
악몽이다.
사람 말이 통하면서 안전한 4종 괴수를 양산하는 거나 다름없다. 지금은 ‘개인’이지만 미래에는 ‘군단’이 될 것이다.
그들을 MID 최강장비로 무장시키면?
선지혜 회장의 호언장담처럼 혼자서 5종 괴수를 쓰러트리는 ‘5급 사냥꾼 군단’이 창설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주석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렇게 중요한 사실이 여태 먼지 속에 처박혀 있었다니!
이 보고서를 작성한 놈도 문제다.
자료를 꼼꼼히 수집하고 정리한 능력은 인정해주겠다만….
서문과 초반부를 이리도 재미없게(?) 쓰면 독자(?)가 다 떨어져 나가지 않는가! 말재간이나 글재주 없는 녀석들은 이래서 승진을 못 하는 거다.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다.
첸지 죠는 거의 끝나가는 보고서를 마저 읽었다.
『모체로 계약자를 고집하는 이유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예산만 충분했다면…. 그래도 추측하자면 ‘최강의 계약자’를 낳기 위함이라고 판단한다. 수호자의 정신에 삼켜지지 않고 역으로 완전지배하는 계약자….』
무시무시한 에필로그(?)로 글은 끝났다.
괴수의 완전지배?
그건 ‘바글바글 카르 4세!’보다 훨씬 무서운 가정이다.
완전지배에 가장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삭풍의 마녀’조차 하루 24시간 대부분을 외모관리로 소모한다.
계약이 여전히 일방통행이란 명백한 증거다.
하지만 완전지배가 된다면?
첫 계약만 성공하면 이후부터는 외모와 순결이 중요하지 않게 된다. 수호자가 계약을 파기하지 못하도록 지배하면 그만이다.
그뿐일까?
섬세한 전투수행은 ‘병기’로서 가치를 극대화한다!
‘그래서 제목이 최종병기였군.’
이래서 글재주 없는 녀석들은 승진을 못 하는 것이다.
20세기 일본에서나 먹힐 것 같은 제목을 달아놓고 읽어주길 바라다니.
혀를 찬 챘는지 죠는 비서에게 연락했다.
(이 보고서를 작성한 자는 어디서 일하고 있나?)
(은퇴했습니다.)
(은퇴…?)
(한국의 보안망을 뚫는다고 예산을 너무 많이 끌어다가 쓴 모양입니다. 그 탓에 동료들에게 눈치 보이는 상황에서 보고서도 무산되는 바람에 일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 형편이란 게 충분히 상상 갔지만, 그렇다고 일을 그만두다니?
직장여건은 본부가 최고일 텐데 말이다.
스포츠카 몰던 사람에게 평범한 승용차를 주면 견디지 못하는 거랑 같은 이치다. 그런데 본부를 그만둘 생각을 했고 실천했다.
글재주는 없지만 평범한 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디서 뭘 하고 있지?)
(살던 집을 팔고 상하이 변두리로 이사 가서 작가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작가…?)
변호사 다음으로 돈 안 되는 직업이다.
단언컨대 재능도 없다.
첸지 죠 국가주석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생겼다. 본부에서 일할 정도로 뛰어난 엘리트가 벽지에서 시간을 썩히고 있다니.
비서의 설명은 더 가관이었다.
(첫 작품으로 ‘23세기 소년’을 냈는데 심의위원회에서 경고조치를 받았습니다. 흉악한 계약자들의 순결을 가져가는 소년의 일대기입니다. 그리고 재작년부터 ‘소년검사 카레’를 인터넷 연재 중인데 현재 인기폭발입니다.)
(소년…. 소년이라….)
자연스럽게 ‘카르 4세’가 떠오른 건 우연일까?
주석의 생각을 눈치챘다는 듯이 비서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저도 의심스러워서 매일 읽어보는 중입니다.)
(그렇군. 그래서?)
