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장-5] 정치는 나비처럼. >
팔뚝 하나가 최희망 몸통보다 두꺼운 임진철이 말하니 반박 거리도 안 떠올랐다.
경비대장은 소녀가 누구냐는 구차한 질문은 일절 하지 않았다. 서울 밖에서 주운 아이라면 그 태생이 뻔한 까닭이다.
그래도 짧은 소감을 해보자면?
불가능한 녀석이 ‘불가능한 생명’을 주워왔다.
“놀리실 시간 있으시면 시신이라도 정리해주세요. 여기서 가깝습니다.”
“...혹시, 그런 거냐.”
“그런 겁니다.”
“하여간, 너의 그 균등한 오지랖은 여전하구나. 카르 4세가 법 좀 어긴다고 왈왈 짖은 녀석도 없는데.”
“제 오지랖에 대장님도 조금만 보태주시죠?”
“오냐.”
서울에서부터 운반해온 대형펌프로 대동강 물을 끌어올려 청소 중인 올림픽경기장은 빠르게 정비되고 있었다.
그렇다고 모든 구역을 손보는 건 아니다. 그럴 시간도 없고.
양측 선수대기실과 샤워장, 화장실, 탈의실, 귀빈석, 이동통로 정도다. 나머지는 사람이나 동물의 사체가 있든 말든 완전히 방치된 상태였다.
이것저것 신경 쓴 게 아깝지만, 끝나면 빠르게 철수할 예정이다. 괴수는 사람이 몰린 장소를 공격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공격받으면 평양에 숨어 사는 추방자들이나 불청객 모두에게 안 좋은 결과만 불러올 뿐이다.
“아저씨, 어디 가세요?”
최희망이 카르 4세의 옷깃을 잡았다.
옷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소녀의 허물을 벗기고 수도꼭지와 샤워기, 샴푸, 비누 등의 사용법을 막 가르쳐준 참이다.
수치심 같은 걸 모르고 자랐다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앞으로도 쭉 그렇게 살면 여러모로 곤란하다.
다른 이유도 있다.
“나도 쉬어야지. 네 옷도 구해봐야 하고.”
“아저씨처럼 깨끗한 옷이요?”
“이건 최희망이 당연히 누려야 했던 권리라고 할까. 어린이용 옷을 어디서 구해야 좋을지 벌써 난감하지만.”
“권리….”
태어날 때부터 험한 꼴을 많이 보고 자라서 그런 걸까?
최희망은 회복과 적응이 무척 빨랐다.
벌거벗은 소녀는 삐쩍 마르긴 했지만, 피부에 흉터나 반점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래도 나이는 여전히 짐작할 수 없었다.
“나이가 몇이지?”
“올해 열둘이요.”
“헐. 내 [예측]이 완전히 또 틀리긴 참 오랜만이네. 못 먹고 자란 아이의 표본은 처음 보니 어쩔 수 없나.”
“아저씨는 몇인데요? 스물?”
“남들보다 3, 4년쯤 높게 평가해줘서 고맙다만, 어째선지 하나도 안 기쁘네. 스물일곱이다.”
곧 서른인데 여전히 꿈도 희망도 안 보인다.
한숨을 안주 삼아 과일주라도 한 잔 들이켜고 싶다. 취해서 여자친구랑 춤추면 바로 총살형이라 무리지만.
“서울 사람들은 늙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정말이었네요.”
“전부는 아닌데.”
“아저씨랑 계속 있을 수 있어요?”
“...내가 밉지 않아?”
“많이 밉지만, 엄마가 아저씨 손을 절대 놓치지 말라고 했어요. 놓치면 오빠들에게 붙잡혀서 엄마처럼 매일 아프게 된데요.”
안 좋은 얘기는 그만하기로 했다.
서울에서 추방된 범죄자들이 ‘우리 예쁜 희망이~. 아저씨 말고 오빠라고 부르렴~.’ 같이 말하며 음흉하게 웃는 광경이 쉽게 상상 됐다.
무일은 ‘아저씨’로 만족하기로 했다.
