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61화 (61/287)

< [15장-1] 이사는 말없이. >

파르나르 장편소설

괴수처럼 8

[15장] 이사는 말없이.

학명: 에쏘드(어떤 용사의 무전취식)

서식지: 불명

특징: 남자를 선택합니다.

위험도: 1종 특수

비고: 용사는 발리지 않아요~♪

***

세상에는 허무맹랑한 소문이 많다.

21세기에는 미국 NASA에서 외계인을 감췄다는 말이 나돌았고, 22세기에 벌어진 3차 세계대전은 히틀러가 일으켰다고 했다.

그 마침표는 23세기에 들끓었던 ‘괴수는 신의 벌’이란 주장이다.

당시에는 꽤 큰 주목을 받았다.

모든 신이 수천 년 동안 침묵하는 가운데 ‘신의 심판’에 관한 예언만 남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당시 최대의 종교였던 크리스트교는 괴수의 등장으로 전성기를 맞이했다.

인류가 멸망으로 치닫고 있음에도.

『2222년 2월 22일 22분 22초』

이 숫자의 중첩이 우연으로 가능할까?

괴수는, 크리스트교의 신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고 2222년이 흐른 해에 등장했다. 하지만 이뿐이라면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2월 22일 22분 22초라는 경이로운 인위성은?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괴수에게 가톨릭 교황과 추기경은 물론이고 ‘전 재산을 사회에 기부한 신자’나 ‘남을 위해 평생 봉사한 수녀’ 등도 잔인하게 살해되면서 부정됐다.

그렇다면 저 날짜와 시간은 뭘까?

그 시초를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이 나온다.

길거리에서, 공공시설에서 ‘예수 안 믿으면 지옥 간다!’를 외쳐대던 사람들이 인터넷에 싸지른 주장이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괴수에 정신없지만 않았어도 웃고 넘어갔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서남아시아에서 발호한 신이다. 갑자기 북동아시아를 편애할 이유나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편애했다면?

그 때문에 여전히 논란이 많다.

『24세기에는 무슨 소문이 있을까?』

용신(龍神)을 주축으로 과학(MID)이 크게 발전하면서 종교는 위축됐다.

종교의 강점은 ‘사후세계의 약속’인데 사람이 안 죽는다!

물론, 돈 없는 서민들은 지금도 아주 조금씩 죽는다, 아주 조금. 싸구려 노화억제제는 완벽하게 노화를 억제해주지 못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그조차도 150세 넘은 고대인 중에서만 간혹 나온다. 그들은 ‘오랜 삶에 질려서’ 안락사(安樂死)를 선택한 임종에 가깝다.

각설하고,

그런 연유로 종교는 지지부진해지고 그 빈자리를 채운 게 ‘옛날 이야기’였다.

괴수와 미녀의 만남.

그 소재를 다룬 신화, 동화, 민담이 주축을 이루며 ‘연구’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슬금슬금 기어오른 깍두기.

『용사!』

덤으로 영웅과 협객.

넌 역할이 뭔데?

24세기 초까지 학자들이 다뤘던 최대의 화두였다.

괴수와 미녀만으로 그럭저럭 잘 굴러가는 세계에서 ‘마초 남성’이 할 일은 없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라클레스쯤 되면 또 모를까, 그냥 ‘고추’는 무리다.

그 헤라클레스조차 ‘순수한 인간’이 아닌 반신(半神)이란, 현대의학으로 불가능한 유전자였다는 사실이 또 함정.

괴수를 몸싸움으로 이길 수 있는 ‘순수한 인간’은 24세기 사내 중에 없었다.

남자의 몰락이 가까워졌다.

안 예쁜 여자는 살 가치가 없다는 식의 폭언도 떠돌긴 했지만, 그래도 출산기여도가 매우 낮은 남자보다는 나았다.

MID 시스템 덕으로 뛰어난 사냥꾼이 하나둘 등장하긴 했지만, 4종 괴수부터 막히는 바람에 또 쓸모가 줄어들었다.

이대로 남자는 끝인가?

잠깐! 옛날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설의 검!』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 총을 든 카우보이가 잠깐 까불긴 했지만 그건 ‘효율성’ 측면에서 불가피하게 사용한 것뿐이다.

겁쟁이처럼 숨어서 총을 빵빵 쏴대는 용사님?

공주님도, 당사자도 원치 않는다.

사나이라면 ‘전설의 검’을 들어야 비로써 ‘전설의 용사’가 된다!

엑스칼리버(아서 왕), 가라틴(가웨인), 아론다이트(랜슬롯), 듀란달(롤랑), 아스카론(성 조지), 그람(지크프리트), 콜라다(엘 시드), 글로리우스(올라비에), 흐룬팅(베오울프), 초치검(쿠사나기), 의천검(조조)….

