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장-4] 이사는 말없이. >
가터벨트는 스타킹이 허벅지 아래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해주는 여성용 속옷이다. 남자들은 그 용도를 다르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지만.
2종 괴수 가더발트의 원형은 가터벨트와 흡사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촉수가 4개뿐인 검은색 해파리 같다고 할까.
차라리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란 표현이 더 적합했다.
카르 4세는 눈을 크게 뜨며 외쳤다.
“미친!?”
가더발트가 뭘 하려는지 [예측]한 탓이다.
단 4개뿐인 촉수는 고무줄처럼 쏘아지며 그의 몸을 붙잡았다. 서둘러 카르세리안 레이소로 베어냈지만, 하나만은 어쩌지 못했다.
검은색 해파리는 잽싸게 촉수를 당겨 숙주에 몸체를 안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찌이이익!
괴수는 거추장스러운 옷을 찢기 시작했다.
카르 4세는 거의 처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공포에 젖은 얼굴로 팔다리를 흔들며 어떻게든 때어내고자 애썼다.
이건 반칙이잖아!
자기 몸에 [반격]하면 죽는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생방송’이란 점이다.
“아, 안돼! 하지 마! 이 변태 괴수가!?”
아메바처럼 들러붙은 가더발트는 처음 당도한 오른쪽 발목을 시작으로 소녀(?)의 옷을 차근차근 해체해갔다.
심판인 실바니아 하이로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패자’를 하늘로 띄워 의무대 측으로 전달한 그녀는 ‘승자’에게 어떤 말을 해줘야 좋을지 난감했다.
아니, 그보다 고개부터 돌려야 좋을까요.
하지만 훌륭한 심판이라면 선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의무가 있는데….
“어…. 음…. 승자. 한국의 특무대, 카르 4세.”
“여긴 안 돼! 안 돼~~!!”
영국의 왕녀님이 무슨 말을 하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팬티만을 남겨 놓고 최후의 항쟁 중이던 카르 4세는 비열한 겨드랑이 습격(간지럼 태우기)에 손을 떼고야 말았다.
찌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노골적으로 남자임이 입증됐다.
선인장 하나 없이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에 고고하게 선 ‘첨탑’이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다. 안타깝게도 그 밑에 자리한 ‘생명의 열매’는 별 주목받지 못했다.
선지혜가 벌떡 일어섰다.
첸지 죠를 상대했을 때의 여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당장! 당장, 저 영상을 매입해! 그리고 초상권이고 뭐고 걸 수 있는 건 다 걸어서 카르 4세의 알몸이 더는 방송이나 인터넷에 안 떠돌게 막아!)
(...회장님?)
(나만 봐야 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
얄미울 정도로 침착한 선배가 극도로 당황하며 허둥대는 모습!
저 영상은 ‘무일♥지혜 보물 1호’로 지정해도 아깝지 않다.
자문단 입장에서는 생뚱맞은 날벼락이나 다름없었다.
(자, 잠시 진정을….)
(시끄러워! 강남구 투기로 너희가 날릴 뻔한 액수가 얼마였는지 또 불러줄까?)
(아닙니다, 회장님! 당장 움직이겠습니다!)
선지혜는 험악하게 자문단을 윽박지르던 말투와 상반되게 눈은 반달처럼 휘어지고 입가는 헤벌쭉 풀려 있었다.
역시, 내가 사랑하는 남자다운걸~♪
언제 어디로 어떻게 튈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다.
선배의 모습 하나하나가 나의 활력소! 이 무미건조한 회색별(?) 지구가 아직 그 유통기한이 다하지 않았음을 깨닫게 해준다.
앞으로도 이 기분을 자주 만끽하고 싶다.
“메이…?”
“잘 안 보여서요.”
“크흠! 남자 몸에 그렇게 관심 많을 줄 몰랐소.”
우이 펑은 헛기침하며 무안함을 달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용사의 정령’은 절대로 여자일 수 없는 카르 4세의 신체구조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옆에서 ‘남자’라고 확인까지 시켜줬다.
용감하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나쁘진 않았던 우이 펑이 거짓말하고 있진 않다고 판단한 메이는 차분히 자리에 돌아와서 앉았다.
보는 눈이 많은 까닭이다.
헤픈 에쏘드(?)라고 손가락질받으면 ‘모시는 용사님’에게 폐가 된다.
(탄핵? 누구야! 그딴 소리를 지껄인 놈이!)
(질 수도 있는 거지! 이 작자들이 무슨 막말을!)
(사기꾼? 누구 보고 사기꾼이란 건가!)
(미호 첸이 저지른 짓을 왜 우리에게 떠넘겨!)
중국 관계자 귀빈석은 시장바닥을 연상케 할 정도로 혼잡해서 에쏘드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비열한 수법을 쓰고도 졌다!
그 후폭풍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침착한 남자가 있었다.
이미 주석과 회장이 입을 맞추고 있을 텐데 난리는….
