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장-2] 이사는 말없이. >
괴수의 눈에 보이는 ‘한무일’이란 인간은 이랬다.
성품과 성질은 수컷 같은데 암컷 원숭이! 외형과 특징은 암컷이 아닌 것 같은데 또 암컷 원숭이!
이건 도대체 뭐하는 암컷이지?
온몸에서 못생긴 생물 고유의 지독한 악취가 풍긴다. 그리고 생식기는 수컷이 또 얼마나 드나들었는지 구제불능(?) 수준조차 넘어섰다.
결론은 ‘어린 암컷’이다.
100번 양보해도 ‘아름다운 숫처녀’는 아니다.
그렇다고 무시 또한 할 수 없다.
“저 여자, 굉장히 위험해요.”
에쏘드는 카르 4세를 보며 계약자에게 경고했다.
털 없는 암컷 원숭이뿐 아니라 메이가 아는 모든 원숭이를 통틀어서 가장 위험했다.
저 여자(?)에게 살해된 괴수들의 원한이 느껴진다.
사냥꾼들이 경계하는 [업보]였다.
그 숫자도 적지 않지만, 괴수들이 죽기 직전부터 직후까지 품고 있었던 울분과 공포, 절망, 당혹 등의 마이너스 감정이 진하게 베여있다.
어? 내가 왜 죽었지?
이, 이럴 순 없어!
뭔가 크게 잘못됐다!
사람은 무엇이든 숫자를 나열한 성적표 결과로 평가하지만, 괴수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경험자의 평가’로 사물을 판단하다.
분명 약한데 강하다.
그렇다면 강한 것이다. 사족은 필요 없다.
“맞아. 위험한 여자지.”
에쏘드 계약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메이는 카르 4세를 가리키며 경고했지만, 우이 펑은 그의 오른편에 앉은 ‘선지혜 회장’으로 해석했다.
이건 사냥꾼의 [예측]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누가 봐도 남자인 카르 4세를 여자로 착각했다는 ‘정보’가 없는 한, 천하의 프로사냥꾼도 오판할 수밖에 없다.
우이 펑은 식사에 열중했다. 맛이 더 좋아진 것 같다.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 메이는 ‘위험한 여자’를 다시 한 번 쳐다봤다.
남자였다면….
그때였다. 옆의 소녀가 말했다.
“아저씨. 이거 안 드세요?”
“...먹고 싶어?”
“네.”
“치즈케이크라는 거야. 후식으로 맨 나중에 먹는 거지. 아저씨도 좋아하지만, 성장기인 은비에게 더 필요하니 줄게.”
그 반대편에서 ‘완전 아빠잖아! 동정주제에.’라는 폭언이 날아왔다.
이후에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에쏘드의 관심은 이미 딴 곳에 있었다.
간과할 수 없는 단어를 들었다.
‘아저씨라고?’
한국어에 능숙하다고 자부하는 메이다.
우수한 ‘용사의 정령’이라면 ‘검밖에 모르는 용사’를 대신해서 모든 나라의 문화는 힘들더라도 언어쯤은 익혀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저씨.
남자에게 쓰는 호칭이다.
혹시….
확인해서 손해 볼 건 없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당장은 아니다. 그녀는 ‘용사를 모시는 정령’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째선지 즐거워 보이는 ‘나의 용사님’에게 충실할 때다.
확인은 우이 펑이 잠든 시간에 몰래 해도 늦지 않다.
쏴아아아아!
대동강 물줄기가 시원하게 떨어져 내렸다.
무일은 샤워기 밑에서 찬물을 뒤집어쓰며 힘껏 기지개를 켰다.
만찬을 마치고 ‘성장기에는 일찍 자야 해!’라는 논리로 최은비에게 조금 이른 수면을 강요했다. 하지만 무서워서 잠이 안 온다고 벌써 반항?!
어쩔 수 없이 소녀가 누운 간이침대 옆에서 근육운동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단순한 반항이나 생떼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금방 잠들 줄 알았던 최은비는 카르 4세가 녹초가 돼서 맨바닥에 쓰러질 때쯤 돼서야 간신히 잠들었다.
“찬물도 좋지만, 이럴 때는 온천이 최고인데.”
수십 명이 한꺼번에 써도 될 정도로 넓은 샤워장에서 알몸으로 혼잣말하던 무일은 바로 옆에 세워둔 여자친구를 뽑아들었다.
그리고 느릿느릿 휘둘렀다.
카르 4세는 검보다 총에 적합한 체형이다.
애니메이션과 영화에서는 가벼운 몸무게가 순발력을 올리는 데 도움이 되지만, 그건 맨몸일 때의 얘기다.
실제로는 ‘검의 무게’에 질질 끌려다니게 된다.
검로(劍路)에 따라 몸의 무게중심이 쏠리는 걸 최소화하려면 카르 4세는 남들보다 몇 배는 더 공들여야 한다.
무겁다. 버겁다.
그만 내려놓으라는 유혹마저 응원처럼 들린다.
휘익!
