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63화 (63/287)

< [15장-3] 이사는 말없이. >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사심 없이 말했다.

이 사냥꾼이 여태 안 알려졌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리고 한국에 잠시 체류하는 동안 또 한 번 놀랐다.

서울에서 ‘이 남자를 아십니까?’라는 질문에 ‘전혀 모른다.’는 답변이 73%(가물가물하다. 23%)였다는 통계자료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무일 한 / 카르 4세】

괴수대응연맹에 기록되어있는 프로필만 보면….

학력 - 이론: 100점 / 초급: 99점 / 중급: 92점 / 고급: 84점

경력 - 토벌전: 34회 / 섬멸전: 186회

면허 - 3급 사냥꾼 / 4급 무기허가증 / 1급 살인면책권

실적 - 4종: 11마리 / 3종 이하 생략

정계에서 조금만 힘쓰면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학력, 경력은 무시해도 된다. 하지만 괴수의 시체가 남는 ‘실적’은 어렵다.

전자프로필의 ‘3종 이하 생략’을 클릭하면 입이 아예 안 다물어진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카르 4세가 입술을 뗐다.

“이제, 시작해도 됩니까?”

손가락 마디마디가 긴장하고 있다.

카르 4세는 [예감]을 통해 죽을 가능성을 27가지 떠올렸다. 그리고 그런 상대를 죽일 방법을 5가지쯤 생각해냈다.

완벽은커녕 제대로 [반격]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감은 둘째치고 육체적인 능력에서 압도적으로 밀린 탓이다. 아마도…. 간신히 막아내는 게 고작이리라.

그렇다고 해서 꼭 비관적이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이건 사냥이기 때문이다.

“...규칙은 숙지하고 있는 걸로 알겠어요.”

하늘거리는 검은색 드레스의 왕녀님이 허공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영화 촬영처럼 몸에 투명한 실을 매다는 특수장치가 아니다. 바람의 정령이랑 계약한 박선영처럼 자연스럽게 날아오른 것이다.

하지만 그 메커니즘은 다르다.

이건 ‘정령 고유의 힘’이 아니라 마법(魔法)이다.

괴수들의 신묘한 능력 대부분을 조금씩 사용할 수 있다고 전해지는 괴수. 그야말로 만능이라고 일컬어지는 ‘대마법사’가 실바니아 하이로드의 수호자다.

【듀크마 / 8종 소형】

일설로는 영국 왕녀의 머리카락이 백색인 이유는 계약의 대가로 아름다운 황금색 머릿결을 수호자에게 줬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당연히 ‘믿거나 말거나’다.

듀크마는 마법으로 모습을 감춘 걸까?

순수한 파괴력은 8종 중에서 가장 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보조한다.’는 측면에서 그 효용가치가 무궁무진하다.

예를 들어, 저기 떠다니는 전기구체처럼.

대결하는 둘을 감시하듯 인근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다.

정신 사납게 씨리.

그 간단한 불만을 내뱉을 시간도 없이 전투는 시작됐다.

챙!

무엇이든 베어내는 카르세리안 레이소가 막히며 끔찍한 금속음을 터트렸다.

페이 링과 카르 4세의 첫 격돌!

쌍둥이처럼 똑같은 두 자루의 흉포한 절단기는 순식간에 2차, 3차, 4차 공방전까지 이어졌다. 전세는 시작부터 중국 측이 유리했다.

빠르고 경쾌하다.

군더더기 없는 최적의 동작으로 움직이는 여걸(女傑) 페이 링은 비디오카메라를 10배쯤 빠르게 재생한 것처럼 움직였다.

그에 반해 카르 4세는 굼떴다.

폭풍에 휩쓸린 돛단배처럼 이리저리 비틀거린다. 오른쪽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막으면 왼쪽으로 쭉 밀려나고, 왼쪽을 막으면 오른쪽, 앞이면 뒤, 뒷면 앞….

그래도 여전히 살아있다.

심지어,

버티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옷이 넝마가 됐어도 몸은 멀쩡한 카르 4세랑 달리, 페이 링은 약간 흐트러지고 베인 게 전부인 전투복 사이로 피가 베어져 나오고 있었다.

처음으로 둘의 거리가 벌어졌다.

참았던 숨을 내뱉듯 크게 내쉰 소년이 말했다.

“재생력 빼면 5종이라고 해도 믿겠네.”

“큭. 괴물….”

중국 측의 표정은 처음이랑 달리 좋지 못했다. 한국 측이라고 좋은 건 아니었다. 모두가 입을 쫙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저걸 막아?

페이 링의 공격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그 신속하고 강한 공격은 미리 앞서서 기다리고 있던 카르 4세의 칼날에 전부 막히며 무산됐다.

검술 도장에서 벌이는 수련 같았다.

스승(카르 4세)이 ‘내가 검을 내미는 곳을 쳐라!’라고 지시하면 제자(페이 링)가 ‘네! 이제 칩니다!’라고 대답하며 성실하게 따르는 것처럼.