위에서 보고받은 내용은 없지만, 그 정도는 지난 역사를 조금만 되짚어봐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정보과 과장 ‘위진 창’은 메이를 집중적으로 관찰했다.
‘그녀가 갑자기 관심을 보였다.’
용사는 ‘남성의 형태’도 중요한 걸까, 아담한 쪽을 선호하는 걸까?
실없는 생각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건, 상대가 평범한 여자가 아닌 ‘전쟁억제력을 가진 괴수’이기 때문이다.
타국에서도 정보를 꽁꽁 감추고 공개하지 않으니 당장 비교해볼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메이의 취향’이 아니다.
중국의 에쏘드가 ‘한국인’에게 짙은 관심을 보였다는 게 문제다.
위진 창은 비서에게 조용히 물었다.
“메이가 카르 4세와 물리적으로 접촉했을 가능성은?”
“없습니다.”
“그런가. 따로 보고할 내용은? 사소한 거라도 좋아.”
“흠. 미식가(美食家)인 그녀가 아침도 거르고 침대에서 점심까지 꼼짝 않고 누워만 있었습니다.”
“그래?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차라리 다행이군.”
침대에만 있었다면 카르 4세를 만났을 가능성은 아예 없다.
그렇다고 해도 끝까지 방심할 순 없었다.
다소곳이 앉아있는 메이를 한 번 더 살펴본 위진 창이 말했다.
“귀국할 때까지 잘 감시해.”
“...구속해도 됩니까.”
에쏘드 본체는 지독한 몸치에다가 가녀린 체형답게 힘도 매우 약하다. 덜떨어진 1급 사냥꾼도 쓰러트릴 수 있을 정도다.
기생형을 제외하면 ‘최약체 괴수’라고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러니 마음만 먹으면 물리적으로 행동을 제약하는 것도 가능하다.
비서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위진 창은 고민했다.
에쏘드는 외부에서 심하게 강제하려고 하면 본체의 물리력을 해제하고 ‘정령’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집’이라 할 수 있는 ‘검’으로 쏙 들어가버린다.
그러면 진짜 큰일이다.
한국에 빼앗기는 것보다야 낫지만, 중국도 계약할 수 없게 된다.
‘전에 얼마나 걸렸더라…?’
외견이 아름다운 괴수, 에쏘드를 ‘성적 노리개’쯤으로 알던 계약자가 하나 있었다.
최약체라고 불려도 힘은 인간보다 강하다.
목이 부러진 알몸의 사내와 ‘괴수의 피’로 낭자한 침대만 남겨두고, 메이는 ‘집’으로 들어가서 ‘평범한 검’처럼 침묵했다.
무고한 국가주석과 본부장관을 시작으로 엉덩이 무거운 간부들이 매일 1시간씩 무릎 꿇고 온갖 앓는 소리를 하며 싹싹 빌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석고대죄(石藁待罪)!
무려 3년 6개월 동안 그 작업을 한 후에야 간신히 관계를 회복할 수 있었다.
위진 창도 그 피해자 중 한 사람으로서,
“최악의 상황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해. 하지만 정말 최악일 때만이야!”
그때는 젊었고, 얼마나 힘든지 모른 상태에서 지원했다.
온몸을 불사른 덕분에 승승장구하여 지금의 정보과 수장까지 올랐지만, 또 그 짓을 하라고 하면 바로 은퇴할 생각이다.
충성도 좋지만, 이번에는 3년 6개월로 안 끝날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미호 첸은?”
“...사과한다는 약속을 불이행하고 마녀를 선제공격했습니다. 주지는 그 자리에서 한국의 경비대에 체포됐고 쑨우쿵은 현재 폭주하여 엘로엘, 레드군이랑 싸우고 있습니다.”
“죽는 건 시간문제겠군.”
싸움은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다만, 주도권을 누가 쥐느냐의 문제였다.
그렇게 중국이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카르 4세는?
“너는 성별도 구별 못 하는 등신이냐! 당장 떨어져!”
평소에 담지 않던 온갖 욕설을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벨트처럼 무일의 허리에 착 달라붙은 가더발트는 침묵을 고수했다. 정말로 침묵 중인지 모르지만, 그는 계약자가 아닌 까닭에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그건 2종 괴수 가더발트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미칠 노릇이었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벗겨내고 생식기를 까보니 흉측한 물건이 떡하니 달린 게 아닌가! 여자가 아니라서 숙주로 삼아지지도 않았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약간의 착오가 있었지만 ‘결속’을 해제하면 그만이니까.
진짜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결속이 해제 안 된다!
가상현실게임으로 치면 ‘접속버튼’은 있는데 ‘종료버튼’이 없어서 나갈 수 없는….
지랄 맞은 상황이었다.
“...카레 경. 심정은 이해하지만, 일단은 뭐라도 입는 게 어떨까요.”