혼자서 수련하는 것처럼 보이던 소년이 기습적으로 몸을 틀어 샤워장 벽을 벴다.
방금까지 근육운동으로 지친 그가 ‘쇼(show)’를 한 이유였다.
중국 측에서 침투시킨 모짜리나 바글버글?
멀리서 조종하는 감시카메라 비슷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 벌레가 환풍기도 아닌 벽을 뚫고 침투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막 진지해지려는데…….
“우와아앗?! 하푸! 푸웁!”
벽과 함께 베인 수도관에서 물이 터져 나왔다!
물벼락 맞은 카르 4세는 물기도 못 닦고 도망치듯 후다닥 샤워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잘못을 시인하기 위해 서둘러 스마트폰부터 찾았다.
그래서 보지 못했다.
카르세리안 레이소에 묻은 ‘은색 피’가 물줄기에 씻겨 배수구로 빠져나가는 광경을.
“카르 4세. 달밤에 체조는 적당히 해라.”
경비대장 임진철은 터진 배관을 잠그는 인부들을 감독하며 말했다.
본능대로 싸우는 자들의 최대 약점은 금전적 손실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목숨을 귀하게 여기는 건 좋지만 때로는 정도를 넘어선다.
소년은 고개는 물론이고 허리까지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MID 기술이 발전했어도 벽을 투시하는 감시카메라는 없어. 음. 꼭 그렇지도 않은가. 하고자 한다면 가능하긴 하겠네.”
“그, 그렇죠?”
“하지만 그건 사람 머릿수 파악하는 정도다. 그리고 첩보위성으로도 할 수 있는데 굳이 구차한 장비를 동원할 필요는 없지.”
중국의 MID 신기술이란 가정은 없었다.
그런 쪽으로 관심 많은 ‘일본의 용신’이라면 또 모를까.
“예민했던 모양입니다.”
“그래. 그럴 거야.”
한국과 중국의 관계는 ‘탐색전’ 이후로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2종 괴수 가더발트.
규칙에 어긋나진 않지만 엄연한 반칙이다.
중국 측은 선수의 장비를 끝까지 공개할 수 없다는 태도로 일관 중이라서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다.
평범한 속옷이라고 발뺌하면 증명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실권자나 다름없는 특공대장 선지혜와 8종 계약자 박선영의 느긋한 태도가 아니었다면 진즉 멱살잡이가 벌어졌으리라.
『비책이 있을 거야!』
그런 믿음으로 소동은 안 벌어졌다.
당연히 비책 같은 건 없다.
인간이 가더발트를 홀로 쓰러트린 사례는 없다.
물론, 계약자를 구하지 못한 ‘발칙한 속옷’은 별다른 위협이 안 된다. 하지만 굳이 계약하지 않더라도 숙주가 생기면 다르다.
녀석이 ‘1종’이 아닌 ‘2종’인 이유다.
전신을 덮은 속옷이 ‘여성의 몸’을 물리적으로 지배한다. 그리고 모든 야생괴수가 다 그러하듯 사람을 해치기 시작한다.
그때의 가더발트는 인간 여성의 형태를 한 ‘2종 소형’이나 다름없다.
육체적인 혹사로 숙주가 죽으면 다른 숙주로 옮겨탄다.
“하필 그딴 괴수랑 싸울 게 뭐냐.”
“어쩔 수 없죠. 계약자와 수호자의 상성이 안 좋길 바랄 수밖에.”
숙주가 아닌 계약자라면?
조금 다르다. 일반적인 계약 이상의 정신적인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강제’보다 ‘동조’에 가까운 상태가 되는 까닭이다.
그때의 가더발트는 강하다!
계약자가 개미 새끼 하나 못 잡는 가련한 미녀라도 3종 수준. 그리고 MID 무기를 사용하면 4종. 심지어 5종이란 말도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가더발트를 가장 잘 다뤘다고 전해지는 무림의 시조 ‘샤려 핑’은 6종 괴수까지 홀로 쓰러트렸다고 전해진다.
그 당사자가 죽어서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즉, 가더발트는 계약자의 능력을 강화해주는 ‘특수한 괴수’다.
“...승산은 얼마나 돼?”
“무조건 이깁니다.”
“카르 4세의 정확한 감이 그렇게 말하디?”
“아니요.”
무일은 고개를 저었다.
지고 이기고는 싸워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질 수 없다.
임진철이 히쭉 웃으며 말했다.
“너는 늘 죽을 생각부터 하고 싸우는 게 신조였잖아. 딸이 생기면서 마음이 변했냐?”
“그럴 리가요. 죽을 수 없으니 이길 뿐입니다.”
억지 논리였다.
하지만 그 때문에 믿음이 가는 게 왜일까?
카르 4세는 늘 이런 식으로 살아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늘 말하지만, 네 장례식은 없다.”
“서울에 돌아가면 은비의 의식주부터 초등학교 입학까지 할 일이 태산입니다. 별거 아닌 이유로 죽을 만큼 저는 한가하지 못합니다.”
“아니라더니 딸 때문이구먼.”