미호 첸의 옆에 앉아 있던 시링 팽은 저 상황을 잘 알고 있다.

‘나랑 똑같아.’

모든 생각을 읽힌다.

다른 점이 있다면 피할 시간이 없어서 대등한 무기로 공격을 흘리거나 막는다는 정도일까. 속옷만 베었듯 봐주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푹신한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관람 중이던 선지혜는 웃고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첸지 죠가 영상통화 너머로 말했다.

(회장. 어떻게 이게 가능합니까.)

(뭐가요?)

(카르 4세는 무언가 이상합니다.)

이상하다?

국가주석은 본인이 말하고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순수한 사람의 몸뚱이로 버티고 있는 소년이 이상하다?

그걸 의심하는 자신이 더 이상했지만, 이상하다는 표현보다 이 상황에 더 어울리는 어휘나 묘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게 내가 말했잖아요, 확신하지 말라고.)

(이건 확신하고 말고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가더발트 계약자는 당장 무기만 바꾸면 5종 괴수도 상대할 수 있단 말입니다!)

중국 본토는 지금 난리가 났다.

페이 링의 지나치게 빠른 움직임을 본 시청자들은 처음에 ‘뭐지?’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비열해!’로 변하며 온갖 욕설과 야유를 퍼붓고 있었다.

대결이 장기화한 탓이다.

중국은 압도적인 힘으로 시청자들이 눈치채기 전에 카르 4세를 죽이고 요란한 축배로 의혹을 날려버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감추긴커녕 가더발트가 탄로 나기 직전이다.

정보부에서 ‘도핑’이란 여론조작을 시도하고 있지만, 시원찮았다. 도핑으로 저런 신들린 움직임이 가능했으면 남성의 입지가 지금처럼 낮지 않았을 것이다.

(주석은 크게 착각하고 있어요.)

(뭐가 말입니까.)

첸지 죠는 힘없이 반문했다.

무인(武人)의 ‘신성한 대결’에 끔찍한 괴수를 투입했다는 비난으로 정부와 본부의 모든 부서가 마비되기 직전이었던 탓이다.

더 악몽 같은 사실은, 저러고도 지게 생겼다는 점이다.

당장 시합을 중지하라고 난리였지만, 이건 외부에 알려진 것과 달리 순수한 ‘친선전’이 아니다. 그래서 중단하고 싶어도 못한다.

(어째서 카르 4세를 4급 사냥꾼이라고 단정하시죠?)

(......)

(무기가 너무 약해서 4급에 머무는 것뿐이에요. 벌써 잊으셨나요? 개구리 한 마리에 쩔쩔매던 그가 겨우 장갑 하나 바꾸자마자 4종의 포위마저 썰어버렸다는 사실을.)

(어찌….)

할 말이 없다.

중국 정부는 카르 4세를 과소평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한국인들이 그를 ‘염소 젖 짜는 양치기 소년’ 정도로 취급할 때도 말이다.

그런데 그조차도 과소평가한 거였다.

어떻게 저런 ‘죽지 않는 사냥꾼’이 탄생할 수 있을까?

와이츠의 비밀병기라는 허무맹랑한 의견을 농담으로 치부하며 묻어놨는데 그 보고서를 다시 꺼내봐야 할 것 같았다.

아니, 그건 나중 문제다.

가더발트 문제가 아직 남았고 여전히 생방송 중이다.

(죠죠 아저씨. 저는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말이 안 통하는 벌레를 상대하는 게 얼마나 짜증 나는 일인지 아실 거예요.)

(그렇습니다.)

벌레인가.

따지지 않기로 했다.

(예정대로 무림을 흡수하고 실각하지 않도록 도와줄게요.)

(...무엇을 바라십니까?)

(이미 받았어요.)

첸지 죠는 영상통화를 마치자마자 선지혜의 말을 곱씹었다.

이미 받았다? 무엇을 받았다는 거지?

회장이 에쏘드를 노린다는 분석도 있었지만, 그 에쏘드 ‘메리’는 평소처럼 계약자 ‘우이 펑’ 옆에 있었다. 그리고 현재는 대결을 조용히 관람하는 중이다.

카르 4세는 ‘에쏘드 적임자’가 아니다.

어제 만찬에서 모두가 확인했다는 보고를 받는 직후에 얼마나 시원섭섭했던가.

첸지 죠는 점점 미궁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기분은,

카르 4세를 상대 중인 페이 링도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나는 모든 걸 희생했는데!’

그 각오로 내공은 과거보다 배 이상 강해졌고, 가더발트로 여성의 신체적 한계를 뛰어넘고 남성마저 압도하는 힘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 결과가 이거라니?

거북이가 토끼를 농락하는 격이었다.

가더발트가 상처를 속옷으로 동여매서 출혈을 억제하고 있지만, 세계에서 3번째로 날카로운 흉기에 베인 근육과 혈관이 회복되는 건 아니다.