“헉! 맞다! 생방송!”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는 척하면서 볼 건 다 보고 있던 영국 왕녀님의 지적을 받은 카르 4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이미 늦었지만, 여기에 있지도 않은 ‘팬티’를 애타게 찾았다.
이변은 그때 일어났다.
허리에서 꿈쩍 않던 가더발트 일부가 스멀스멀 움직이더니 칠흑빛 ‘삼각팬티’로 변하여 소년의 중심을 가려주는 게 아닌가!
그 놀라운 변화를 코 닿는 거리에서 목격한 8종 계약자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고결한 왕족의 체면도 잊고 입을 쩍 벌렸다.
답은 하나다.
‘남자가 계약을…?’
놀라기는 카르 4세가 더했다. 아니, 심했다.
한 걸음만 떼면 시야에 닿는 어디든지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 같고, 9년째 늘 한결같이 무거웠던 여자친구가 깃털처럼 가볍다.
다만, 조몰락거리는 감각이 심히 불쾌했다!
그렇게 느끼는 순간, 칠흑빛 삼각팬티는 다시 벨트로 흡수되어 사라지고 그는 평소의 무력한(?) 소년으로 돌아왔다.
짙은 상실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카레 경(卿)! 방금 뭐였죠?!”
출처가 불분명해진 ‘카레 시리즈’가 여기에 또 있었다.
아까도 그렇게 불렀던 것 같은데….
8종 계약자인 왕녀님에게 묻거나 따질 정도로 그는 어리석지 않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가더발트는 저보다 중국 측에서 더 자세히 알 것 같은데요.”
“어머! 그것도 그렇군요. 실례했어요.”
실바니아 하이로드가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딱 봐도 비싸다는 걸 알 수 있는 두꺼운 망토가 등장했다.
망토는 마법처럼 천천히 하강하더니 프로사냥꾼의 양어깨에 얹어졌다.
흰색 배경에 금실로 영국 국기가 양각되어있고, 왼쪽 가슴과 좌우 견장(肩章)에는 황금 방패를 좌우에서 날개로 감싼 은룡(銀龍), 영국왕실문장이 새겨져 있다.
...팔면 비싸겠는데 팔아도 괜찮으려나.
무례하게도, 할부의 노예는 금전적인 문제부터 떠올렸다.
“저에게 주시는 건가요?”
“처음부터 승자에게 줄 예정이었습니다. 좀 더 극적인 순간에 보여줄 예정이었는데…. 지금보다 극적일 순 없을 것 같군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카르 4세는 망토로 알몸을 가렸다.
승자라고 박수 쳐주는 것보다 이게 100배 좋다.
“이건 괴수대응연맹이 아닌 영국 왕실에서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훌륭히 다루는 기사에게 내리는 하사품이라고 보시면 될 거예요.”
“감사히 입겠습니다.”
“......”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당신처럼 대단한 기사가 레이디와 눈을 못 마주친다는 게 안타깝군요. 벽이랑 대화하는 것 같은 무례는 용서하도록 하죠.”
“하, 하, 하…. 죄송합니다.”
역시나 변변찮은 사냥꾼. 그리고 남자.
아무리 칼질을 잘해도 아름다운 왕녀님 앞에서는 찍소리도 못하는 잔챙이,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는다.
무일은 가더발트에 놀라서 땅에 떨어트린 검과 검집을 회수했다.
카르세리안 레이소는 신기할 정도로 멀쩡했다. 같은 등급의 절단기랑 수십 번을 박아댔는데 흠집 하나 없다.
...만약 부러졌다면?
까칠한 300억짜리 여자친구를 치료하려면 돈이 얼마나 들까. 열심히 싸웠다고 나라에서 전액 보상해줄 리 없다.
병원비(?)를 나름대로 추측해본 카르 4세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래도 위험을 감수한 수확이 있었다.
‘어…. 이렇게 하면 되려나.’
늘 그랬듯 본능대로 찍어 맞췄다.
왕녀님에게 하사받은 영국왕실망토 안쪽으로, 벨트뿐인 알몸 옆구리에 검집을 가져다 대자마자 가더발트가 자석처럼 끌어당겨 고정해줬다.
신기하고 어색해야 정상인데?
처음이랑 달리 당연하게 느껴지는 감각이 묘했다.
“카레 경. 경은 참 재미없게 사는 남자로군요.”
“파괴와 살육을 즐기면 죄악이죠.”
“그런 뜻이 아닌데….”
“예?”
“아무것도 아닙니다.”
불가능한 승리를 일궈낸 것치고는 조용히 마무리됐다.
겉보기에는 그랬다.
엘로엘(+레드군)과 쑨우쿵의 접전으로 평양부터 신의주까지 초토화됐고, 남성과 계약(?)한 가더발트에 관한 소식이 사나이들을 흥분시켰다.
조용한 나라는 한국뿐?
그냥 조용하기로 따지면 ‘중국 정부’도 마찬가지였는데, 이쪽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에쏘드가 가출(家出)했다.
< [15장-4] 이사는 말없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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