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장-4] 믿음의 종류 >
“나름 설욕전이었나.”
정확히 20마리의 암투나를 토막 낸 무일은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을 훔쳤다.
‘손이 머무는 호텔’이란 명성을 단 ‘앙그류 그랑모리’가 물리충격을 급감시켜준 탓에 손맛이라고 할 감동은 없었다.
연약한 생물을 베는 것처럼 무감각하다.
그럴 리 없는데.
장비가 좋아지면서 긴장이 살짝 풀린 모양이다.
유축기를 멘 사냥꾼들은 카르 4세가 얼굴과 이름 정도는 알고 지내는 ‘사나이’들이다. 그들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암투나 시체를 4대의 차량에 나누어 실었다.
“카르 4세. 오늘 저녁에 암투나 초밥 어때?”
“닭 잡으러 왔다가 꿩 잡은 셈이군!”
“사장님이 먼저 먹었다고 노발대발할걸.”
“어쩔 수 없지. 이건 사냥꾼 특권이라고. 하하!”
피해 없이 별미를 맛볼 수 있다는 건 축복이다.
염소의 번식에 지장 없도록 늙은 수컷 2마리와 암컷 1마리를 도축해서 차에 싣는 걸로 작업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다. 우유 탱크를 가득 채우려면 앞으로 염소 무리를 다섯 번쯤은 더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넉넉했다면 염소 젖통에 젖이 보충될 때까지 기다리겠지만, 한 장소에 ‘인간 다수’가 오래 머물러도 될 정도로 서울 밖은 안전하지 않다.
그게 가능했다면 아예 목장을 만들었으리라.
“한 공자님.”
“......뭔가 많이 달라진 것 같은데.”
무일은 뱀이 온몸을 한 번 휘감고 지나간 느낌을 받았다.
시링 팽의 말투와 대사가 사근사근하게 변한 탓이다.
스마트폰에 설치한 앱이 그 정도로 뛰어났나?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겨우 반나절 만에 사람을 180˚ 바꿔놓는 게 가능할 것 같진 않다.
하지만 눈앞에서 버젓이 그런 불가능이 일어났다.
“한국어가 어렵긴 하지만, 요령만 알면 간단해요.”
고대부터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 했다.
꼬치꼬치 캐물으면 지는 거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한 공자님의 그 뛰어난 실력은 승리의 자신감에서 나오는 건가요?”
“그럴 리가.”
카르 4세는 손까지 휘저으며 부정했다.
자신감은 사냥꾼이 가장 경계해야 할 마음가짐이다. 상대가 만만한 1종 괴수일지라도 스치면 중상 내지는 사망이다.
그래도 인간인지라 자신감이 튀어나올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그때는 정말 실수해도 괜찮은 상대와 싸울 때뿐이다.
시링 팽이라던가….
무례한 생각은 그만하기로 했다.
“소녀에게 가르침을 주실 수 있나요?”
“흠. 그건 저녁에 암투나 초밥을 먹으면서 설명해줄게.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초밥을 먹으며 강의하기로 후배들이랑 약속했거든.”
염소 젖을 짜는 ‘고급 일감’을 따낸 그들의 나이는 카르 4세보다 대부분 많다. 하지만 사나이들끼리 똘똘 뭉치지 않으면 살기 힘든 24세기다.
똑같이 방울 달렸으면 형제 아닌가!
...거리낌 없이 반말로 주고받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선후배 관계는 확실하다.
웬만하면 이 또한 무시하고 형님, 동생 하겠지만, 알짜배기 경력만 13년의 카르 4세는 ‘대선배(大先輩)’였다.
“무공전수?!”
“그렇게 거창한 건 아닌데.”
겨우 초밥 먹으며 잡담하는 건데 말이다.
하지만 이 소녀는 벌써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서 듣고 있지 않았다.
나중에 듣고 실망하지나 않았으면 좋겠다.
“...걱정되지 않나요?”
“뭐가?”
“앞으로 닷새 뒤에 평양에서 싸우게 되잖아요.”
그렇다.
구체적으로 잡혀 있지 않던 날짜가 결투일까지 열흘 남기고 결정됐다. 그리고 벌써 그 절반이 거짓말처럼 지나갔다.
그동안 카르 4세는 그렇다 할 ‘비장의 수’도 없이 보냈다.
야생괴수의 습격으로부터 염소 젖을 지키거나, 서울 변두리를 후배라는 녀석이랑 쌩쌩 달리며 순찰하는 게 전부였다.
성과라고 할까….
시링 팽은 카르 4세가 홀로 4종 괴수를 잡는 광경을 봤다.
최소한의 비장감도 없이 간결하게 끝난 접전은 어리벙벙할 정도였다.
‘이래서 안 알려졌구나.’
카르 4세를 주인공으로 한 액션영화를 만든다면 망할 것이다.
관객에게 보여줄 게 없기 때문이다.
볼트윙의 날개를 베는 기교를 선보였을 때도 그렇다.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을 100배로 늘린 동영상이 아니었다면 그가 뭘 했는지도 모를 뻔했다.