(네? 네. 카르 4세의 어릴 적하고 유사점이 많았습니다. 주요활동무대만 한국에서 본국으로 바꾼 느낌입니다. 교묘하게 심의위원회의 마지노선을 피해 가는 실력은, 정보과 에이스였다는 동료들의 증언이랑 일치했습니다.)
(...꽤 자세히 알고 있군.)
(일단은 저도 팬이라서…. 흠흠.)
인터넷 소설? 바빠서 그런 쪽으로는 신경 쓰지 못했다.
첸지 죠는 프로필을 쭉 훑어봤다.
글재주가 정말로 없는지는 모르게 됐지만, 자국의 미래를 걱정하는 충신(忠臣)이란 점만은 충분히 인지했다.
보고서 내용을 소설로 옮겨서 불특정 다수에게 경고메시지를 보냈다.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다.
이렇게 뛰어난 인재들이 중국 본부에는 많다. 그런데도 타국에 합병된다면 훗날 역사가들이 첸지 죠를 비웃을 게 분명하다.
(언제 한 번 약속을 잡아보게.)
(알겠습니다.)
에쏘드가 가출해서 행방불명됐지만, 중국의 저력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통제가 안 되던 무림의 힘이 내부가 아닌 외부로 향하도록 돌리기만 해도 미호 첸의 공백을 메꾸기에 충분하다. 인도와 러시아의 가벼운 도발쯤은 막을 수 있다.
한국은?
솔직히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니, 버틸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보고서는 근미래를 걱정했지만, 현재도 벅차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용사가 이렇게 성가신 적이었던가.’
아군인 용사는 이용하기 좋은 호구. 하지만 적일 때는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까다롭다.
영웅은 상대하기 쉽다.
부와 명예, 여자에 흔들리며 쉽게 자멸(自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는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할 게 없다. 있다면 뻔히 보이는 함정에 들어가도록 종용하는 정도일까.
스스로 지킬 힘이 부족하다면 말이다.
첸지 죠는 옆에 치워둔 다른 보고서를 들었다.
“카르발트 전투력 예측이라….”
정보과 과장 위진 창은 ‘카르 4세’에게 ‘카르발트’라는 새로운 별명을 붙였다.
괴수와 계약한 카르 4세는 더는 사냥꾼이 아니란 판단에서다.
그렇다고 계약자도 아니었다.
『성장의 결함으로 육체 능력이 일반적인 사냥꾼보다 뒤떨어졌던 카르 4세는 가더발트로 그 치명적인 약점을 완전히 극복했다. 우리는 가더발트 초대 계약자 ‘샤려 핑’의 신체데이터를 베이스로 카르 4세의 전투력을 재측정했다.』
보고서를 쥔 첸지 죠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건 이미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다.
그야말로 괴수!
위진 창이 ‘카르발트’란 고유명사를 붙인 이유가 있었다.
『1종 괴수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성인보다 육체가 부실했던 카르 4세는 4급 괴수를 홀로 학살했었다. 그랬던 남자에게 3종 괴수에 버금가는 근력이 생겼다. 이론상 그는 7종 괴수까지 단신으로 쓰러트릴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무기만 받쳐준다면.
조금도 위안이 안 되는 단서가 붙었다.
‘카르세리안 레이소’로는 이전보다 수월하게 4종을 학살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피부와 껍질이 약한 5종과 6종 일부라는 분석이다.
‘스콜레옹 레이소’일 경우에는 5종까지 학살할 수 있다. 6종은 역시나 괴수의 방어력 영향을 크게 받았고 7종은 무리라고 단언했다.
미국이 보유 중인 세계에서 가장 날카로운 절단기라면?
단검(短劍)이라서 쓸 수 없다.
카르 4세에게 약점이 있다면 여전히 팔다리가 짧다는 것이다.
“이런 것도 조사했나….”
상대가 ‘군대’일 경우도 상정했다.
위기감지능력인 [예감] 때문에 지뢰와 저격은 일절 통하지 않고, 생화학병기와 폭격기보다 빨라서 이 또한 무의미하다.
