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57화 (57/287)

< [14장-2] 정치는 나비처럼. >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질문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마녀가 얌전히 한국에 틀어박혀 있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지기 싫어서!

미호 첸과 ‘아메바 원숭이’는 박선영의 안중에 없다. 그녀가 경계하는 대상은 오직 ‘에쏘드’뿐이다.

분명, 박선영의 수호자인 ‘바람의 정령’은 강하다. 파괴력과 위험성은 여타 8종 괴수도 엇비슷하지만, 유연성과 범용성에서 엘로엘의 상대가 못 된다.

하지만 ‘용사의 정령’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바람이 아무리 거센들, 고추밖에 안 남은 사나이들의 울분과 원한을 훨훨 날려버릴 순 없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집대성된 정령!

【에쏘드 / 1종 특수】

독선적인 박선영이 경계하는 수호자는 어디에 있을까?

중국에 자연재해를 일으키며 톡톡 건드려도 나오지 않는 계약자가 어떻게 됐을지는, 굳이 국가주석의 확답을 듣지 않아도 뻔했다.

전사(戰死).

그렇지 않다면 이리 조용할 리 없다.

‘이모가 좋아할 소식이네.’

세계인들은 박선영이 보복차원에서 저지른 ‘홍콩 소멸’만 기억하고 있다. 그건 홍콩에서 종전(終戰)됐고 휴전(休戰)도 그 폐허에서 체결됐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도 그랬다.

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이라고 하면 일본의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폭탄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로 그보다 더한 폭력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자행됐다.

무관심이란 이래서 무섭다.

(마땅한 후계자를 찾지 못해서 몸을 사리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첸지 죠는 중대한 진실을 감추기 위해 다른 진실을 고백했다.

꽤 괜찮은 대응이라고 자찬했지만, 수화기 너머로 갑자기 키득키득 웃음소리가 들리는 바람에 몸서리쳤다.

선지혜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사랑하는 남자 앞에서는 절대 보여주지 않는 표정으로,

(몸을 사려요? 그래서 원숭이와 악마, 미친년이 한국에서 살인하고 다녔나요?)

(위령비를 세우고 관계자들도 전부 처벌했습니다.)

미녀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한국이다. 박선영 같은 8종 계약자가 또 등장하기 전에 합병 내지는 굴복시키기 위해 중국에서는 강수를 뒀다.

수원, 광주, 대전, 울산이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다.

수많은 미녀와 소녀가 죽었고 그중에는 박선영의 친언니도 있었다. 그리고 그 참극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인 ‘선유나’는?

중국의 우려대로 8종 계약자가 됐다.

이후로 한국에 8종 계약자는 늘지 않았지만, 박선영과 선유나 둘만으로도 충분했다.

최강의 무력과 최고의 지략.

그 환상적인 콤비는 세계인들이 인정한 ‘사기’였다.

(주석. 당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건 알아요. 역으로 이 ‘외모만 믿고 나대는 년’들이 미쳐 날뛰지 않도록 달래는 쪽이죠.)

선지혜는 그런 남자를 만났다.

카르 4세가 하는 말이면 무조건 고분고분 따르게 된다.

또, 그가 즐겨보는 일본 애니메이션(장르: 폭력+코믹+애로)의 여주인공처럼 사랑받기 위해 이것저것 시도해보기도 하고!

이 정도면 최고의 신붓감? 꺅!

팔베개를 껴안고 한참을 또 뒹굴뒹굴했다.

(...흠흠! 선지혜 회장, 듣고 계십니까?)

(쓰읍. 말씀하세요.)

(당신은 이대로 카르 4세의 죽음을 계기로 전쟁이 발발해도 좋다는 겁니까. 또 어마어마한 희생자를 치르면서? 이번에는 양국의 멸망으로 끝날 수도 있습니다.)

(아까부터 계속 이상한 말씀을 하시는데요.)

(경청하겠습니다.)

(어째서 카르 4세가 죽는다고 확신하는 거죠?)

사람인 이상 싸우다가 죽을 수도 있다.

그건 인정한다.

하지만 카르 4세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

죽어버리면 뒤따라 자살하겠다고 선지혜가 협박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농담이 아님을 ‘최강일 수밖에 없는 사냥꾼’은 잘 안다.

그러니 죽지 않는다.

이론상으로 생존율이 0.0%만 아니면 무조건 산다.

그 기적을 몸소 경험한 ‘여자’로서 확신한다.

(가더발트 계약자를 이길 수 있는 사냥꾼은 없습니다.)

(그런가요. 그렇다고 해둘게요.)

(......)

(하지만 귀국이 패하고 약속을 불이행했을 때는 각오해야 할 거예요. 이모는 요즘 어머니랑 중국여행일정을 짜고 계세요. 오랜만에 해외여행이라고 얼마나 호들갑이시던지…. 자금성과 만리장성 위성사진을 눈여겨보셨죠. 참고하세요.)

관광지에 남아나는 게 없는 해외여행이 될 것이다.