그래서 카르 4세의 전투는 박진감이 없다.
언제나 일격필살.
적의 공격을 받아치는 [반격]이 전부다.
하지만 그 뻔한 기술을 피하거나 막은 괴수가 여태 없다는 사실이 소름 돋는다.
“이기게 해달라고 태양신에게 기도라도 하라고?”
“그런 건 아니지만요.”
“아니면 생화학무기라도 챙길까?”
시링 팽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감시를 피해 비열한 수단을 준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바로 조금 전에도 친구와 한가하게 전화를 주고받았다. 내용은 좀 많이 어이없으면서도 무서웠지만.
“친구의 결혼식인데 안 가도 돼요?”
“괜찮아. 녀석의 결혼식은 전에 한 번 갔었거든. 얼마나 염장을 찔러대던지…. 그리고 이번에는 신부가 마음에 안 들어서 가기 싫어.”
신부가 다름 아닌 ‘홍영희’였던 탓이다.
딱히 유감은 없지만, 웃으며 인사 나눌 사이도 아니다.
나중에 첫 아이의 돌잔치 때나 뻔뻔하게 얼굴 들이밀며 아기의 건강과 그녀의 행복을 빌어줄 생각이다.
그때까지 자신이 살아있다면.
“결혼식에 참석 안 하면 집에 수류탄을 던진다고 협박했잖아요.”
“녀석은 못 던져.”
“왜요?”
“집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오거든. 자식을 벌써 열둘이나 봤지만, 아직도 마땅한 후계자가 태어나지 않았어. 계약자가 될 것 같은 딸만 아홉이라고 만족하는 눈치지만.”
희소성 때문에 둘 이상은 힘들지 않을까?
모계 유전자가 다르니 어떻게든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부모 눈에는 자기 딸이 세상에서 가장 예뻐 보인다고 하니 이 또한 믿을 정보가 못 된다.
홍영희는 운이 좋다.
카르 4세는 그렇게 생각한다.
남편의 친구라서가 아니라 그녀는 정말 좋은 배우자를 만났다.
아직 자식들이 어려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만, 한 집안에 ‘기가 센 미녀’가 여럿인데도 통솔이 잘 되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그 친구분이 대단한 집안의 가주(家主)인가요?”
“대단하지. 정말로.”
가문을 세운 조부(祖父)와 가모(家母)를 한꺼번에 잃지만 않았어도 지금처럼 조용한 가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혈통이 끊기지 않은 건 정말 천운이었다.
가모가 낳은 세 남매 중에서 둘이 특이체질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운이 다했는지 장남이 죽고 둘째 아들과 어린 막내딸만 남았다.
내년에도 막내딸이 계약에 실패하면 근친혼을 고려 중이라고 했었나?
상념을 접은 무일은 오랜만에 괴수대응본부 의무대로 향하는 중이었다. 자주 와서 좋을 곳은 아니지만.
“개굴개굴.”
“어머. 이게 누구야~♪ 정말로 카르 4세? 동정을 드디어 뗀 거야? 거기 아가씨. 어땠어? 처음은, 정말로 애인을 죽이고 싶을 만큼 아파?”
개구리 왕자님이랑 나란히 누워 일광욕 중이던 무늬만 간호사, 4종 계약자 강보라가 속사포처럼 물어왔다.
프로칸도 카르 4세를 신기하다는 듯이 지그시 쳐다본다.
당연하다.
최근에 그는 4종 괴수를 무더기로 베면서 [업보]가 무지막지하게 쌓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앙그류 그랑모리를 착용한 카르 4세’는 예전의 카르 4세가 아니었다.
개구리 왕자님은 더는 그의 적수가 못 됐다.
“여전히 동정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아무런 관계도 아닌 식객.”
서울에 초특급 고래가 떨어지는 사태만은 막고 싶은 무일이 재빨리 정정해줬다.
강보라는 재미없다는 야유의 눈빛을 보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건 시링 팽도 마찬가지였는데, 모국어로 중얼중얼 불평을 늘어놓았다.
...뭐라는 거야?
욕이 아니었길 빈다.
오늘은 정기점검을 받기 위해 의무대에 방문했다. 조금 이르긴 하지만, 설사나 복통 같은 잔병치레로 전투에 지장이 생기면 안 되기 때문이다.
강보라의 수다에 어울려주길 30분.
간신히 빠져나온 카르 4세는 주치의를 만날 수 있었다.
“변변찮은 사냥꾼에게 주치의가 있다는 게 놀랍지?”
“어…. 놀랄 일인가요.”
카르 4세가 처음으로 ‘자랑’ 비슷한 말을 했지만, 7종 계약자는 주치의가 넷이란 설명으로 신분격차를 실감하게 해줬다.
역시나 변변찮은 사냥꾼.
대단해 봤자 수호자 발가락 수준이다.
“어떻습니까, 선생님.”
별거 없겠지. 변변찮은 사냥꾼이니까.
주치의 오돈혁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3시간에 걸친 정밀검사를 마친 카르 4세의 진지한 물음에 진지하게 말했다.