다른 무기류도 있지만, 검에 비할 바는 아니다.

이 많은 ‘전설의 검’이 가짜고 허구일까?

정령이 있었다.

『에쏘드』

그 이름은 ‘어떤 용사의 무전취식’이다.

어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놈’도 용사로 변신시켜주는 정령이란 뜻이다. 과거에 뭐하며 살았든 계약하는 순간부터 완전무결한 용사가 된다.

그 아무리 강대한 적을 만나더라도 물러서지 않으며, 수개월을 싸워도 지치지 않는 강인한 체력과 생명력의 용사!

그렇다고 하더라.

여기까지가 여러 나라에서 확인해준 ‘에쏘드’의 능력이다.

하지만 그 실체는 여전히 공개되지 않았다.

『에쏘드는 어떻게 생겼을까?』

24세기의 허무맹랑한 소문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가장 많은 주장은 역시 ‘전설의 검’이다. 무엇이든 벨 수 있는 검이란 해석이다. 그리고 그 뒤를 ‘바라보기만 해도 힘이 불끈불끈 솟는 절세미녀’란 주장이 바짝 쫓아오는 형국이다.

카르 4세는 여기에 답을 줄 수 있다.

작년 말에 유키 짱이 ‘일본의 에쏘드’를 보여준 덕분이다.

정답은?

『둘 다!』

이 세상에 뜬금없는 소문은 없다.

용사의 정령, 에쏘드는 둘이면서 하나다.

검과 검집이 한 짝이듯이.

더 정확히 말하면, 에쏘드는 ‘몸매가 비현실적인 미녀’가 정령의 본체고 ‘시대착오적인 구닥다리 검’이 능력이다.

중국과 일본.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든다고 말하기 어려웠다.

본체의 복장과 표정이 2차원이었던 일본보다는 3차원인 중국이 더 나았지만, 능력은 카르세리안 레이소와 유사한 일본 쪽이 더 마음에 들었던 까닭이다.

본심은 광선검(光線劍)….

안타깝게도 ‘우주 용사’는 미구현인 모양이다.

“저에게 용무 없으세요?”

치파오와 마찬가지로 중국 여성의 전통복장인 ‘한푸’를 입은 묘령의 미녀가 만찬 중에 노골적으로 소년을 쳐다보며 물었다.

중국의 무협과 역사극의 가인들이 입는 대수삼(큰 소매의 적삼)의 반투명한 옷감은, 그녀의 가녀린 어깨와 팔이 속속들이 보였다.

그리고 은실로 장식한 매화가 인상적인 순백의 치마는, 가슴 반절만 아슬아슬 걸치듯 묶어서 우월한 여성임(인간이 아님)을 강조했다.

선녀(仙女)가 있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만찬이란 표현이 무색한 개인용 도시락(반찬이 조금 풍성한)을 향해 열심히 젓가락을 놀리던 카르 4세가 응답했다.

“보통은 있느냐고 묻습니다만.”

“용무가 없는 사람에게 있느냐고 물을 정도로 소녀는 세상 물정에 어둡지 않아요.”

“...당신이 에쏘드?”

“여태 누구와 대화한다고 생각했나요.”

에쏘드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소년과 여인은 평행하게 놓인 한국과 중국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아주 멀리 떨어져서 작게 혼잣말하는 모양새였다.

원리는 모른다.

들리고 들으니 말할 뿐이다.

친동생처럼 아낀다는 윤소영을 밀어내고 무일의 오른편에 앉은 선지혜는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중이었고, 왼편에 앉은 최은비는 도시락을 조금씩 아껴먹기 바빠서 아저씨가 뭘 하든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대화는 중단됐다.

카르 4세가 아닌 에쏘드 쪽에서 방해받은 탓이다.

“메이(梅). 누구와 말하는 거요?”

수호자 옆에 앉아있던 계약자가 말을 걸었다.

절대적인 상하관계는 아니지만, 에쏘드는 용사에게 충실하다. 그것이 ‘용사의 정령’이 살아가는 목적이자 가치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에쏘드, 메이는 성실하게 답했다.

“사람이랑 얘기하고 있었어요.”

이름은 모른다.

그러니 ‘사람’이라고만 솔직하게 답했다.

“사람?”

수호자에게 용감하지 못한 ‘변변찮은 용사님’이란 평가를 받고 있는 계약자 ‘우이 펑’은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겉보기에는 아리따운 여인이지만 그 실체는 괴수인 에쏘드도, 미녀(+계약자) 외의 사람은 구별하지 못하는 건 다른 괴수와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그래도 하루 이틀 함께해온 계약관계가 아니다.