“동정도 못 뗀 총각에게 그런 말씀 마십시오, 대장님.”
“겨우 그걸로 정색하기는.”
겨우?!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수면을 더 줄이면 앞으로 있을 대결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에 그만두기로 했다. 졸다가 죽으면 정말 억울할 테니까.
알람도 끄고 잔 무일은 정말 오랜만에 늦잠을 잤다.
정확히 8시간.
시간상 아침도 거른 것 같다.
다행히 누군가 카르 4세 몫의 아침 도시락을 따로 빼줬다. 하지만 탁자에 놓인 도시락에는 어째선지 풀밖에 없었다.
“죄, 죄송해요…. 조금만 먹는다는 게 그만…. 훌쩍!”
“됐어. 내가 혼내는 것 같잖아.”
어째선지 도시락이 놓인 탁자 뒤편에 무릎 꿇고 있는 최은비가 눈물, 콧물을 주르륵 흘리며 이실직고했다.
매우 엄하게 자랐거나 식량의 중요성을 아는 것 같았다. 최은비가 자란 환경을 생각하면 둘 다일 확률이 높았다.
무일의 눈에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평범한 소녀로 돌아가려면 시간과 관심이 많이 필요하리라.
“아저씨. 때려도 좋으니 절 버리진 말아 주세요.”
“안 때리고 안 버려. 괜찮아. 성장기에는 많이 먹어야 해.”
몇 번을 말해도 믿질 않는 최은비에게 스마트폰을 맡기며 ‘아저씨 보물’이라고 속인 후에야 간신히 진정됐다.
보물은 안 버릴 테니 말이다.
일어나자마자 피로가 쌓인 무일은 밤새 빠진 근육을 점검했다.
...이상한데?
적게 잔 것도 아니고 무려 8시간이나 잤는데 덜 빠졌다. 13년 동안 하루도 예외 없이 똑같았던 몸뚱이를 잘못 봤을 리 없다.
달밤에 체조하고 아침을 거른 것치고는 공복감도 적다.
“평소와 다른 건….”
성장이 멈춘 이래로 13년 동안 규칙적인 생활을 해왔다. 개선의 개선을 거듭한 끝에 기계처럼 효율적이고 체계화된 패턴이 완성됐다.
육체단련이나 식생활은 최적화되어 더는 손 볼 게 없다.
달라진 게 있다면 ‘최은비’뿐이다.
무일의 스마트폰으로 유아교육프로그램(수준을 낮췄다.)을 시청 중이던 소녀는 아저씨의 복잡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제가 뭘 잘못했나요?”
“아니.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기특해서.”
“저, 열심히 배울게요!”
야무지게 대답하는 최은비를 보며 무일은 결론을 내렸다.
유쾌하지 않은 과거사 때문에 쭉 부정했던 이론.
하지만 이젠 믿을 수밖에 없다.
『부양가족이 있는 사냥꾼은 강하다!』
저주처럼 정체됐던 14년 만에 처음으로 ‘발전’이 있었던 탓일까? 올해로 9년째 다이어트에 관심 없는 ‘무거운 여자친구’가 평소보다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다.
최은비에게 잠시 ‘일’하러 다녀온다고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다.
카르 4세는 괴수를 사냥하는 반복작업만 15년째 하고 있다. 염소 젖은 부업이다, 부업! 오늘의 ‘가더발트 사냥’은 본업의 연장선일 뿐이다.
순수한 대결이었다면 조금 힘겨웠을지도 모른다. 익숙한 ‘일’이 아닌 탓이다.
하지만 사냥은 어떨까?
대기실에서 축구장으로 걸어 나왔다.
관중은 터무니없이 적었지만, 그편이 더 익숙하다.
사냥꾼은 사냥감만 있으면 된다.
“저는 심판과 공증을 맡은 카르 2세 ‘실바니아 하이로드’입니다. 영국 왕실의 자랑인 ‘카르세리안 레이소’가 불명예스러운 일에 쓰이지 않길 빕니다.”
심판관은 영국의 제1 왕위계승권을 가진 왕녀님이었다.
늙어 보이기 쉬운 백발(白髮)을 ‘순결의 상징’처럼 완벽하게 소화해낸 얼굴은 소문처럼 ‘영국의 국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었다.
하지만 너무 뛰어난 얼굴 탓에 몸매가 아쉬웠다.
그럭저럭 평균인가…?
조심스럽게 힐끔 훔쳐본 소년의 생각을 알았다면, 영국의 로열기사들이 우르르 몰려올 것이다. 그전에 월드컵경기장 어딘가에 있는 수호자가 나서겠지만.
실바니아 하이로드는 영국인들의 인기와 사랑을 한몸에 받는 왕녀인 동시에 ‘8종 계약자’이기도 하다.
사건의 중요성을 인지한 연맹에서 대단한 인물을 파견했다.
“중국의 아미파, 페이 링. 본인이 틀림없나요?”
“네.”
“한국의 특공대, 카르 4세. 이쪽은 워낙 유명해서 확인할 필요도 없겠군요.”
< [15장-2] 이사는 말없이.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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