남은 방법은 순수한 육탄전!
무기(카르세리안 레이소)가 부러지거나 체력이 다 떨어질 때까지 일방적으로 파괴, 학살할 거란 전망이었다.
4차 세계대전이랑 비슷한 양상이었다.
『그런 근거로…. 정보과에서는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장비하고 ‘가더발트’와 계약한 한무일에게 ‘카르발트’라는 고유명을 붙이고자 한다. 우리가 판단한 ‘카르발트’ 위험도는 ‘6종 소형’이다, 이상.』
위진 창은 한무일을 ‘6급 사냥꾼’도 아닌 ‘6종 괴수’라 칭했다.
어쩐지,
한국에서는 ‘미호 첸의 무력화’를 원했다. 중국에서는 승낙하는 대신 ‘무력해진 아미파 주지의 신변’을 돌려받았다.
첸지 죠는 여기서 1가지를 더 요구했었다.
미호 첸을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약물투여’가 아닌 ‘순결제거’를 제안했다. 그리고 그 집행자로 ‘카르 4세’를 지목했다.
하지만 선지혜 회장이 단호하게 거절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좀 과한 거부반응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카르발트의 정자’ 유출을 경계한 거라면….
그 괴수는 현재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일단 42시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도록 하자.
카르발트(?)가 포효했다.
(없다고요?!)
(미안하게 됐네. 서울방송 국장 녀석이 심술을 부려서…. 자네가 딸의 결혼식에 참석 안 한 일로 살짝 앙심을 품은 모양이야.)
(아아, 그럴 수가…!)
평양에서 호버크라프트를 타고 서울로 돌아온 무일은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스포츠카를 줄 수 없단다.
참고로, 서울방송 국장은 카르 4세가 누군지도 모른다.
헌병대장 문장춘은 ‘사랑하는 아들’을 인기스타로 만들어주는 열쇠나 다름없는 카르 4세가 단독행동하도록 놔줄 생각이 없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운전기사취급?
아주 좋다! 나이스! 베리 굿~!
위험하게 싸우지 않고 공적을 쌓을 수 있다면 진실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마음 같아서는 스포츠카 대신 현금으로 30억쯤 주고 싶지만, 내가 그래도 헌병대장인데 뇌물은 좀 그렇잖은가. 그래서 생각해봤다네. 곧 개성시로 이사한다지?)
현금만 뇌물인가?
주고받는 선물 속에 우정과 의리가 싹튼다고 생각한다.
정치 쪽은 복잡해서 잘 모르겠다.
(네, 대장님.)
(집도 작고 내부도 텅텅 비어서 안타깝다고.)
(안타까울 정도는….)
(아들 녀석이 한숨을 푹 내쉬더군!)
(혼자, 아니, 셋이 살기에는 적당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중요한 순간에 [예감]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됐다.
금전적인 문제는 [예측]도 별 힘을 못 썼다.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헌병대장 문장춘은, 하나 남은 자식의 등용문(登龍門)이나 다름없는 카르 4세에게 사람 좋은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신속했다.
카르 4세에게 생각할 틈을 줘선 안 된다.
(파주시가 크게 땅값이 오르면서 개성시도 조금씩 탄력을 받기 시작했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 팔불출 헌병대장이지!)
(자랑하실 호칭이 아닌 것 같은데요….)
듣고 있지 않았다.
문장춘은 계속 말했다.
(그래서 사람이 붐비리라 예상되는 노른자 땅을 자네와 특공대장의 공동명의로 해놨네. 음? 너무 놀라서 숨도 안 쉬어지는가.)
개성땅이 공동명의? 특공대장 선지혜랑?
평양에서 귀환한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벌써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지려 하고 있었다.
머리가 핑글핑글 돈다.
두통약과 산소호흡기가 필요할 것 같다.
< [16장-2] 진실은 점점 산으로.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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