대한민국 여자들은 ‘명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로 좋아한다. 게다가 공짜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마음에 드는 건축물을 쇼핑가방에 쓸어담듯 하늘 높이 휙휙 날려서 파주시 인근에 기념품이랍시고 전시해놓을 게 분명하다.

첸지 죠도 바보가 아니다.

그녀들의 ‘관광 스케일(!)’을 따라잡진 못했지만 비슷하게 해석했다.

중국의 건재함을 보여줘야 한다.

‘어떻게?’

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에쏘드.

수호자와 계약자만 있다고 끝난 게 아니다. 폭주하는 엘로엘을 막으려면 ‘용사’와 한 팀을 이룬 ‘군단’도 필요하다. 계약자는 연약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즉, 군단이란,

용사와 함께 싸우는 동료!

RPG 게임으로 치면, 성녀, 궁수, 마법사 등등.

일본은 이 파티를 짜지 못해서 계속 아까운 프로사냥꾼만 희생하고 있는데,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 ‘팀워크’를 맞추기 위해 에쏘드를 보유한 나라들은 하나같이 애먹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쌓은 비결은 특급기밀!

인류의 힘을 합치기보다는 타국의 침략과 합병을 경계하는 것이다.

특히,

【이즈헬 / 9종 특수】

세계에서 유일한 9종 수호자와 계약자는 평화주의자가 아니다. 이집트를 척박한 사막국가에서 풍요로운 도시국가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그렇다. 기회를 노리고 있다.

에쏘드는 9종 계약자도 함부로 준동하지 못하게 하는 전쟁억제력을 갖췄다.

하지만 알려지진 않았다.

용사파티가 구사한 전술과 전략, 팀원 등이 공개되는 걸 꺼린 나라들이 입단속을 철저히 했기 때문이다.

(...선지혜 회장.)

(네.)

(박선영 여사를 잃어도 괜찮습니까? 당신만 괜찮다고 허락하면 참관인으로 에쏘드를 파견하겠습니다.)

첸지 죠는 허세를 섞어서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계속 주도권을 뺏길 순 없다는 판단에서다.

다른 무엇보다도 ‘중국에 에쏘드 계약자가 없다.’는 게 밝혀져선 안 된다. 이 여자라면 러시아와 인도 그리고 북해빙궁에 일러바칠 게 뻔하다.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외교가 또 있을까!

스트레스가 쌓인다.

철부지 어린애처럼 막무가내로 ‘보여줘! 보여줘! 없으면 전쟁! 무조건 전쟁!’이라고 나오면 할 말이 없잖은가!

사람이 얼마나 죽던 관심 없다는 태도다.

첸지 죠도 ‘수천 명’쯤은 그러려니 할 수 있다.

하지만 선지혜는 ‘수천만 명’이 죽어도 웃을 괴물이었다.

(좋은 생각이네요. 나도 이모가 경거망동하지 않았으면 했거든요. 인간은 인간답게, 슬기롭게 문제를 풀어가야죠.)

(그렇습니다. 인간이라면.)

(네. 인간이라면.)

(......)

(에쏘드라면 훌륭한 중재자가 될 거예요. 하지만 귀국이 불미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도록 저희도 안전장치가 있어야 공평하겠죠? 레드군. 그 정도면 될 것 같네요.)

중국의 국가주석은 계속 ‘당했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레드군을 보내겠다고?

우연인지 의도인지 확인할 방도가 달리 없지만, 중국의 에쏘드 계약자를 살해한 야생괴수가 바로 레드군이었다.

소형 괴수에게만 있는 [예지]는 사냥꾼의 천적이다.

그건 에쏘드 계약자도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첸지 죠는 끌려다니기만 하려고 전화한 게 아니었다.

‘이 또한 정보과의 분석 안이다.’

은근히 바라던 요구였다.

준비는 이미 갖춰놨다.

(누가 패배하더라도 전쟁은 없을 거란 확답을 주시면 그러겠습니다. 공증은 괴수대응연맹이 나설 겁니다. 어길 시에 박선영 여사의 계약파기를 요구합니다.)

(헤에~♬ 강하게 나오시네요.)

박선영이 강한 건 사실이지만 연맹을 홀로 상대할 정도는 안 된다. 그리고 엘로엘을 잃으면 한국의 전력은 절반 아래로 뚝 떨어진다.

선지혜 회장이 무슨 결정을 내리든 상관없다.

첸지 죠 국가주석은 당당하게 ‘에쏘드를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선지혜의 의심이 한풀 꺾일 수밖에 없으리라.

그것만으로도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다.

(그래도 하시겠습니까?)

직접 전투만 안 벌어지면 에쏘드 계약자가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질 리 없다.

이 또한 중국 정보과에서 내놓은 방책.

에쏘드 계약자의 사망을 의심하는 건 러시아와 인도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건재하다는 걸 확인시켜둬서 나쁠 건 없다.

결정을 독촉받은 선지혜는?

크게 하품했다.

너무 뻔하게 나와서 재미없던 까닭이다.

(그렇게 해요.)

