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괴수처럼-56화 (56/287)

< [14장-1] 정치는 나비처럼. >

[14장] 정치는 나비처럼.

학명: 웨일풍 (구름처럼 떠도는 고래)

서식지: 하늘

특징: 괴수의 서식지입니다.

위험도: 7종 대형

비고: 세계에서 가장 큰 비행체

***

23세기 초까지만 해도 세계인 모두가 대한민국이란 반도국가가 곧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는 괴수대응연맹의 발표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미군의 도움을 받으면서 미국 전체를 싸잡아서 욕하는 국민의식.

한민족이란 구실로 퍼부은 막대한 북한 원조와 파병 그리고 희생.

병역회피와 군복무기간 감소, 군자금 횡령 등으로 국방력 약화.

그밖에 수많은 문제가 겹치고 겹친 ‘오합지졸 한국군’은 4차 세계대전이 선언되고 2분 만에 괴멸함으로써 괴수의 위험성을 전 세계에 알렸다.

『괴수 vs 인류』

애초부터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한국은 정말 빠르게 무너졌다.

이유를 들자면?

서울 청와대에 있는 것처럼 연설하던 대통령과 각부 장관들을 태운 비행기에 볼트윙이 들이박으면서 공중분해 됐다.

마땅한 무기가 없어서 식칼과 공구 등으로 무장한 의용군은 그 기상(氣像)이 무색할 정도로 순식간에 학살당했다.

『계약자?』

여성부의 탄압이 심했던 대한민국은 세계인 모두가 인정한 100년 연속 부동의 1위! 성매매, 성범죄 선진국이었다.

원인은 간단했다.

성매매와 성인물을 금지한다고 남성들의 성욕이 사라지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역으로 욕구불만 남성들의 성범죄율만 올려놨다.

수요는 그대로인데 공급이 부족해지면서 여성들의 몸값이 급상승했다. 그리고 여기에 ‘예쁜 여자’들이 전부 낚였다.

왜?

명품가방은 교양이고 성형수술은 필수니까!

유행을 따라잡으려면 돈이 필요하고 예뻐져야 돈을 더 벌 수 있다.

그리하여, 세계에서 여자 몸값이 가장 비싼 나라로 유명했던 대한민국에는 ‘순결한 자연미인’이 없다시피 한 상태였다.

그러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주변국들은?

한국군의 뒤를 이어 군대가 괴멸하긴 했지만, 계약자와 수호자를 등에 업고 빠르게 재건되기 시작했다.

일본을 예로 들자면,

『9종 오니오프 계약자, 미오 타미에』

『8종 네코스트 계약자, 샤토라메 호나코』

『6종 야미르 계약자, 와이하라 아키아』

설명이 필요 없는 최강의 도깨비, 대가를 받고 소원을 들어주는 고양이, 운명을 예지하는 용신(龍神)까지.

일본은 이들 셋과 수호자의 활약으로 도쿄와 교토 등의 대도시 대부분을 지킬 수 있었다.

미오 타미에의 계약이 금방 파기되지 않았다면?

한국은 제2의 임진왜란, 일제강점기를 겪었을지도 모른다.

『8종 쑨우쿵 계약자, 미호 첸』

『8종 하이블 계약자, 비비 황』

『7종 프린스트 계약자, 아이밍 리』

『2종 가더발트 계약자, 샤려 핑』

한류열풍의 영향을 답습한 중국은 한국의 뒤를 바짝 쫓아온 성매매 선진국이었다. 하지만 초야에 묻혀있던 자연미인들이 있었다.

그 방대한 인구를 고려하면 정말 참담한 숫자였다.

무한복제하는 원숭이, 악마 중의 악마, 괴수를 조종하는 왕자, 무림의 시조가 된 위대한 여협(女俠)까지.

수호자들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아무튼 막았다.

그렇다면 한국은?

『없었다.』

그 흔한 4종 괴수 로니콘 계약자조차 없었다.

간간이 등장하긴 했지만, 무지한 국민들의 마녀사냥으로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라졌다.

당시에는 어쩔 수 없었다.

타국처럼 괴수와 계약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줘야 할 정부인사들이 비행기사고로 몽땅 죽었으니 말이다.

희망의 불씨는 바로바로 꺼지며 점점 무주공산(無主空山)으로 치달았다.

무정부 상태의 지옥 같은 3년.

숨통이 트인 중국과 일본에서 한국의 합병을 놓고 투닥거릴 때였다.

『한국이 살아났다.』

성매매 최강국이었던 한국에는 ‘미인’이 비정상적으로 풍부했다. 돈을 벌기 위해 원정 온 미녀들까지 더해지며 혼혈도 많았다.

그녀들은 괴수와 계약할 수 없는 몸이었지만, 어린 딸들은 아니었다.

아직 성형과 남자랑 인연 없던 소녀들.

힘겨운 3년 동안 부쩍 성장한 그녀들 사이에서 ‘미소녀 중의 미소녀’가 탄생한 건 어쩌면 당연했다.