7종 계약자 윤소영이 ‘무일 오빠!’라고 할 때마다 심장이 쪼그라들면서 수명이 하루씩 줄어드는 기분인데 오빠는 무슨.
“내가 늦으면 수건이라도 두르고 있으렴.”
“네.”
“...그리고 혹시라도 누군가 찾아와서 물으면, 카르 4세가 여기 있으래요. 라고 말해.”
“카르 4세?”
“아저씨 별명이란다. 그러면 대충 알아들을 거야.”
결과적으로 무일은 최희망의 옷을 구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굴욕적이게도 가장 비슷한 체형인 그의 옷을 입혀야 했다.
사내 의상을 입혀놔도 얼굴에 ‘소녀’라고 쓰인 느낌이다.
몸에 살이 좀 붙고 나와야 할 곳이 나오면 아무리 못해도 계약자는 될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사고만 안 치면 장래는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어디까지나 카르 4세의 [예측]일 뿐이고, 현재는 정말 볼품없는 ‘미운 오리 새끼’나 다름없었다.
미움은 안 받는 것 같지만 글쎄….
“선배는 늘 상상 밖으로 움직이는걸~☆”
“무일 오빠! 저 애는 누구예요? 설마! 숨겨둔 딸?!”
선지혜와 윤소영을 차례차례 상대하고 나니 컨디션이고 뭐고 없었다.
그나마 미소녀 쪽은 이번 대결의 위험성을 알기 때문인지 금방 물러나며 ‘오빠! 꼭 이기셔야 해요! 꼭!’이란 말로 기운을 북돋아 줬다.
황천으로 가버리면 펑펑 울 기세다.
아무튼, 한 명은 해결됐는데 연상임에도 철없는 아가씨가 문제였다.
“키워서 잡아먹겠다는 심보?”
“나를 어떻게 보는 거야!”
“난봉꾼.”
일본산 전파녀와 중국산 촌년 다음에는 줘도 안 먹을 영계백숙?
내 남자의 심미안이 점점 떨어지는 것 같아서 안타까웠다.
“야, 선지혜. 최소한 동정은 떼게 해준 후에 비난해라.”
“...이건 프러포즈? 남자는 죽기 직전에 가장 성욕이 왕성하다더니 정말인가 보네. 아주 좋은 정보. 바로 입력.”
“얘가 뭐래?”
“응. 내가 지금 떼줄게. 피임약은…. 괜찮아. 임신하면 낳아서 미아보호소 같은 곳에 몰래 버리면 간단히 처리되니까.”
“됐어! 전력으로 사양한다!”
어머니가 될 자세가 전혀 안 보인다!
모성애 넘치던 ‘최희망 엄마’가 갑자기 불쌍해졌다.
사고가 완전히 글러 먹은 여자도 이렇게 잘사는데 딸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한 여자의 결말은, 속된말로 ‘못쓰게 된 걸레’나 다름없었다.
선지혜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 귀여운(가증스러운) 표정에도 무일은 눈 하나 깜빡 안 했다.
“선배. 이따가 오후에 상대전력을 볼 거야. 자정에는 선지혜의 알몸을 점검할 거고.”
뒷말은 깔끔히 무시하기로 하자.
카르 4세는 턱을 쓰다듬으며 스마트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흠. 아직은 넉넉하네. 탐색전인가.”
“응.”
대결은 공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싸우기 전에 상대방 선수와 한 번 상견례 시킨다. 그리고 그때, 서로에게 보여준 장비만 전투에서 사용할 수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싸우는 것보다는 공평하다고 할까.
모르는 편이 좋을 때도 있지만.
보유한 무장(武裝)에서 압도적인 차이가 난다면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그걸 알려주려고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응. 사실은 그 뒤에 있을 만찬에 대해 말해주려고 했어.”
“만찬이라…. 또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라니, 실례잖아. 나를 어떻게 보고.”
“알면서 뭘 물어.”
“맞아. 난 예쁘게 착한 후배.”
“......”