중국에서는 바라던 결과라고 좋아하겠지?

하지만 그건 그녀도 마찬가지다.

에쏘드.

훔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지만 그러지 않은 건 혼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용사님은 너무 착해빠졌으니까.

(영민한 결단입니다, 선지혜 회장. 양국의 평화가 앞으로도 계속되길 빌지요.)

(좋은 밤 되세요, 첸지 죠 국가주석.)

선지혜는 통화가 종료되자마자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평화?

나를 달래주는 남자가 죽으면 바로 전쟁이다.

어째서 이자들은 엘로엘만 경계할까? 와이츠는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를 돌아다니며 신(神)처럼 인간을 굽어보고 있는데.

용신은 현명하기만 한 게 아니다. 그랬다면 괴수들은 와이츠가 둥지를 비운 북한산을 여전히 피해 다니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잠에서 완전히 깬 상태다.

어쩌지?

고민은 찰나, 행동은 신속했다.

(새벽에 웬 전화야.)

(완 샹 하오!)

(...중국산 선지혜? 세상에 이런 끔찍한 악몽이 다 있지…?)

(악몽이라니. 실례야, 선배!)

자다가 말고 전화를 받은 무일은 죽을 맛이었다.

이 중국산(?) 여자들이 수면부족으로 사람을 암살하려는 게 분명하다.

안 그래도 밤마다 빵빵한 가슴의 소녀가 팔을 꽉 껴안고, 심심찮게 우아한 맨다리를 올리고 자는 바람에 여간 고역이 아니다.

숫총각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시험이다.

무일의 ‘남성본능’과 카르 4세의 ‘생존본능’이 치열하게 싸운다!

‘간신히 잠들었는데….’

알람시계를 따로 장만하고 스마트폰을 꺼둔 채 자는 방안을 진지하게 검토했다.

역시나 시답잖은 전화였다.

가슴둘레가 커지고 허리둘레가 줄었다는 간단한 내용을, 선지혜는 이리저리 돌리고 꼬면서 1시간째 조잘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무일은 인내심을 갖고 쭉 들어줬다.

이 지루한 얘기를 계속 듣고 있으면 졸음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의 허리는 남자친구가 한쪽 팔로 안을 수 있는 둘레가 가장 이상적이래.)

(...그런데?)

(선배의 어린애 체형을 맞추려고 내가 열심히 노력 중이란 걸 알아달라는 거지! 의사 말로는 이 이상 예쁘게 줄이려면 수술로 뼈를 교정하는 수밖에 없데.)

졸면서 듣던 프로사냥꾼의 이마에 주름이 그어졌다.

팔이 짧은 건, 검사인 카르 4세에게도 상당히 스트레스받는 문제였다.

(팔 짧다고 놀리고 싶으면 그냥 대놓고 말해.)

(응. 나는 한계, 그러니 선배가 맞춰.)

한껏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내뱉고 개운한 마음으로 새근새근 잠든 선지혜. 하지만 무일은 수화기 너머로 그 평온한 숨소리를 들으며 기가 막힐 뿐이었다.

그래서 결국은 왜 전화한 건데?

스마트폰 전원을 끄고 자려는데 옆에서 빤히 쳐다보는 시선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선지혜의 통화음에 깬 시링 팽이었다.

“둘이 별거하는 이유가 뭐예요?”

“당연한 소리 그만하고 잠이나 자.”

상대해주기 귀찮은 무일은 그대로 잠들었다.

그 무심한 한마디에 심통 난 소녀는 평양으로 출발할 때까지 말수가 줄었다. 그리고 정말로 감시자처럼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 눈초리가 얼마나 흉흉했던지….

운전기사 문세웅은 미호 첸에게 돌아가는 시링 팽을 보며 속삭였다.

“한 선배님. 정말 괜찮으세요?”

“뭐가?”

“저 중국인 아가씨. 선배님을 잡아먹을 기세던데요.”

“적(敵)이니까.”

카르 4세는 대수롭지 않게 정의했다.

소설과 영화에도 흔히 나오는 소재니 놀라울 것도 없다.

적(敵)과 동침(同寢)!

그럴싸하다고 생각한 청년은 선배의 대꾸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중국의 최종병기에 가까운 7종 계약자가, 이미 일본에 여자친구도 있는 ‘유부남 사냥꾼’에게 연정(戀情)을 품을 리 없는 까닭이다.

문세웅이 본 선배의 경지는 이미 전설이었다. 이 이상은 상상력 밖이다.

무려 국제연애!

홍영희처럼 이용당하는 것 같지도 않고, 여친 쪽이 ‘LOVE! LOVE!’를 온몸으로 발산하는 이상적인 연애관이었다.

근친혼보다 찾아보기 힘든 장면이다.

“목적지가 평양이라고 하셨죠.”

“그래.”

“중국산 짜장면이랑 싸우다가 죽을 수도 있다고 들었는데요.”

“언제는 안 죽을 수도 있었냐?”

“그건 그렇네요.”

< [14장-2] 정치는 나비처럼.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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