우이 펑은 ‘사람’이라고만 대답한 메이의 말뜻을 이해했다. 용감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멍청하거나 어리석은 건 아니다.

그런 남자가 국가공인(비공식) ‘4급 계약자’가 될 수 있겠는가.

“한국인인 거요?”

에쏘드가 이름은커녕 별명조차 모른다면 한국인뿐이다.

역시나 그의 [예측]이 맞았다.

“네.”

“그자가 메이의 흥미를 끌었구려.”

우이 펑은 카르 4세를 염두에 두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예측]이 틀렸다는 사실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어진 메이의 대답 탓이다.

“그자? 소녀였어요.”

“그, 그랬소? 흠흠!”

카르 4세를 보고 있다고 확신했는데 그 옆의 소녀? 만석에 참석 예정인 인물 리스트에 없어서 부랴부랴 조사했던 여자아이였다.

이름이 ‘최은비’였던 걸로 기억한다.

삐쩍 마른 몸과 홀쭉한 얼굴을 한 번 보고는 정보과에서도 신경 껐지만, 카르 4세와 마찬가지로 4급 사냥꾼인 우이 펑의 눈썰미는 소녀의 ‘장래’까지 내다보고 있었다.

최소한 계약자.

이것이 카르 4세의 무감각해진 평가였다면,

못해도 7종 계약자!

개인의 심미안 차이로 우이 펑은 더 높게 어림짐작했다.

‘카르 4세는 용사가 될 재목이 아니었나?’

에쏘드에게 ‘변변찮은 용사님’이라는 따끔한 지적을 받고부터 카르 4세를 경계해온 우이 펑은 팽팽했던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있었다.

괴수의 계약은 언제나 일방통행이다.

그래서 계약을 깨는 것도 제멋대로다.

에쏘드는 ‘1종 특수’답게 계약 조건도 ‘아~~주’ 느슨해서 특별히 하자가 없으면 ‘아무 남자’나 계약할 수 있다.

하지만,

쉽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더 뛰어난 남자가 보이면 말도 없이 옮겨탄다!』

중국 정보과에서는 89%란 매우 암담한 확률로, 에쏘드가 카르 4세를 따라간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만찬을 ‘탐색전’ 이후로 박박 우겼다.

카르 4세가 ‘카르세리안 레이소, 앙그류 그랑모리’ 그 둘만 쓰기로 결정된 후라면 설사, 에쏘드와 계약하게 되더라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안전장치는 또 있다.

카르 4세와 에쏘드의 물리적인 접촉을 차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용사의 정령, 그 주체인 메이는 대한민국의 ‘한무일’보다 중국의 ‘우이 펑’을 더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그렇게 판단한 중국 측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강하다고 꼭 ‘용사’인 건 아니다.

‘정보과의 판단이 틀렸군.’

‘카르 4세는 에쏘드 적임자가 아니었어.’

‘죽여도 아쉽지 않겠네.’

중국 정부에서 참석한 최고 귀빈인 괴수대응본부 정보과 과장 ‘위진 창’만이 눈살을 찌푸리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메이가 카르 4세를 무시했다고?

정의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내던지는 사나이(호구)가 용사가 아니면 도대체 누가 용사란 말인가!

승산부터 따지며 몸을 사리는 우이 펑?

중국의 두뇌라고 불리는 위진 창은 무언가 착오가 있다고, 무언가 놓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아닌가?

바로 눈앞에 뻔히 보이는 상황에 자신감이 조금씩 옅어졌다. 그리고 그 빈자리를 자부심이란 훼방꾼이 채웠다.

자국민이 더 우수하다는 결과를 싫어할 충신(忠臣)은 없는 까닭이다.

“스승님.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그래. 나를 슬프게 하지 말아다오, 페이 링.”

박선영을 노려보고 있는 미호 첸에게 엉거주춤 인사한 가더발트 계약자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금남의 성역, 아미파에서 태어나고 자란 미녀의 청순한 매력이 마음에 쏙 들었는지 수호자는 그녀를 한시도 가만 놔두질 않았다.

중국의 선수 ‘페이 링’이 조용히 떠났다.

카르 4세는 그녀의 뒷모습이 안 보일 때까지 지그시 쳐다봤다.

‘몹쓸 괴수군.’

그도 사나이인데 ‘용사의 정령’에 관심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정의’보다 우선은 아니다.

반대로 메이는 그런 ‘여성 용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말 아리송하네요.’

< [15장-1] 이사는 말없이.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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