패색이 짙어져서 그런 걸까?

이 ‘발칙한 속옷’이 딴마음을 품고 있는 게 느껴졌다.

이해할 수 없지만, 가더발트는 ‘카르 4세’의 몸을 숙주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남자인데?’

그건 아무래도 좋다.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서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상처를 지혈해주고 있는 가더발트가 계약을 파기하고 빠져나가는 순간, 모든 상처가 한꺼번에 터지며 죽음을 맞이하리라.

한 남자가 자신을 그렇게 몰아붙였다.

무서운 인간….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싸움에서 냉혈한이니 인정머리 없느니 같은 소리는 안 한다. 하지만 저 무미건조한 표정과 눈빛은 뭘까.

담담하다.

당연한 결과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얼굴이다.

“그, 그만….”

죽을 각오로 임했지만, 살 수 있다면 살고 싶다.

스승님을 배신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대로는 승산 없는 개죽음이다. 살아서 용서를 구하고 벌을 받는 게 낫지 않을까.

항복하고 싶다.

페이 링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하지만 거의 모든 근육이 파열된 그녀의 의지는 몸에 전달되지 않았다. 계약자가 아닌 숙주처럼 가더발트에게 끌려다니기 시작했다.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말하려고만 하면 예민한 부위를 간질이거나 고통을 줘서 차단한다.

“역시, 괴수. 포기를 모르는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으며 카르 4세가 말했다.

피로하고 지치긴 했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이것도 부양가족 버프?

이렇게까지 뛰어날 줄 알았으면 진즉 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찜찜한 부분이 남아있다.

부양가족이 있다는 ‘책임감’은 정신적인 강함이다.

정신적인 변화나 성숙이 간접적으로 육체에도 영향을 준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극적일 수 있는지 긴가민가했다.

...아무렴 어때.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지는 거다.

“아흨!”

페이 링은 비명을 내질렀다. 그녀는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짠다.’는 표현을 조금 왜곡해서 실제로 겪고 있었다.

살아있는 속옷이 가슴을 꽉 쪼이며 폭발적인 힘을 쏟아냈다.

앙그류 그랑모리의 물리충격 흡수능력은 85%까지다. 여태는 그 15%를 무시해도 될 수준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카르 4세의 몸이 붕 떠올랐다.

보통은 여기서 무게중심을 잃고 흔들리지만, 그는 아니었다. 몸이 이렇게 될 줄 미리 알았다는 듯이 차분하게 이조차도 [반격]에 이용한다.

가더발트도 안다.

몇 번을 이런 식으로 당했는데 모른다면 괴수로서 실격이다.

“너!!”

처음으로 카르 4세의 입에서 당혹감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터졌다.

쭉 완벽하게 [예측]했는데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가더발트가 계약을 깨고 일방적으로 페이 링의 몸을 움직인 탓이다. 그래서 미세한 빈틈이 생겼다.

허공에 뜬 소년을 향해 아래서부터 훑듯이 카르세리안 레이소를 사선으로 올려친다. 이 일격을 허용하면 허벅지가 양단되고 후속타로 죽음이다.

하지만 그건 페이 링도 마찬가지다.

이건 일종에 하단 베기.

저러면 그녀의 몸도 무방비상태로 노출된다. 그래서 카르 4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이건 계약자의 목숨을 버리는 양패구상 전략이었던 까닭이다.

‘정말 몹쓸 괴수군.’

그러나 금세 차분해졌다.

꽤 괜찮은 수였지만 검술을 제대로 모르는 괴수의 주먹구구식 공격이 통할만큼 카르 4세는 만만하지 않다.

그는 얼추 14년 동안 [반격]만 연구한 [반격]의 달인!

부담스러운 ‘무거운 여자친구’를 크고 강하게 역방향 사선으로 휘둘렀다.

그 마법 같은 한 수에, 허공에 붕 떠 있던 소년의 ‘가벼운 몸’은 외부에서 힘을 받은 것 같은 비현실적인 방향으로 움직였다.

검으로 막지 않으면 안 되는 하단 베기를 피했다.

그리고 [반격]이 완성됐다.

카르 4세의 카르세리안 레이소는 페이 링의 ‘젖가슴’만 횡으로 벴다.

가더발트만 노린 한 수!

응급처치를 잘하면 여자는 살지도 모른다.

“뭐?”

손맛이 이상하다.

벨 때마다 느껴졌던 가더발트 특유의 저항감이 안 느껴졌다.

브래지어 역할을 하던 녀석은 어디로?

“아아아앜!”

페이 링이 비명을 질렀다. 가슴뿐 아니라 온몸의 상처가 한꺼번에 터진 탓이다.

다 끝난 게 아니었다.

여걸의 아름다운 무림 의상이 갈기갈기 찢기며 요요한 칠흑빛을 띤 비단 조각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하나로 합체했다!

‘가터벨트(garter belt)…?’

< [15장-3] 이사는 말없이.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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