『8종 엘로엘 계약자, 박선영』

『8종 와이츠 계약자, 선유나』

엘로엘. 그 이름은 ‘폭풍 그리고 폭풍’이다.

이 ‘바람의 정령’은 한국에 상륙해서 박선영을 만나기 전까지 지구를 반 바퀴나 돌며 수많은 도시를 흔적도 없이 날려버렸다.

그 무자비함에 힘입은 능력도 무자비했다.

엘로엘의 화신이 된 계약자도 무자비했다.

『홍콩 소멸』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9종 괴수의 가공할 무력시위로 중국을 밀어낸 일본은 한국을 병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그 오니오프가 메이지 신궁에 드러누우면서 공황상태에 빠졌다.

한 발 후퇴했던 중국이 다시 움직였다.

중국의 영웅으로 자리매김한 4명의 절세미녀 중 셋이 한국에 상륙했다. 하지만 그녀들은 싸움 시작부터 밀리고 밀려 본토인 홍콩까지 후퇴했다.

『삭풍의 마녀, 박선영』

그 악명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무림의 시조이자 전설인 ‘샤려 핑’은 한국에서 허망하게 갈기갈기 찢겨 죽고 수호자인 ‘가더발트’만 간신히 회수됐다.

무한증식으로 강력하기 짝이 없던 ‘쑨우쿵’은 태평양 한가운데 던져졌고, 무림에서 천마(天魔)로 불렸던 ‘하이블’은 하늘 높이 내던져졌다.

그야말로 압도적!

똑같은 8종이란 게 믿기지 않은 결과였다.

싸움의 여파로 섬이 통째로 날아간 홍콩의 폐허에서 ‘미호 첸’과 ‘비비 황’이 박선영의 발을 핥으며 종전협상이 이루어졌다.

소녀 혼자서 국력(國力)을 회복했다.

그 뒤를 이은 건 북한산에 둥지를 튼 거대한 용이었다.

영국에서 이미 그 압도적인 위용과 지혜가 입증된 ‘와이츠’는 어린 소녀를 일국의 군주까지 격상시켰다.

『대한의 국모, 선유나』

8종 계약자 밑으로, 대한민국이 하나로 합쳐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박선영이 죽음과 파괴로 공포정치를 했다면, 선유나는 자비(상대적으로)와 ‘약속’으로 국민의 지지를 끌어냈다.

약속은 간단했다.

『대한민국 ‘상남자’의 아내가 되겠어요.』

그 말에 혹한 수많은 사내가 한국을 살리는 데 힘을 보탰다.

거기에 8종 수호자 ‘와이츠’가 가세했다.

영국의 와이츠 ‘모드레무스 멀리온’보다 적극적으로 인간사회에 간섭하기 시작한 대한민국 용신은 괴짜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대한민국은 빠르게 새 정부와 치안을 확보하고 다시금 성장했다. 어째서 선유나가 ‘군주제(영국처럼)’ 대신 ‘민주제’를 선택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국의 부활.

그 저력은 무시무시했다.

왜?

『미녀가 풍부한 대한민국!』

좁은 땅덩어리에 비정상적으로 많은 고위급 계약자가 차례차례 탄생했다.

여기에 ‘IT 산업’과 ‘MID 중공업’이 크게 부흥하면서, 한국은 짧은 시간에 ‘성매매 선진국’에서 ‘계약자 강대국’이 됐다.

세계가 경악(驚愕)했고 경탄(敬歎)했으며 공경(恭敬)하게 됐다.

여기까지가 23세기의 대한민국 역사.

그리고 24세기가 됐다.

선유나는 ‘약속’대로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

결혼 3개월 만에 ‘정기 고갈’이란 놀라운 사유로 복상사한 남편의 모든 재산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딸’에게 넘어갔다.

덤으로 ‘계약’도.

부모의 모든 걸 물려받은 딸은 가끔 자문했다.

『어머니는 무슨 생각일까?』

모른다. 모르겠다. 몰라도 된다.

공주님의 관심사는 오직 ‘용사님’뿐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완성된 운명에 가치와 이유를 부여해준 남자.

더 뭐가 필요해?

(나를 보자고 한 이유가 뭔가요, 죠죠 아저씨.)

(죠죠라니…. 과분한 표현입니다. 공주마마.)

삼국지(三國志)에 등장한 난세의 간웅(奸雄) 조조.

이 남자에게 적절한 비유다.

정곡을 찔렸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는 중국인 청년은 한국말을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었다. 세계는 여전히 한국의 저력을 잊지 못하고 있다.

부활의 기적을.

공주로 불린 여인이 새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숙녀의 수면시간을 방해할 정도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첸지 죠 국가주석.)

(물론입니다, 선지혜 회장.)

특정 소년의 알몸(!)이 그려진 팔베개를 끌어안고 침대 위를 뒹굴던 여인은 이것저것 생각하는 척하며 시간을 끌었다.