카르 4세는 지적하길 포기했다. 어린이의 정서에 매우 안 좋은 영향은 줄 선지혜를 최대한 빨리 쫓아내려면 언쟁을 안 하는 게 상책이다.
벌써 영향을 받고 있는 것 같다.
최희망은 선지혜의 비현실적인 이목구비(耳目口鼻)부터 환상적으로 뻗은 다리 끝까지 쭉 내려다보며 선망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여자는 외모가 전부인 건 맞지만….
이 오묘한 기대가치를 어떻게 설명해줘야 좋을지 벌써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에쏘드가 올 거야.”
“...정말로?”
“응.”
“내 상대는 아니겠지?”
“그러면 좋겠는데 일단 아니야. 만찬 때만 보게 될 확률이 높아.”
“그런가.”
“선배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정말 많이 노력했어. 나도 그 일본산 전파녀처럼 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한국에는 에쏘드가 없는걸.”
카르 4세는 선지혜의 눈동자를 빤히 쳐다봤다.
공주님은 용사님의 뜨거운(의심하는) 시선에 사르르 얼굴을 붉히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무일은 먼저 눈을 돌렸다.
그녀가 부정을 저지르려는 것 같진 않았다.
반칙이라면 중국 측에서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는 진한 [예감]을 받았다.
“고마워.”
“응. 힘들게 만든 기회니까 꼭 봐.”
“그래.”
“혹시라도 죽으면 에쏘드도 나랑 같이 선배 옆에 묻어줄게.”
대한민국 멸망 기념품 겸 전리품으로.
카르 4세는 진저리치며 외쳤다.
“반드시 살 테다!”
영락없이 ‘사랑에 빠진 소녀’ 같은 분위기로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선지혜. 하지만 무일의 눈에는 ‘오랜만에 잘해주는 계모’처럼 보였다.
꿍꿍이가 없다니 웬일이지?
태양신에게 버림받은 게 아니라면 감은 틀림없는데.
“저는 세상에서 엄마가 가장 예쁜 줄 알았어요.”
푹신푹신한 대기석에 앉아서 얌전히 무일이 준 호박죽을 떠먹던 최희망이 말했다.
평양이 세계 전부였던 소녀에게는 당연할지도 모른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먹어보지 못했던 호박죽의 ‘단맛’부터 모든 게 새로웠다.
무일은 머리를 긁적였다.
뭐라고 답해주는 게 아이의 정서에 좋을까?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만 보면 세상에서 가장 예쁠 거다.”
“아…. 엄마….”
그 여인이 무슨 사유로 추방된 건지는 모르다. 불임수술을 받지 않은 것만 보면 사랑을 맹신한 탓일 가능성이 높지만.
그러고 보니 애 엄마의 이름도 듣지 못했군.
딱히 중요할 것 같진 않았다. 그리고 아이의 사고가 계속 ‘엄마’ 중심인 건 좋지 않다. 살아있다면 또 모르겠지만 이런 식이면 과거에 집착하게 된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육아해본 적이 없는 무일은 쉬운 것부터 하기로 했다.
“우선 네 이름부터 바꾸자.”
“이름이요?”
“고대에는 어땠을지 몰라도 요즘에는 이름에 ‘희망’을 붙이지 않아. 희망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나 쓰는 거니까. 앞으로 학교도 다니고 친구도 많이 사귀어야 하는데 지금 이름이면 문제아로 의심받아.”
최희망을 낳은 어미는 분명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딸은 그녀의 ‘희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안 된다. 사람은 희망만 기대며 살 수 없는 탓이다.
“그럼, 아저씨. 뭐가 좋을까요.”
엄마는 이 아저씨의 말을 무조건 따르라고 했다.
당부였지만 소녀에게는 절대적인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희망아, 서울은 이렇단다.
그런 식으로 엄마가 설명해준 ‘학교’나 ‘친구’ 같은 불확실한 단어가 들렸지만,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니 무조건 따르는 게 정답일 것이다.
“...현재 쓰고 있는 ‘최’ 씨는 누구에게 받은 거니?”
