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65화 (65/287)

< [16장-1] 진실은 점점 산으로. >

[16장] 진실은 점점 산으로.

학명: 쑨우쿵(복사되는 돌 원숭이)

서식지: 바위

특징: 물량의 진수를 보여준다.

위험도: 8종 소형

비고: 손오공, 손고쿠, 썬어겅

***

쑨우쿵은 신의주와 함께 잿더미로 변했다.

주위에 돌만 있으면 얼마든지 무한복사하는 능력으로 끈질기게 버티고 버티던 원숭이도 무시무시한 화력(火力)과 풍력(風力)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계약자인 미호 첸은 구속됐다.

그녀는 ‘한국의 법’으로 ‘유전상속’을 선고받았다. 앞으로 낳아야 아이는 총 서른. 당연히 격렬하게 반대하며 저항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소위 ‘아름다워지는 물약’을 강제복용하고 ‘인공미인’이 된 탓이다.

그녀는 짙은 상실감과 함께 극도로 겁에 질리는 추태를 보이며 잠잠해졌다.

직후에 중국 측에 인도됐다.

“주지. 아무도 그대를 해치지 않으니 진정하시오.”

“저, 정말인가요? 나를, 그 마녀가 가만 놔두나요? 정부의 당신들도.”

비행기 좌석에 몸을 웅크리고 앉은 미소녀가 덜덜 떨면서 물었다.

정보과 과장 위진 창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다만, 아시지요?”

“얼마든지 낳을게요! 그러니 고문만은 하지 말아주세요!”

미호 첸은 순결을 잃고부터 무림의 지배자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변해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평범한 여자’의 정상적인 반응일 것이다.

정부에 반기를 들었던 그녀가 공포에 떠는 건 당연하다.

‘통쾌하긴 하지만 뼈아프군.’

위진 창은 곧 이륙한다는 안내음을 듣고 좌석에 돌아와 앉으며 생각했다.

많고 많은 질 낮은 계약자가 아닌 무려 8종이다. 일본의 9종 계약자였던 ‘미오 타미에’가 낳은 딸들의 성적만 봐도 알 수 있다.

9종은커녕 8종조차 없다.

한 세대 건너뛰어서 외손녀가 ‘7종 계약자’이긴 하지만 그렇게 많이 낳았으면 확률적으로 하나쯤 성공할 수밖에 없다.

즉, 미호 첸이 절세가인을 낳는다는 보장은 없다.

일본의 사례를 보면 기껏해야 6종이 한계일 것이다. 농장에서 대량생산하는 가축의 품질이 떨어지듯이 말이다.

절세가인은 유전자배열을 주관하는 ‘신의 기적’이 필요하다.

그 기적을 인위적으로 손봐서 절세가인이 뽑힐 확률은 0.000001% 미만. 그냥 신의 섭리대로 놔두는 편이 금전적 손실을 줄이고 정신건강에도 이롭다.

‘뛰어난 인재를 뺏긴 것도 아깝고.’

이번 사건의 모든 죄는 ‘페이 링’이 뒤집어썼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카르 4세’를 쓰러트리고 싶었던 ‘미계약자인 척한 계약자’가 벌인 단독범행이란 식으로 말이다.

가더발트의 은밀함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라서 중국 정부는 ‘사람 보는 눈이 없다.’는 매우 약한 비난만 받고 넘길 수 있었다.

입을 맞춘 ‘두 거물’의 작품이다.

과다출혈로 의식불명인 페이 링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국외로 추방됐고, 그녀의 생살여탈권은 직접적인 피해자였던 ‘카르 4세’에게 넘어갔다.

합법적인 노예인 셈!

그런 ‘대역죄인’에게 정부는 막대한 보상을 해줄 계획이다.

안 그러면 누가 정부를 믿고 따르겠는가.

충신(忠臣)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왕(王)의 나라가 흥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에쏘드는 무사히 회수-, 음?’

곧 이륙하는데 좌석에 메이가 안 보였다.

그런데도 우이 펑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서 태평하게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눈살을 찌푸린 위진 창은 안전띠를 풀고 일어났다.

“펑 수가(帥哥).”

“그녀라면 화장실에 갔습니다, 창 과장님.”

이름만 불리고도 이유를 [예측]한 프로사냥꾼이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위진 창은 눈살을 찌푸렸다.

대결이 끝나는 걸 확인한 메이는 곧바로 카르 4세를 만나려고 했다. 이유라면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계약!

마지막 작별인사 같은 예의를 괴수에게 바라면 안 된다.

물리적인 접촉만 하면 바로 넘어갈 긴급상황이었다. 당연히 제지했고 메이는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따라왔다.

계약은 해지됐지만 말이다.

“...솔직하게 말해주게.”

“말씀하십시오.”