세부적인 조율은 이미 끝났다. 대결 날짜도 잡았고 참관인, 심판 등도 양국의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또 뭐가 아쉬운 걸까?

흥미는 없지만, 일단은 물어보기로 했다.

사랑하는 용사님이 그녀에게 좀 더 ‘인간적’이길 바라기 때문이다.

(뭔가요?)

(카르 4세를 이대로 죽게 놔둘 겁니까?)

(그건 중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걱정할 문제라고 보는데요, 죠죠 아저씨.)

난 또 뭐라고.

공주님은 피식 웃었다.

(...솔직히 말하지요. 본국은 박선영 여사가 두렵습니다. 홍콩의 참사, 여걸(女傑)의 죽음. 그 비극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카르 4세가 죽고 난 후에 약속대로 그녀가 순순히 사과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건 아미파 아줌마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그 또한 맞는 지적입니다.)

미호 첸은 박선영의 발을 핥으며 목숨을 구걸했던 전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까마득하게 어린 시절이라 자존심보다 목숨이 귀했던 때다.

하지만 지금은?

여전히 그날 일을 잊지 못한 아미파 주지는 반쯤 미쳐있었다.

그때만큼 굴욕적인 사과를 할 필요는 없지만, 조금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그 호전적인 원숭이도 문제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태평양 한가운데 던져진 수모를 기억하는 쑨우쿵도 흥분해있긴 마찬가지였다. 그 기억력을 용처럼 쓰면 좋으련만.

계약자인 미호 첸이 억제하고 있지만 장담할 수 없다.

이건 주도권 싸움이다.

괴수대응연맹에서 누구의 손을 들어주느냐는 명분이 달린 대결이다. 두 8종 계약자와 수호자의 싸움은 예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싸운다면?

미호 첸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승산 없는 개죽음이다.

(죠죠 아저씨. 어째서 두려워하나요?)

(홍콩에서 살던 무고한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지 안다면 누구나 같은 심정일 겁니다, 선지혜 회장.)

(그렇게 인간미 넘치는 분으로 안 봤는데요.)

(......)

(나는 아직도 통화한 이유를 모르겠어요. 카르 4세의 죽음, 여왕의 전쟁선포. 귀국은 손해 볼 게 없잖아요? 과거하고는 상황이 많이 달라요. 우수한 계약자와 수호자가 정말 많이 탄생했어요.)

잠깐이지만, 서울 위에 두둥실 떠 있던 웨일풍의 위용은 대단했다.

지금은 성층권에 대기 중이겠지?

와이츠에게 밟아서 떨어트려 달라고 부탁하고 싶을 정도였다.

나의 용사님과 단둘이 북한산 정상에 오붓하게 앉아서 서울이 뭉개지는 광경을 내려다본다면 참 낭만적일 것 같다.

‘하지만 싫어하겠지.’

그는 모르는 사람의 인생도 소중히 여긴다.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그런 행동조차 포함해서 사랑한다.

(선지혜 회장. 그렇다고 전쟁이 합리화되는 건 아닙니다. 계약자의 질이 높아진 만큼 과거보다 더한 재난이 될 겁니다. 양국에 씻을 수 없는 상처만 남을 뿐이지요.)

(공자처럼 말씀하시네요. 아니면 맹자? 순자였나?)

(......)

(중국의 소극적인 태도가 이해 안 되네요. 무력합병도 시도했으면서 이번 기회를 완만하게 해결하려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정권이 바뀌었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홍콩을 세계지도에서 지웠다.

그런 만행을 지시한 정당(政黨)이 존속될 리 있겠는가.

첸지 죠는 수화기 너머로 식은땀을 닦았다.

선지혜는 박선영처럼 말이 안 통하는 여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화가 쉬운 상대도 아니었다.

논리정연한 정공법으로 파고든다.

정보과에서 준비해둔 변론으로 어떻게든 회피하고 있지만 영 신통치 않다.

가장 큰 문제라면 이 여자가 은근히 ‘전쟁’을 원한다는 점이다.

‘미치겠군.’

전쟁만은 반드시 피해야 한다. 중국은 현재 ‘삭풍의 마녀’를 막을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이상적인 결과는 없었던 일로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어렵다는 사실을 첸지 죠는 얼마 전에 확인했다.

그래서 8종 계약자 미호 첸을 ‘포기’하고 무림을 흡수하는 차선책을 생각했다. 내부결속을 다질 수 있다면 대국적인 측면에서 나쁘지 않다.

(흐응~♬ 죠죠 아저씨. 방금 생각난 건데요.)

(진지한 대화를 원합니다, 회장.)

불안했다.

이 여자의 콧노래를 듣고 유쾌했던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카르 4세에게 ‘괴수의 육감’이 있다면, 선지혜는 ‘용의 통찰력’이 있다.

(에쏘드 계약자에게 변고라도 생겼나요?)

< [14장-1] 정치는 나비처럼. > 끝

ⓒ 파르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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