“아빠요.”
애증(愛憎)인 걸까? 악마 같은 놈이라고 욕하면서도 딸의 성을 바꾸지 않은 건.
그렇다면 그 뜻을 존중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이름만은 안 된다. 요즘 시대에 ‘희망’은 불길한 단어다.
뭐가 좋을까?
고민하던 무일은 모녀(母女)를 만나기 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신드버드에 매달린 채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좋은 기억은 아니군.
“최희망의 새 이름은, 최은비.”
“무슨 뜻이에요?”
“은색 비둘기.”
카르 4세의 작명센스는 이게 한계였다.
하지만 ‘감’이 가미됐다.
소녀는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엄마는 그 거대한 새가 떨어지는 광경을 보시자마자 저를 데리고 위험한 집 밖으로 나가셨어요. 마침내 사냥꾼이 왔다면서요.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다시 없을 거라고도 하셨죠.”
“...인연의 끈이네.”
별생각 없이 지은 이름이 갑자기 심오해졌다.
애만 좋다면 된 거지.
스마트폰으로 ‘서울인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100가지 상식!’이란 앱을 내려받은 무일은 ‘최은비’에게 넘겨줬다.
받아든 소녀는,
“에...? 꺄아아아!”
얇은 판이 꿈틀거린다고 비명을 지른 사건은 생략하도록 하겠다.
급기야 엉엉 우는 최은비를 어찌어찌 달래고 기진맥진해진 몸으로 대기실을 빠져나온 카르 4세는 축구장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여인을 보았다.
대결 상대였다. 죽여야 하는.
1세기 동안 전혀 관리가 안 된 축구장의 잔디가 무릎까지 덮었다.
하지만 그런 건 정말 사소한 문제다.
진짜 문제는 상대가 ‘자연미인’이었단 점이다.
‘이건…. 반칙이라고 하기도 뭐하네.’
누군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여성의 풍만한 젖가슴이 제멋대로 흔들리고 눌린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인 까닭이다.
무일은 순식간에 [예측]했다.
규칙의 맹점, 자연미인, 중국의 수호자, 비열한 수법….
그 모든 걸 종합했을 때,
나올 수 있는 답은 하나뿐이다.
“발칙한 속옷, 가더발트. 계약자가 죽더라도 위험하진 않겠군요. 무기는…. 카르세리안 레이소. 과연, 그렇게 나오는군요.”
“...그쪽은 카르세리안 레이소, 앙그류 그랑모리. 역시나 그 둘뿐인가요.”
“네. 그쪽은 더 숨겨두신 수가 있습니까?”
“있더라도 가르쳐줄 수 없어요.”
침착하려고 노력하는 가더발트 계약자의 말투는 딱딱 끊겼다.
수호자가 시도 때도 없이 몸을 자극한 탓이다.
무기는 똑같이 카르세리안 레이소. 겉보기에는 동등한 ‘검 vs 검’의 공정한 대결이다.
까보면 ‘인간 vs 괴수'의 싸움이지만.
계약자는 아름다운 몸을 희롱당하는 꼭두각시일 뿐이다. 본격적으로 싸움이 시작되면 그녀의 몸을 움직이는 건 가더발트일 것이다.
『인간을 조종하는 괴수』
알게 모르게 찾아보면 주변에 많다.
은밀해서 모를 뿐.
그 대부분은 연약한 계약자를 놔두고 ‘강력한 사냥꾼’을 하수인처럼 조종한다. 그러니 머리가 박힌 사냥꾼이라면 망설일 필요가 없다.
발견 즉시 멸살!
카르 4세의 눈동자가 무시무시하게 번뜩였다.
“내일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게 아쉽군요.”
이건 신념을 담은 대결이 아니다.
그냥 사냥이다.
괴수처럼 잔혹하게, 인정사정 봐줄 필요가 전혀 없다.
더 볼 것 없다는 듯이 카르 4세는 몸을 돌렸다.
탐색전은 끝났다.
< [14장-5] 정치는 나비처럼.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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