“계약이 깨진 게 확실한가.”

“메이를 화나게 해준 덕분에 깨졌습니다.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지만, 카르 4세는 가더발트와 계약했습니다. 그런데도 난리법석을 떨며 메이를 야생괴수 다루듯 위협하니 이 꼴이 난 겁니다.”

우이 펑은 화내는 것 같진 않았다.

단, 계약이 파기된 잘잘못은 확실히 하고자 했다.

위진 창은 고개를 끄덕였다.

방법이 과격했다는 점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본토에서 탄핵이니 어쩌니 떠드는 바람에 감시요원들의 신경들이 날카로워져서 저지른 실수였다.

하지만 누군가 막긴 막았어야 했다.

계약이 파기되긴 했지만, 결과만 보면 ‘최악’은 아니었다.

에쏘드가 우이 펑의 허리에 채워진 ‘집’으로 들어가지만 않으면 ‘맛있는 음식’으로 얼마든지 구슬릴 수 있다.

정보과 과장은 눈을 날카롭게 하고 물었다.

“정말로 계약이 그때 깨진 게 확실한가?”

“과장님도 보셨잖습니까. 대결이 끝날 때까지 제 옆에 얌전히 앉아있던 그녀를.”

불쾌하다는 어조로 우이 펑이 말했다.

살짝 고개를 숙여 사과한 위진 창은 중얼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좀 늦는군.”

여자의 볼일은 오래 걸린다는 것쯤은 유부남인 그도 안다.

하지만 화장도 안 하는 메이가 ‘소화’가 전혀 안 되는 음식물을 몸에서 배출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위진 창은 이륙한다는 방송에 어쩔 수 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의기소침한 시링 팽의 7종 수호자 웨일풍의 보호를 받으며, 중국에 단 3기뿐이 없는 ‘수직이착륙 여객기’가 빠른 속도로 성층권까지 날아올랐다.

안전궤도에 접어들자마자 위진 창은 화장실로 뛰어갔다.

“메이! 대답해주십시오!”

“......”

대답은커녕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환풍기로 전부 빼내지 못한 ‘괴수의 피’ 냄새가 화장실 안쪽에서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위진 창이 부하들에게 외쳤다.

“화장실을 강제로 열어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비켜보세요.”

소란을 들은 포르 12세(독일의 포르 8세가 죽었다.)가 무시무시한 절단기를 뽑았다.

세계에서 2번째로 날카로운 검, 스콜레옹 포르소.

손에서 떨어트려 비행기에 구멍이라도 생기는 날에는 끔찍한 대참사가 벌어질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에쏘드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없는 까닭이다.

서걱! 퉁.

부드럽게 베인 화장실 문짝이 떨어졌다.

그 안쪽에서 코를 찌르는 피 냄새가 뿜어져 나온 것에 비해 드러난 광경은 딱히 끔찍하다고 할 건 없었다.

바닥에 수은처럼 고인 ‘은색 피’뿐이었다.

그 대부분은 세면대와 변기, 배수구로 흘러나가고 일부만 남은 것 같았다.

“정령으로 돌아간 건가!”

과거에 지금이랑 비슷한 상황을 보았던 위진 창은 탄식했다.

에쏘드 본체는 입는 옷부터 머리카락 한 올까지 ‘괴수의 피’로 이루어졌다. 머무는 시공간이 다른 정령이 물리력을 행사하게 해주는 매개체인 셈이다.

모두의 시선이 우이 펑에게 쏠렸다.

정확히 말하면, 그가 허리에 차고 있는 ‘용사의 검’을 쳐다보고 있었다.

실체를 버린 그녀가 돌아갈 곳은 ‘집’뿐이기 때문이다.

“...저는 잘못이 없으니 빼주십시오.”

위기를 [예감]한 우이 펑이 잽싸게 말했다.

하지만 쏟아지는 살벌한 시선과 위진 창의 발언에 찌그러졌다.

“그래서 자네가 용사답지 못하다는 걸세. 그러니 카르 4세에게 밀리지. 그건 아주 큰 죄라고 할 수 있네.”

“그럴 수가!”

“주석께 연락하게. 나와 함께 석고대죄할 정예를 뽑아달라고.”

소식을 전해 들은 첸지 죠는 뒷목을 부여잡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좌절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빠른 결단력과 추진력이 그의 최대 장점.

중국의 주석은 서둘러 ‘정예’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포함에서 이 일에 조금이라도 가담한 자들을 싹싹 긁어모았다.

마누라 궁둥이 때릴 시간 있으면 무릎 꿇고 빌라고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에서의 힘든 일정을 마친 ‘용사파티’가 중국에 도착했다.

“...에쏘드가 좀 이상합니다.”

모범을 보이기 위해 가장 먼저 앞장선 첸지 죠는 불길한 보고를 받았다.