“발기(勃起) 유지시간은?”
“...예?”
“조루냐고 묻는 거다, 이 녀석아.”
“어째서 그런 얘기가 튀어나온 겁니까, 선생님!”
늘 보던 간호사만 있는 게 아니다. 마누라도 아닌 처자가 감시자라고 바득바득 우기며 동석한 상태였다.
시링 팽은 귓불을 사르르 붉히면서도 그 당사자보다도 주치의의 말을 경청하듯 자세를 바로 했다.
오돈혁은 딱하다는 시선으로,
“동정이랑 얘기하려니 힘들군.”
“큭! 순수한 게 죄입니까.”
“죄지. 그것도 아주 큰 죄. 특히나 자네처럼 능력 좋은 사내가 자손에 관심 없다는 건 국가적으로 큰 손실이야.”
“그런가요?”
꼭 특수체질일 필요는 없다. 이 세상에는 특별한 체질을 타고나지 않았음에도 뛰어난 인물이 많기 때문이다.
특히, 감으로 먹고사는 ‘사냥꾼’이 그렇다.
부모가 뛰어나다는 사실만으로도 ‘믿음’이 형성된다.
괴수를 쓰러트린 강자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다는 과학적인 근거만으로도, 정말 평범한 가정 출신보다 [예감]과 [예측]의 ‘출발점’을 앞서갈 수 있다.
무림의 사제(師弟)관계도 같은 원리다.
좋은 교육, 좋은 혈통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뛰어난 사람 밑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강해진다.
그리고 정말 짜증 나게도,
“자네도 그 덕을 보고 있지 않은가, 카르 4세.”
“...부정할 수 없군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의 집안은 80년 전부터 ‘사냥꾼만’ 줄기차게 배출했다. 배운 건 없고 낳아준 게 전부지만, 사냥꾼의 자손이란 ‘사실’은 대단한 강점이다.
지금은?
안중에도 없다.
“원론으로 돌아와서, 남자의 건강은 아침마다 아랫도리가 불끈불끈 솟는지로 결정되네.”
“...그렇게 쉬운 거였으면 정밀검사를 왜 합니까.”
“끝까지 들어!”
“네.”
“첨단장비로 살펴본 카르 4세는 건강해. 하지만 자네가 먹은 약을 떠올리게.”
“아….”
일생일대의 후회가 있다면 그 약을 먹은 순간일 것이다.
미소년을 ‘미소녀’로 착각시킨다는 목적으로 진행된 임상시험은 한 남자의 인생을 송두리째 무너트렸다.
성장도 멈추고 발전도 멈췄다.
시간도 멈췄다면 그나마 위안이 됐을 텐데 수명은 ‘훨씬’ 줄었다.
“실례지만, 자네는 지금 남자인가?”
“...그럼 뭡니까?”
“생물학적으로 따져보면 남성이 맞지. 하지만 와이츠가 실패작이라고 단언한 약품을 이리저리 뜯어고친 미치광이들이 뭘 만들어냈는지는 본인들도 몰라.”
“무서운 말씀이네요.”
카르 4세도 어렴풋이 알고 있던 내용이다.
하지만 정밀검사 직후에 의사에게 듣는 확답은 그 느낌이 사뭇 달랐다.
흥미진진한걸?
오돈혁은 ‘무섭다.’의 의미를 제대로 모르는 것 같은 소년에게 말했다.
“혹시라도 몸에 변형이 생겨서 생식능력을 상실하더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라. 네 정자는 절대온도 100K 속에 고이 보존되어 있으니.”
“방금 말씀은 완전히 처음 듣는데요?!”
경고성 발언은 심심찮게 들어왔지만 이건 아니다.
카르 4세는 ‘정자 은행’에 든 기억이 없다.
“그럴 거야. 나도 보안이 허술해진 최근에 안 사실이거든. 10년 전부터 매해 은밀하게 채취되고 있었지. 마치 SF영화 같지 않나?”
“선생님!”
“이제 좀 긴장하는 얼굴이 됐군.”
“됐습니다.”
“되긴 뭐가 돼? 국가에서 비밀리에 추진하는 외계인 생체실험 같구먼.”
중요한 내용을 농담처럼 말하는 주치의 때문에 힘이 쫙 빠졌다.
긴장은 무슨.
발전은 없는데 경력은 계속 쌓여간다. [업보]가 위험수위에 도달하기 전에 은퇴하지 않으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그날이 언제일까? 30분 뒤? 30일 뒤?
목숨이 오늘내일하는 카르 4세에게 미래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다. 그러니 괜한 걱정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심력 낭비다.
“하실 말씀은 그게 전부입니까?”
“자네는 뭔 말을 해줘도 늘 태평하구먼. 환자가 재미없게.”
“...검을 아십니까.”
“검? 수술용은 좀 알지.”
검(劍)의 가치는 모두가 다르다.
목숨의 무게도 마찬가지다.
“위기(危機)는 여자친구 대신 늘 끼고 삽니다.”
< [13장-4] 믿음의 종류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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