앞으로 10년 동안 매일 1시간씩 무릎 꿇는 굴욕과 고역보다 더 심각한 일이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아무튼 물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건가?”

에쏘드를 깨끗하게 손질하기로 되어있던 대장장이였다.

그의 손에는 화려한 철검이 들려 있었다.

손잡이 정중앙에 금강석이 박혀있고 좌우에서 용이 여의주처럼 물고 있는 형태의 장식이 입체적으로 세밀하게 표현되어 있다.

즉,

요란하고 유치하다.

적어도 24세기 심미안으로는, 카르 4세의 표현처럼 시대착오적인 디자인이다.

그래도 이 촌스러운 검이 ‘에쏘드’다.

정령의 취향을 강제할 순 없다.

에쏘드는 ‘용사의 검’답게 생채기 하나 안 생기는 완전무결을 자랑하지만, 메이는 계약자가 자신의 ‘집’을 소중히 다뤄주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전문가에게 부탁한 거였는데….

“쇳돌로 갈자마자 날이 닳았습니다.”

“닳아? 잘못 본 것 아닌가.”

첸지 죠는 피식 웃었다.

에쏘드는 쇳돌 따위로 어떻게 될 싸구려 검이 아니다. 그랬다면 이렇게 모여 석고대죄할 준비를 하지 않았다.

예산을 퍼먹는 용사파티를 신설하지 않았을 것이며, 용사밖에 모르는 정령의 비위를 일일이 맞춰주지도 않았으리라.

즉, 가더발트처럼 창고에 처박아뒀을 것이다.

“주석께서 직접 보십시오.”

“이건….”

정말이었다.

검에 대한 조예가 없는 첸지 죠가 봐도 ‘용사의 검’은 이상했다. 검신(劍身)이 무른 알루미늄 깡통처럼 쇳돌에 여기저기 긁힌 흔적이 뚜렷했다.

이건 명백하다.

『정령이 집을 버렸다!』

에쏘드가 철부지 비행소녀도 아니고 어떻게 이럴 수가?!

중국 정부는 공황에 빠졌다.

첸지 죠는 한국의 카르 4세를 가장 먼저 의심했지만, 곧바로 부정했다. 남자가 계약한 것도 놀라운데 이중계약?

상상은 자유지만, 비약이 너무 심하다.

“러시아와 인도가 눈치채기 전에 찾아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주석!”

“알겠습니다! 들었지? 빨리 움직여!”

명령을 내린 첸지 죠는 생각했다.

에쏘드가 가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선지혜 회장이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니 의심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받았어요.』

무엇을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끝까지 듣지 못했다.

설마 또, 카르 4세인가?

이번에도 그렇다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만, 논리보다 감성이 앞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첩보위성으로 그를 감시하라고 은밀히 지시했다.

대답은 금방 돌아왔다.

여자와 손을 잡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는 것이다.

(여자! 메이인가?)

(어…. 아닙니다. 소녀입니다, 최은비라는.)

첸지 죠는 방심하지 않았다.

더는 카르 4세를 과소평가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게 바로 36시간 전이다. 벌써 흔들린다면 국가지도자로서 실격이다.

지금은 누구보다 침착하게 비밀을 파헤칠 때다.

(두 사람의 목적지는?)

(어….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아! 나왔습니다. 어…. 음…. 백화점에서 이것저것 산 후에 스포츠카를 타고 이동 중입니다. 운전기사는 놀랍게도 헌병대장 아들입니다!)

(역시! 무언가 있군!)

헌병대장 아들이 카르 4세를 따라다닌다는 건 익히 알려진 정보다. 하지만 ‘사적(私的)’으로 함께했던 적은 여태 없었다.

어디로 향하는 거지?

최은비는 연막이고 문세웅이 진짜일 것이다. 가더발트 계약을 그에게 양도하고 카르 4세는 에쏘드로 갈아타는 게 아닐까!

그 선지혜 회장이라면 이런 이중, 삼중계획을 짜고도 남을 여자다.

(방금 목적지를 알아냈습니다.)

(어디인가! 역시, 비밀연구소나 벙커인가!)

(그게…. 초등학교입니다.)

다짐하고 38시간밖에 안 지났다.

첸지 죠는 인내심을 갖고 수시로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린 후에 보고서를 읽어갔다.

제목은 ‘와이츠의 최종병기 프로젝트’였다.

전에는 웃고 넘어갔지만, 이번에는 진지하게 읽기 시작했다.

『총 300명의 15살 미만 동정소년이 실험에 동원됐다. (참고자료 3쪽) 실험목적은 ‘남성 계약자’ 개발이었다. (참고 사진 12쪽) 하지만 실험은 실패했다.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다.』

< [16장-1] 진실은 점점 산으로.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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